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목숨으로 사는 남자
구광렬 지음 / 새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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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강경준은 왜 멕시코에 갔을까? 말도 안 되는 혐의로 악명 높은 나우칼판 교도소로 향하면서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한다. ‘자유란 저런 걸까. 어디서든 퍼질러지는 것. 사실 난, 파타고니아를 가기 위해 멕시코로 왔다. 모든 것이 헐렁한 그곳, 언젠간 가고 말 테다.’

 

그러나 강경준은 어떤 불가사의한 운명으로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내게 된다. 소설 제목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들의 목숨으로 삶을 이어 가고, 끝내 특급살인죄의 공범으로 99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 그것도 머나먼 이국의 땅 멕시코에서.

 

여기에서 멕시코의 법률체계나 정의를 거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비록 강경준이 감옥에 가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부조리하고 정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이것이 유독 멕시코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 1968년 올림픽을 치를 당시만 해도 멕시코의 국민소득은 우리의 열 배였다고 하니 그때는 오히려 우리나라가 정의와는 거리가 먼 상태였을 때이다. 정의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한 세상은 앞으로도 절대로 정의롭지 않겠지만.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멕시코는 사실 우리나라와 공통점이 많은 나라이다. OECD회원국 가운데 연간 평균 노동시간이 가장 길며, 산재사망률도 최근 10년 1~3위를 다투고 있다. 현재 경제상황이 우리가 좀 낫다고 해서 멕시코와 우위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면 굳이 멕시코를 소설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멕시코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의 땅일까? 강경준이 가고 싶어 하던 파타고니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작가는 70~80년대 일련의 민주화 과정에서 마음에 진 ‘시대의 빚’을 갚기 위해 이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다고 한다. 동료들은 국내에서 민주화를 위해 감옥에 가거나 가열하게 살아야 했던 시대에 작가는 한국을 등지고 멕시코로 향하면서 부채의식을 지닐 수밖에 없었으리라. 세계 어느 곳이나 민중들의 삶은 부당함과의 싸움이고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연속이다. 멕시코라는, 우리와는 다른 세계 같지만 결코 다를 수 없는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편협한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었다고 생각한다. 파타고니아는 아직은 도달 수 없지만 그래도 꿈으로라도 가야할 자유의 상징이 아닐까.

 

시인이자 소설가인 작가의 <메르세데스 소사>라는 시에 나오는 ‘구석’은 말 그대로 구석이면서 온 세상이기도 하다. ‘구석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건만 세상은/구석을 향해 닫혀 있다는 걸//세상 힘든 것들 구석으로 몰리건만/묵묵히 구석은 그 어깨들을 받쳐준다는 걸//수평선에도 구석이 있고/그 면도날 같은 파도의 한 줄 구석에도/등짝을 곧게 펴는 고기들이 산다는 걸’ 강경준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멕시코 오지로 숨어드는 강경준은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고 그 구석은 강경준의 어깨를 받쳐주어 삶을 이어가게 했으며, 면도날 같은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등짝을 곧게 펴고 살아갈 수 있었다. 세상 힘든 것들이 구석으로 몰려들어도 구석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 다만 세상이 구석을 향해 닫혀 있을 뿐이다, 종종. 시리아 난민처럼.

 

http://blog.aladin.co.kr/nama/3395532

 

이 소설은 세상이 구석을 향해 닫혀 있는 문을 대신 열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애니깽이라 불리는 선인장으로 고된 작업을 하며 목숨을 부지하던 땅, 멕시코. 이제는 문학이 멕시코를 우리 곁으로 오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과 그들의 삶을 하나로 연결하고 같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모든 곳이 헐렁한 그곳’, 파타고니아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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