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야기로 읽는 고시조
임형선 지음 / 채륜서 / 2016년 10월
평점 :
임형선의 [이야기로 읽는 고시조]는 '~습니다.' 혹은 '~다.'로 문장이 끝나지 않는다. 저자의 의도를 살려 좋게 평가하자면 그야말로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고, 만약 저자보다 나이가 더 많은 독자라면 '반말'투가 약간 거슬릴지도 모른다. 그럴 때 마다 저자의 의도 - 시조가 어렵고 고리타분하다는 기존의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 저는 새로운 방식으로 독자들과 만나기로 했습니다.4p-를 떠올리자. 책을 다 읽고나니 왜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고시조를 알리고 싶었는지 납득이 가기 때문에 나 또한 한 번 더 강조한다. 이 좋은 고시조를 그동안 어렵다고 피해왔던 것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작품을 소개하기 전 전체적인 작품 및 시대상황을 이야기처럼 들려준 뒤 그에 꼭 맞는 작품 혹은 일부를 원문으로 소개한 뒤, 풀이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책의 구성은 크게 사랑, 정치 끝으로 자연, 풍경 그리고 풍류로 나뉜다. 두루두루 여러 편을 소개하는 것도 괜찮을테지만 이번에는 마음에 오래 남겨질 작품들을 각 챕터 별로 몇 편 골라 소개하기로 한다.
사랑이 엇더터니 두렷더냐 넙엿더냐
기더냐 쟈르더냐 발을러냐 자힐러냐
지멸이 긴 줄은 모로되 애 그츨만 하더라 125쪽
대충 어떤 내용인지 짐작은 할 수 있겠지만 풀이를 읽지 않으면 확 와닿지 않을 것이다. 정확한 해석은 책에 나와있으니 생략하고 저 짧은 내용을 더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사랑이 어떻더냐 하고 물으면서 그 사랑이 사람의 속을 얼마나 애태우는지는 알만하다 라는 내용이다. 저자의 말처럼 휴대폰과 다양한 SNS가 존재하는 지금도 이런저런 상황에 의해 연락이 쉽지 않은 연인들이 많은 데 전화조차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그 사랑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싶다. '애 그츨만 하더라'는 애(창자)가 끊어질 것 같다라는 표현이니 사랑때문에 아파보고, 가슴태웠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시조를 쉬이 넘길 수 없을거라 생각한다. 결코 내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위의 작품은 무명씨의 작품이고 사랑을 주제로 한 이정구의 시조도 과연 사랑이란 과거와 현재를 아울러 '밀당'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구나를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 여기에 있다.
님을 믿을 것인가 못 믿을 것은 님이시라
믿어왔던 그 시절도 못 믿을 줄 알았도다
믿기야 어렵지마는 님을 아니 믿고 어찌하리 93쪽
이번에는 원문이 아니라 풀이된 상태로 연인관계라기 보다는 부부가 된 이후에 상황처럼 느껴진다. 사실 밀당은 양쪽에서 밀고 당기기라고 한다면 위의 작품은 어째 유달리 한쪽에서만 믿어보려고 애쓰는듯한 느낌이다. 물론 이풀이는 저자가 아닌 사견으로 일 혹은 육아문제를 핑계로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상황이라면 딱일 것 같다. 저자의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첨가하자면 14세의 나이에 과거시험에 장원을 했고, 세자에게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던 엘리트 중에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역시 머리좋은 사람이 연애도 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미 내용과 시조가 쓰이던 전후사정을 아는 작품들은 소개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지나치게 생경한 작품들만 실려있다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아 어쩌면 조선시대 대표시조라고 할 수 있는 <단심가>를 소개한다.
이몸이 주거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
백골이 진토 ㅣ 되여 넉시라도 잇고 업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싈줄이 이시랴 163쪽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원문으로 가져왔다. 이방원이 조선을 건국할 당시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하여가>를 읊었을 때 정몽주는 위의 시로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했다. 그런 후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교살로 죽음을 맞이한다. 재미난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만약 정몽주가 이방원의 회유책에 '화답'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봤다고 한다. 하지만 그랬다한들 저자의 말처럼 그의 운명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개국 공신이었던 정도전도 살해한 마당에 변절자 정몽주를 제거하지 않을리 없지 않은가.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마지막까지 절개를 지키며 숭고하게 떠나는 것이 나았을 것 같다. 마지막 자연, 풍경 그리고 풍류편에서는 성혼의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어쩌면 마지막 장의 작품은 우리가 시조를 떠올렸을 때의 이미지에 가장 부합되는 주제가 담긴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야말로 시조를 읊는 선비들의 모습은 자연과 벗하고 안빈낙도하는 그 모습이지 싶다. 바로 이 작품이 그런 분위기를 잘 담았을 뿐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물질이 인간과 자연보다 앞서있는 세태를 본다면 작품의 저자가 자신의 생각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통탄하지 않을까 싶다.
푸른 산은 말이 없고, 흐르는 물은 모양이 없다
맑은 바람은 값이 없으며, 밝은 달은 임자 없는 모두의 것이로다
이런 것들 병이 없는 이 몸도 분별없이 늙으리라 298쪽
저자는 이 작품을 두고 '없다'라고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은 '있는'것으로 욕심없이 살고자 하는 작자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저 작품을 마주했을 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안빈낙도의 이미지를 떠올렸지만 거듭 보면 볼수록 종교와 닮은 점이 많게 느껴졌다. 특정 종교 하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無'와 같은 마음가짐은 불교를 닮았고, 임자 없이 모두의 것이라 하는 표현에서는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욕심을 모두 비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것, 내 의견만 옳다는 편협된 생각에서는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소개한 네 작품 뿐 아니라 다른 작품을 다 둘러봐도 고리타분하거나 당시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과는 별개로 아나크로니즘적인 작품도 없었다. 우리가 고전읽기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처럼 <이야기로 읽는 고시조>를 통해 고시조의 아름다움과 시대를 관통하는 선인들의 혜안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