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인간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50년 독서와 인생
오에 겐자부로 지음, 정수윤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오에 겐자부로 자체가 고전이다. 장애아들과 끝까지 함께 사는 것. 고전작품을 토양삼아 자신의 소설을 쓰는 것 등. 독서, 삶, 글쓰기가 모두 진중하고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매우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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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와 the의 저력
쓰모리 코타 지음, 이우희 옮김 / 토트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a와 the를 오랫동안 찾아 헤매었는데 드디어 너희들이 여기에 있었구나.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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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점

1. 우리에게 친숙하면서도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유명인의 초상화를 감상하고 그들의 훌륭한 면모를 되새겨 볼 수 있다.

2. 인생 2모작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다.

 

단점

1. 굳이 과거에 CEO였음을 밝히는 것과 이 책의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없다.

2.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해야겠다는 의욕은 읽혀지나 그게 꼭 책이라는 성과물(짜집기 같은)로 보여지기를 원하는가.

 

 

이상 까칠한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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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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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1907년~1914년에 걸쳐 각각 출판되었다가 한 권으로 출간된 것은 1915년이라고 한다. 딱 100년 전이다.

 

백 년 전이라고는 하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그리 다를 것 같지 않다. 학교 다니고, 졸업하면 직장 구하고, 직장을 구하면 결혼해서 애 낳고...방랑자 크눌프의 주변 인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이 대열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만나는 친구들마다 정착하지 못한 크눌프를 향해 훈수를 두는 것도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크눌프가 세상에 나온 지 백 년이 지난 지금, 크눌프의 인생은 그저 소박하게 보인다. 백 년 전에 비해 더욱 심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크눌프처럼 살아가는 일이 실제로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집 밖을 벗어나면 온통 돈이 지배하는 세상인데 어떻게 그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아니다. 이 책이 나왔을 때도 아마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이 책이 백 년에 걸쳐 회자되는 걸 보면 그렇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니까 문학 속 인물로나 꿈을 꾸게 되는 거고 그것으로 마음을 달래보는 것일 터.

 

라틴어고 뭐고 간에 당시의 내겐 결국 특별히 중요할 게 하나도 없었다네. 자네도 아다시피, 난 언제나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뒤따라가게 되면 한동안은 이 세상에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곤 했었거든. 체조를 할 때도 그랬고, 그 다음에 송어 잡이를 할 때, 그리고 식물학을 공부할 때 그랬었지. 바로 그 당시에는 여자 문제가 그랬어. 거기서 따끔한 맛을 보고 직접 체험을 얻게 되기 전까지는 다른 건 하나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 사실 전날 저녁에 소녀들이 목욕할 때 훔쳐본 것을 은밀하게 떠올리느라 정신없는 사람이, 학생이라고 의자 위에 웅크리고 앉아 동사변화를 연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 아니겠나.

 

이 부분이 처음에는 아름답게 느껴졌다. 무언가 하고 싶을 때 마음껏 해보며 사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가. 허나 문제는 '따끔한 맛'이다. 마지막 문장에서는 내 눈 앞을 스쳐간 많은 아이들이 떠올랐다. 결국에 학교 생활을 접어야 했던 아이들도 있다. 따지고보면 그깟 학교 접었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소설 말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네, 맞습니다. 사실은 저도 항상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더 한탄할 게 없느냐?"

"없습니다."

"그럼 모든 게 좋으냐?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느냐?"

"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어요."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만히 나의 앞날을 생각해본다. 살아온 세월보다 살아갈 세월이 분명 짧은데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앞으로도 '제대로' 된 생활을 하려면 계속 일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을 내 마음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은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도대체 '제대로'된 삶이 무엇이고 무슨 소용인가. '이제 이 나이에'.

지금도 가끔씩 그리운 시절이 있다. 바로 대학 졸업 후 다년간의 백수 생활이다.

 

크눌프는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시절 그가 느꼈던 기쁨이 마치 먼 산 위에서 타오르는 불길처럼 흐릿한 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하고, 꿀과 포도주처럼 진하고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그러고는 이른 봄 밤의 따스한 바람과도 같이 나지막한 소리를 울리는 것이었다. 아, 정말이지 그때는 아름다웠다. 기쁨도 아름답고 슬픔도 아름다웠다. 어느 하루라도 빠뜨리기가 무척 아쉬울 만큼!

