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 시대의 마지막 승자는 누구인가? - 근세 초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4
김원중 지음 / 민음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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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이지만 야무지고 알차다. 목차를 잠시 살펴보면, 


- 머리말ㅣ대항해 시대의 마지막 승자는 누구인가?

1 유럽 인들은 왜 먼바다로 나가려고 했는가?
2 어떤 지식과 기술의 발전이 대항해를 가능하게 했는가?
3 포르투갈은 아시아를 정복하고 지배했는가?
4 에스파냐 정복은 포르투갈 정복과 어떻게 달랐는가?
5 아메리카의 정복자들은 누구이고 그들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6 대항해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글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거꾸로 책을 읽은 후에 이렇게 질문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읽기가 바빠서 실천하기 쉽지 않겠지만. 글자 빽빽한 책만 읽다가 이렇게 요약이 잘 된 책을 읽으니 달콤하다.


기억할 만한 두 가지를 적어본다.


* 에스파냐 정복은 포르투갈 정복과 어떻게 달랐는가?

p. 103  이처럼 정복 이래로 꾸준히 모습을 갖추어 간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제국은 포르투갈의 아시아 제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다. 유럽 인들의 진출의 영향이 가장 크고, 가장 지속적으로 나타난 곳이 이곳 아메리카였다. 이곳에서 에스파냐 인들은 원주민들과 무역을 하거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건너가 정착했고, 아메리카의 거대한 영토와 수많은 현지인들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제국을 건설했다. 1600년 경 포르투갈 인들이 서아프리카에서 마카오에 이르기까지 몇몇 요새와 섬들에만 머물러 있을 때 에스파냐 인들은 이미 아메리카에 에스파냐 본국보다 몇 배나 더 큰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p.97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발견'한 포르투갈 인들은 그 소유권을 현실화할 힘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에 비해 에스파냐 인들은 아메리카에 대한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p. 99  에스파냐의 해외 사업이 정복과 정주와 식민화 쪽으로 나아가도록 추동한 원인은 모국에서 유래한 것도 있고 아메리카의 지역적 상황에서 유래한 것도 있었다. 재정복운동은 카스티야에서 영토 정복과 정주의 전통을 확고하게 확립해 놓고 있었다. 그러므로 1492년 재정복운동이 완성된 시점에서 볼 때 에스파냐가 아메리카에서 계속해서 영토를 획득하고 재정복을 확대 연장하는 것에 관하여 고려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콜럼버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카리브 해는 인도양에서 포르투갈 인들이 발견했던 수지맞는 교역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본토 내륙에 사는 훨씬 개화된 원주민들도 백인들과 지속적으로 교역할 만한 물품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에스파냐 인들이 볼 때 아메리카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은 오로지 금광과 은광, 진주 어장, 비옥한 토양 뿐이었다. 이것들을 수탈하기 위해서는 몇몇 해군 기지를 발판으로 하는 해상 제국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정복과 식민지화,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받기 위한 원주민의 노예화였던 것이다.


** 원주민의 노예화에 대해

p.125 (각주)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열등하고, 그들의 삶의 목적은 더 우월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그는 그리스 인들에 비해 선천적으로 열등한 종족은 노예로 써도 된다고 주장했다. 또 선천적으로 열등한 종족의 저항으로 야기된 전쟁에서 포로가 된 사람들은 노예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 이론은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아무도 노예 제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16세기 이후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의 논리는 서구에서 노예 제도의 정당성이 도전을 받을 때마다 그 윤리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인종주의를 자극했고, 특정 '인종'의 노예화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노예 제도를 유지하려면 열등한 인간으로 분류되는 집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인종주의의 뿌리가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구나....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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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여행은 책 <향신료 전쟁>에서 움 트기 시작했다. 거의 일 년에 걸쳐 이와 관련된 책을 꾸준하게 읽었다. 목록을 만들어 보면(이미 포스팅한 글과 겹친다.)


향신료 전쟁(최광용)

육두구의 저주(아미타브 고시, 김홍옥 역)

욕망의 향신료 제국의 향신료(로저 크롤리, 조행복 역)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김상근)

한중일의 갈림길, 나가사키(서현섭)

대항해시대의 탄생(송동훈)

바다인류(주경철)

막스 하벨라르(물타뚤리, 양승윤, 배동선 역)

암흑의 핵심(조지프 콘래드, 이상옥 역)


처음부터 의도하고 계획적으로 읽은 건 아닌데 방향이 계속 이쪽으로 향했다. 지리적으로는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아프리카(콩고)로 빠지기도 했으나 포르투갈, 스페인,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일본으로 확장되어 갔다. 마젤란은 역으로 동에서 서로 향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년간에 걸쳐 심심풀이 땅콩 삼아 아시아 일대를 별 목적 없이 돌아다닌 나의 여행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간 다녀온 인도, 말레이시아 말라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족자카르타, 마카오, 필리핀 세부 등이 한 줄로 엮인다. 물론 그 전에 스페인도 있다. 90년대 중반 무렵에 갔었다. 이렇게 어떤 흐름에 따라가다 보니 동쪽에 이르렀다. 그 끝에 나가사키가 있었다.


