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필요한 시간, 교토여행(2013.1.11.~1.15)

 

 

󰁯일정: 1/11~12-교토 시내

           1/13 - 오하라, 교토시내

           1/14 - 키노사키

           1/15 - 키노사키에서 오사카간사이공항으로 이동

 

 

 

기요미즈데라(淸水寺)

도착 첫 날. 이미 시간은 오후로 접어들기 시작했는데 저가항공기를 타고 온 탓에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지 못했다. 공항에서 먹은 아침밥은, 15분을 기다려야하는 된장찌개, 순두부찌개를 시간상 주문하지 못하고 제일 빨리 먹을 수 있는 비빔밥을 시켰다. 그것도 입맛 없다는 누군가의 주장에 따라 4명이 2인분을 나누어 먹었다. 점심은 간사이공항에서 자그마한 핫도그 하나씩을 먹은 게 전부였다.

 

숙소에다 일단 짐을 풀고 전철로 두 정거장되는 거리를 걸어 다시 교토역에 왔다. 물어물어 버스를 타고, 또 물어물어 기요미즈데라로 올라가는 골목에 접어들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청수사를 북쪽 방향에 두고 걸어 올라갔는데 이번에는 정반대 방향으로 올라간다. 지난번에 내려왔던 길로 올라가게 되니 잠시 방향감각이 어리둥절해진다. 가뜩이나 동서남북 구분도 제대로 못하는데.

 

교토 시내에서 제일 예쁜 골목길을 걸어 올라간다. 다양한 상점들이 가장 예쁘장한 모습으로 어깨를 마주대고 있는 곳이어서 눈요기만으로도 이내 즐거워지는 곳이다. 그러나 허기에 지친 우리들에겐 말 그대로 그림의 떡, 몸은 나도 모르게 시식코너가 있는 상점을 기웃거리다 접시에 담긴 무료 시식으로 제공된 각종 간식거리를 찾아 하나 둘 입에 넣기 시작한다. 한참을 골고루 먹다가 그냥 나오기가 미안해서 한 봉지 사들고 나오지만 이미 네 명이 먹은 분량이 이 한 봉지 이상이어서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다.

 

맛있어 보이는 교토 전통 만두를 한 개 사서 4등분해서 먹기도 하고, 이렇게 이것저것 먹어보고 마셔보느라고 청수사 가는 길이 영 더디기만 하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언제 가려고 이러시나들.

 

청수사. 봄에 벚꽃 구경이 볼만하다는데 늘 여행이 한여름 아니면 한겨울인 내게 청수사를 봄에 볼 확률은...명퇴이건 정년퇴임이건 퇴임이후에나 가능한 한 일일 터. 벚꽃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그저 상상으로나마 그려볼 수밖에.

 

 

 

기타노텐만구(北野天萬宮)

잔인하다. 발갛게 꽃눈이 맺혀 머지않아 붉은 꽃망울을 터트릴 매화를 끝내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움을 넘어 잔인함을 느끼게 한다. 2월 25일에 매화 축제가 열린다고 하니 한 달 보름만 지나면 만개한 매화를 볼 수 있으련만 그건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 일뿐이다. 내가 직장에 몸담고 있는 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일 터. 머릿속으로나마 그려보는 매화는 그래서 더욱 잔인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기타노텐만구에서였다.

 

기타노텐만구는 ‘학문의 신으로 존경받는 스가하라 미치자네를 모신 신사로 합격을 기원하는 수험생들의 참배가 가장 많은 신사’(<교토! 천년의 시간여행>이현진 지음. 한길사)라고 하더니 과연 학생들과 자녀를 앞장세운 부모들로 붐빈다. 보통 500~800엔 하는 입장료도 없으니 우리네 동네 공원 내지는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는 듯싶다.

 

이곳을 굳이 가보게 된 사연은 이렇다. 금각사를 둘러본 후, 20여 분을 걸어서 가레산스이식 정원의 대표격인 료안지에 가서 모래밭에 섬처럼 심어놓은 작은 바위들의 개수가 15개인지를 확인하고, 근처에 있다는 유명한 우동집에서 점심을 먹을 참이었다. 그런데 그 우동집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지나가는 동네 아주머니에게 묻고, 동네 총각에게 묻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학생을 세워 길을 물었다. 간밤에 숙소에서 일본어공부를 열심히 한 인자가,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던 기억을 최대한 되살리며 일본어로 말을 붙였다. 그러다가 잠시 방향을 놓고 설왕설래하면 이내 내가 영어로 물어보는 식이었다.

