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도 여행기


(1)여행기간: 2005년 1월 5일-1월 22일(18일간)

(2)여행일정: 뭄바이(2일)-기차(25시간)-벵갈로르(1일)-이동(3시간)-스라바나벨라골라(2일)-이동(2시간30분)-마이소르(2일)-이동(4시간)-우티(1일)-이동(9시간)-코친(3일)-기차(16시간)-고아(2일)-기차(12시간)-뭄바이(한나절)

(3)환율: 1루피=25원



20일도 아닌 18일간의 여행기간이라. 다 이유가 있다.

원래는 한 여행사를 통해서 단체배낭 형식의 여행을 계획했는데 그 상품이 18일간이었던 것이다. 아니 다시, 원래는 출발 인원이 셋이었다. 나, 딸아이(유진), 그리고 큰오빠의 아들인 조카(유석), 이렇게 셋이었다.

유진이는 이제 초등학교 2학년, 유석이는 대학 1년 생. 둘 다 책임져야 할 상황이었으므로 계획 초반부터 나는 심히 떨고 있었다고나 해야겠다. 이미 인도는 94년 초(28일간)와 2001년 초(16일간)에 다녀와서 웬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전 여행들이 모두 단체배낭으로 다녀와서 몸에 익숙해져있었고 동행자들이 어리고 그리고 인도는 왠지 배낭여행에 자신이 없었다. 물론 몇 번의 배낭여행 경험이 있지만 여행은 떠날 때마다 처음인양 긴장이 되곤 한다. 특히 인도는 더욱 그랬다. 결국 고민과 결단을 거듭한 끝에 여행사를 찾게 되었는데, 주위에 있는 동료 교사들의 호응도 있어서 전체 인원8명이 되었다. 이 인원이면 비인기 여행상품이 구성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여행사에 타진해 보았는데 그 후 우리가 신청한 남인도 상품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되자 신청자가 몰려 22명이 되었다. 9월부터 시작된 작업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되어 비자 신청 들어가고 출발 날짜(2005.1.5)만을 기다리며 배낭이다 침낭이다 망원렌즈 등을 하나하나 혼수 준비하듯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2월 26일 일요일, 지구 대참사라는 남아시아 지진 해일 사건이 일어나 그야말로 지구촌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했다. 그 여파는 또 다른 지진, 또 다른 해일이 되어 여행 자체를 무산시켜 버렸다. 전염병의 창궐, 여진의 우려 등 언론의 과장보도에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여행자들이 하나 둘 혹은 뭉텅이로 썰물처럼 빠져나가 급기야 우리의 여행상품 자체가 취소되어 버린 것이다. 누구를 탓하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이 마당에 여행이라니.(1월 25일 현재 사망자수는 23만 명)

다시 원점이 되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에 침을 뱉으며 이미 취소 상태가 되어버린 싱가폴 항공의 뭄바이 인, 첸나이 아웃을 다시 개인 발권을 신청하며 뭄바이 인, 뭄바이 아웃으로 부탁했다. (차마 피해 지역인 첸나이는 안되겠다 싶었다. 나 혼자면 몰라도.) 유감스럽고 원망스럽고 무엇보다 불안했지만 처절하고 비장한 마음에 눈물이 다 나왔다.(여행중독증에 걸려본 사람이라면 이해하리.)

그래 셋이다. 어떻게 되겠지 뭐, 하고 있는데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정선생님과 연락이 닿았다. 함께 떠나시겠단다. 그렇다면 충~분해!



1. 뭄바이는 항구다

Nishant. 그는 내가 뭄바이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다. 지난 번 인도여행 때 현지 인솔자였던 그와는 여행 내내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따로 한국인 인솔자가 없었던 관계로 어쩌다 그 역할을 했던 나는 이런저런 일을 맡다보니 여행 인솔을 처음 한다는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21살의 풋풋함이 몹시 부러웠던 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여간 즐겁지 않았다. 그때 이미 내 나이는 마흔을 넘기고 있었지만 그건 그저 수치상일 뿐 새 친구를 하나 얻은 기분이었다. 보름간의 일정을 마치고 헤어질 때는 몹시 섭섭하여 3년 후엔 다시 돌아와 남인도를 여행할 테니 그때 만나자고 하자 그땐 자신도 내 여행을 기꺼이 돕겠노라고, 자기 집에서 있으라고도 했다.