나가사키에 관한 책은 단연 서현섭의 이 책이 압권이다.















그런데 묘한 게, 여행 전에 읽었을 때는 페이지를 잘 넘겼는데, 여행 후 다시 읽어보려고 하니 문장 하나하나에 눈이 멈추며 페이지를 잘 넘기지 못한다는 것. 무엇을 제대로 안다는 게 어려운 일이구나, 를 깨닫는다. 두고 두고 알아가는 수밖에. 


여행 중에 그날 그날 대충 북플로 포스팅한 것 말고 가장 아쉬웠던 건 바로 카스텔라와 짬뽕 얘기이다.



p. 71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선교사들이 16세기 말 나가사키에 도래하여 전해준 남만 과자 카스텔라는 4백 년의 세월을 거쳐 나가사키 특산품의 간판 메뉴로 자리 잡았다...남만 요리라고 하면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의 요리를 포괄적으로 지칭하고 있다.

  카스텔라가 처음 전해졌을 무렵에는 천황이나 쇼군 등에 대한 진상품으로 사용되었다. 1592년 무라야마 도안이라는 사람이 임진전쟁 때 사가의 나고야성에 머물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카스텔라를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히데요시는 카스텔라 맛을 보고 좋았던지 포르투갈 요리사를 오사카성으로 데려가 카스텔라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뒤를 이어 카스텔라 원조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내 흥미는 여기에서 멈춘다. 왜냐면 내 입맛에는 나가사키의 카스텔라보다 양양의 '코코양양' 카스텔라가 더 맛있기 때문이다. 우리 식구 모두 이 점에 의견 일치. 어렸을 때 나의 어머니는 식구 중 아픈 사람이 있어 입 맛을 잃고 밥을 못 먹으면 카스텔라를 한 개 사다 주곤 하셨다. 집에서 기르던 똥개가 탈이 나서 밥을 못 먹어도 카스텔라를 하나 사와서 조금씩 떼어 주셨다. 그러면 사람도 개도 아픈 몸과 마음이 아물며 기운을 차렸다.



p.130~132  짬뽕은 나가사키에서 처음으로 상품화된 먹거리이다. 짬뽕의 원조라 알려진 천핑순은 1892년 19세 때, 단신으로 박쥐우산 1개를 들고, 중국 푸저우성으로부터 나가사키에 왔다. 그는 호기심이 많은 소년이었다. 고향 사람들에게 빌린 돈으로 리어카 한 대를 마련하여 옷가지 등을 싣고 나가사키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 행상을 했다....그는 중국인 특유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손짓 발짓을 해 가며 7년간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1899년. 26세 때 천핑순을 중국인들의 밀집 지역에 레스토랑과 여관을 겸하는 '대청국 사해루 요리 여관'을 열었다. 종업원 30명. 박쥐우산 한 개로부터 시카이로(사해루)가 탄생하는 감격의 순간이었다.....당시 개항지인 나가사키에는 푸저우 출신의 가난한 유학생들이 많았다...천핑순 사장은 오갈 데 없는 유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베풀었다...한창 먹을 나이인 젊은이들의 식사가 부실한 것을 보고, 값이 싸며 푸짐하고 영양 만점인 시나 우동 즉 중국 우동을 만들었다. 이 시나 우동이 '짬뽕'의 시작이다. 식재료는 돼지 뼈를 푹 고아서 만든 국물에 돼지고기, 캐비지, 숙주나물, 생선묵, 새우, 오징어, 조개 등 보통 열 가지 정도가 들어간다. 면을 밀가루에 탄산나트륨이 주성분이 도아쿠라는 재료를 넣어서 만든다. 도아쿠는 밀가루로 만든 면이 쉽게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짬뽕의 면이 지니는 특이한 맛을 내게 한다.


현재 시카이로라는 중국집은 증손자가 사장을 맡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한번 가봤는데 대기 줄이 길어서 그냥 포기하고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국집에서 짬뽕을 먹었다. 맛은? 육수에서는 진한 굴맛이 나는데 짬뽕하면 떠오르는 불 맛과 매운 맛이 빠졌다. 매끈한 일본 맛이라고나 할까?


