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쌈 차차茶 - 인도여행, 90일간의 차밭살이 이야기
김영자 지음 / 이비락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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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의 글 보다 찻잎 따는 진짜 경험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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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범우문고 2
법정스님 지음 / 범우사 / 2004년 5월
절판


위 붉은색 책은 요즈음에 나오는 책이고 사진 속 책은 1982년 2월 10일 3판으로 발행된 책이다. 값 700원. 범우사.


고향집에 갔더니 예전에 읽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있었다. 감회가 새롭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책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어 있고 문장도 세로로 되어있다.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었었나 싶다. 책에 써넣은 유일한 메모를 보니 대학 3학년 말에 구입했다고 적혀있다. 책을 너무 깨끗하게 보았다. 메모가 없는 옛 책은 뭔가 아쉬움을 남긴다. 이 책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이제는 안경 없이는 읽기도 힘든 책이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뵙는 기분이다.

딸내미 왈, "엄마와 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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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 월요일 아침(5월3일) 다른 식구들이 모두 먼저 나가고 나도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열쇠 꾸러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 키 하나 없는 소박한 열쇠 꾸러미였다. 다른 열쇠는 둘째치고 당장 집을 나설 수가 없었다. 출근 시간은 시시각각 임박해오는데 문을 잠그고 나갈 수가 없었다.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르고 가슴이 조여오면서 정신마저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끝내는 출근 시간을 넘기고야 말았다. 이미 출근한 남편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나를 집에서 꺼내주기까지 약 한 시간이 걸렸다. 그 한 시간 동안 나는 말 그대로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열쇠가 없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와 역시 열쇠가 없어 집에서 나올 수 없는 경우(꼭 집 밖으로 나가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서) 중 어떤 것이 더 힘들까? 집에 들어갈 수 없을 때는 열쇠공을 부르면 되겠지만, 나올 수 없을 때는 도움을 청할 데가 없다. 집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아니면 누군가 집을 대신 봐주지 않는 한 집에서 나갈 방법은 없다. 문만 열면 밖인데 밖으로 도저히 나갈 수가 없다. 악몽 같은 경험이었다. 

지난 월요일(5월10일). 며칠 전 집을 나갔던 한 녀석이 자살을 기도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싸이월드에 글을 남겼다며 녀석의 친구가 담임인 내게로 달려온 것이다. 녀석의 친한 친구들을 불러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다급한 김에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한 친구녀석을 데리고 택시를 타고 녀석 찾기에 돌입했다. 자주 들락거린다는 피시방을 집중 공략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의 화장실까지 살펴보고 다니자니 입은 바싹 타오르고 가슴이 계속 조여왔다. 이 일을 어쩌나.... 

내가 녀석의 친구와 함께 있다는 걸 눈치 챈 녀석은 끝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나타나지 않았다. 그냥 돌아왔다. 얼마 후 학년 부장 교사와 총무를 맡은 교사가 나서서 찾아보았으나 역시 허탕을 쳤다. 학생 부장, 교감,교장 한테 보고가 되고 여러 대책 끝에 또 한 번 학년 부장과 총무 교사가 나섰다. 오후였다. 운전 면허조차 없는 내 초라함과 무능이 그대로 부각되었다. 

결국 녀석을 잡아왔다. 녀석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복잡하고 착잡했다....곧이어 부모가 왔고, 간단한 진술서를 쓰게한 후, 녀석을 부모와 함께 집으로 돌려보냈다.... 눈물이 났다.

이틀을 쉬고 어제부터 등교하기 시작한 녀석은 아직도 내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다. 나 뿐 아니라 학교 자체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 듯하다. 녀석은 싸이월드에 미리 써놓은 유서에서 "낙이 없다"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녀석에겐 낙이 없어 보인다. 공부, 외모, 집안 형편...뭐 하나 신통한 구석이 없다. 존재감이 없는 녀석은 '보이지 않는 인간'처럼 그저 하루 하루를 별 의미없이 흘려보낼 뿐이다.  

훈계조 일색인 상담은 나도 하기 싫어서 못한다. 선생 앞에서 주눅들기 일쑤인 녀석을 상담 혹은 대화랍시고 앞에 앉혀놓고 이런저런 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녀석은 내게는 자폐아와 다를 바 없다. 마음을 꽉 닫은 상태에서 내가 녀석에게 늘어놓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래서 그냥 눈치를 보며 기다릴 수 밖에.

열쇠를 잃어버려 집 안에 잠시 갇혔었던 열흘 전 일이 녀석과 자꾸 겹쳐진다. 녀석에겐 세상에 나올 열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에겐 '되는 게 하나도 없는' '포기'하고 싶은 세상이다. 녀석이 절감하는 절망감을 교사인 나는 도저히 알아내지 못한다. 절망감에 자살을 생각하는 녀석 앞에서 나는 무능하고 무력하다. 

성과급으로 선생을 농락하는 세상에서 나는 기꺼이 C급 선생임을 인정한다. 아이들 마음 하나 열지 못하는 나는 C급도 황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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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하에 자식이 여럿 있으면 모두 같은 크기로 다가올까? 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한다. 4남매 중 막내인 나는 어려서부터 그 점이 늘 궁금했다. 지금의 내게는 자식이라고는 하나 뿐이어서 이 역시 알아볼 기회가 없다. 그러니 그저 생각을 할 뿐이다. 