 

자전거를 탄 20대 초반의 남학생, 50대의 외국인 아줌마들 넷이서 길을 가로막고 물어대며 빤히 쳐다보니 모른다고 가버릴 수도 없어 이마에선 비질비질 땀이 솟기 시작한다. 와중에도 간식거리를 좋아하는 종학은 좀 전에 샀던 곶감을 열심히 먹고 있고 나머지 셋도 질세라 곶감 꼬투리를 알뜰하게 발라내고 있는데, 난감해하던 이 학생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큰 도로변까지 나란히 걸어가며 몇 마디 물어보니, 이 동네에서 살고 있으며 어떤 대학에 다닌다고 하는데, 내가 알고 있는 대학은 교토대학과 도시샤대학 정도에 불과하니 그 대학 이름은 듣고 있어도 듣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 우동집을 찾기는 틀린 것 같아 다음 목적지인 기타노텐만구로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종학이가 스마트폰으로 찍어온 정보에 의하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걸어갈 요량으로 물었더니 왼쪽, 오른쪽, 큰 길, 사거리 하며 설명이 한참 길어진다. 언뜻 10번 버스를 타도된다고 한다. 하여튼 이쯤에서 이 학생을 놔줘야 될 것 같았다. 얼른 카메라를 꺼내 이 학생과 친구들을 향하니, 방긋 웃으며 두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이 학생. 귀엽기도 해라. 우리만 우물우물 먹고 있는 게 미안해서 좀 전에 손에 곶감 하나 쥐어줬는데 그 곶감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겠다.

 

마침 10번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왔다. 하마터면 엊저녁부터 감기로 고생하는 성란을 또 한 번 고생시킬 뻔했다. 500엔짜리 교토 일일투어 버스카드만 소지하면 하루 종일 얼마든지 시내버스를 탈 수 있어서 마침 한 장씩 들고 있는데 어제에 이어 오늘도 본전을 못 뽑고 있었다. 세 번만 타도 본전을 뽑는데 말이다. 허나 여행을 하다보면 곧잘 그렇게 되곤 한다. 일단 걷다보면 웬만한 거리는 그냥 걷게 되는 것이다. 버스비가 아깝거나 택시요금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된다. 게다가 우리 네 친구들은 왕복1시간이 훨씬 넘는 밭길, 산길, 과수원길 등을 걸어야만 다닐 수 있는 중학교를 함께 다녀서 걷는 일에는 기초가 튼튼하다. 그것도 대단히 튼튼하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기타노텐만구에 왔다. 내 입가에선 나도 모르게 미소가 솟는다. 왜? 대학입시를 앞둔 딸내미를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서? NO! 내가 대학 들어갈 때 누구 하나 날 위해 교문에 엿가락 한 마디 붙이거나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하거나 하는 일이 없었거늘 나 역시 딸을 위해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터에 남의 나라 신사에 와서 그런 기도를 한다고 좋아하겠는가. 내가 웃는 의미는, 드디어 교토에서 내가 와보지 못한 새로운 곳에 왔기 때문이다. 물론 딸내미를 위해 부적을 나무에 엮고 오긴 했지만.

 

인도의 아그라에 사람들이 가는 이유는 그곳에 타지마할이라는 불후의 건축물이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남편과 딸내미와 인도여행을 할 때도 아그라에 갔었다. 그러나 나는 타지마할을 보러가지 않았다. 비싼 입장료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나는 이미 타지마할을 두 번이나 보았기 때문이다. 처음 타지마할을 보았을 때는 감동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처음 한 번으로 족하다는 것을 두 번째로 타지마할을 보았을 때 절실히 깨달았다. 그건 흡사 첫사랑과 같은 것이다.

 

금각사. 이번 여행으로 세 번째가 되지만, 친구들과 함께 하는 소중한 시간이라 그냥 보았다. 자그마한 이층 건물에 금박을 입혔기로서니, 유명한 소설 <금각사>를 몇 번 읽었기로서니, 금각사가 마음에 새록새록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다. 유럽 가는 도중 경유지였던 도쿄가 내게는 일본 여행의 시초였는데 그때 공항에서 구입한 금각사 모형의 열쇠고리에 오히려 더 추억이 담겨 있다.

