너무 바쁘다면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 바쁘게 살면서도 불안한 당신을 위한 11가지 처방
토니 크랩 지음, 정명진 옮김 / 토트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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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쁜 것은 나쁜 것이다


결코 내가 이 책 서문에 적힌 것처럼 커피를 마시고 또 마시고 출근길에도 줄기차게 통화를 하며 다녀야 할 만큼 바쁜 '직장인'은 아니다. 오히려 타인에 시선으로 보자면 근무시간이 유동적이며 심지어 원하는 때에 긴 여행을 떠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와 약속을 하거나 취미활동을 하기위해 시간을 조절하려고 할 때 들이대는 핑계는 늘 '바쁘다'였다. 한마디로 <너무 바쁘다면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의 저자 토니 크랩의 말대로 하자면 난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각하고 있었고 그런 내게 이 책은 실용적이다. 다시말해 서문에 묘사된 상황이 자신과는 다를지라도 삶의 만족감이 부족한 까닭이 '바쁨'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바쁜 당신은 분명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괜찮다. 나처럼 이미 정독한 누군가가 리뷰를 친절하게 적어놓았지 않은가.


분주함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삶의 주인이라는 느낌을 회복해야 한다. 이 느낌을 되찾으려면 우리를 바쁘게 만드는 두 가지 주요 원인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통제력의 결여와 선택의 결여가 그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기가 아주 어렵다. 22쪽

저자는 우리가 바쁜 진짜이유를 총 7가지로 분류해놓았다. 이 중에서 '선택의 부족', 풀어 쓰자면 게을러서 가장 쉬운 대안이 바로 '바빠서'가 되는 것이다. 흔히 부모의 요구를 이런식으로 거절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아침을 잘 챙겨먹느냐고 묻거나, 주말에 집에 올 수 있느냐 혹은 결혼은 언제하냐 등의 물음에 이보다 빠르고 손쉬운 핑계가 어디있는가. 그런가 하면 일을 집에까지 싸들고 가는 사람들은 '경계선의 부재'에 해당한다. 일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야근을 안한다기 보다는 일과 가정을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것을 나 역시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일을 못할수록 미루게 되고 그 미루는 성격이 결국 퇴근이후에도 근무의 연장선에 놓이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이유보다 오히려 더 안타까운 것은 '의미의 결여'가 아닐까 싶다.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바쁘게 지내는 것이다. 흔히 실연 후에 일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고 이런 식으로 일에 집중하는 것이 오히려 긍정적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있다. 술이나 폭식등으로 자학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바쁘게 일에 미치는 것 또한 성과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다지 권할만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다른 4가지 이유인 통제력 상실, 초점의 분산, 자신감의 부족, 추진력의 결핍과 관련된 내용을 포함 '바쁨'을 멀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본문에서 다루고 있다.  분주함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다루다보니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 그렇게 하기 위해 올바른 결정과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팁등 삶 전반에 있어 참고할만한 내용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제대로 생각하는 방법을 다룬 5장의 내용과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동기부여 역할에 해당되는 10장의 내용이 크게 와닿았다.


이 파트에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멀티태스킹이 나쁘다는 점이다. 우리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번갈아가며 하는 방법이다. 당신은 멀티태스킹이 시간을 절약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을 수 있다. 178쪽

PC가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졌을 때 우리는 신세계를 만났다며 환호했다. 하지만 직장에 들어와 먹고 살기 위해 멀티태스킹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때 우리는 좌절하고 말았다. 그랬던 우리에게 저자는 멀티태스킹이 시간을 결코 줄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니 억울함과 동시에 역시 그랬던거였구나 하는 안도감이 교차된다. 실제로 통화를 하면서 키보드를 두르리는 경우 동일한 패턴의 작업이라면 크게 문제가 없지만 둘 중 어느하나라도 심각한 내용이거나 패턴이 달라질 경우 혼선이 생겼던 경험이 있었다. 저자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한마디로 우리의 뇌는 동시에 두 가지를 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다고 한다. 해당 부분에 예시로 들은 승려 이야기는 꽤나 유명한 내용으로 종교적인 분야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업무에 있어서도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지나간 일들을 너무 오래 머릿속에, 혹은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자신만의 가능성을 창조하려면 사회분위기에 일치하며 바쁘게 움직이라는 압박에 맞설 수 있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이는 곧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도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70쪽

