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진 샤프 지음, 백지은 옮김 / 현실문화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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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위한 투쟁의 가장 강력한 수단은 정치적 저항, 즉 비폭력 투쟁이라는 것이 우리의 주장입니다. 45쪽

 

독재, 투쟁, 비폭력 저항. 세 단어를 언급하면 마치 독립투사 혹은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정당인 등으로 보이기 쉽다. 책 <독재에서 민주주의로>를 읽으면서 분단국, 휴전국가의 국민으로 역사적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오랜시간 ‘저항’ 혹은 ‘투쟁’이란 단어를 기피하고 살아온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떠올리면 제대로 정착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북한’보다는 낫지 않느냐 하는 소극적 민주주의속에 살아온 것은 아닌가 싶다. 지난 날 한국에 있었던 저항은 비폭력 저항만은 아니었다. 어쩌다 던진 돌이 아닌 계획된 총알에 가족을 잃은 국민들은 각자 자신이 가진 가장 독한 무기를 가지고 거리로 나왔다. 박숙자 작가의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을 읽다보면 그들의 저항은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진 샤프에 의하면 제대로된 계획없이 거리로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를 노래한다는 시인들에게서 조차 공감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진 샤프의 비폭력 저항과 관련된 내용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협상’에 관한 부분이었다. 노사가 원만하게 극적으로 협상안 타결 등의 신문기사를 접하면서 협상은 어찌보면 ‘비폭력’이란 단어에 가장 적합한 해결방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사합의와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것과는 애초에 갈등 배경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 다소 충격이었다. 뿐만아니라 어르신들이 흔히 말하는 ‘좋은 게 좋은 것이다.’ ‘배만 곯지 않으면 된다.’라는 식의 가정환경이 그런 사고를 더욱 키운 것인지도 모른다. 더불어 이전의 우리가 보여준 ‘폭력적 저항’은 진 샤프의 말처럼 또 다른 독재, 폭력을 키웠다. 독재를 무너뜨리고 또 다른 독재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고 자란 우리 세대는 마찬가지로 애초에 저항할 의지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구체적인 지시 사항이 주어졌을 때뿐 아니라 전체적인 개념을 이해할 때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섭니다. 대전략에 대한 지식은 투쟁에 참여한 대중들의 사기와 적극성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적절한 행동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101쪽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책은 가볍다. 페이지가 많지 않다는 이야기도 되고 동시에 우리가 전혀 모르던 이야기만을 설파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작은 책이 담고있는 의미와 내용, 사례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비폭력 저항만이 휴유증을 최소한으로 하여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계획과 내부안에서 타오르는 저항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외부자극이나 영향이 큰 것은 분명하나 내부에서 타오르지 않고서는 결코 실질적인 결과를 낳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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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개정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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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를 공부하려 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펼쳐보는 책은 E.H.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일 것이다. 두꺼운 책에 보기만 해도 책 속에 있는 모든 내용이 읽기만 하면 내 머릿속에 들어오고, 완독 후 전시장을 방문하면 누구의 작품이라도 다 이해될 것만 같은 기대가 생기는 책.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여전히 그 책을 완독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덕분에 대략적으로 미술이란 어원의 시작과 변천사 혹은 현대이론에 가까운 이론이 정립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중간중간 비평가와 작가들의 명언은 덤으로 얻어가면서 말이다. 미술사 어느 책을 들여다보더라도 고대 비너스 작품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사실 그 시대의 비너스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여체의 아름다움이나 작가 개인의 취향 혹은 창조성을 바탕으로 창조된 '예술' 혹은 미술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이것은 미술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 있을 수도 있고, 비너스의 풍만한 라인은 다산, 여성이라는 아름다움이 아닌 생존 혹은 번식력을 위한 바람을 담은 성물이라고 볼 수 있다. [스펙타클 사회]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살아 있는 경험을 온갖 형태의 '재현'이 대체하고, 그 이미지들은 사회생활의 모든 면에 개입하며 시민들은 대중매체의 수동적 소비자로 전락시킨다'란 말처럼 미술은 창조자가 어떤 대상을 끊임없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현한다고 볼 수 있다. 딘큐레는 작품 <모든 것은 재현이다>를 통해 미술 뿐 아니라 취미나 가치관 혹은 일생생활 전부를 재현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거나 현재 모두가 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도 될까? 예술이라는 어원의 변천과정을 통해 이해해보자면, 처음 예술 혹은 미술은 일상예술까지 포함하거나 다빈치의 경우처럼 지식의 한 방향으로 보기도 했고 천체술, 광학술 등 기술적인 분야까지 순수예술항목에 포함되기도 했다. 현대에 이르러 학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17세기 이전에는 예술가였던 셈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불과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창조자가 예술가던, 기술자던 그들은 모두 '남성'에 한해 명명되어졌다는 점이다. 심지어 여성 화가가 유명했던 19세기조차 여성작가들에게는 누드가 금지되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 차별이 어느정도 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누드화를 통해 전문 예술인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과정이었음에도 그랬다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여성예술가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창조자의 삶이 저런 과정을 거쳤다면 비평가 혹은 취미 또는 취향으로 미술을 바라보는 관람객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아카데미 제도만 보더라도 현대의 작가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작품을 창작하는 것과는 달리 17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창작자들은 궁중 혹은 귀족의 요구대로 작품을 그렸다. 성화가 교회의 무대배경이자 장식이기에 미술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뿐 아니라 자발적 창조품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미술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요청에 의해 창작된 작품, 그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의 직업은 계급과 지위가 높은 이들이었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이는 변함없는 사실이었고, 취미란 그 사람의 직업과 신분을 나타내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창작자들은 특별한 능력, 즉 천재성을 부여받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여전히 인류의 절반인 여성 역시 천재성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은 부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사진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회화가 아닌 사진분야에 여성들의 참여가 높아졌는데 이는 차별적인 것도 있지만 직접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게 되는 회화보다 화화적인 중간과정을 거치는 사진이 덜 직접적으로 느껴진다는 여성작가들 스스로의 의사도 반영 된 셈이다.

