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문학기행 행사로 부여에 있는 신동엽문학관을 다녀왔다. 좀 더 시간이 있어 하나하나 읽고 음미해보면 좋겠지만... 아쉬운대로 좋았다. 한겨울 눈 내리는 날 조용히 홀로 오고 싶어지는 곳이다.

 

 

 담장 안쪽이 신동엽시인의 생가이고, 저 너머에 있는 사각형 건물이 문학관이다. 내 키 때문에...

 

 

 시인의 부인인 인병선의 글

 

 

시인의 방

 

 

 시의 깃발.  겨울에 눈이 내리면 볼 만 하단다. 보고 싶다.

 

 

임옥상 작품

 

 

 건축가 승효상이 지은 문학관은,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시 같은 건물이다. 살아있는 생물체로 숨 쉬고, 생각하고, 말을 건네고, 시간과 공간을 음미하는 건물? 이런 느낌이다. 사람들이 왜 승효상이라는 이름을 거론하는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집'이라는 걸 느끼게 한다.

 

 

문학관 옥상. 한 건물의 꼭대기인데 다시 땅이 된 공간.

 

 

바닥에 쓰인 네모난 돌모양이 같으면서도 조금씩 다르다. 미묘한 차이에 숨어 있는 숨결이 보일 듯 말 듯. 내부도 그렇다.

 

 

저 글 중 '내 인생을 혁명으로 불질러 봤으면'에 눈이 꽂힌다. 시는 조심스럽고, 사랑은 겁나고, 혁명은...불지르면 되니까. 39세에 요절한 시인이 '서둘고 싶진 않다.'고 한다. 왜 서둘러 가셨나요?

 

 

육필 시. 비록 복제품이긴 하지만 시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엿보는 듯하다.

 

 

 

외모도 참으로 시인답다.

 

 

지난번 이쾌대 전시회도 그렇지만 신동엽 문학관도 가족의 노력이 이루에 낸 결실이다. 특히 신동엽 시인의 부인인 인병선의 '내조'가 있었기에 시인이 사후에 더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싶다. 유물을 일일이 살펴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90년대 초에 역사문제연구소 주최로 역사기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일행중에 시인의 부인인 인병선씨가 있었다. 이야기를 몇마디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시인의 부인답게 인생을 뜻있게 살고 계시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었다. 존경스러운 분이었다.

 

짧은 나들이였지만 나름 의미있는 시간을 보낸 것 같아 좋다.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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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퇴근길1

 

 

 

퇴근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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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간 책 - 오염된 세상에 맞서는 독서 생존기
서민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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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책 선물은 이 책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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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지난 여름 어느 연수에서 였다. 첫날 첫시간, 개강식이 열리는 자리인데 국민의례를 생략한 채 연수가 시작되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라는 최소한의 의식조차 없었다. 이건 뭐지? 안해도 되나? 갑자기 어리둥절해졌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공공기관에서 열리는 대부분의 연수는 첫날 첫시간을 의례히 국민의례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어디 연수뿐인가. 학교에서는 전체직원회의를 할 때마다 당연히 국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하기 마련이다. 성당에 들어갈 때 성수를 찍어 성호를 긋듯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 신성하다면 신성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절차가 빠져버리니까 갑자기 숨죽었던 의식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안해본 짓을 해본다는 것, 반대로 해본 짓을 안해본다는 것이 뜻밖의 기쁨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국민의례가 빠진 연수기관에서 받은 연수는 아이러니하게도 광복 70주년과 관련된 독립운동과 인물에 대한 연수였는데 내용도 알차고 풍부했으며, 마치 내가 독립운동가가 된 기분이었다. 국민의례가 빠진 덕분에 신선해진 두뇌가 마음껏 활동했기 때문이었을까.

 

의식이 트인 기관장을 만나는 것은 분명 이 시대의 행운이다.

 

둘.

어제는 <여덟 단어>의 저자인 박웅현의 강연에 갔었다. ' 이 시대 최고의 크리에이티브 멘토, 박웅현 작가가 전하는 "창의적" 메시지' 가 그 주제였다. 그의 책 두어 권을 재미있게 읽었던지라 기대가 컸었다.

 

드디어 시작.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국민의례가 시작되어 가슴에 손을 얹었는데 잠시 후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애국가가 진행되는 동안 심장 위에 얹은 손이 꿈틀거리고 기분이 지루해지면서 자꾸 딴생각이 들었다. 손은 애국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애국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박웅현, 이 분의 강의는 좀 색다르게 시작했다.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일단 10~15분 정도 청중에게서 질문을 받아 화이트보드에 하나씩 적어나간다. 질문이 칠판 가득차면 하나씩 답변하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묘한 것이 결국은 진행자의 의도에 맞게 질문이 꿰맞혀진다는 것이다. 형식은 질문에 답변하는 식이지만 결국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를 하는 셈이 된다. 방법만 다를 뿐이다.