3년이 아닌 4년 후가 되었지만 나는 늘 그 약속을 마음속에 품고 남인도 여행을 꿈꾸며 지냈다. 물론 단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루어진 여행은 아닐지언정 그와의 만남은 나의 여행을 좀 더 풍부하고 알차게 해주리라 믿고 있었다. 그래서 열심히 이메일도 주고받았다. 2002년 월드컵 땐 안정환 선수가 훌륭하다며 우리 축구팀을 응원하는 메일도 보내왔고 이런저런 사소한 사정도 전하며 얼마간 기쁨과 슬픔을 서로 나누기도 했다. 언젠가는 한국에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물가수준은 어떤지 횡설수설 묻기도 하여 나를 당황하게도 했고 얼마 전에는 내가 우리학교의 원어민 교사의 전교조 가입 소식도 전해주는 둥 우리는 그렇게 지난 4년 동안 나름대로 착실히 우정을 다져왔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그와 만나는 것은 그러므로 내게는 최우선의 일정인 셈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이번 여행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가 전해준 현지 소식은 계획을 실행하는 데 결정적인 용기를 주기도 했다. 일정 상 첸나이를 제외하고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메일을 지령삼아 주위의 걱정과 만류를 무릅쓰고 떠나올 수 있었다.

1월 6일 새벽 1시경.

꼴라바 거리에 있는 걸프 호텔에 미리 예약이 되어있던 우리의 방은 호텔 측의 신뢰성 없는 처사로 이미 다른 여행자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우리가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였다. 그러고도 그들은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11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땐 훅 불어오던 공기 중의 이상한 향내와 일일이 걸어주던 하얀 꽃목걸이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새삼 가슴이 설레기도 했건만 이런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당장 방을 구해야 했다. 유진이는 이미 내 가슴에 기대어 잠들고 있었고 갑자기 바뀐 기온과 모기떼의 극성은 우리를 더욱 더 피로하게 만들었다.

정말 힘들게 밤인지 새벽인지를 한참 헤맨 끝에 연회장으로 쓰이는 아주 커다란 방을 2개 구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인천공항부터 함께 한 <인도소풍>의 빠니님의 역할이 매우 컸다.) 셋이 누워도 남는 운동장만한 침대를 중심으로 양편에는 몇 명이 누워 잘 수 있는 긴 소파가 쭉 늘어서 있으며 한쪽엔 주방 시설에 컵이랑 집기들도 두루 갖추고 있어 이 방이 파티용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방 하나에 1,600루피. 그 후로도 그렇게 비싼 방은 구경도 못해보았지만 하여튼 첫날은 그렇게 신고식을 톡톡히 치렀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 아니라 Nishant과의 약속이었다. 걸프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의 어긋남이라든가 필요 이상의 긴장 따위의 여러 정황에 대한 얘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하여튼 이날 밤 9시 30분에 Nishant과 만났으니까.

푸네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는 그가 뭄바이에 오려면 3시간이 걸린단다. 3시간은 인도인에게는 아주 가까운 거리를 의미한다지만 작은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잖은가. 고맙고 반가웠다. 4년 만에 만난 그는 탈모 증세가 심해 아예 삭발을 했다더니 그 누군가를 닮고 있었다. 바로 간디. 아마도 간디의 젊었을 때 모습이 저랬으리라. 그런데 손님 맞는 우리 방이 너무나 비좁고 초라하다. 그래도 1,150루피나 하는데. 넷이 잘 요량으로 얻은 트리플룸엔 의자 하나 없어서 도저히 침대에 걸터앉은 채 이 아까운 시간을 이렇게 어정쩡하게 보낼 수가 없었다. 멋진 해후에 걸맞게 우리 다섯은 근처에 있는 유명한 타지마할 호텔 커피숍으로 갔다.

그런데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은 후 더 이상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척이나 어색하다. 분위기가 풀리지 않는다. 무겁기까지 하다. 아, 이럴 땐 어떻게 하지?

얼마 후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데 Nishant도 따라서 우리 방으로 들어와 정선생님의 침대에 걸터앉는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방갈로르행 기차를 타야할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그는 이미 전철이 끊겨 2시간이 걸리는 그의 친척집에 가기 힘든 상황을 말하고 있다.(나를 만나러 뭄바이 근교의 친척집에 어제 왔었다한다) 그러면서 여분의 방을 얻어줄 수 있는 지를 물어온다. 그게 안되면 대강 한쪽에서 있다가 새벽 5시쯤 가겠다고 한다. 난감하다. 이럴 땐 정말 어쩌나.

유석이와 함께 엘리베이터까지 전송하는 데 돌아가는 그의 모습이 초췌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세상을 버린 남자의 모습이 저럴까. Good night!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눌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뭄바이는 항구다. 만나고 헤어지고 또 떠난다. 기약도 없이.



2. 내가 인도에서 살고 싶은 곳은?