과거에 이르러 현재까지 미술 혹은 예술을 이야기할 때 지금까지는 미술사에 등장하는 모든 작품을 '예술작품'이라는 장막으로 가린 뒤 무조건 신비롭고 고귀한 것으로만 바라보았던 내게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무엇이 '미술'이며, 도대체 '미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자조적인 고민을 던져준 책이다. 끝으로 책을 읽는 내내 왜인지 모르게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던 피카소와 관련된 이야기를 올려본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어머니는 내게 약속했다.

"만약 네가 선원이 된다면 선장이 될 것이고, 정치가가 된다면

대통령이 될 것이고, 신부가 된다면 교황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난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결국 피카소가 되었다. -본문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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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 일기에 나타난 어느 독일인의 운명
파울 요제프 괴벨스 지음, 강명순 옮김 / 메리맥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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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이 작품은 작품을 이야기 하기 전, 작가 이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듯 하다. 역자 후기만 보더라도 20대 청년의 방황, 사랑 그리고 투쟁으로 보기 보다는 저자의 나치 선정성을 염두하고 읽으라고 할 정도니 말이다. 출발은 그랬다. 저자의 말처럼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성장하고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하면 그렇게 잔인한 학살에 가담 정도가 아니라 앞장설 수 있을까, 과연 그들도 '사람'이라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막상 <미하엘>을 읽다보니 과연 그런 선입견을 두고 이 책을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반드시 또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가장 쉬운 예로 내용이 정말 멋지고, 공감가는 내용도 많은데 하필이면 그 작가가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하다 못해 잔인하게 살해한 일본인이었다면? 심지어 수장이었다면 어떨까? 내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소설을 두고 그냥 소설로 보자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헤르타 홀크. 그녀의 노트에 적힌 이름이다. 이름 하나 알았을 뿐인데도 벌써 그녀와 아주 가까워진 기분이다. 말 한마디 나눠 보지 않았지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21쪽


위의 문장만 보더라도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순수한 청년의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나약한 인간의 면모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친구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하고 자신의 길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연인에게 실망하기도 하는 모습은 보통의 청년가 다를바 없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이 소설이 위험한지도 모른다. 사실 이 소설은 저자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자전소설을 탄광에서 사고사한 친구를 위해 장편소설로 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전소설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친구의 죽음을 마치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다고 강조하며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감정적 호소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인간의 모습을 한 거짓이다. 유대인은 역사상 최초로 영원한 진실을 덮기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받았다. 126쪽


마치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를 탄압하고 살해했기 때문인것처럼 몰고가지만 사실상 자신(혹은 국가)의 나약함을 유대인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을 찬미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지극히 존경하는 와중에도 유대인을 경멸하고 모욕하는 '미하엘'을 보고 있으면 역자의 말처럼 결코 친구를 '추모'하기 위한 소설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주지는 않았다. 247쪽


