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전에는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아도 보이지 않던 책들이, 여행 후에 하나씩 눈에 들어오는 이 신비한 현상. 여행이 주는 선물이겠다. 꼭 고구마나 감자를 캐는 기분이 든다. 뿌리를 들추면 줄줄이 엮여 나온다. 인도네시아 여행은 언제 끝나려나,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책에서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시인 박인환이 인도네시아와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박인환 시인은 일제 치하를 거친 한국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인도네시아를 향한 강한 동질감을 노래하였다. 이 시를 읽으면 동시대 인도네시아인과 아픔을 같이하는 그의 시대정신에 놀랍고, 그가 한때 한 해운회사에 입사해 자카르타에 아주 잠깐 머물다 갔으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인도네시아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해박한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때부터 이미 인도네시아 사람과 한국 사람은 애달픈 식민사에 대해 같은 정서를 공유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p.189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1948)
박인환
동양의 오케스트라
가믈란의 반주악이 들려온다
오 약소민족
우리와 같은 식민지의 인도네시아
삼백 년 동안 너의 자원은
구미 자본주의 국가에 빼앗기고
반면 비참한 희생을 받지 않으면
구라파의 반이나 되는 넓은 땅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가믈란은 미칠 듯이 울었다
네덜란드의 58배나 되는 면적에
네덜란드인은 조금도 갖지 않은 슬픔에
밀시密柹처럼 지니고
육천칠십삼만인 중 한 사람도 빛나는 남십자성은
쳐다보지 못하며 살아왔다
(중략)
네덜란드인은 옛날처럼 도로를 닦고
아세아의 창고에서 임자 없는 사이
보물을 본국으로 끌고만 갔다
(중략)
제국주의의 야만적 제재는
너희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욕
힘 있는 대로 영웅 되어 싸워라
자유와 자기보존을 위해서만이 아니고
야욕과 폭압과 비민주적인 식민정책을 지구에서
부숴내기 위해
반항하는 인도네시아 인민이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라
(중략)
하기야 내가 언제 박인환 시인의 시를 꼼꼼하게 공부했던가. 찾아보니 박인환 시집에서 이 시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제대로 안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