이번 여행지 중 내가 살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한 1년 정도.

나는 우띠(Ooty)를 꼽겠다. 타밀나두 북쪽에 위치, 해발 2240m의 산악 도시로 여름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은 우리가 처음 계획한 일정에는 들어있지 않았는데 마이소르에서 어쩌다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하여 숙소 옆에 있는 여행사에 신청했다가 갑작스레 생각이 바뀌어 하루 머물게 된 곳으로 우리가 잘한 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바뀐 일정 때문에 코친까지 예약한 버스요금 환불로 인한 손해(75% 환불해줌)와 우띠까지 왕복을 조건으로 한 투어비 250루피(1인당) 중 50루피 밖에 환불이 안 돼 이중으로 손해를 보는 멍청한 짓을 좀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서 하루라도 머물길 잘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곳은 어떻게 보면 인도 같지 않은 곳일 수도 있다. 우리가 머문 리플렉션 게스트 하우스를 예로 들어보면, 한마디로 영국 풍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호숫가 언덕 위에 자리 잡아 전망이 뛰어나며 식당 겸 로비로 사용되는 거실의 실내장식은 물론 아기자기 꾸민 정원과 화분들이 영국의 민박집 B&B를 그대로 연상시킨다. 19세기 영국인 존 설리반이 이곳에 매료되어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더니 그 흔적이 고스란히 곳곳에 남아 있나보다. 그는 이곳의 원주민인 토다족에게서 1 에이커당 1루피를 주고 이곳 Nilgiris를 포함한 꼬임바토르 일대를 사들여 지금은 미술대학이 된 건물을 비롯한 여러 건물을 짓고 물 공급을 위해 인공호수를 만드는 등 도시 개발을 주도했다한다. 또한 현금 작물인 차 재배를 도입하였다고도 하는 데 거의 이 지역 일대가차 밭으로 뒤덮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우리나라의 차밭으로 유명한 보성 차밭의 수십 배 정도라고나 할까.

내가 이곳에 살고 싶은 이유는 영국과 호주의 분위기를 결합시켰다는 이국 취향의 아련한 분위기 때문이 아니고, 한여름의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피서지로서도 아니고, 시원하게 자리 잡은 호수와 놀이 공원 혹은 진기한 식물을 볼 수 있는 식물원 혹은 여름 별장의 별난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여러 휴양 시설 때문만은 더욱 더 아니다. 바로 겹겹으로 되어 있는 시장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여러 시장을 둘러봤지만 이곳 우띠 만한 시장은 처음인 것 같다. 골목에 골목을 덧 댄 꼴로 크기도 크기지만 산더미 만하게 쌓아놓은 물건들과 어두워져도 줄지 않는 대단한 인파로 인해 이곳이 산악 도시의 시장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싱싱한 사탕수수대의 달콤한 유혹, 현란한 색깔의 갖가지 과일과 싱싱한 채소들. 배가 고팠던지라 주로 먹는 거만 눈에 들어왔지만 이곳은 또한 보석 판매로도 유명하다한다.

이런 시장을 곁에 끼고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가까운 시장 하나 없어서 매번 차를 타고 대형 할인 매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곳에 사는 나로서는 부럽기 그지없다.

더 중요한 이유. 온 도시(작은 산간 마을이 아님-인구 약 8만 9천명, 2001년 론니 플래닛)가 곳곳에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보니 산책하기 딱 좋은 언덕들로 거미줄처럼 둘러 싸여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한 골목만 답사를 해도 족히 몇 개월은 걸리리라. 매일 신선한 공기 마시며 발이 부르트도록 실컷 걸어보고 싶다. 그러면 건강 걱정은 사라질 텐데. 그리고 지천으로 보이는 차밭들. 이곳 현실은 어떨지 모르지만 일거리는 많을 것 같다. 거지가 눈에 띄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일거리도 많을 테니 생계는 유지할 수 있겠지.



3. 인도 여행의 시작과 끝-기차 타기

인도는 세 번째라지만 내 손으로 기차예약하고 기차 타기는 처음이라서 여행 내내 제일 힘든 부분이었다. 12시간이상의 장거리를 이동하는 경우 3-tier 라는 에어컨이 있는 3인용 침대칸을 세 번 이용했다. 예약은 필수인데 한 도시에 도착하면 먼저 다음 행선지 기차 예매부터 해야 된다. 그렇게 서둘러 해도 웨이팅 리스트에 걸리기 일쑤여서 그때그때 상황 파악해서 적절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무렵 인도 여행이 끝난다. 내 경우가 그랬다.

