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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동안 두빛나래활돌을 하면서 참 즐겁고 행복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조금 더 성숙해 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두빛나래활동 초기에는 부담감도 컸고, 내가 얼마만큼 이 활동에
적응하고 선생님과 아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또, 이 활동을 통해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나는 내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고민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 기억에서 사라졌고 어느새 내 마음속에 그러한 고민의 답이 스며들어 왔다.
 우리 동아리 친구들은 모두 착하고 밝은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내가 동아리 활동에
금방 적응할 수 있었고 1년 동안 재미있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분도 아닌 두 분의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함께 했다는 게 더욱 좋았다. 이렇게 동아리 식구들이 좋았기 때문에 1년이란 시간이 더 아쉽게 다가오고 헤어짐이 싫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절대 고등학교 땐 좋은 친구도, 선생님도, 그리고 추억거리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두빛나래가 그 생각을 깨뜨려버렸다.
 두빛나래가 나를 바뀌게 한 것은 많다. 그 중 하나가 자신감이 없는 나,
많은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 말도 못하던 소극적인 나를 보다 적극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특히, 사회를 맡았던 때는 정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러한 느낌을 받았었다.
좋은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떨리고 부끄러웠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 더 밝아지고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지나고 보니 그 새로운 경험이
나를 발전시킨 것 같다. 사회를 맡은 것 말고도 많은 책을 읽을 읽고 그 책을 바탕으로 친구들과 토론을 하면서 폭넓은 생각을 가질 수 있어으며 독후감 쓰기를 통해서도 내가 한 걸음 나가갈 수 있었다. 이 글을 쓰기 전 두빛나래 첫 모임에서 받았던 1년간의 일정표를 보았는데 우리가 읽은
책이 20권 가까이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만약 두빛나래를 들지 않았다면
1년 동안 이만큼의 책을 읽을 수 있었을까, 글을 이렇게 썼을까, 내 꿈을 잊지는 않았을까 하고.
나에게 좋은 책을 읽게 해 준, 내가 글 쓰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알게 해 준 두빛나래에게
늘 고맙다. 내 꿈 때문에 두빛나래에 들었고 두빛나래 때문에 내 꿈을 잊지 않았다.
 너무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이 많아서인지 나빴던 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나지
않는 게 아니라 없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모임 날인 금요일에는 정말 학교에 가면 1교시부터 들뜨고 기대 대고 즐거웠다.
이런 나에게 두빛나래의 나쁜 점이란 찾아볼 수 없는 게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늘 모임에 동아리 식구 모두가 모이지 못했던 것이다.
한 달에 딱 두 번인 모임인 만큼 얼굴 보기도 사실상 어려운데 늘 함께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그리고 두빛나래에서 참 좋은 곳도 많이 갔는데 그때마다 함께 할 수 없었던 것도 아쉽다.
그래도 항상 자리를 지켜준 고정 친구들과 선생님이 계셔 모임도, 여행도 모두 재미있었고
나에게 든든한 힘이 되었다.
 끝으로 작은 소망이 있다면 우리 두빛나래활동이 2기, 3기, 4기,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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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이라는 단어 자체가 평소엔 잘 몰랐는데 여행기를 쓰려고 하니깐 굉장히 어색하고 새롭게 느껴졌다. 집에만 있거나 나가봤자 가까운 시내만 누비던 나에게 여행은 생각하기 힘든 단어였다. 그래서 많은 고민 끝에 떠오른 것이 바로 거제도를 갔던 때이다. 2년 전 일이지만 그래서 나의 머리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추억이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거제도에서 일하고 계시는 아빠에게 갔다. 아빠가 그곳에서 일하고 계셔서 나는 거제도를 갈 기회가 종종 있었다. 이번에는 할머니와 오빠와 내가 가는 날이었는데 거제도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심한 고비를 겪었다. 기쁨과 설렘으로 배를 타고 가는데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는 어지러움과 멀미증상이 와서 힘들었다. 