추진력을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는 타인의 시선과 일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특히 여러가지 변수가 많은 이 세상에 결과를 예측하는 일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추진력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스로의 감정과 행동을 제대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어야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해당 부분을 읽다보면 그동안 꽤나 익숙한 내용들이 많이 등장한다. 자기개발서 책제목을 여럿 찾을 수 있을정도다. 그만큼 인용한 예화도 많고 실제 이론을 뒷받침하는 실험결과도 여러차례 등장한다. 그렇다보니 이 책을 읽고 마음이 움직일 확률은 상당히 높다. 실제 생활에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계획표를 세우는 방법이 말미에 수록되어있다. 계획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척상황을 꼼꼼하게 기술하는 것으로 새 노트와 함께 '바쁘다'는 핑계를 던지고 당장 행동으로 옮기면 될 것이다. 행동에 옮기다가 멈칫하게 될 때, 그 이유가 바쁨이 될 때 다시금 책을 펼쳐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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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읽는 고시조
임형선 지음 / 채륜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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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선의 [이야기로 읽는 고시조]는 '~습니다.' 혹은 '~다.'로 문장이 끝나지 않는다. 저자의 의도를 살려 좋게 평가하자면 그야말로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고, 만약 저자보다 나이가 더 많은 독자라면 '반말'투가 약간 거슬릴지도 모른다. 그럴 때 마다 저자의 의도 - 시조가 어렵고 고리타분하다는 기존의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저는 새로운 방식으로 독자들과 만나기로 했습니다.4p-를 떠올리자. 책을 다 읽고나니 왜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고시조를 알리고 싶었는지 납득이 가기 때문에 나 또한 한 번 더 강조한다. 이 좋은 고시조를 그동안 어렵다고 피해왔던 것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작품을 소개하기 전  전체적인 작품 및 시대상황을 이야기처럼 들려준 뒤 그에 꼭 맞는 작품 혹은 일부를 원문으로 소개한 뒤, 풀이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책의 구성은 크게 사랑, 정치 끝으로 자연, 풍경 그리고 풍류로 나뉜다. 두루두루 여러 편을 소개하는 것도 괜찮을테지만 이번에는 마음에 오래 남겨질 작품들을 각 챕터 별로 몇 편 골라 소개하기로 한다.


사랑이 엇더터니 두렷더냐 넙엿더냐

기더냐 쟈르더냐 발을러냐 자힐러냐

지멸이 긴 줄은 모로되 애 그츨만 하더라  125쪽

대충 어떤 내용인지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풀이를 읽지 않으면 확 와닿지 않을 것이다. 정확한 해석은 책에 나와있으니 생략하고 저 짧은 내용을 더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사랑이 어떻더냐 하고 물으면서 그 사랑이 사람의 속을 얼마나 애태우는지는 알만하다 라는 내용이다. 저자의 말처럼 휴대폰과 다양한 SNS가 존재하는 지금도 이런저런 상황에 의해 연락이 쉽지 않은 연인들이 많은 데 전화조차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그 사랑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싶다. '애 그츨만 하더라'는 애(창자)가 끊어질 것 같다라는 표현이니 사랑때문에 아파보고, 가슴태웠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시조를 쉬이 넘길 수 없을거라 생각한다. 결코 내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위의 작품은 무명씨의 작품이고 사랑을 주제로 한 이정구의 시조도 과연 사랑이란 과거와 현재를 아울러 '밀당'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구나를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 여기에 있다.