처음 일정은 뭄바이에서 고아로 갈 예정이었다. 한 장의 예약표에 탑승자의 이름이랑 나이, 주소, 행선지를 써서 외국인 전용 창구까지는 잘 갔다. 그런데 고아 가는 표는 나흘 후에나 있단다.(책을 보니 고아에 무슨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이다. 나흘 동안 뭄바이에 있는 것은 물가와의 싸움인데, 안되지. 방향을 틀어 아래에서 거슬러 올라오자. 그래서 벵갈로르를 25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기차는 생각보다 안전하고 안락했다. 모든 끼니를 기차에서 해결할 수 있고 출출할 때쯤 되면 때맞춰 짜이 장수들이 와 주었고 일정하게 흔들리는 것이 밤에는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이번엔 코친에서 고아까지다. 유적지가 많은 포트 코친에서 기차역이 있는 에르나쿨람까지는 적지 않은 릭샤 비용이 들어간다. 한 번 해봤다고 이번엔 좀 여유까지 생겼다. 그런데 돌발 상황 발생. 표 하나에 나란히 이름과 나이와 좌석 번호가 올라가야 하는 데 W.L이라며 우리들 이름조차 없다. 대기번호 6,7,8,9 이란다. 이게 뭐여? 이곳은 외국인 전용 창구가 없어서 뒤에는 인도인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담? Enquiry 창구로 가서 물어보면 알겠지. 긴장된 얼굴로 물어보니 뭐라 하는 데 귀에 안 들어온다. 종이에 써 준 걸 보니 Area Manager Office로 가라고 하는 것 같다. 그건 또 뭐시여? 키 큰 유석이가 먼저 발견하고는 옆 건물을 가리켜 들어가 보니 창고 같은 사무실에 어떤 남자가 앉아있다. 이 사람이 그 매니저? 기차표를 내미니 Emergency Quota라고 적힌 종이를 주며 작성하란다. 이 기차를 꼭 타야하는 이유를 적는 난도 있어 간절하게 적어본다. ‘한국에 돌아가려면 이 열차를 타야한다’라고.(아직 돌아갈 때는 아니지만) 그러나 읽지도 않는 걸 보니 요식 사항인가 보다. 이 열차를 탈 수 있느냐고 재차 물어보니 No problem! 이라며 당일 날 출발 전에 와서 다시 문의를 하란다. 아마도 비상으로 남겨둔 좌석인 모양이라고 우리는 서로를 안심시킨다.

마지막 한 번 남았다. 고아(기차역이 여러 개 있다)에서 뭄바이까지로 이번 열차를 놓치면 악명 높은 버스를 타야한다. 그리고 시간을 잘 조정해야지 잘못하면 돌아갈 비행기도 놓칠 수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아 우리 모두 총력을 기울인다. 지난 번 코친에서는 도착한 다음 날 기차표를 예매하는 바람에 애를 먹어서 이번엔 일찌감치 원칙을 지켜보기로 한다. 바로 도착한 즉시 다음 행선지 예매를 하는 것 말이다. 시간을 확인한다. 한쪽 벽면에 열차 시간표를 아예 페인트로 써 놓은 이네들 방식이 마음에 든다. 그런데 여기도 외국인을 봐주지 않는 곳이라 걱정이 앞선다. 아니나 다를까 또 대기번호 W.L 26, 27, 28, 29이다. 표를 끊어주기 전에 이 표를 사겠느냐고 물어온다. 지난번처럼 뭔가 할당제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yes"했더니 우리보고 good chance라고 한다. 대기 번호 26번이 good chance? 뭔 얘기여? 어떻게든 기차를 타게 되었으니 good chance란 말이여? 지난 번 경험을 살려 매니저를 찾아보자. 뭔가 있을 거야. 매니저 오피스를 물으니 이상한 표정들을 짓는다. 그렇다면 역장실로 가보자. 가이드북에도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 찾아갔더니 한 사무실로 데려간다. 다시 이층의 창구로 가란다. Enquiry 창구로 가서 물어보니 내일 오란다. 출발은 모레인데 내일은 또 뭐여? 그런데 돈이 더 필요하다고? 급행요금인가? 때 마침 옆에 한국 여행자가 한마디 정보를 준다. 자기는 다른 역에서 예매했노라고. 역시 동족끼리 돕고 살아야지. 좋은 정보가 되겠다싶어 다음 날 숙소에서 좀 더 가까운 역으로 가서 우리 표를 알아보니 별 방법이 없다한다. 그래 그냥 타봐. 이러는 와중에 대기 번호가 22번부터 시작하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게 없었다.