억지로 잠을 청해 보려고 눈을 감았지만 배는 통통배처럼 심하게 오르락 내리락 거렸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고 깨서보니 도착하기 10분전이었다. 처음의 설레는 마음은 어디로 가고 온 몸의 힘이 몽땅 빠져서 쉬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도착해서 내렸을 때 언제나 멀리 있어도 한 눈에 찾을 수 있는 아빠가 서 계셨다. 단번에 아빠를 알아보고 '아빠다'하고 외쳤다. 그렇게 아빠를 만나서 아빠 숙소로 갔다. 숙소에 짐을 다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고기집에 가서 저녁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먼 거제도까지 힘들게 와서 먹는 고기라 그런지 너무 맛있었다. 그렇게 잘 먹고 아빠 혼자 있는 숙소에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숙소에 모기가 너무 많아서 모기향을 5개를 온 사방에 피웠다. (누가 보면 불난 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수박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늦은 밤 아빠와 나는 마트에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다고 나왔다. 섬이라 그런지 마트가 꽤 멀리 있었다. 그래도 마트가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사실이었다. 마트를 가는 동안 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애기하고  아빠는 그런 나의 이야기를 웃으며 들어 주었다. 무뚝뚝함과 욱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아빠를 닮은 나는 애교라곤 하나도 없는 성격이다. 하지만, 아빠 앞에서는 난 어쩔수 없이 온갖 애교를 다 부리며 달라 붙는다. 그렇게 아빠와 나는 드넓은 바다로 둘러싸인 길을 걸어갔다. 밤인데다가 바람도 세고 깊이는 어마어마해서 아름다운 것보다 무서웠다. 내가 예상한 아름다운 바다풍경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일이면 찾아 올 멋진 바다 풍결을 모른체 오늘은 조금의 실망감으로 잠을 청했다.                  다음날, 모기향 5개의 위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백여마리의 모기에게 침트를 당한 것처럼 많은 흔적과 동시에 간지러움이 나를 괴롭혔다. 거기에 나를 더욱 괴롭힌 것은 물이다. 피부가 민감한 나에게 부산물(?)과 거제도 물(?)의 차이가 큰 영향을 미칠지 생각도 못했는데 나의 피부는 하루아침에 엉망이 되어있었다. 짜증의 연속으로 아침을 보낸 나는 그 상태로 바닷가를 갔다. 그리 탐탁치 않은 시작이었다. 하지만, 차에서 내리는 순간 나는 나의 눈을 의심했다. 거대하게 펼쳐진 바다에 사람들이 수영을 하며 놀고 있었다. 몸이 간질간질 했다. 모기 때문이 아니라 나도 빨리 저 바다에 '풍덩'하고 빠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속력으로 달려서 바다에 빠졌다. 물은 아주 깨끗했다. 집 근처 가까운 해운대화 광안리와는 또다른 느낌이 나를 사로 잡았다. 물이 얕아서 안정하게 놀 수 있었다. 가족들은 베치와 오둑막의 절묘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곳에 앉아 있었고 나는 오빠와 둘이서만 물 안에서 전쟁을 벌였다. 시간이 조금 지나 다시 숙소에 가서 밥을 먹고 다른 바다로 갔다.
사면이 바다라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바다였다. 두 번째로 온 곳은 통영에 있는 바다였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배 30척 정도가  일렬로 바다를 가로질러 지나갔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그냥 쳐다보거나 딴 짓을 하는데 나 혼자서 흥분해서 눈을 크게 뜨고 보았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너무 신기하고 놀랐다. 내가 더욱 놀란 건 거북선이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모양은 정말 화려하고 잘 만들어졌다. 나는 아빠에게 아까 왜 그렇게 많은 배가 일렬로 지나갔으며 거북선은 왜 만들어 놓았는지 물어봤다. 아빠는 통영이 임진왜란 때 저항이 가장 센 곳이었고 민란이 처음 일어났던 곳이라 오늘 기념으로 배들이 행진했다고 하셨다. 그제야 이해한 나는 다시 걸음을 바삐 움직여  배들이 세워진 둑 사이로 걸어갔다. 그 이유는 그 사이에  고동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아빠는 고동 매니아. 한 봉지 가득 찰 정도로 떼서 집으로 들고 와 가족들과 함께 먹었다. 초장에 찍어 먹는 그 순간 나는 행복의 미소를 머금었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부산으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아쉬움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로서 나는 아빠와 또 헤어짐을 한다. 나는 방학이 아니면 내려오기 힘들고 또 아빠는 돈을 벌러야 해서 부산에 잘 올라 오시지 않는다. 그래서 만날 기회는 많이 없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 나는 나대로 학교에 얽매이고 아빠는 아빠대로 일에 얽매여 살아간다. 한 가족인데도 서로 돌아 볼 시간이 없어 안타갑지만 그래도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가 힘든 세상을 버티며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나는 지금 고 2다. 이 일이 있은 후 2년이 지났고 2년동안 딱 두 번 내려갔다.
