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이야기를 읽고 그 느낌을 시로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시는 어떻게 쓰는 것인가요?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언니는 많이 쓰셨잖아요? 끊임없이 쓰셨잖아요? 정말 시인은 태어나는 것인가요? 운명인가요? 본 적 없는 언니의 방을 상상합니다. 생각보다 좁아서 놀랐다고 마리아 포포바는 말하더군요. 책상도 아주 작았다고요. 저는 큰 책상을 갖고 있습니다. 책이 마구 쌓여있고 커다란 컴퓨터도 있고 책을 읽기 좋게 독서대도 올려두었지요. 무언가를 쓰기에 적합할까요? 글쓰기에 적합한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요? 책상이 크다고 글이 커지는 건 아니겠지요. 나는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펜으로 연필로 글자를 적는 것보다 속도가 훨씬 빨라요. 썼다가 지우기도 쉽습니다. 게다가 내 방은 큽니다. 타자가 빠르다고, 방이 크다고, 글이 커지는 것도 아니겠지요. 어린아이 침대 크기에 몸을 웅크려 잤을 언니를 생각합니다. 신체적 고통에 몸부림쳤을 시간을 생각합니다. 창으로 바깥 세상을 바라보았을 눈을 생각합니다. 어쩌면 언니와 내가 비슷하게 느낄 수 있는 건 햇살과 바람과 새 소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유난히 새가 맑게 이야기하더군요. 그걸 종이에 옮겨적으면 시가 될까요. 그러나 그 시도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겁니다. 새의 날개가 자유롭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요. 언니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언니를 스스로 가둔 새장에서 날아오른 자유의 새라고 말하는데, 언니는 후대의 우리들이 이렇게 언니에 대해 많이 이야기할 것도 알고 계셨나요? 사람들의 평가가 마음에 드시나요? 아무렴 무슨 상관이겠어요. 아무도 언니를 언니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평가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를 살았다고 말하는 건 쉽습니다. 칭송 또한 그러하죠. 그러나 삶이 그렇게 쉬운 것이던가요. 나는 언니를 모르고 언니의 시도 읽지 않았습니다. 너무 어려워요. 때로는 시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어려운 건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시를 몸으로 살아낼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걸까요. 언니의 이야기를 읽을수록 점점 더 시가, 삶이 어려워지는 느낌입니다. 만약 언니가 방에서 나왔다면,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요. 누군가의 말처럼 평범한 여자의 삶을 살아버리고 말았을까요. 예술가는 어떤 식으로든 결핍과 부재와 고통을 겪어야만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걸까요. 우리는 그 위대한 작품을 칭송하고 향유하지만 과연 그것이 온당한 것인가 의문도 생깁니다. 위대함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은, 언니가 생각했던 것처럼 먼지에 불과한 것일까요. 이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온통 모르겠는 것 투성이네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늦게나마 인생을, 예술과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니까요. 인간이라는 존재와 크고도 작은 이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몰랐던 언니를 한 명 더 알게 되었다는 - 안다고 말하는 것이 폭력일 수 있다고 했지만 - 지극히 개인적인 만족감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언니의 시집을 사서 읽거나 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 점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니는 개의치 않을 듯 싶어요. 중산층 이상의 생활을 한 시인이라서, 백인이라서, 일종의 반감이 생기면서도,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저 지지하고 싶은 이 마음은 또 무엇일까요. 참 신기합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에도 언니와 같은 사람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알려지려면, 알게 되려면, 영어로 표현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또다른 반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언니가 영어 아닌 다른 나라 말을, 소수 민족이 쓰는 말을 사용해서 시를 썼다면 어땠을까요. 그런 생각 해본 적 있으세요? 영어를 쓰지 않는 많은 예술가들이 그렇게 숨겨져 있었을 겁니다. 언니 이전에도 이후에도 말이에요... 다른 책에서 언니의 하얀 옷에 대한 해석을 읽었습니다. 우연찮게도 오늘 아침 또 다른 책에서 남성작가가 쓴 하얀 옷을 입은 여자에 대한 글을 보았어요. 한숨이 나왔습니다. 남성들이 가지는 환상, 클리셰들이 가득하더군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또한 편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언니도 아셨다시피 이 세상은 온통 클리셰로 가득합니다. 그 남성 작가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칭송받는 작가라는데, 실망했지요. 언니가 하얀 옷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요. 해석을 읽었음에도 모호하다는 말은 모호함을 언니가 너무 잘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도요. 흰 옷만 입는 시인이라는 소문에 너털웃음을 터뜨렸을 언니를 상상해요. 놀랍게도 지금은 2022년입니다, 언니.





(<진리의 발견> '에밀리 디킨슨' 부분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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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2-04-29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티앙 보뱅이 말한 이는 클리셰라기보단 죽은 자신의 연인을 뜻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죽은 연인을 뜻하기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걸로 표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도 궁금해서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오늘 아침 알게 됐어요.

난티나무 2022-04-29 17:12   좋아요 0 | URL
악 이름 밝히고 싶지 않았는데 ㅎㅎㅎㅎ
그렇군요. 그럼 그 원핏은 수의겠네요….. 다시 읽어봐야 겠습니다.^^

미미 2022-04-29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난티나무님! 에밀리 디킨슨이 읽는다면 미소지을 것 같은 편지네요. 빨려들듯 읽었습니다.^^*

난티나무 2022-04-29 17:16   좋아요 1 | URL
편지를 빙자한 중얼거림이죠. ㅎㅎㅎ 🙏 🙏 🥰🥰

거리의화가 2022-04-29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시를 읽고 경험한다는 게 어떤건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는 이 글에서 묻혀있는 글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했습니다. 영어가 모국어인 글들 중에서도 묻혀 있는 글들이 수두룩할텐데 영어가 아닌 타 언어로 된 글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글들이 묻혀 있을지요. 그래서 역사에 묻혀 있는 글들을 계속 들춰보고 꺼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난티나무 2022-04-29 17:22   좋아요 1 | URL
맞아요, 거리의화가님. 영어라는 언어 자체가 갖는 힘, 다른 언어로 된 작품은 모두 영어로 번역되어야 세상에 알려지는 현실, 아이러니하면서 엄청 폭력적인 일이죠. 이렇게 서양의 작가/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한국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저의 무지를 탓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

공쟝쟝 2022-04-29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리 디킨슨은 정말 부럽고 좋고........ 멋지고 사랑하고..... 그러고 질투나고......... 동경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짠하고..... 그런 시인. 언니는 누구일까? 하면서 읽다가 디킨슨인거 알고 너무 좋아 너무좋아! 이랬어요 ^^

난티나무 2022-04-29 17:28   좋아요 0 | URL
공쟝쟝님 좋아하시는군요.^^ 맞아요 짠하지만 시에 대한 정열은 멋지고! 방에서 안 나왔다는 게 한편으론 너무 이해되기도 하고요.
😍😍

하늘바람 2022-04-29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를 쓰고 싶다고 하시는 말씀이 넘 아름답게 들려요

난티나무 2022-04-29 20:54   좋아요 0 | URL
그렇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바람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