'로랑비네'의 <HHhH>를 읽으면서도 느꼈고, 멀리서 찾지 않고 히틀러의 생애만 보더라도 나치당 중 유대인 학살에 앞장 섰던 인물들은 겉으로는 외향적이고 학업적 능력이 뛰어나며 심지어 '로맨티스트'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들과 대화를 일단 시작하면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마지막 문단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한 마디. 불우한 가정 때문에 혹은 불구였던 신체 때문에, 이도 아니면 꺾인 꿈으로 인해 한 평생 열등감 속에 빠져 있었다고 결론짓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열등감을 이겨내기 위해 정말 '잘'사는 사람들의 흉내를 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흉내는 진실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던 만큼 신의 탓이 아닌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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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5-30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소설이라기 보다는, 나치즘을 전파하기 위한 선전물이 아닐까 싶네요.

에디터D 2017-09-23 00:49   좋아요 0 | URL
그런듯 싶죠? 공감한다고 밑줄까지 그었던 부분도 있었는데;;; 흠흠;;;
(댓글을 6개월만에 달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불구의 삶, 사랑의 말 -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양효실 지음 / 현실문화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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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전에 맥긴리의 사진은 도발, 청춘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맥긴리의 사진을 통해 그 어떤 말보다 '자유'와 이를 표현해낸 그들에게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용은 전혀 우습지 않지만 제목만큼은 눈에 확들어오는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이 있다. 천 권도 아니고 이제는 만 권 정도는 읽어야 스펙으로서의 독서량을 인정받는 시대에 다분히 유혹적인 책제목이다. 하지만 이런 책을 읽지 않더라도 대략적으로 타이틀을 통해 그 내용이 짐작되는 책이 대부분이다. 당연한 소린데 굳이 언급하는 까닭은 양효실 교수 [불구의 삶, 사랑의 말]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 만큼은 제목에서 짐작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기 보다는 조그만 구멍가게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창고형 마트안에 들어와 있음을 깨달은 수준이었다. 그것도 세계 최대 규모의 마트.


'불구의 삶'이란게 무엇인가. 사실 자주 접하는 기도문 내용중에 '정신적 불구'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입에 올릴 때 마다 나이들어 신체도 완전치 못하지만 정신과 영혼 역시 불구인게 맞구나 싶을 때가 많았다. 저자는 비행청소년, 우울증환자, 예술가들의 삶들을 불구의 삶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삶은 평균, 평범, 보통이라 퉁치는 '사회성' 을 갖춘 사람들과 비하면 불구자가 맞다.


앞서 계속 이야기해 왔듯이 좋은 행동에는 개인의 존재와 욕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사회를 위한 것이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56쪽


스스로 만들어낸 불구의 삶 뿐 아니라 사회 혹은 제도가 만들어준 '불구'의 삶도 피폐하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성을 갖추고 그 속에서 '성공'도 했지만 상대에 대한 배신감과 여자로서 벗어날 수 없는 억압이 정신적 불구의 삶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신체적 불구와 정신적 불구 중 그 어느 것이 더하나 덜하다 논할 가치도 없다. 둘 모두 '불구'인 삶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방법이 '사랑'밖에 없고 저자는 바로 그 사랑이 왜 필요한지, 왜 그것만이 치료약이 될 수 밖에 없는지를 이미 있었던 작품들 속에서 꺼내온다. 그 사랑의 표현은 물론 과격한 퍼포먼스가 될 수 있고 사회에 대한 거친 욕설이될 수도 있다. 표현의 방식의 제재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그 근원이 결코 사랑의 반대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기적을 일으키고 기적을 보는 사람이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하고 죽었던 몸을 일으킨다. 사랑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잠들 수 있게 한다. 248쪽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말한다. 명민한 독자라면 분명 책속에 등장하는 음반, 영화, 책들을 하나하나 찾아보게 될 것이라고. 명민해서가 아니라 나이 마흔이 다되어가는 데도 여전히 호기심천국의 뇌를 가진 나는 300페이지도 안되는 이 책을 읽는데 몇 주가 걸렸다. 이름만 대충 알았던, 타이틀곡만 알고 들었었던 앨범과 뮤비는 물론 언급한 시인들의 시집을 들춰보고 사진집을 들여다보고 보았던 영환데 내용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 러닝타임 2시간이 넘는 영화를 다시 봐야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놓쳤던 놓칠뻔 한 내용들을 알게 되는 기쁨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수익은 이제 그만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쇠퇴되기 전에 우선 성장부터 해보자고 스스로를 괴롭혔던 내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불구의 삶이면 어떠랴. 타인으로 부터 듣지 못하는 사랑이면 어떠랴. 내가 나를, 그리고 저자가 애써 찾아내준 '멋진불구'동료들이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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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온기 - 내가 먹은 채소에 관한 40가지 기억
김영주 지음, 홍명희 그림 / 지콜론북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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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가 따뜻하다는 사실을 알려준 책, 채소의 온기

