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충제를 먹었다.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구충제 복용이라고 한다. 새로운 것에 늘 눈을 반짝이는 습성이다보니, 한번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던지라, 배낭을 메고 집에 들어오기도 전에 약국에 들러 구충제를 구입했다. 몰랐으면 모를까 새로운 지식을 얻었으니 당장 실천에 옮겼다. 다른 곳도 아닌 인도에 다녀왔으니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다. 헐, 이게 여섯 번째 인도여행인데 그러면 그전까지는?
'여행'하면 이 단어가 떠오른다. 객창감. <여행자의 독서>에서 작가 이희인은 이렇게 말했다.
객창감(客窓感). 그렇다. 이 단어다. 내가 여행에서 즐기는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객창감, 그 쓸쓸함의 즐거움이다. 별 까닭도 없이 이끌려 젊은 날 많은 시간을 외딴 시골길이나 장터, 비 오는 처마 밑에 서게 했던 감정의 실체.....객창감 속에 떠다닌 여행은 쓸쓸했지만 그 쓸쓸함으로 여행의 시간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희망이라는 거짓 행복이 더러 사람을 배신하는 일은 있어도, 쓸쓸함과 외로움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은 드물다.
'그 쓸쓸함의 즐거움'이었던 첫 번째 인도여행이 늘 그리웠다. 어떤 곳을 가도 어떤 것을 보아도 그 쓸쓸함의 즐거움은 인도 같지 않았기에 기회가 되면 인도로 떠나곤 했었다. 이렇게 인도에 빠져 허구헌날 인도타령을 해댔더니 드디어 인도에 함께 가자는 친구들이 생겼다. 중학교 때 친구와 짝꿍이었던 친구, 그 친구의 친구들, 따지고보면 이들 모두 초중고 시절의 어느 한 시기를 함께 했던 친구들이다. 거기에 짝꿍 친구의 남편과 내 남편, 이렇게 8명과 생면부지의 여행동지 10명이 16일 동안 남인도 일대를 휩쓸고 다녔다. 내 친구들을 잠시 소개해보면 이렇다.
* 과일킬러(중학교 때 짝꿍): 끼니 때마다 과일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친구. 존재의 의미를 과일에서 찾는다.
*오카리나여사(고등학교 동창): 나는 이 친구를 보고 두 번 놀랐다. 고등학교 때는 너무나 예쁘게 생긴 친구라서 감히 옆에 가지도 못했다. 어쩜 저렇게 예쁠 수 있나, 했던 예쁘고 날씬했던 친구였는데, 지금은 한물간 여배우처럼 펑퍼짐해져서 놀랐고, 눈물을 찔끔찔끔 흘릴만큼 오카리나 연주 솜씨가 뛰어나서 놀랐다.
*토이여사(초중학교 동창): 손녀가 쓰던 장난감을 한가방 들고와서 곳곳에서 장남감 잔치를 벌였다. 손녀까지 돌보고 있으니 우리 중 제일 어른인 셈이다.
*포토여사(고등학교 동창): 사진 찍을 때 그녀가 1,2,3을 외치면 포즈가 요란해진다. 1. 점잖은 포즈, 2. 귀여운 포즈, 3. 발광 포즈 혹은 요사스런 포즈
*아가씨여사(중고 동창): 모태 솔로. 여사가 되기에는 아까운 아가씨. 장미에는 가시가 있는 법.
* 두 남정네: 울며 겨자 먹기를 작정한 두 기사.
일정: 인천-델리-뭄바이-고아-함피-마이소르-스라바나벨라골라-할레비-벨로르-뱅갈로르-코친-알레피-떼까디-마두라이-마말라푸람-첸나이-델리-인천
(앞으로 얼마나 이야기를 이어나갈지 모르겠다. 오늘 병원에 가서 피검사를 확인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다. 당분간 손가락 사용을 자제해야 하는데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할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