 

드디어 새로운 곳에 왔다는 기쁨도 잠시 개화 직전의 매화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피지도 않은 매화에 생명을 불어넣듯 봄기운을 실어 꽃을 피우게 하자니, 그것도 머릿속 상상력으로 꽃을 개화시키려니 가슴이 답답해지고 힘은 준 눈에서는 눈물이 나는 듯도 했다. 개화 직전의 꽃눈이 맺힌 매화가, 그래서 잔인하게 다가왔다.

 

온통 매화나무 천지인 기타노텐만구를 기억할 것. 매화가 만발했을 때 이곳에 온 분이 계시다면 사진 한 장 잘 찍어서 내게 보내주시길.

 

 

 

니조조

새삼 우리나라 기독교의 편협함의 상징인, 친구 인자를 흉보자고 하는 말은 아닌데 이렇게 말하지 않고서는 이 친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일본의 교토라는 곳이 역사 유적지가 넘쳐나는 곳이지만 대부분이 절 아니면 신사, 아니면 성이라서 어떻게든 불교와 연결되는데, 절이라면 질색을 하는 인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난감한 여행 장소도 없었을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라 따라왔지만 하필 이런 곳이람, 하고 마음속이 매우 시끄러웠을 것이다.

 

가는 곳마다 부처님과 각종 잡신들로 넘쳐나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인자는 아예 입장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잠깐 들어가는 척하면서 이내 밖으로 나와 혼자서 주변만 맴맴 돌기가 일쑤였다. 료안지에서도 그랬다. 비싼 입장료를 냈는데 영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만 서성거리기에 “여기는 절이 아니야. 그냥 유명한 정원이야. 안보면 후회하니까 잠깐 들어와 봐.”라고 말하고 보니 료안지의 ‘지(寺)’자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종학이와 나는 음흉한 눈빛을 주고받았음을 인자는 알는지 모르겠다.

 

이 니조조에서는 그래도 인자가 입장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뭐하나. 화장실에 가느냐고 잠시 떨어진 사이에 길이 엇갈려 종학이와 나는 경내를 마감 시간까지 둘러보았지만 우리 둘을 기다리다 못한 인자와 성란이는 입구에서 장승처럼 제자리에 못 박혀 있어야했다.

 

그러나 이 니조조는 구석구석 둘러보았다고 해서 이곳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곳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걸출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없는 곳이다. 이들을 둘러싼 재미있는 표현들, 이를테면 “오다가 쌀을 찧어 도요토미가 반죽한 떡을 도쿠가와가 먹었다”는 이야기나, ‘울지 않는 새’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기 그지없다.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는 베어버린다.”고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새는 울게 만든다.”라고 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지 않는 새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라는 이야기 등은 얼마나 유명한가. 이 이야기에 깃들인 역사적인 사실들은 또 얼마나 다양할까.

 

이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건립하여 교토에서 쇼군이 머물 숙소로 이용했다는 이 니조조는 이들의 권력 관계, 역사적인 배경 등을 모르면 이곳이 제대로 다가오지 않을뿐더러 보아도 보았다고 할 수 없는 곳이다. 그렇다고 32권짜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도전하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을 9권까지 읽었다는 종학이가 이곳을 두 번째 와보는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마음에 담았을 것이다. 명퇴한 종학이가 정말 부럽다.

 

앞에서 ‘걸출한 인물들’이라고 쓰고 보니 이 세 인물을 모두 훌륭하게 보는 것 같아 좀 조심스러워진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히데요시를 어떻게 훌륭하다고 말하겠는가. 교토에 가게 되어 혹 교토국립박물관에 간다면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 있다. 박물관 옆에 히데요시 신사가 있는데 그 신사 맞은 편 길 건너 어린이놀이터 옆에 큰 무덤이 하나 있다. 미미즈카, 즉 귀무덤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 선조들의 귀와 코를 베어 와서 자신들의 전승을 증명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 귀와 코를 묻어놓은 곳이다. 지난 번 식구끼리 왔을 때는 근처 꽃집에서 꽃 다발을 사서 무덤 앞에 놓고 나란히 서서 큰 절을 했었다. 물론 굳게 잠긴 출입문 때문에 월담을 해야 했다. 그때는 한여름이라 무덤위의 잡초가 무성하여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이제는 깔끔하게 관리가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무덤을 보는 마음은 역시 편하지 않다. 상상력이 발동된 인자가 드디어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아낸다. 함께 울어주지 못해 미안해 인자야, 대신 사진 한 장 남겨주마. 귀무덤 앞에서 인자는 이렇게 울었노라고.