짬뽕에 이어, 책에서는 프랑스 해군 대위 로티 얘기가 나온다..피에르 로티(Pierre Loti)를 아시는지...나는 알고 있다는...23년 전 이스탄불에 갔을 때였다. 인터넷에서 읽은 피에르 로티 찻집, 꼭 가봐야겠다는 일념 하에 택시를 탔다. 외곽에 있는 공동 묘지 옆 찻집에서 로티가 차를 마시며 소설을 썼다나 어쨌다나. 그가 썼다는 소설은 지금도 번역된 게 없어서 읽을 수도 없는데 왜 그 찻집에 가고 싶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음. 한 무리의 프랑스 관광객들 틈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나왔는데 돌아간 줄 알았던 택시가 우리(식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한편 고맙기도 해서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데 숙소가 있는 동네에 이르렀을 때 택시비를 건넸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나는 분명 우리 돈 2만 원에 해당하는 요금을 뒷좌석에 있던 남편에게 확인 시킨 후 기사에게 주었는데 내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2만 원 짜리 지폐를 2천 원 짜리 지폐로 바꾸고는 요금을 더 내라는 것이었다. 부리부리한 눈매의 거친 인상에 기가 죽어 그만 1만 8천 원을 더 주고 말았다. 이게 모두 피에르 로티 때문.


그러면 피에르 로티와 나가사키는 무슨 관련? 책을 보시길....


다음은 책에 없는 얘기.



군함도를 먼 발치에서 보았던 바로 그 섬 다카시마에 가는 배의 왕복승선권이다. 색깔도 모양도 크기도 예전 우리 나라 기차표와 유사하다. 우리는 생활사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으려나. 서양 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던 나가사키의 아날로그 고집이 편안하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하다.





앞으로 유명해질 것 같은 기타리스트 Tomohiro Iwamatsu. 박보검 닮았으니까. 같은 날, 거리 공연과 어떤 문화재 건물 작은 콘서트를 보았으니 두 번 만난 셈. 사진도 함께 찍었다. 음악인으로 살아가는 건 쉽지 않으나... 잘 되시길 빌어요.



책을 읽고, 여행을 하다 보니 세상이 서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걸은 만큼이라도 세상을 제대로 알아야겠다. 


대항해의 동쪽 완결편, 나가사키. 다음 목표는 대항해의 시작점, 포르투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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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5-09-2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진진합니다.
양양의 카스테라는 어떤 맛이기에.
양양에 가볼 이유가 또 생겼네요.

nama 2025-09-27 13:06   좋아요 0 | URL
쌀로 만들어서 촉촉하답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라고 할까요. 4, 9일은 양양 장날인데 빵이 일찍 떨어질 수 있어요. 인기가 많아요.
 

생각과 말, 글이 반짝반짝 빛나던 사람, 전유성.
그분의 죽음을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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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에 가지 않고 군함도를 보았다.

나가사키에 오면 군함도에 쉽게 갈 줄 알았다. 바로 지척에 있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2주 전에 예매하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흥미가 식었다. 군함도의 존재가 일본인에게는 의미있는 유적지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억울하고 비통한 곳. 굳이 애쓰며 가고 싶지 않았다.

하루 일정이 남았으니 섬으로 가는 배나 한번 타보자는 심정으로 나가사키 여객터미널에 갔다. 여객선으로 35분이면 닿는 다카시마행이 적당해 보여 왕복표를 끊었다. 평일이라서 터미널도 여객선도 널널했다. 날씨가 따갑다. 섭씨 30도, 체감온도는 37.8도.

나가사키가 어떤 곳이던가. 자못 감상에 젖기도 전에 도착한 다카시마(高島). 어리버리 둘러보니 낡은 순환버스가 있다. 버스기사에게 섬을 한바퀴 둘러보고 싶다는 의미로 팔로 큰 동그라미를 그렸더니 100엔씩을 내면 된단다. 승객은 우리 부부 포함 4명. 얼마 안 가 한 명이 내리고, 또 얼마 안 가서 버스가 잠시 정차. 왠일일까 싶어 창밖을 보니 멀리 군함도가 눈에 들어온다. 친절한 기사님이 우리를 위해 눈도장 찍을 기회를 주신 것이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버스는 어느새 출발지점으로 돌아왔다. 돌아갈 배는 오후 3시, 두어 시간 남았다. 방향감각이 좋은 남편을 따라가보니 멀리 군함도가 보이는데 버스에서 본 것보다 한층 가깝게 보였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어쨌거나 군함도를 보았다.


