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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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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기존 방식을 따르지 않기, 혹은 제대로 따져보기로 요약할 수 있겠다. 제호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원제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 의심하고, 질문하고, 따져보고, 생각해보고.... 그림을 볼 때 명심해야 할 것.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그중 두어 개를 인용해본다.

 

 

한스 멜링 <허영> (출처: 네이버)

 

 

-60쪽

화가가 벌거벗은 여성을 그린 이유는 벌거벗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의 손에 거울을 쥐어 주고 그림 제목을 허영이라고 붙임으로써, 사실상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벌거벗은 여자를 그려놓고는 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위선과 적반하장의 뻔뻔함을 본다. 점잖은 해석은 이제 그만.

 

 

-76

오늘날 이 누드가 포함하고 있는 태도나 가치들은 광고, 저널리즘, 텔레비전과 같은 좀 더 다양한 미디어 속에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여자를 보는 방식, 즉 여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여자들은 남자들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여성성이 남성성과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적인' 관객이 항상 남자로 가정되고 여자의 이미지는 그 남자를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말에 의심이 든다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 보면 된다. 이 책에서 전통적인 누드화를 아무 작품이나 하나 고른 다음, 그림 속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 보자. 머릿속에서 생각만 해도 좋고 그려 봐도 좋다. 그리고 그런 전환이 얼마나 폭력적인 것인지를 살펴보기 바란다. 이미지 자체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관념에 대한 폭력 말이다.

 

'머릿 속에서 생각'만 해도 신선하고 유쾌하다. 여성 화가들이 남성 누드화를 그릴 수 없었던 건 시대적인 한계 상황으로 여성들에게 누드화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만약 허용했다면 어떠했을까. 적어도 위의 그림과 같은 위선적인 그림은 덜 허용되지 않았을까? 성불평등을 말할 때, 남자를 여자로 바꾸어보면 문제가 무엇인지 확연히 보인다. 남자들은 끊임없이 저항하겠지만. 마치 특권이나 되는 것처럼. 원래부터 그런 것이었노라고 항변하겠지.

 

 

 

프란스 할스 <웃고 있는 어부 소년> (출처: 네이버)

 

-122

이 그림 속의 가난뱅이는 자신이 팔 물건들을 보여 주며 웃는다. (가난뱅이들은 이를 드러내고 웃지만, 부자들은 절대 이렇게 웃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들 앞에서 웃어보인다.

 

하층계급의 생활장면들을 묘사한 그림을 '장르화'라고 한다는데, 목적은 '이 세상의 덕성은 사회적이고 금전적인 성공으로 보상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면 잘 살게 되지만 게으름뱅이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교훈을 나타낸다. 그러나 위의 할스의 그림은 이런 장르화의 성격과는 다른 것으로 그를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나...그런 사실보다 부자들은 절대로 저렇게 이를 드러내며 웃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림을 생각하면서 보지 않으면 어떤 것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사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좀 더 공들여 읽어야 한다는 것만 짚고 넘어간다. 개념이 잡힐 듯 말듯 한 유화의 본질과 현대 광고와의 관계, 그리고 글래머glamour의 개념, 발터 베냐민의 이론 등. 1972년에 발간된 책인데도 과거시제로 읽히지 않는 책이다. 물론 내가 무지한 탓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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