 

어떤 역사학자가 나이가 들어 교토에 와보고는 진작 교토에 와보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일본의 역사, 하면 그게 교토의 역사고, 교토의 역사가 바로 일본의 역사이기 때문이란다. 역사학자의 한탄에야 미치지 못하겠지만 이곳 교토에서는 내 지식의 보잘 것 없음을 재확인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 틈을 살짝 상상력으로 메워 보려고 하지만 시도부터가 어불성설이다.

 

보면 볼수록, 알려고 하면 할수록, 수많은 인물과 수많은 명소가 마구 뒤엉키는 곳, 그곳이 교토다.

 

 

 

키노사키

드디어 교토를 벗어난다. 역사학자도 아닌 내가 교토에 세 번씩이나 가게 되니 사실 식상한 면이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교토에 관한 혹은 일본에 관한 책은 읽을수록 가슴이 답답해졌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행이라는 게 공부하러 가는 것이 아니잖은가.

 

그러던 중 <일본의 작은 마을>(서순정 지음)이란 책을 도서관에서 보게 되었다. 그 책에 교토나 오사카에서 직행열차로 3시간 거리에 떨어져있다는 키노사키온천이 소개되어 있었다. 외국인보다 일본인이 많이 찾는다는 곳이었다. 일단 이번 여행에 새로운 곳을 추가할 수 있다니 내심 반가웠다. 먼 곳이 아름답다, 고 얼마 전에 동유럽 일대를 한 달 넘게 다녀온 종학이와 성란이지만 일본은 처음이라서 무조건 내가 가자는 대로 따라들 온다고 하니 그래 키노사키를 살짝 집어넣기로 한다. 주최 측의 농간을 부릴 만하다.

 

때마침 간사이 지방 일대를 4일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는 JR열차 패스(간사이와이드패스)가 있다는 정보를 종학이가 알아냈다. 여행사<여행박사>에 알아보니 할인 판매하고 있었다. 여행 임박해서 구입하기로 하고 우선 숙소가 다급했다.

 

키노사키 얘기에, 만났다 하면 어디 온천이 어떻고 어디가 좋으니 함께 가자는 둥 온천매니아인 인자가 누구보다도 좋아한다. 그래서 내친 김에 나의 오랜 로망인 일본의 전통숙박인 료칸을 시도해보기로 한다. 일본 사람들은 료칸숙박에 대한 어떤 열망 내지는 애정 같은 게 있다고 하고, 오래된 료칸은 손님을 함부로 받지도 않고, 료칸에서의 저녁 만찬에 대한 이야기는 왜 그렇게 또 구미를 당기게 하는 지, 게다가 료칸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온천은 이야기 자체가 낭만이었으니, 필생에 꼭 한 번은 맛을 봐야만 하는 것이 료칸이었다.

 

교토에서 민박을 직접 인터넷으로 예약했듯 료칸도 직접 인터넷으로 예약하기 위해 두어 곳에 이메일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답신이 없었다. 전통료칸이라더니 인터넷예약은 전통이 아닌가? 일본어만을 고수하는 게 전통인가? 혼자 퉁퉁거리다 결국 료칸전문사이트를 발견해서 예약을 마친다.

 

교토에서 4일 째 되는 날, 밤새 비가 오더니 아침에도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그칠 기미가 없다. 전철정거장까지는 도보로 3분 정도, 이 정도 비라면 예전 우리가족끼리 여행이라면 생각해볼 여지없이 걸어가련만, 이 우아한 아줌마들은 걸을 생각들이 없는 데 특히 인자는 앞장서서 대로변에 나가 택시를 불러온다. 그래 여행지에서 택시도 한 번 타봐야지.