님을 믿을 것인가 못 믿을 것은 님이시라

믿어왔던 그 시절도 못 믿을 줄 알았도다

믿기야 어렵지마는 님을 아니 믿고 어찌하리 93쪽

이번에는 원문이 아니라 풀이된 상태로 연인관계라기 보다는 부부가 된 이후에 상황처럼 느껴진다. 사실 밀당은 양쪽에서 밀고 당기기라고 한다면 위의 작품은 어째 유달리 한쪽에서만 믿어보려고 애쓰는듯한 느낌이다. 물론 이풀이는 저자가 아닌 사견으로 일 혹은 육아문제를 핑계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상황이라면 딱일 것 같다. 저자의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첨가하자면 14세의 나이에 과거시험에 장원을 했고, 세자에게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던 엘리트 중에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역시 머리좋은 사람이 연애도 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미 내용과 시조가 쓰이던 전후사정을 아는 작품들은 소개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지나치게 생경한 작품들만 실려있다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아 어쩌면 조선시대 대표시조라고 할 수 있는 <단심가>를 소개한다.



이몸이 주거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

백골이 진토 ㅣ 되여 넉시라도 잇고 업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싈줄이 이시랴 163쪽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원문으로 가져왔다. 이방원이 조선을 건국할 당시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하여가>를 읊었을 때 정몽주는 위의 시로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했다.  그런 후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교살로 죽음을 맞이한다. 재미난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만약 정몽주가 이방원의 회유책에 '화답'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봤다고 한다. 하지만 그랬다한들 저자의 말처럼 그의 운명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개국 공신이었던 정도전도 살해한 마당에 변절자 정몽주를 제거하지 않을리 없지 않은가.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마지막까지 절개를 지키며 숭고하게 떠나는 것이 나았을 것 같다. 마지막 자연, 풍경 그리고 풍류편에서는 성혼의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어쩌면 마지막 장의 작품은 우리가 시조를 떠올렸을 때의 이미지에 가장 부합되는 주제가 담긴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야말로 시조를 읊는 선비들의 모습은 자연과 벗하고 안빈낙도하는 그 모습이지 싶다. 바로 이 작품이 그런 분위기를 잘 담았을 뿐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물질이 인간과 자연보다 앞서있는 세태를 본다면 작품의 저자가 자신의 생각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통탄하지 않을까 싶다.