언어에도 온도가 있다는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를 읽은 후로는 '온도'라는 단어자체에 조금 민감해져 있기도 했고, 나는 과연 타인에게는 둘째치고서라도 내 자신에게는 어떤 온도로 살아왔는가 깊게 생각해왔던 요즘이다. 사실 뜨근한 오뎅국물 한 모금에 꽁꽁 얼어붙은 마음이 녹는다는 생각은 이전에도 했었다. 하지만 채소는 어떤가. 아삭아삭 씹히는 오이와 싱싱할 때 한입 베어물면 달큰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지는 당근등을 떠올리자면 채소의 온도는 늘 '시원함'이었다. <채소의 온기>의 작가 김영주 작가는 그런 좋았던 기억들이 다름아닌 따뜻한 온기를 안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독자인 나는 못이기는 척 저자의 손에 이끌려 채소와 관련된 따뜻한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평온한 일상에 실련이 주어지듯, 너무 매운 고추를 잘못 먹고 찔끔 눈물 흘리는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인생은 가끔 이 매운맛이 있어 견디고 즐기면서, 또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88쪽

위의 문장은 저렇게 떼어놓고 보면 마음에 확 와닿지만 저 말보다 더 공감했던 것은 저자가 자취했을 때 고춧가루와 관련된 일화를 들려준 부분이다. 사실 자취를 시작하고 마트에 가서 고춧가루 가격을 봤을 때 나도 엄청 놀랐었다. 차라리 라면을 사서 스프를 꺼내 활용하는 편이 경제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독립한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 한번도 내돈으로 구매해 본 적이 없는 양념이 고춧가루다. 저자는 언젠가 직접 고춧가루를 해서 보내드리는 날도 오겠지 하며 여운을 남겼지만 난 그냥 용돈을 챙겨드리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지난 가을 고추를 말리는 수고가 어느정도인지 간접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다.



 


-본문 중간중간 혼자 or 함께 분량에 따른 레시피가 귀여운 고양이 일러스트를 만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위의 경우처럼 공감하고 따끈따끈한 추억을 끄집어 내기도 했지만 '생강'처럼 괜시리 뜨끔거릴 때도 있었다. 저자의 말처럼 생강이 채소인건 너무나 당연한데도 생강도 채소라고 하면 새삼스럽다. 서문에 언급한 것처럼 채소라하면 오이, 상추, 당근, 토마토처럼 날 것으로 아삭아삭 씹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강은 몸에 유익한 성분도 많기 때문에 오이먹듯이 목이 마를 때 씹어먹는다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입안에서 강한 생강향이 나는 것 같아 책을 읽다가 혼자서 당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역시나 목이 아프거나 감기 기운이 있을 때면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이 감기약보다 생강차인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시금치를 생각하면 뽀빠이가 떠오른다는 저자의 말에 은근슬쩍 나와 같은 세대인 듯한 묘함 친근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친근감을 갖게 된 것은 헌 책을 팔아 장을 보았다는 내용이었다. 내게도 전재산이 오로지 책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엄청 가난하고 형편이 어려웠구나 싶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책을 팔아 산 돈으로 식재료를 구입하고, 요리라 할 만한 건 못돼지만 제법 입맛에 맞을 때 느껴지는 묘한 행복감을 느껴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저자에게 시금치 무침이 그런거라면 내게는 달래무침이 그랬다. 저자의 달래무침 이야기도 책에 수록되어있지만 유사한 에피소드가 시금치편이라 해당 이야기를 언급했다.


채소를 먹으면 몸에 활력이 느껴지고, 기분 좋아지곤 했습니다.

아마도, 수많은 채소와 관련한 기억과 추억, 그리고 맛있는 채소 요리를 나누었던 사람들의 온기 덕분일 겁니다.


여러분의 채소는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나요? 254쪽



사실 읽다보면 다들 알겠지만 30대 초중반 혹은 이제 막 독립을 시작해서 채소 하나하나 맛을 알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처럼 다른 채소지만 추억이 같을 수도 있고, 같은 채소에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저 건강하고 시원하기만 했던 채소가, 그 채소들의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얼마나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깨닫느냐 일 것이다. 채소의 온기. 이 온기를 일단 한 번 느끼게 되면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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