 

간사이와이드패스만 있다고 해서 기차 타는 게 바로 해결되지 않았다. 전날 알아본 시간표상 10분 정도 남았으니 걸음을 빨리하면 탈 수 있지 않겠냐고 종학이가 재촉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바우처로 된 패스를 진짜 열차패스로 바꾸는 일이 남았기 때문이다. 몇 번을 물었을까? 교토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복잡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절차가 간단하고 열차에 오르기도 생각보다 훨씬 쉬웠다. 다만 진짜 열차패스만 있다면.

 

여기저기 헤맨 끝에 2층 중앙 정면에 있는 티켓사무실로 가서 드디어 열차패스로 바꿨다. 알고 보면 별 것 아니고 쉬운 일이지만 제대로 된 정보를 모르고 달려들면 몇 배의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새삼스러운 얘기도 아니건만 때때로 새삼스럽고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인도여행에서 기차표만 제대로 끊을 줄 알게 되면 인도여행은 마스터했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떤 여행도 어렵지 않으리라는 말이 있어서, 내심 이 정도쯤이야 하고 자신하고 있었건만 여기는 또 다른 세계였다. 인도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우왕좌왕하고 10시 20분에 드디어 키노사키행 열차에 올랐다.

기차에 오르니 조금 전의 의기소침도 눈 녹듯 녹아버려 어느 새 새로운 ‘소풍’을 즐기기 시작했다. 중학생 시절로 되돌아가 재잘재잘, 조용한 일본 사람들처럼 조용히 재잘 거리며 간식을 먹는 둥 즐거웠는데...

 

좀 전에 검표를 하여 우리 일행이 키노사키에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차장아저씨가 얼마 후 갑자기 우리에게 오더니 계산기를 보여주면서 4천 엔이 넘는 추가요금을 내라고 한다. 웬 추가요금? 그러면 벌금? 우리가 뭔 잘못을 저질렀나? 일인당 7천 엔짜리 열차패스도 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바로 전 역인 후쿠치야마에 정차하면서 열차내 방송으로 무엇인가 열심히 반복하던 말이 떠올랐다.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 중에 키노사키가 여러 번 들어있었다. 뭐였지?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이 30대 중반쯤 된 차장아저씨나 일본어 한두 마디 겨우 하는 우리나 답답하기는 매한가지. 겨우 파악한 내용은 우리가 타고 있는 열차는 키노사키에 가지 않는다는 것과 JR선이 KR선으로 바뀌어서 우리가 갖고 있는 패스는 사용할 수 없으니 추가요금을 내라는 이야기였다. 돈은 그렇다 치고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키노사키에 가란 말인가? "What should we do?" 외쳐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이때, ‘짠’하고 귀인이 나타났다. 출입구 가까이에 앉아가던 젊은 애기엄마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파란 눈에 머리가 검고 눈빛이 선하다. 다급하게 묻는다.

“Do you speak English?"

”한국인이시죠?“

”.....?“

“남편이 한국인이구 아버지가 일본인인데, 지금 친정에 가는 길이에요. 신제주에 살고 있어요.”

 

다음 정차역이 고향이라는 이 귀인을 따라 우리도 내렸고 역무원의 친절한-말 그대로 친절한-호위를 받으며 다시 한 량짜리 완행셔틀열차를 타고 후쿠치야마로 돌아갔다. 후쿠치야마에서는 키노사키행을 기다렸다가 무사히 키노사키로 향했다. 물론 추가요금은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모두가 이 귀인 덕택이었다.

 

키노사키에 대한 정보는, 흠..... 준비한 게 없었다. 가이드북도 몇 년 전 교토에 올 때 들고 왔던 책이었고 그 책마저 키노사키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었다. 이럴 때 론리플래닛을 참고하면 단박에 해결되었을 텐데. 뭘 믿고 그냥 왔나.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친절한 가이드북을 들고 오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란 게 잘 맞춘 퍼즐조각처럼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아서야 그게 어디 여행인가.

 

미흡한 정보 덕에 간이역마다 정차-정차 역을 세어보니 13개 역이었다-하는 한 량짜리 시골 완행열차도 탈 수 있었고(흡사 70년대 우리나라 완행열차 같아서 무척이나 정겨웠다), 뜻하지 않은 사람을 귀인이 되게 만들었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하는 일인데 뭐 어려울 게 있겠냐 하는 믿음 같은 것이 생겼으니, 역시 길을 잃어야 여행이지 싶다.