푸른 산은 말이 없고, 흐르는 물은 모양이 없다

맑은 바람은 값이 없으며, 밝은 달은 임자 없는 모두의 것이로다

이런 것들 병이 없는 이 몸도 분별없이 늙으리라  298쪽

저자는 이 작품을 두고 '없다'라고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은 '있는'것으로 욕심없이 살고자 하는 작자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저 작품을 마주했을 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안빈낙도의 이미지를 떠올렸지만 거듭 보면 볼수록 종교와 닮은 점이 많게 느껴졌다. 특정 종교 하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無'와 같은 마음가짐은 불교를 닮았고, 임자 없이 모두의 것이라 하는 표현에서는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욕심을 모두 비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것, 내 의견만 옳다는 편협된 생각에서는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소개한 네 작품 뿐 아니라 다른 작품을 다 둘러봐도 고리타분하거나 당시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과는 별개로 아나크로니즘적인 작품도 없었다. 우리가 고전읽기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처럼 <이야기로 읽는 고시조>를 통해 고시조의 아름다움과 시대를 관통하는 선인들의 혜안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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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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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소설 / 김상훈 옮김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내가 달성하게 될 것은 최소화일까, 아니면 최대화일까? 230쪽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표제작을 포함 총8개의 단편이 실린 그의 첫 작품집이자 현재까지는 유일한 작품집이기도 하다. 리뷰의 시작을 발췌문으로 시작한 것은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절대지식은 결국 미래를 보는 것과 맞닿아있을 때 미래를 아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이로운 것인가 아니냐하는 것에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말한다. 작가는 표제작을 통해 자유의지를 가졌다면 미래를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미래를 알면서 자유의지를 가질 수 는 없는데 그것을 세계의 책을 읽게 되는 한 여자를 통해 쉽게 설명한다. 외계인의 언어를 분석하라는 정부 요청에 의해 헵타포드라 명명한 외계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점차 지구인들의 방식이 아닌 헵타포드의 방식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는 언어학자.  그 과정을 딸아이에게 이야기 해주는 듯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상황연출은 읽는 내내 [컨택트]란 제목으로 개봉했다는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들었다. 시점의 모호성이 결말을 예고하기는 하지만 막상 이야기 끝에 다다르면 역시나 알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치 화자가 곧 외계인들을 만날 줄 뻔히알면서도 대면한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가하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배움에 늘 목말라하고 무언가 배우기를 즐겨하는 사람들은 <이해>라는 작품이 가장 흥미로웠을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영원히 놀라움이 이어지게 되는 것일까? 예의 그 악몽이 사라지고 마음 편히 지낼 수 있게 되자 내가 처음으로 깨달은 것은 독서 속도와 이해력이 향상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언젠가는 읽을 생각으로 책장에 꽂아두긴 했지만 딱히 그럴 시간을 만들지 못하고 방치해두었던 책들을 이제 나는 실제로 읽을 수가 있었다. 심지어 난해한 기술서적까지. 61쪽


<이해>는 신경손상된 환자들에게 호르몬 K요법으로 치료했을 때 인간의 이해능력이 고도로 높아졌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을 다뤘다. 이 작품 역시 영화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하는데 앞서 소개한 표제작 보다 사실 이 작품이 더 기대된다. 총이나 폭탄과 같은 무기가 전혀 없이 오로지 상대와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상황이 어찌 보면 상당히 우스운 코메디 연출같을수도 있다. 만약 영화가 개봉된다면 이 작품을 분명 여러 희극인들이 패러디 할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호르몬 K 요법과 같은 의학기술이 발달한다면 미래가 다분히 희망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면, 야훼가 우리를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39쪽

<바빌론의 탑>은 성경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으로 지구가 아직 둥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때, 인간들이 신에게 대적하려고 탑을 쌓아올리는 것을 그냥 방치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 끝도없이 탑을 쌓다보니 탑의 끝에 다다르려면 수개월이 걸리고 그렇다보니 그곳에서 아이들이 태어나 가정을 꾸리는 등 있음직한 내용들이 펼쳐진다. 더불어 물리학을 전공했다는 저자의 지식을 옅볼 수도 있는데 만약 이 책을 읽는 독자가 관련 분야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좀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해가 불가능할 만큼 어렵게 쓰여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고 저자의 의견에 의의를 제기하는 등의 묘미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에서 말이다. 나처럼 기초지식이 전혀 없어도 소설을 이해하고 흥미를 느끼는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앞서 소개한 <이해>의 경우는 컴퓨터공학을, 표제작은 언어학과 물리학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 부럽기도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글의 구성이나 상황연출이 너무나 매력적이고 위트있다는 사실이었다. 역자의 노고가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흥미로우면서도 무언가 앎에 영역에 다다르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다른 작품들도 모두 만날 수 있는<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누가 읽어도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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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자서전 - 바람만이 아는 대답
밥 딜런 지음, 양은모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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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인생에는 무슨 일이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원하는 것을 모두 갖지 못했어도, 원하지 않는 일이 생기지 않은 것에 감사해라." 242쪽