 

하여튼 그런 그렇고. 첫 질문이 나왔다. 어떤 여자분이 손을 들었다. " 오늘의 강연 주제가 창의력인데 왜 꼭 국민의례부터 시작해야 되나요? 강사님은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첫 질문부터 만만하지 않다. 이후 여러 질문이 쏟아졌다. 대부분 창의력이 어떻게 길러질 수 있느냐가 주된 관심사였다. 전체적인 강연의 흐름은 나쁘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썩 좋지도 않은 그저그런 수준이었다.

 

강연 도중 박웅현 이분도 뭔가 잘 풀리지 않는다 싶었는지 "오늘은 좀 뭐가 안 되는 것 같네요."라고 혼잣말 비슷하게 한다. 좀 그랬었다. 창의력을 말로 표현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차라리 창의력 있는 작품을 보여주는 게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면서, 기대에 못 미친 강연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무엇이었을까. 막힌 기분이 들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음, 바로 그거다. 국민의례와 애국가. 죽어가는 창의력을 살려보려고 많은 사람이 모여든 강당에 울려퍼진 애국가. 애국을 강요하는 형식이 문제였다. 사람들이 이제는 알 것은 다 알고 있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애국을 강요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애국가 없이 자연스럽게 진행하였더라면, 좀 더 창의력 있는 진행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되면 새삼 창의력을 주제로 한 강의가 필요 없게 되겠지. 그래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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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대학 입학까지의 공부는 시험 잘 보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중 국사 공부는 지금 생각해보아도 썩 괜찮은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우리 세대는 국정교과서 세대이다. 국민교육헌장 암기로 지적 능력을 시험 받고 도깨비 뿔 달린 공산주의자들이 주위를 배회하던 시절, '자수하여 광명찾자,'는 구호 아래 철저한 반공교육-승공교육-멸공교육을 순차적으로 받으며 자라난 세대이다.

 

수능 이전에 학력고사가 있었고, 학력고사 이전에 예비고사가 있었는데, 나는 바로 그 예비고사 세대이다. 거의 전과목을 종합선물세트식으로 넑고 얇게 배워야 했다. 수학은 그때도 힘들었지만 한 일 년 전념해보니 그럭저럭 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바로 국사 과목이었다. 말이 너무나 많은 과목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고안한 방법은 교과서 암기였다. 어느 날 시험 문항을 분석해본 결과,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문장을 그대로 시험지 선다형 문장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부터 정밀한 정독으로 들어갔다. 국사책 한 페이지를 읽는 행위는 가히 종합예술행위였다. 눈으로는 책이 뚫어져라 한 단어 한 단어를 주시하면서 머릿속으로는 그 글자의 위치를 각인시켰다. 그 결과 시험 문항에 나오는 문장을 보면 어느 페이지 상단 혹은 하단 몇 째줄에 위치한다는 게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단어 하나 바꾸어 출제해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말하자면 문장으로 외운 게 아니라 그림으로 외운 것이다. 이름하여 시력암기법이었다.

 

단 두 번의 정독으로 가능한 공부법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30점 만점에 30점이 나온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혹 틀렸더라도 한 개 정도.

 

그렇게 시험을 보고 나서 그림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차피 오래 지속되는 공부법이 아니어서 오래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고등학교 때 공부한 국사과목은 내용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그저 공부방법만이 자랑스럽게 전리품인양 남아 있다. 나 이렇게 공부했노라고.

 

그렇게해서 대학에 들어갔더니 1학년 때 10.26 박정희 서거, 2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으로 이어지고, 졸업하니 과외금지라는 기상천외한 시절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밀과외는 범법행위였으니 나는 당시 범법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물론 겁을 먹고. 어떤 시대였는데...

 

나의 두뇌에는 시험용 두뇌와 진짜 두뇌 두 개가 있다. 국정 교과서는 시험용 두뇌가 담당했다. 그간 정신분열증을 앓지 않고 잘 살아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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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9 17: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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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5-10-09 17:19   좋아요 0 | URL
암기력이 좋다니....그건 절대 아니구요. 시력이 좋았어요. 지금도 나쁜 편은 아니에요. 노안이 오긴 했지만요.

2015-10-09 17: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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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9 2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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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9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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