"그래요,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인정했다. 하지만 피곤한 어린애처럼 심하게 울먹이며 항변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죄와 슬픔도 이미 거기 함께 있었지요. 그래도 좋은 시절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그 당시의 저만큼 좋은 술을 마시고 즐겁게 춤을 추고 멋진 사람의 밤을 지새웠던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그러고 나선 그 모든 게 끝나버려야 했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행복 속에 가시가 박혀 있었어요. 그러고는 더 이상 그토록 좋은 시절은 오지 않았죠. 안 왔어요, 한번도요."

 

위에 인용한 크눌프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분명 백수시절이 있던 사람이리라. 내가 그러하므로. 비록 '행복 속에 가시가 박혀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도 식지 않는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에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크눌프을 읽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크눌프를 읽게 되리라. 헤세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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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그랑 샤르트뇌즈 Grand Chartreuse' 수도원의 일상을 다큐멘터리로 찍은 것인데, 대사가 거의 없고 상영시간이 2시간 49분이나 되어 성공적 흥행은 애초에 기대 밖이엇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에서 꽤 맣은 관객을 모았던 영화였다. 필립 그뢰닝Philp Groning이라는 감독이 이 수도원에 촬영을 청원한 지 무려 15년 만에 허락을 얻어 6개월을 수도사들과 함께 기거하며 혼자서 찍었다고 했다. 영화의 내용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동트기 전 일어나서 기도를 시작으로 오로지 성경 읽기와 쓰기, 묵상, 기도, 세 번의 미사를 드리는 수도사들의 일과를 담백하게 담고 있을 뿐이다. 수도원은 폐쇄되어 외부와 단절되고, 내부도 대화는 금기되어 침묵만이 흐른다.

.....수도원을 의미하는 영어에는 '클로이스터 Cloister'와 '모나스터리Monastery'라는 두 단어가 있는데, 본래의 뜻은 다르다. '클로이스터'는 '갇혀 있다'라는 뜻의 'Claudere'를 어원으로 가지는 반면, '혼자됨'이라는 'Moochus'를 어원으로 삼는 '모나스터리'는 그런 '클로이스터'중에서도 스스로를 독방에 가두어 침묵과 은둔의 삶을 원하는 수도원을 뜻한다. 안에서는 밖으로 나오는 문을 열 수가 없으며 음식도 작은 구멍을 통해 외부에서 공급받는다.

  1084년에 브루노라는 수도사를 비롯한 여덟 명이 그르노블 인근 프랑스 알프스 산맥 속 험준하기 짝이 없는 샤르트뢰즈까지 기어이 찾아가 스스로를 유폐시키며 시작한 수도생활이 최초의 모나스터리이며, 그들이 시발하여 만든 그랑 샤르트뢰즈가 카투샨 카르투지오, 체르토사 혹은 차터하우스로 불리며 세계 곳곳에 퍼진 봉쇄수도원의 본산이다. 이 그랑 샤르트뢰즈 수도원은 영화 촬영으로 무려 천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처음으로 그 내부를 공개한 것이다.

 

승효상의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에 소개된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았다. 위 인용문에서 '이 수도원에 촬영을 청원한 지 무려 15년 만에 허락을 얻어'라고 되어 있는데 영화 자막에 의하면 15년이 아니라 16년으로 나온다.

 

 

 

 

 

 

 

 

 

 

 

 

 

 

 

오전 7시에 출근하면 창밖은 아직 어둑하고 서서히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는데 그때가 이 영화를 보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그러나 이 시간은 오래 가지 못한다. 이내 아이들이 들어오고 수업에 들어가고 잡무 처리를 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직장이니까. 더군다나 TV화면이 아닌 컴퓨터 모니터나 작은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다보니 단번에 보지 못하고 끊어서 여러 번에 걸쳐서 보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좀 지루하긴 하다. 금욕적인 수도원 생활이야 조금만 생각해도 상상할 수 있는 거니까. 울림이 없는 것은 아니나 크게 감동 받았다거나 놀라웠던 건 아니다. 물론 '무려 천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처음으로 그 내부를 공개한 것.'이니만큼 호기심이 앞선 것은 당연하다.

 

살다보면 어느 순간 기도가 저절로 나올 때가 있다. 막막하고 불안하고 절망적일 때. 어떻게든 안 될 때. 사방이 꽉 막혀있을 때. 무언가 절절해질 때. 이런 순간에는 말(언어)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침묵도 일종의 언어임을 깨닫게 된다. 절망이라는 막다른 골목 앞에 이르러서야 겨우 깨닫게되는 이 '침묵'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은 또 무엇일까. 스스로 선택한 침묵이라서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 나오는 수도사들처럼 말년을 보내도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깊은 산 속의 암자건, 히말라야 오지에 있는 곰파든, 알프스의 천 년된 수도원이건. 그렇게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 살아보고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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