위의 내용은 책의 거의 후반부에 나온다. 마치 <위대한 개츠비>의 서문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자유로우면서도 반전주의자였으면서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이 아마도 저 문장으로 다 이해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밥은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아버지였던 그가 해준 이야기라고 적었지만 제3자인 내 입장에서보면 저것은 이기적이고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이야기의 첫 시작이자 보브가 카페에서 노래를 하고 보조를 맞추려고 일자리를 알아볼 당시에 그의 모습은 진정한 포크를 아는 사람은 세상에 흔치 않으면 그 흔치 않은 사람중에 자신이 포함되어있고,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것을 확신한 듯 보였다. 실제로 카페를 오가며 별볼일 없다고 판단되는 곳은 크게 미련을 두지 않았고, 나름의 기준으로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등의 치밀함도 보였다. 뿐만아니라 연주를 잘하는 사람과 곡을 잘 만드는 사람을 구별할 줄 알았고, 또한 좋은 곡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효과적인지도 파악하려고 애쓰는 진지한 모습에 조금 놀라기도 했다. 왜냐면 내가 밥 딜런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너무나 높은 자리에 오른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시작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출발했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대사라고는 한 마디도 없는 역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스타라도 된 것 같았다. 의상이 마음에 들었고 기분은 붕 뜬 것 같았다..... 로마병사로서 지구의 중심에 선 무적의 사나이처럼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없이 오래 전에 잇었던 엄청난 몸부림이었다. 138쪽


가수인 그가 연극무대에 그것도 종교 드라마에 엑스트라로 출연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의 본명이 밥 딜런이 아니었다는 사실과 그의 노래 중 일부가 교과서에 실려있기까지 한 사실등도 이 책을 통해 접하게 된 이야기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순차적으로 쓰여있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가 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서는 다분히 순차적인 이야기로 끌고오지 않았나 싶다. 그랬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은 사람들 모두가 하나의 공통된 감상, '이미 한참 지난 과거의 일을 마치 지금의 일처럼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평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이념을 가지고 강하게 밀어붙이는 저돌적인 모습이 한 때 그에게 있었다고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처럼 마음을 울리는 감상적이고 진솔한 노랫말로 변화되었다고 해서 그의 열정이 사그라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조의 강약과 상관없이 인간이 누리는 삶 그자체에 대한 사유를 이토록 직접적이면서 은유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그만의 힘이 가장 그다운 모습일 것이다. 사실 음반을 통해 내가 알던 밥은 고뇌와 삶을 아우르는 진지함보다는 유쾌한 리듬 그 자체였다. 내가 그의 음악을 들을 당시의 기분은 조금 더 '흥겨워지고 싶을 때'였으니 대략 이해가 될 것이다. 물론 그런 노래만 골라서 들었기 때문인데 달리 표현하자면 밥 딜런의 음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즐기느냐는 철저하게 각각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책은 밥 딜런의 한 면만 보던 나와 같은 이들에게 다양한 그의 모습을 만나게 해주는 참고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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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1-1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하지 않는 일이 생기지 않는 것에 감사해라, 이 가르침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
 
그것은 정말 애국이었을까 - 나의 극우 가정사
클레어 코너 지음, 박다솜 옮김 / 갈마바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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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정말 애국이었을까 : 나의 극우 가정사


 