해마다 담임을 맡고 있지만 그 아이들이 모두 같은 크기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몇 년은 커녕 일 년만 지나도 아이들 이름이 가물가물해진다. 심하게는 방학이 끝나고 개학날이 되면 기억 속의 이름들을 불러내느라 명렬표를 보고 이름을 한번씩 불러보기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증세가 심해진다. 

그러나 첫 아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내게 영원한 아이들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1991년, (내게는 기구한)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교직이라는 직업을 내 손에 쥐게 되었을 때, 처음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은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남아있다. 어제 학교로 걸려온 전화 한 통이 그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어제. 하루 중 유일하게 빈 시간인 3교시 때. 약간 망설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1991년 1학년 13반 학생, 박...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기억하느냐고 물어온다. 일종의 통성명이 필요했다. "얼굴이 좀 넙데데하고, 혹시 부친이 안기부에 근무하시지 않았나...?"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와서 지금은 박사 과정을 밟고 있으며,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있고, 그간 키도 많이 자라서 183cm라고 한다. 부모님은 여전히 그전에 살던 동네에서 사신다고도 했다.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 얘기에 내가 기억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탠다. 누구는 결혼을 해서 아이가 둘이라고 했다.

그 당시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사춘기 소년 시절이라서 그랬을 거라며 뉘우치는 말을 하며 멋쩍어한다. 언제 그랬던가? 난 기억하지 못한다. 아이들과의 이런저런 갈등이야 그건 그저그런 일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 기억을 떠올리며 쑥스러워한다. 아, 어른이 되었구나!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거리라거나 식당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인사를 해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그때 나는 당혹스럽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그저 학교에서만 불리우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제자들 때문에 나는 계속 선생으로 남아있어야 하는 게 난 정말 부담스럽고 황송하다. 

간혹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는 제자들 중에 나한테 꾸중을 많이 들었던 아이들을 만나게되면 나는 굉장히 부끄러워진다. 겉으로야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로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다. 그땐 왜 그랬을까. 나이가 들면 제 몫을 잘 해내는 어른이 되는데... 

박...야, 미안한 마음 품지 말아라. 나도 너희들 보면 미안해진단다...는 말은 못했지만 너도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는다. 너희가 내게 첫아이였듯 내가 너희들에게 첫 선생님으로 기억되어 이렇게 멀리서 전화 한 통 걸어주니, 너희들의 사랑이 내 사랑보다 훨씬 크단다. 고맙고 고맙다.  

어제는 정말 황홀한 하루였다. 첫사랑이 살아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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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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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산티아고에 다녀온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도 꽤 많다고 들었다. 또한 다녀온 사람들이 펴낸 책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책들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책이 그것들과 어떻게 다른지 알지 못한다....'(400쪽) 

소설가 서영은에 대해서는 이야기만 무성하게 들었지 정작 그의 소설을 관심있게 읽은 적은 없다, 는 사실에 나 스스로 놀랐다.  짧은 문창과 시절, 소설가 김동리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살아있는 전설같은 분의 강의를 듣는 다는 것에 감격하는 것도 잠깐, 귀가 먹은 여느 노인네와 다름없다는 실망 아닌 실망으로 수업은 별 의미가 없어보였고 고루하기까지 했었다. 내가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에 서고 보니 나이 70을 넘어 남을 가르친다는 일이 절대로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령에도 불구한 후학을 위한 열정은 높이 살 만한 일이었지만 거물에게서 배우고 있다는 감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따라서 서영은이라는 작가는, 소설 보다는 김동리와의 관계로 더 잘 알게되었다고나 할까. 헌책방에서 구입한 그의 소설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는 게 전부이다.

산티아고에 관한 책을 한 권도 읽지 않고 그 길에 올랐다는 윗 글을 읽고 적잖이 놀랐었다. 글쎄, 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여행 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바로 이게 서영은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여느 산티아고 책과는 전혀 다르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노련한 작가답게 문장이 치밀하고 표현이 뛰어나지만, 결국은 자기만의 여행을 기록한 책이라는 점에서는 그저 기행문으로 분류하면 될 것이다. 거기에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신앙 고백 같은 게 짙게 녹아 들어있다. 글쎄,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그 부분을 건드린다는 게 무척 난감한 부분이며 애써 피하고 싶은 주제이기도 해서 그건 내 식대로 접수했을 뿐이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어나가자니 솔직히 읽기가 불편했다. 특히 그의 동행인 '치타'와의 시종일관된 에피소드는 약간 민망한 느낌마저 들었다. 마치 내가 그의 동행이 되어 무안을 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집요한 까발김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횡포라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읽는 내내 무척이나 불편했다. 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지은이의 신앙 고백을 더불어 따라가자니 책 읽기는 고역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이 불편함의 끝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서영은의 산티아고 길이다, 라고. 제 색깔대로 살아가듯 제 색깔대로 걷는 것이다, 결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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