다음 날 비장한 각오로 기차역에 당도하여 Enquiry 창구로 가서 물어보니 좌석번호를 매겨주는 데 한 좌석에 두 사람씩 앉게 되어있다. 이건 또 뭐여? 결국 침대칸이 아니란 얘긴데 나머지는 왜 환불해주지 않는 거야? 일반 좌석표와 침대표는 가격차가 큰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시 가서 물어보니 뭔가 큰 소리를 친다. 잠시 후 우리가 탈 열차의 예약자와 좌석이 적힌 리스트를 게시판에 붙여놓았다. 역시 우리는 열외였다. 모든 가능성을 점치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봐야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을 접고 그저 제 시간에 뭄바이에 도착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자고 서로를 위로한다. 그런데 이눔의 인도 기차는 길기가 엄청나다. 말 그대로 “길면 기차”다. 비록 우리처럼 빠르진 않지만. 물어물어 우리가 타야할 칸을 찾아가는 데 워낙 길다보니 도중에 서너 번을 물어보게 된다. 아니 그런데, 우리가 원하던 3-tier A/C class였다. 같은 가격에 누구는 폼 나게 침대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고 우리는 쪽방 신세처럼 한 침대에 둘이 앉아가야 할 판이니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데 옆에서 널찍하게 자리를 잡은 인도 남자들이 자꾸 신경 쓰이게 하고 있다. 에고 처량해라. 앉아서 갈 수 있는 것만도 어디냐 싶었던 조금 전의 비운 마음도 내공이 덜 쌓여서인지 온데간데없다. 심란하게 앉아있는 데 자칭 의사라는 내 나이 또래의 인도남자가 유진이 자리에 와서 껴 앉는다. 보아하니 우리와 같은 대기자 신세인가 본 데 왜 자기 자리 두고 애들 좌석을 넘보고 있는가? 무례하게 굴기도 뭣해 몇 마디 나누었더니 잠시 후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얼마 후 열차내의 차장이 다가와서 표를 달란다. 분명 표 검사는 마쳤는데 이번엔 또 뭐여? 표에 무엇인가 적어주는 차장의 얼굴이 순간 환하게 빛난다. 순간 영화배우 브루스 윌리스의 미소를 보았다. 아, 우리의 침대 번호였다. 예약만 하고 승차하지 않는 자리를 재배치하면서 대기 번호에 걸린 사람들을 마법으로 풀어준 것이다. Good chance!



4. 벼르고 별러서 가볼만한 곳은?

우띠가 한 1년 정도 살고 싶은 곳이라면, 인도에 가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곳은 스라바나벨라골라이다. 벵갈로르에서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야 한다. 겹겹으로 둘러싼 모양새가 삼겹살을 연상시키는 버스 정류장은 수많은 버스가 드나드는 데 도대체 매표소와 승강장을 구별해 낼 수가 없었다. 길게 생각하기도 전에 제복 입은 사람들이 보이는 한 사무실로 들어가 알아보기로 한다. 말끔하게 제복 입은 사람이 안내해주는 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한참 물어본 끝에 우리가 타야할 버스의 승강장과 시간을 확인해준다. 기차 예약은 이에 비하면 또 아무것도 아니구먼.(이 경찰관아저씨는 나중에 우리 숙소까지 데려다주는 과잉 친절을 베풀어 우리를 애먹이기도 했다. 과유불급이라던가.....)

3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가면서 운전기사와 주위 사람들에게 스라바나벨라골라에 도착하면 알려달라고 부탁해놓기도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이곳이구나 하는 강한 확신이 들 정도로 독특한 모양새를 이룬 돌산이 우뚝 양편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에 진입하다보면 왼쪽에 보이는 큰 산이 주인공이고 오른쪽으로 난 약간 작은 산이 조연쯤으로 보이는데 각기 돌계단이 있고 그곳으로 쉴 새 없이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첫 인상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이후에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우선 물가가 저렴하다. 우리 식 백반이라 할 수 있는 meals(탈리를 일컫는 남인도식 명칭)가 20루피 정도로 어른 셋이서 이것저것 시켜서 배불리 한 끼를 먹어도 100루피 내외고 숙박비도 다람살라 순례자 숙소에서 머물렀는데 더불룸이 하루에 160루피다.(뭄바이의 1600루피 방을 떠올리시라) 우리는 이곳에서 이틀을 묵었다.