이 책을 읽기 전이나 책의 초반을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전달하고싶은 메세지가 잭 이브라힘과 제프 자일스의 [테러리스트의 아들]과 같은 선상에 놓여있을 줄 알았다. 극우라는 것이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 뿐 아니라 가정내에서도 크나큰 '폭력'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용 전부를 읽고 난 후 내 시선은 극우는 무조건 '악'이라는 단순한 결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책의 저자 클레어 코너는 원하는 바는 아니었겠지만 스스로 인정한 것 처럼 부모로부터 행동하는 '정치가'로서의 성향을 제대로 물려받았다. 낙태금지법을 맹렬하게 주장했고, 설사 그것이 산모의 생명을 위협해도, 강간이나 심지어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이라 할 지라도 낙태는 결코 안된다는 내용을 모른척했다. 다시말해 이 책의 타이틀 '그것은 정말 애국이었을까'에서 '그것'이 극우단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믿고 있는 '나의 주장'과 뜻을 달리하면 무조건적으로 선과악의 기준에서 '악'으로 떠미는 행위나 단체활동이라고 보여진다. 저자의 부모, 코너 부부는 존 버치 협회에서 인정할 정도로 열성적인 회원이었다. 심지어 저자가 겨우 열 세살밖에 안되었을 때 협회에 가입시켰으며 제대로 간호를 받지 못하면 평생 누워지내야 할 지도 모르는 위험에 놓인 자녀를 역시나 어리기는 마찬가지인 손위 형제에게 맡기도 협회활동에 집중하는 '비도덕적인'행위도 서슴치 않는다. 놀라운 것은 사랑과 생명존중을 목숨처럼 여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행동과 사상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대의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아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식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라도 말이다. 물론 아브라함이 이삭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는 상황을 떠올리면 그것이 결코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이 아브라함에게 원한 것은 '피'가 아니었다. 아들마저 내놓을 수 있을정도로 자신의 '믿느냐'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이렇게만 보면 기독교 사상이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멀리갈 필요없이 한국의 상황을 보자면 한국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우리 부모님 세대와 '자유'라는 단어가 가장 '비자유'스러웠던 시대가 과거라고 보이지 않는다. 종전이 아닌 휴전국으로서 당사자인 우리는 태평한 듯 받아들이지만 보수파들에게는 여전히 전쟁의 공포는 현재 진행형이다. 코너 부부에게도 공산주의는 '공포'로 그 자체와 다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당장 눈앞에서 자식을 하나 잃더라도 아직 남아있는 수많은 후손들을 공산주의자들 손에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맞서 싸워야만 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민중은 늘 누군가로부터 '적'의 존재를 주입당해왔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저자 클레어가 부모의 극단적인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자신 역시 '낙태'를 합법화 하는 것이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것과 같다고 느끼는 극단적인 공포에 빠져드는 것이라 믿게되는 상황이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즐겁게 놀이를 하고 덕담을 나누는 그림은 이제 동화속에서나 접하는 생소한 모습이 되었다. 취업여부와 결혼여부를 물어오는 어르신들에게 조금이라도 예의없이 대답하면 '요즘 젊은 것들'이라는 비난을 받아야하고 그 젊은 것들은 역으로 그 어르신들을  판단력을 상실한 '꼰대'로 치부해버린다. 서로에 대한 배려도 없고, 나와 다른 의견에 있어서는 '의견'이 아니라 '무지한 존재' 심지어 적으로 인식해버리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단순히 공산주의라던가, 현 정권에 대한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극단적인 상황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미국의 근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색깔논쟁'또한 당연히 언급된다. 백인들 사회에서만 살아가고 있을 때 저자 역시 인종차별이란 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남부지역을 대학에 입학했을 때 비로소 '차별'이라는 것이 단순히 혜택을 덜 누리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부모님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여기서 또 중요한 사실은 저자가 결코 부모님의 행동을 '틀린 행동'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데에 있다. 잘못된 것일수는 있어도 그들의 행동 자체를 이해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긍정직인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 만약 저자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부모를 비방하고 틀렸다고 전면으로 고발하거나 부정했다면 안타깝게도 생물학적인 의미로서의 코너 주니어가 아니라 극우단체가 끊임없이 반복되어 탄생하는 과정을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세상의 둘도 없을 것 같은 클레어의 아버지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딸을 매질하기를 서슴치 않는 불행한 환경속에서 그녀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을 뿐 아니라 최소한 덜 극단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 형제들과 남편의 역할에 큰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마치 오랜 세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당하던 신데렐라 왕자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같은 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희망을 보았던 것과 같았다. 다만 저자에게 다가온 구원의 날개는 보았지만 이 세상 전체를 보자면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는 극우단체를 위한 구원의 날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뿐만아니라 심각할 정도로 왜곡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내가 사는 이 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극우주의자들은 가장 용기없고 극심한 두려움에 빠져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언제고 나를 해치고 나의 가족을 살해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하는 그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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