중학교 땐 많이 내려 갔는데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바빠진 내 생활 때문에 내려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항상 늦게 마치고 시험시간에 맞쳐 아빠도 시간이 나거나 또 방학 땐 보충하고 시간이 나도 쉰다고 잘 가지 않았다. 이젠 그저 추억으로만 남은 여행이 다시 한 번 더 찾아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고 3을 앞둔 나는 오늘도 내 일에 급급해 맞쳐진 시계처럼 돌아간다. 그래서 아직도 여행은 낮선 단어로 내 곁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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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육군대위 드레퓌스)
1894년 9월 어느 날, 독일대사관 무관 앞으로 가는 봉투 안에는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의 내용을 자세히 적은 '명세서'가 들어 있었고 보낸 사람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 군대의 참모본부는 범인을 찾기 시작했고 그 범인은 알프레드 드레퓌스로 지목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기의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군사법원에서는 그를 유죄로 선고했다. 드레퓌스로 말하자면 그는 아주 평범한 육군 장교였고 남다른 점이 있다면 유대인이면서 프랑스를 조국으로 섬겼다는 사실이다.
 그는 독일 국경 가까운 지방에 살았는데 독일이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그 지방을
빼앗아 버렸다. 그래서 드레퓌스는 군인으로서 조국 프랑스에 봉사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고 차별을 받기도 한다. 그래도 그 상황에서
조국에 대한 사랑과 군대에 충성심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군인으로서의 착실하게 생활해
나갔다. 그러나 지금 그는 유대인을 미워하고 뿌리 깊은 악습이 남은 프랑스에서 참모본부 상관들 같은 사람들도 인해 재판정에 서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참모본부 상관들은 만약
드레퓌스가 죄가 없다면 그들의 위신이 떨어질 것 같아 여러 가지 거짓 문서를 꾸며 증거로 제출했다. 결국, 드레퓌스는 군대에서 쫓겨났으며 모욕까지 당하고는 외딴 섬으로 끌려간다. 그러나
오랜 세월 그는 아내의 편지 때문에 힘든 생활을 참을 수 있었다.
(진짜 스파이 에스테라지 소령)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일하는 조르쥬 피가르 중령은 에스테라지라는 소령이 진범이라고 주장했으며 이 사실을 참모본부 장군들에게 알렸지만 모두 욕만 했다. 또한 마티외는 에스테라지를
고발까지 했다. 그리고 '피가로'라는 신문은 맨 처음으로 에스테라지가 진짜 범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의 힘은 너무나 약해서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에밀 졸라는 '나느 고발한다'란 글을 통해 드레퓌스의 무죄를 호소했다.
즉, 졸라는 에스테라지가 진범인 이유를 하나하나 밝힌 다음, 드레퓌스를 죄인으로 만들어
참모본부의 잘못을 감추려 한 장군들과 엉터리 증언을 한 글씨 감정전문가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한 재판관을 무섭게 꾸짖었다. 그러자 군사법원은 에밀 졸라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하는 수 없이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영국으로 망명한다.
(진실이 거짓을 누르다)
 에밀 졸라가 다시 펜을 들었으며 '진실'이라는 책을 냈으며 드레퓌스는 자기가 겪은
일을 쓴 '악마의 일기'를 펴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때문에 끝끝내 드레퓌스는 무죄를
선고받고 비로소 드레퓌스 사건은 막을 내렸다.
(20세기를 연 드레퓌스 사건)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하는 것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꽃피우고자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드레퓌스 개인의 생명이나 자기네의 이익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사회진보를 위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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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님의 강연을 보러 가기에 앞서 책을 받아 보았을 때
표지에 그려져 있는 선생님의 얼굴과 나이를 알고는
연세가 높고 조용한 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얼굴은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젊으셨고 말씀도 재미있게
하셨다. 그래서 나에게 신영복 선생님은 좋은 인상을 남기셨다. 
감옥에 있었을 때에 대한 이야기로 강연은 시작하고 있었다.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에 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 때문에 30~40명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도소에 있으면서 늘 책과 함께 하며
노자, 주역 등 한 권으로 오래 읽을 수 있는 중국 고전을 많이 읽었다고 하셨다.
그 이야기를 뒤로 어릴 적 가졌던 꿈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중고등학교 시절 가졌던 선생님의 꿈은 주체적이지 못한 꿈 이였다고 한다.
어릴 적 어른들이 뭐 될래 물어보면 '일본총독'이 되겠다고 했다.
이승만을 존경해야 한다는 학교의 주입식 가르침과 아버지 친구 분들이
그러한 꿈을 말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감옥 전 20년, 감옥에서 20년, 감옥 후 20년을 살다 보니
주체적인 꿈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사회의 주입과 인식을 자신이 다시 관찰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타인에 의한
꿈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가질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꿈보다는 사회가 인정하는 높은 권력층의 꿈을 이루려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의 말씀처럼 사회가 주입하는 꿈 보다는 자신의 주체적인 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생님께서는 참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셨다.
그 중 물질적인 것은 어려운 것을 극복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이 없더라도 자기
자부심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은 정말 어려움과 불편함을 쉽게 해준다. 하지만
물질적인 것에는 우리의 마음이 담기지 않는다.