물가와 사람들의 순박함은 비례하는 것일까?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면 그들은 환한 미소로 웃어주거나 가벼운 인사말을 건넨다. 마치 이웃 동네에서 놀러온 사람을 대하는 듯하여 인정이 참 따뜻하다.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은 무관심도 부러움도 탐색의 눈길도 아니다. 그냥 평온하고 순박하고 편안하다. 골동품 가게의 아저씨와 인도의 옛 동전을 파는 아저씨와도 악착스레 흥정하지 않아도 된다.(물론 내 경우일 수도 있다. 유석이는 바가지를 썼으니까)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이곳은 자이나교의 성지 중의 성지로 아주 성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자이나교하면 무저항, 비폭력의 간디가 떠오른다. 그의 종교가 자이나교였기에 자연스럽게 그 가르침이 몸에 배었으리라. 공기 중의 날벌레가 입 속으로 들어가 죽을까 두려워 마스크를 한다거나,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를 밟아 죽일까 두려워 빗자루로 길을 쓸며 다닌다는 그들의 생명존중 사상과 고행을 중히 여기는 사상이 자이나교의 핵심을 이룬다고 하는 데, 그래서일까? 이곳 사람들이 평온한 것은?

산을 깎아 만든 500여 개의 돌계단을 숨 가쁘게 올라 정상에 이르면 17m의 거대한 나신상이 떡 버티고 서 있는데, 하나의 돌을 깎아서 만든 것이라 한다. 고마테슈바라라고 이름 붙여진 이 거대한 석상은 자이나교의 성인이라는 데 한 때 자이나교의 세력이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물론 지금도 12년마다 이 나신상을 우유, 요구르트, 기름, 사프론, 백단향 등으로 목욕을 시키는 축제를 열고 있다한다. (올해 그 행사가 열린다고 하는 데 우리가 너무 일찍 왔나 보다.) 밤에는 이 계단을 따라 드문드문 가로등이 정상까지 이어지는 데 또 다른 묘한 감동을 준다. 여우에 홀린 듯한 기분이랄까. 문득 오르고 싶어진다. 그에 비해 조연급의 맞은 편 돌산에 있는 옛 사원들은 쇠락하여 과거의 영화를 간직하고 있을 뿐 살아있는 성전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저 조용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 같은 것이 느껴지는 곳이다.

하여튼 그 이름도 외우는 데 2박 3일이나 걸린 이곳 스라바나벨라골라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만큼이나 거대한 감동과 인상을 남기는 곳이다. 한마디로 이곳은 10살짜리, 21살짜리, 그리고 40대 중반을 넘어선 나머지 두 사람. 이 모두를 만장일치로 대 만족시키는 곳이었다. 벼르고 골라 골라서 한 번 가 볼만한 곳이다. 강추!



5.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스라바나벨라골라의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었다. 40~50명쯤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를 저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체로 온 학생들이었는데 우리와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 광경에 왠지 가슴이 벅차오른다. 팬들에 둘러싸인 인기 연예인의 기분이 이럴까? 간절한 눈빛 세례를 받으며 서로의 카메라로 돌아가며 몇 장 찍고 나자 인솔교사로 보이는 한 남자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인도에선 늘 그렇듯 어디서 왔느냐, 이곳에 며칠이나 있을 예정이냐 등을 묻다가 갑자기 한국과 인도의 환율을 물어온다. 무엇이 궁금한 것일까? 깊은 우물 같은 큰 눈망울의 10대 학생들 틈에서 이 기습적인 질문 앞에 그저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다. 예전 같으면 나이가 몇이냐, 직업은 무엇이냐 등을 물어왔을 텐데. 이 질문에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 후 나는 이와 똑같은 질문을 두 번 더 받게 되는데, 한 번은 Goa 로 가는 밤 열차의 50대 여인한테서, 또 한 번은 뭄바이로 돌아가는 밤 열차의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내 또래의 의사한테서였다. 월급이 우리 돈으로 50만원이라는 이 내과의사는 진료비부터 수술비, 승용차 구입비, 한 끼 식사비까지 질문 내용이 무척이나 구체적이었다.

내 얼굴에서 돈 냄새가 나는 걸까? 아니면 어린 딸을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고 우리의 경제력이 궁금해진 것일까? 나도 한때는 어린 자녀와 함께 여행하는 외국인들을 보고 그 여유가 부러웠었다.

환율에 대한 의문. 이것은 그들의 경제가 빠르게 변하고 있고 경제력도 좋아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러고 보니 그 흔하고 흔하던 사이클 릭샤 한 대 보이지 않는다. 비쩍 마른 노인이 이끄는 릭샤를 도저히 가만히 타고 갈 수 없어 서로 바꿔 탔다는 어느 여행자의 여행담을 이젠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나보다. 등 뒤의 손님에게 걸핏하면 쇼핑안내를 하겠다하여 끝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면 잠시 숨죽이고 있다 얼마 안가 다시 쇼핑 얘기를 꺼내던 그 끈덕진 사이클 릭샤를 이젠 볼 수 없다보다. 온통 오토릭샤 뿐이다. 이들은 예전처럼 쇼핑을 강요하지도 행선지의 정확한 위치를 모르면서도 무조건 손님부터 태우던 그 전의 사이클 릭샤 하고도 다르다. 이는 남인도의 경제력이 델리를 중심으로 한 북인도와 다르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이번 여행은 북인도를 가지 않으니 확인해 볼 수 없다.