**한국에는 없으나 일본에는 있는 것.

평소 잘 신고 다니는 신발이 닳기 시작하면 나는 슬슬 화가 난다. 220cm인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찾아 삼천리를 헤매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성인 여자의 신발은 230cm부터 시작된다. 내 발은 다행히(?) 볼이 넓어서 운동화는 대강 맞는데 문제는 여름 샌달이다. 특히 스포츠 샌달. 내 발은 225cm가 적정 사이즈인데 시중에서 찾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225가 있긴 있다. 바로 아동화. 몇년 전 어쩔 수 없이 한번 신어봤는데 복잡한 심정에 휩싸여서 벗어버렸다. 내가 키가 작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내가 자장 작은 사람은 물론 아니다. 거리를 걷다보면 나보다 작은 사람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 왜 다들 조용하지? 그들은 신발을 어디서 구할까? 230부터 시작되는 걸 왜 계속 수용해야 할까? 230은 키 작은 여성들을 침묵시킨다. 알아서 조용히 살아가게 만든다.

나가사키항 근처 쇼핑몰에서 드디어 발견했다. 220~225가 적힌 매대가 있었다. 220짜리 여성을 무시하지 않는 세상이 있구나, 놀라움과 감탄을 당신은 이해하실지...남성용은 24.5부터 시작한다. 남자라고 전부 발이 큰 건 아니잖은가. 물론 일본은 키 작은 사람들이 많아서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길을 걷다보면 우리보다 작은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그래도 그렇지, 혹시 우리나라 신발 업체들이 일본보다 자존심을 세우려고? 우리는 키가 큰 민족이라고 우기고 싶어서?

키 작은 사람은 소수자인가 아닌가?

나는 지금 225cm 네파 스포츠샌달을 신고 있다. 가평 휴게소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건데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다. 어쩌다가 있는 일이다. 매대에도 진열하지 않는 신발이 있긴 있다. 조용히 물어볼 일이다.

나가사키의 마지막 밤을 230 때문에 흥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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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5-09-25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가사키하면 저는 카스테라부터 떠오르네요. 그리고 그게 전부이고요 ^^
군함도를 먼 발치에서라도 직접 보셨다니, 저는 책으로 읽고 영화로만 봤어요.

nama 2025-09-26 12:51   좋아요 0 | URL
저도 잘 몰랐는데 대항해 관련 책을 읽다 보니 현장답사까지 하게 되었어요.
한수산의 군함도를 읽어봐야겠어요.
 

오늘은 세 번째 호텔로 이동하는 날. 7박 8일 일정에 호텔을 세 군데 잡았다. 정리하면,

첫 번째는 게스트하우스로 80년대 분위기의 가정집. 어렸을 때 부모, 형제와 함께 살았던 18평 짜리 옛날 우리집과 분위기가 많이 닮았다. 창문과 방문을 적당하게 열어 놓으면 바람이 잘 통하도록 설계되었는데 나름 삶의 지혜를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앞집은 연립주택으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여서 밤에는 좀 무섭다. 이 게스트하우스엔 주인이 살지 않고 잠깐씩 필요할 때만 드나들어서 편한 면도 있지만, 비유하자면 절간에 가깝다. 낡음, 사라짐, 폐허 따위를 명상하기에 잘 어울린다. 잊혀져가는 달동네의 삶을 여기에서 체험했다. 주변엔 식당도 편의점도 없다. 저 아랫동네까지 내려가서 장을 보고 비탈길을 십여 분 올라와야 한다. 밤에는 온동네가 적막강산. 집들이 작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전형적인 서민 동네여서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다. 어쩌다 이곳을 선택했을까..나에게 묻는다.

두 번째는 어제 썼으므로 생략. 평균 평점이 5점 만점에 4.8인 곳. 외국인이 많이 살았던 곳으로 도로도 넓고 전망도 좋은 부유한 동네. 이런 곳에 다시 올 수 있겠니..나에게 묻는다.

세 번째는 비유하자면 역세권 아파트로 돌아온 느낌이다.
프랜차이즈 호텔이라 공간 낭비가 적고 직원들도 매뉴얼대로 친절하다. 몸에 잘 맞는 옷 같다. 나에게 던질 질문이 없으니 아마도 기억에 남지 않을 곳이다.

이렇게 세 동네에서 머물다보니 이제는 내가 현지인이 된 기분이다. 유명한 군함도를 못 가본 게 좀 아쉽지만 이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하나쯤 남겨두면 다시 올 지도 모르고.

나가사키의 호텔 체험은 부수적인 건데 쓰다보니 이런 글이 나왔다. 내 여행은 진행 중..

사진: 파친코. 버스 안, 나가사키항에 입항한 초대형 크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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