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년 전쯤 될까? 가물가물한 기억을 헤집어본다. 학급당 학생수가 50여 명쯤 하는 시절이었고 지금은 잊혀진 아이들 얼굴을 애써 떠올릴 수도 없지만 한 학생만큼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말이 없고 조용히 앉아있던 그 학생 때문이 아니라 그 학생의 어머니 때문이다. 아마도 학년 초에 열리는 학부모 총회에서 만났을 것이다. 아닌가? 잘 모르겠다. 하여튼 그 학생의 어머니와 얘기를 나누었고 자녀 중에 자폐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폐아가 주는 어감 때문에, 나 역시 장애가 있는 언니를 두었기에, 그 학생을 유심히 보게 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따로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자폐아를 동생으로 둔 아이의 마음은 어떨까 상상하며 일상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을 뿐이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학년 말이 되었을 무렵, 정확히는 김장철 무렵, 이 어머니가 갓담근 김장김치 세 통(아마도)을 손수 들고 내가 사는 아파트를 찾아오셨다. 고소공포증(밀실공포증?)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면 심장이 두근거린다며 식은땀을 흘리고 계셨다. 예전에 어떤 선생님에게 드렸는데 제 때에 냉장고에 넣지 않아서 결국 못먹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며 이마에 흘린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숨을 돌리셨다. 고마움과 죄송한 마음으로 염치없이 김치통을 받았다. 묵직했다. 배추김치, 알타리김치, 파김치였던가. 종류를 달리한 김치 세 통을 이삼일 실온에서 익힌 후 냉장고에 넣으니 냉장고가 꽉 찼다. 그해 겨울 그 김치를 먹을 때마다 이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후로도 그 김치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해보았다. 자녀의 담임선생님이 뭐가 그리 이쁘다고, 뭐가 고맙다고 이런 수고를 하셨을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아픈 자녀가 있으면 엄마의 마음도 늘 아프다. 아픈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서 내 아픔을 보아달라고, 알아달라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내가 남을 보듬어주는 게 내 아픈 마음을 들키지 않고 나를 위로하는 방법이 된다는 것을. 그러니 누군가 조건없이 내게 무엇인가를 베풀 때는 잠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마음의 밑자락을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위의 책. 김치통과 함께 주신 건지, 나중에 주신 건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저 책을 직접 쓰셨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직접 쓰신 걸로 기억하는데 내용을 읽다보니 아닌 것도 같고.....그게 또 그렇다. 타인은 무심하다.
1월 12일
'버스 금강 추락 38명 사망'
신문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떼죽음을 당하는 세상이다.
외로운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 고장난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내는 아이. 현실적으로 보아도 가엾기 그지없고 절망감난 안겨 주지만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맑고 깨끗한 영혼의 소유아이리라. 이럴 때는 겨울 열차를 타고 조용한 간이역에서 혼자 내리고 싶다. -55쪽
1월 13일
내가 당면하고 있는 이 시련은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다. 죽음을 생각해 보자.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다. 이 시련조차도.
그래서 이 시련은 생명이 숨쉬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생명을 열렬히 사랑하라는 신의 가르침이 있다. -55쪽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지, 하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내는 장애아 엄마. 지금은 어떻게 살고 계신가요? 잘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