인도에서의 마지막 날.

뭄바이 센트럴역에 열차가 도착한 것은 새벽 6시.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탑승 시간까지는 약 20여 시간이 남았다. 마지막 하루를 아라비아해를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석양이 장관인 아라비아해. 그러나 우리를 위해 해가 서쪽에서 떠오를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우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사람 물결. 인도의 배 나온 아저씨들이 모두 나왔다. 사리를 곱게 입은 아가씨들도 어딘 가로 바삐 가고 있었다. 뿐 만이랴. 마치 개가 주인이고 사람이 하인인 것처럼 보이는 볼품없는 아저씨, 반바지 차림의 날씬한 청년, 퉁퉁한 중년 부부. 모두 아침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었다. 이중에는 양복 차림의 말끔한 신사도 있었다. 무언가 명함 같은 것을 나누어준다. 다 이어트 광고였다. 우리에게도 친절하게 한 장 건넨다. 먹을 것 먹고 운동하지 않고 쉽게 살 빼는 방법을 가르쳐준다는 데 한 번 관심을 보여 봐?

오차에서였던가? (4년 전) 조용한 시골 마을에 인파의 물결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지류가 모여 큰 강을 이루듯이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지류를 이루며 일제히 큰 강으로 합류하는 인파의 물결은 대단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무슨 축제여서 강으로 목욕하러 가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의 신앙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다시 현재의 뭄바이. 살아가는 모습이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너무나 똑같아 괜히 심심해진다.



6. 나는 때로 가수 이문세가 그립다.

이문세의 노래를 들으면 나는 인도를 떠올리는 버릇이 있다. 이 버릇은 11년 전의 첫 번째 인도 여행에서 비롯되었다. 여행 내내 한 대의 버스로 이동하였는데 길게는 30시간을 달리는 경우도 이따금 있어 이 때는 추위와 배고픔, 외로움이 짙어지면서 왠지 처량해지곤 했다. 이럴 때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적당히 우울해지고 적당히 감상에 젖고 적당히 위안이 되고 적당히 심신이 편안해지곤 했다. 평소에는 그 전이나 그 후에도 그때만큼 그의 노래를 듣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도 이따금씩 그의 노래를 듣게 되면 순간 인도가 떠오르고 인도가 몹시 그리워진다. 하여튼 그 때는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광화문 연가>등이 들어있는 2집 카세트테이프가 늘어나 버리고 말았었다.

그러면 지금은?

나는 여행할 때 이제 더 이상 휴대용 카세트나 MP3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결혼을 하면서부터다. 남편이나 딸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고 귀를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가족은 나를 외롭게 두지 않는다. 나의 고독을 원치 않는다.

혼자만의 외로운 여행을 원하는 건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문세의 노래가 주는 아련한 우울함과 감상 등이 여행이 주는 선물 중의 하나임을 알기 때문에 때로 그것이 그리울 뿐이다.



7. 이런 곳도 갔었다.

<마이소르> 릭샤를 한 대 대절하여 몇 군데를 허위허위 다녔는데 그중 국립 호수 공원은 너무나 깨끗하여 마치 뉴질랜드의 어느 공원을 연상시켰다. 보트도 있었다. 사람이 노를 젓는 보트보다 페달보트 대여비가 더 비쌌다. 아니 사람이 기계보다 못해? 그런데 오리보트가 아니네. 백조 모양일세. 자, 승선. 근데 페달이 너무 멀다. 거의 눕다시피 해야 겨우 발끝이 닿는다. 그래도 열심히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태양은 뜨겁고 온 몸에 땀이 나는 데 경치하나 끝내준다. 호수 가운데 서있는 나무 위에서 멋진 새들이 멋진 자태를 자랑하고 있고 물 위에서도 퍼드득 퍼드득, 그림 같은 광경이다. 영화 속 한 장면이다. 그때 관리소 직원들이 소리치며 우리를 부른다. 빨리 나오라고 재촉한다. 벌써 시간이 되었나? 시간 명시가 되어 있었던가? 기다리쇼. 우리도 힘들어 더 이상 페달을 밟을 기운도 없소. 보트에서 채 내리기도 전에 100루피의 벌금을 내란다.(대여비가 100루피였음) 호수 중앙으로 갈 수 없는 규정을 우리가 어겼다나. 우리도 그 규정 지키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러느냐고 따졌더니 계속 벌금 얘기만 한다. 그것도 서 너 명이. 땀과 더위로 얼굴이 벌개진 우리도 질세라 벌개진 얼굴을 더 붉힌다. 여기서 지면 안되지. 진지하기 이를 데 없는 직원들, 갑자기 그냥 가란다. 진작 그럴 것이지.

