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는 피곤하다. 제아무리 여행자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발리라고 하더라도 별 수 없다.
발리 사람들은 한국이란 곳을 돈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가 자신들보다 잘 살고 있기 때문에 물건을 팔 때 좀 비싸게 팔아도 되고, 택시비를 좀 더 받아도 상관없고, 환전수수료를 더 떼어도 상관없을 뿐더러 으례 그걸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발리에서 만나고왔기 때문이다.
형편이 어려운 처지에 있다보면 자신보다 잘사는 형제나 친척에게 기대를 품게 된다. 어렸을 때 우리집이 그랬는데, 우리는 우리보다 훨씬 잘사는 작은아버지한테 늘 어떤 기대를 갖고 있었다. 북에서 피난나온 부모님이 그나마 기댈 곳이라곤 형편이 좀 나은 작은아버지뿐이었는데 지금 내가 어른이 되어서 생각해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당당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형편이 나아졌을 때 그간의 빚진 것을 갚았다면 말이 달라질 텐데 안타깝게도 그런 기회를 놓쳐버렸다. 나는 그게 지금도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외국의 원조 덕분에 우리나라가 이만큼 살게 되었다면 이젠 우리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나라에게 우리가 도움을 주어야하는 건 순전히 국가의 몫인가 아니면 국민 개개인에게도 할당된 몫일까. 작은아버지에게 기댔던 부모님의 나약함을 지적하면서 그걸 마음의 빚으로만 여기고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나 역시 부모님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일까. 그건 오로지 부모의 몫일까 피로써 맺어진 자식된 자의 또다른 몫일까. 도리일까.
내가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야할 지, 피곤하게 여겨야할 지 여행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된다. 작은 목공예를 파는 가게에서 나무로 깎은 불독 두 마리를 흥정하는데 주인아주머니는 이민호의 팬이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날리면서도 한국은 잘살지 않느냐며 바가지를 씌었다. 그래야 몇 푼되지 않으니 과감히 '국민 개개인의 할당된 몫'으로 생각하고...지불했다. 꾸따의 호텔앞에서 개인승용차로 영업을 하는 '구다'라는 이름의 아저씨는 첫날 거스름돈을 주지 않고 버티다가 다음날 천 원, 그 다음날 삼천 원을 마지못해 내게 돌려주었다. '국민 개개인의 할당된 몫'으로 여기며 물렁하게 있다간 뒤에 오는 여행자가 피곤해질 터이다. 길거리에 널려있는 환전소는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미국화폐를 달러당 13,450루피아로 바꿔주는 환전소를 찾아갔다. 200달러를 내밀었더니 2,690,000루피아를 주기에 일일이 세어봤다. 대충 맞는 것 같은데 워낙 숫자가 많아서 다시 한번 천천히 세었는데 어라, 앞자리 2백만은 맞는데 육십구 만이 아니라 6만 9천으로 바뀌어 있었다. 주인장을 노려봤더니 계산기를 내 앞으로 내미는데 계산기에 적혀 있는 숫자는 269,000이었다. 하여튼 269라는 숫자는 맞아떨어진다. 와중에 이 노련한 주인장은 밖이 위험하니 빨리 가방에 돈을 넣으라고 재촉까지 했다. 내가 의심의 눈초리로 째려보며 계산기에 0자를 하나 추가했더니 주인장은 뻔뻔스럽게도 커미션이라고 한다. 점입가경이다. 이건 잘사는 나라에서 온 만만하게보이는 여자여행객을 노리는 사기행위라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올라 다시 200달러를 달라고해서 그냥 나와버렸다. 밖에는 이런 내 속도 모르고 남편이 한가하게 서성이며 나와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경험이 전무한 물렁한 딸아이는 만약 내가 수능을 치른다면 내가 분명 저보다 수능을 더 잘 보았을 거라며 제 어미를 감탄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발리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우붓에는 몇 개의 미술관이 있는데 이 미술관은 각각 아름다운 정원에 둘러싸여 있어서 절로 감탄사가 우러나온다. 그림도 매우 인상적이다. 우붓에 며칠 있다보면 이 '매우'라는 부사를 셀 수 없이 남발하게 된다. 그림에, 전통무용공연에, 카페의 라이브무대에, 그림같은 논 풍경에, 각종 공예품에 셀 수 없이 무의식적으로 '매우'라는 부사가 튀어나온다. 이 멋진 곳의 여러 우아한 경험에 앞서 환전 따위에 분노하는 나는 여전히 초보여행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