 

우여곡절 끝에 키노사키에 도착하니 역 대합실을 벗어나기도 전에 또 한 차례의 친절세례를 받게 된다. 알록달록한 우리들 옷차림이 눈에 띄었는지 염색하지 않은 내 흰머리가 동정심을 유발했는지 친절한 미소를 머금은 한 여인네가 어느 숙소에 가느냐며 말을 걸어온다. 숙소의 위치를 친절하게 가르쳐주기에 염치 불구하고 바로 코앞 양동이 가득 담겨 있는 우산을 빌려 쓰고 나중에 돌려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니 그냥 쓰고 가서 호텔에 주면 된다고 한다. 이 인간적인 배려라니. 역시 키노사키가 유명해질 만했다.

 

그러면 그렇게 꿈에 그리던 료칸은 어땠을까? 비교적 저렴한 편에 속하는 료칸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물론 우리에게는 그것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지만) 료칸은 그간의 내 환상을 깨기에 충분했다. 저녁 만찬이 화려하기는 했지만 음식 하나하나에 정성이 들어갔다고 말하기 어려웠고, 이부자리를 손님 모르게 펴주고 정리해 주는 것은 들은 바와 같으나 어딘가 형식적인 관습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방에서 나는 담배 냄새가 치명적이었다. 프런트에 내려가 주인 남자에게 말하니 무뚝뚝한 표정으로 전혀 못 알아듣는 척한다. 영어를 못하는 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타바코란 단어도 못 알아듣는 척하냐며 옆에서 거들던 인자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 키노사키에서 종학이와 내가 감기에 걸리기 시작했다는 점을, 그 감기가 우리 둘 다 기억으로는 최악의 감기였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다. 다음 날 돌아와서 나는 약 1주일간을 앓았다. 감기 때문에 몸져누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열악한 인도 라닥지방에서도 거뜬했었는데 에고, 4박 5일 일본여행을 만만하게 볼 게 아니다.

 

이 글을 빌어 성란에게 미안했던 일 하나. 끼니를 놓쳐서 대강 먹는 것 마저 시원찮을 때 성란이가 읊조리던 한 마디. “입에 들어가는 걸 그렇게 아까워하냐.” 내 생각은 이랬다. “허구한 날 입에 들여보내니 입에 들어가는 거 한 번 아껴보는 것도 여행이야.” 생각해보니 인자에게도 미안했다. 조선 토종의 입맛을 지니고 있어 쌀밥 없이는 여행이 안 되는 인자에게 나는 또 이렇게 잘난 척을 했다. “난 여행가면 쌀밥은 안 먹으려고 해. 매일 먹는 게 밥인데 뭐.” 잘난 척하는 나를 잘 참아준 친구들아 고맙다.

 

그런데 말이야. 첫 날 도쿄역사 지하에서 먹었던 그 우동 말이야. 돼지 누린내가 역하게 나던 그 우동을 나만은 맛있게 먹었는데, 사실 나도 내가 놀라웠다. 20여 년 전에 처음 먹었을 때는 거의 입에 대지도 못했었고, 2008년 가족이랑 와서 바로 우리가 앉았던 그 자리쯤에서 먹었던 우동 역시 반쯤정도 밖에 못 먹었는데 이제는 별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거야. 우동을 받아들이게 되니 일본이라는 나라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아.

 

다음에 또 우동 먹으러 가자, 친구들아.

 

 

<정리>

1. 여행 동무들: 성란, 인자, 종학, 나

2. 여행 준비

가. 항공권: 이스타항공 (인터넷으로 예매)

                인천↔오사카(간사이공항): 225,700원(Tax포함)

나. 숙박

  a) 한인민박(<교토하우스>-인터넷으로 예약): 가족실180,000원×3일÷4명

  b) 료칸(키노사키의 <카와구치야 혼칸>-료칸전문사이트 <큐슈로>에서 예약):

      51,000엔÷4명=178,500원

다. 간사이와이드패스4일권(<여행박사>에서 구매):

      7,000엔(할인가 6,650엔)×4명=354,912원(택배비 2,500원포함)

라. 여행자보험(<탑항공>에서 신청): 131,360원÷4명

마. 합계: 1인당 약660,000원(기타 경비-쓰는 대로)

바. 환전: 살 때 100¥=1,219.23원

            팔 때 100¥=1,177.66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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