우리의 힘도 우리의 정신도 우리의 땀도 들어가지 않는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자부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부심만 있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쉽게 해 나갈 수 있다고 본다.
다음으로, 선생님께서는 인관관계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회의 잘못된 구조는 인관관계에서부터 깨달아야 하며
맹자의 이야기를 들어 '만남'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교도소는 인간관계가 적나라하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희망'에 대해서는 삶 속에서 어려움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들은 말은
물은 웅덩이가 있으면 차곡차곡 쌓아 뒷물이 흘러갈 수 있도록 도와주며
산이 물을 가로막으면 빗겨 흘러가기 때문에 물은 절대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물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물은 정말 너그럽고 다투지 않으며 양보하는 존재라는 걸 느꼈고
나도 물 같은 존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평강공주와 바보온달에 대해
바보는 온달이 아니라 평강공주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평강공주가 바보 온달은 사랑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는 바보란 신데렐라의 꿈을 가진 사람들, 친구를 짓밟고 일어서려는
학생들이라고 하셨다. 그리곤 우리에게 바보 온달과 바보 평강공주가 되라고
하셨다. 바보의 의미를 하찮게 생각한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하는 말 이였다.
또 선생님께서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셨다.
한 종류는 지혜로는 사람, 나머지 한 종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가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합니다. 세상은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 변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이다.
바보의 의미처럼 어리석음의 의미도 우리는 무시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바보와 어리석음이 더 세상을 순순하게
만드는 것 같다.
끝으로 나는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뭔가 참된 것을 얻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감옥이라는 어둠의 공간에서 20년 동안 계셨지만
밝은 조명을 받으며 20년을 넘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더욱 빛나고 아름다운 분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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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지금까지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라디오 스타'이다. 영화 '라디오 스타'와 나의 만남은 우연히 시작되었다. 영화로 개봉했을 때 나는 "와! 재미겠다. 보러 가야지”했었는데 막상 영화관에서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텔레비전에 특집으로 '라디오 스타'가 나오는 걸 보고 우연히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누워서 편안하게 감상하던 나는 점점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책 '내 인생의  영화'에서 김홍준이라는 영화감독이 한 말처럼 아무 준비 없이 마주쳐 그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 느끼는 행복감 만한 것도 없다는 말이 공감 갔다. 나는 이 영화에 담긴 내용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어 좋았다. 보통 보고 나면 금방 까먹거나 화려함에 빠져 감탄하는 영화가 대부분인데 이 영화는 반대로 오래도록 기억나고 화려함이 아닌 순박함에 매료되는 영화다.
  줄거리를 간단히 말하자면 한때 이름 날리며 정상을 누비던 가수 최곤과 그의 옆에 늘 있어준 매니저 민수가 있다. 하지만, 최곤은 마약, 폭력 등으로 점점 정상에서 내려오고 사람들에게서 잊혀 진다. 그 속에서도 민수는 최곤을 떠나지 않고 그를 다시 복귀하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며 최곤을 지켜준다. 그러나 민수의 노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곤은 말썽만 피운다. 그러던 중 영월이라는 곳에서 라디오를 진행하게 된다. 그러면서 최곤은 사람들의 기억에 자리 잡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평범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최곤의 모습이 변해가는 과정과 영월 사람들의 사연은 최곤의 마음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마저 흔들었다. 일상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내용의 영화가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나는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과 사연이 담긴 영화라서 같이 울고 웃을 수 있었다. 내가 공감하고, 마치 내 이야기 같은 영화를 찾았다는 게 가장 좋았다. 집나간 딸이 다방 여직원이 되어 엄마를 그리워하고 집 나간 아버지를 찾는 아들과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데 주저하는 젊은이들의 뻔한 사연들이지만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영화는 영월이라는 곳의 공동체 의식과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묻어난다. 그리고
'비와 당신'이라는 노래는 영화 속의 아름다움을 더욱 잘 나타내서 나의 마음조차 아름답게 했다. 하지만, 특히 내 마음을 아름답게 한, 내가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최곤을 항상 지켜준 민수이다. 최곤이 정상에 있을 때도 밑바닥에 있을 때도 민수는 한결같이 최곤과 함께 했다. 민수라는 소중한 존재를 미처 깨닫지 못한 최곤이 뒤늦게 그 소중함을 알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내 옆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나타날까? 아니면 혹시 지금 내 옆에 그러한 소중한 존재가 있는데도 깨닫지 못한 채 흔한 존재로 그 사람을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자신의 곁에 있는 친구, 가족, 연인, 이웃 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주고 도와주고 사랑해 준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라는 걸 영화는 말해주고 있다. 지금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라. 그리고 자신의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보길 바란다. 그리고 그 고마움을 깨닫고 그 사람에게 다가선다면 우리 모두 영화처럼 행복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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