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은 영어로 된 원문을 읽어야 제 맛이 난다고들 해서 원서를 구입하고 번역서는 도서관에서 빌렸다. 보통은 영어사전을 옆에 끼고 끙끙거리며 원서를 읽게 되는데 그게 또 원서읽기를 멀리하게 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방법을 바꿔보았다. 원문과 번역문을 나란히 놓고 한 문장씩 읽기도 하고, 한 단락을 원문 먼저 읽고 번역문을 차례로 읽기도 하고, 내용이 궁금하면 번역문 먼저 읽고 원문 확인하고...이런 식으로 읽다보니 이 방법이 생각보다 재미있고 글을 읽는 묘미가 있다. 수분 많은 과일 먹다가 바삭거리는 비스킷 먹는 기분이랄까. 원문도 질리지 않고 번역문의 밋밋함도 쫄깃쫄깃하게 변환된다. 흠, 괜찮은 방법이다.
예전 대학에서 <햄릿>을 배울 때가 생각난다. 1616년에 돌아가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어서 원서는 저만치 밀어놓고 번역본만 여러 권 비교해가며 어떤 번역이 더 그럴듯한가를 가려가며 공부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물론 그렇게 읽고나면 뒷맛은 영 개운치 못하다. 자존심에 이래저래 금이 간다. 그래서 원서를 읽을 땐 번역문 따위 생각하지도 않고 끙끙거리며 보게 된다.
그런데 책을 꼭 힘들게 읽어야만 하나? 하는 의문과 함께 만사 귀찮은 생각이 들어 꾀를 냈더니 독서 방법면에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카버의 단편을 하나씩 읽다보면 나도 카버처럼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마저 생기는데, 이런 도발적인 욕망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눈 녹듯 금방 사라질 허무한 욕망이긴 하지만 뭐 어떠랴, 단편집 한 권이 주는 이 풍요로운 식감, 이것으로도 훌륭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