<코친> 수로유람을 신청해 놓고 덜컹 겁이 나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해일 피해 지역이 여기서 멀지 않다는 데. 나도 정신이 나갔나보다. 밤에는 해변에서 생선까지 구워 먹다가 모기에도 엄청 물렸다. 나야 괜찮은 데 어린 유진이와 유석이가 걱정이다. 말라리아. 콜레라. 전염병의 창궐. 어쩐다. 에이, 운명에 맡기노라.

다음 날 아침. 이번 여행 중엔 아침을 끓인 누룽지로 해결했는데 오늘 따라 그럴 기분이 아니다. 어제 사 놓았던 빵과 커피로 때우자. 유진이는 대신 콜라를 마신다. 평소 먹이지 않는 음료수라서 그런지 아침에도 콜라를 맛있게 마신다. 그래, 아무 거라도 잘 먹어야지.

보트를 타는 곳까지 승용차로 1시간을 달린다. 인도에서 타 본 차 중 제일 좋은 차다. 앞좌석에 앉은 서양 남녀 5명이 저희들끼리만 통성명을 주고받는 게 얄밉다고 생각하는 순간 유진이의 입에서 시커먼 물이 마구 나온다. 아침에 먹은 콜라와 빵이다. 어쩐다.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애는 안 간다 하고. 그래도 가야지. 모진 에미가 될 수 밖에 .

온통 야자수만 보인다. 깨끗하고 조용하다. 바람도 없다. 해일 우려는커녕 심심하기 이를 데 없다. 저만치서 염소가 울어대니 유진이가 맞받아 염소 우는 소리를 낸다. 녀석들이 또 운다. 유진이가 또 흉내를 낸다. 염소보다 더 염소 우는 소리를 잘 내는 유진이를 보고 보트에 탄 사람들이 즐거워한다. 유석이는 옆에서 조는 척 자고 있다. 바나나 잎에 얹어주는 점심을 맛있게 먹고 다시 유람을 시작하는 데 역시 심심하다. 밤 새 뜬눈으로 새웠더니 솔솔 졸음이 온다. 무료하다. 언제 끝나나. 돌아오니 오후 4시 30분. 하루가 너무 무의미하게 지나간 것 같은 데 몸은 피곤하다. 너무 긴장한 탓 일게다.

<고아>안주나 비치엘 갔다. 서양인 천지다. 벼룩시장도 장사꾼과 서양인 천지다. 좁은 시골길에 오토바이 천지다. 걷기에 더 좋은 길인데 아쉽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어떤 서양 남자,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데 길을 비키지 않는다고 뒤돌아보며 인상 쓰며 소리 지른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고아가 아니다. 여기 오려고 얼마나 빙 돌아서 왔는데, 속은 기분이다.

코친처럼 이곳에서도 교회(성당)를 실컷 본다. 인도에 가서 교회만 실컷 보고 왔다면 사람들이 믿을라나.



8. 진짜 궁금해 할 내용-여행 경비

(1)항공료 97만원× 2명=194만원
아동(75%) 74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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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만원

(2)비자비용 65,000 × 3 = 195,000원
(2)보험료 22,430 × 3 = 67,290원
(3)현지 경비 33,390 Rs × 25원 = 834,750원

✈ 기차요금이 액수가 큰 데 비해 일반 대중버스요금은 아주 저렴함.
✈ 옷도 한 벌씩 사 입었음(1,194루피). 골동품 구입(약700루피).
은반지(3개 660루피). 기타 기념품 약간(약 1,000루피)
✈ 600루피가 넘은 경우(숙박비 제외): 코친에서의 수로유람(1,000루피)
타지마할호텔에서의 음료수, 피자(도미노피자, 피자헛)
✈<피자헛>에서는 international과 Indian 피자 등 메뉴가 다양한 데
Indian 식 피자에 고춧가루 뿌려먹는 맛이 일품이었음.
✈ 인도인들이 주식으로 먹는 탈리(meals)를 20루피 내외로 먹을 수 있음-양도 엄청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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