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정말 애국이었을까 - 나의 극우 가정사
클레어 코너 지음, 박다솜 옮김 / 갈마바람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그것은 정말 애국이었을까 : 나의 극우 가정사


 


이 책을 읽기 전이나 책의 초반을 읽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전달하고싶은 메세지가 잭 이브라힘과 제프 자일스의 [테러리스트의 아들]과 같은 선상에 놓여있을 줄 알았다. 극우라는 것이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 뿐 아니라 가정내에서도 크나큰 '폭력'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용 전부를 읽고 난 후 내 시선은 극우는 무조건 '악'이라는 단순한 결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책의 저자 클레어 코너는 원하는 바는 아니었겠지만 스스로 인정한 것 처럼 부모로부터 행동하는 '정치가'로서의 성향을 제대로 물려받았다. 낙태금지법을 맹렬하게 주장했고, 설사 그것이 산모의 생명을 위협해도, 강간이나 심지어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이라 할 지라도 낙태는 결코 안된다는 내용을 모른척했다. 다시말해 이 책의 타이틀 '그것은 정말 애국이었을까'에서 '그것'이 극우단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도에서 출발했다고 믿고 있는 '나의 주장'과 뜻을 달리하면 무조건적으로 선과악의 기준에서 '악'으로 떠미는 행위나 단체활동이라고 보여진다. 저자의 부모, 코너 부부는 존 버치 협회에서 인정할 정도로 열성적인 회원이었다. 심지어 저자가 겨우 열 세살밖에 안되었을 때 협회에 가입시켰으며 제대로 간호를 받지 못하면 평생 누워지내야 할 지도 모르는 위험에 놓인 자녀를 역시나 어리기는 마찬가지인 손위 형제에게 맡기도 협회활동에 집중하는 '비도덕적인'행위도 서슴치 않는다. 놀라운 것은 사랑과 생명존중을 목숨처럼 여기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행동과 사상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대의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아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식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라도 말이다. 물론 아브라함이 이삭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는 상황을 떠올리면 그것이 결코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이 아브라함에게 원한 것은 '피'가 아니었다. 아들마저 내놓을 수 있을정도로 자신의 '믿느냐'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이렇게만 보면 기독교 사상이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멀리갈 필요없이 한국의 상황을 보자면 한국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우리 부모님 세대와 '자유'라는 단어가 가장 '비자유'스러웠던 시대가 과거라고 보이지 않는다. 종전이 아닌 휴전국으로서 당사자인 우리는 태평한 듯 받아들이지만 보수파들에게는 여전히 전쟁의 공포는 현재 진행형이다. 코너 부부에게도 공산주의는 '공포'로 그 자체와 다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당장 눈앞에서 자식을 하나 잃더라도 아직 남아있는 수많은 후손들을 공산주의자들 손에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맞서 싸워야만 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민중은 늘 누군가로부터 '적'의 존재를 주입당해왔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저자 클레어가 부모의 극단적인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자신 역시 '낙태'를 합법화 하는 것이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것과 같다고 느끼는 극단적인 공포에 빠져드는 것이라 믿게되는 상황이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명절에 가족들이 모여 앉아 즐겁게 놀이를 하고 덕담을 나누는 그림은 이제 동화속에서나 접하는 생소한 모습이 되었다. 취업여부와 결혼여부를 물어오는 어르신들에게 조금이라도 예의없이 대답하면 '요즘 젊은 것들'이라는 비난을 받아야하고 그 젊은 것들은 역으로 그 어르신들을  판단력을 상실한 '꼰대'로 치부해버린다. 서로에 대한 배려도 없고, 나와 다른 의견에 있어서는 '의견'이 아니라 '무지한 존재' 심지어 적으로 인식해버리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단순히 공산주의라던가, 현 정권에 대한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극단적인 상황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미국의 근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색깔논쟁'또한 당연히 언급된다. 백인들 사회에서만 살아가고 있을 때 저자 역시 인종차별이란 것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남부지역을 대학에 입학했을 때 비로소 '차별'이라는 것이 단순히 혜택을 덜 누리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부모님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여기서 또 중요한 사실은 저자가 결코 부모님의 행동을 '틀린 행동'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데에 있다. 잘못된 것일수는 있어도 그들의 행동 자체를 이해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긍정직인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 만약 저자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부모를 비방하고 틀렸다고 전면으로 고발하거나 부정했다면 안타깝게도 생물학적인 의미로서의 코너 주니어가 아니라 극우단체가 끊임없이 반복되어 탄생하는 과정을 받아들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보면 세상의 둘도 없을 것 같은 클레어의 아버지가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딸을 매질하기를 서슴치 않는 불행한 환경속에서 그녀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달을 뿐 아니라 최소한 덜 극단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 형제들과 남편의 역할에 큰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마치 오랜 세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당하던 신데렐라 왕자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같은 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희망을 보았던 것과 같았다. 다만 저자에게 다가온 구원의 날개는 보았지만 이 세상 전체를 보자면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는 극우단체를 위한 구원의 날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뿐만아니라 심각할 정도로 왜곡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내가 사는 이 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극우주의자들은 가장 용기없고 극심한 두려움에 빠져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언제고 나를 해치고 나의 가족을 살해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하는 그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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