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간: 2003. 1. 8 ∼ 1. 20

여행은 갈증이다. 채워질 듯 말 듯, 그러나 결코 채워지지 않는 청량음료 같은 갈증이다. 톡 쏘는 맛은 늘 새롭고, 식도를 넘어가는 순간 코끝까지 전해지는 전율에 한순간 몸서리를 치게 하고, 그 전율에 못 이겨 질끈 감는 눈. 그러나 눈을 뜨면 어느 새 목이 타오른다. 갈증은 청량음료로는 해갈되지 않는 것이다.

또 떠난다. 갈등이 없을 소냐. 왜 떠나는가, 화두처럼 붙들고 늘어진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처럼 결론은 이미 내린 상태다. 가보고 싶으니까. 단순하다. 배고프니까 밥 먹는다, 와 다름이 없다. 단순해지지 않고는, 가벼워지지 않고는 떠날 수 없는 게 여행이란 걸 서서히 깨닫기 시작한다.

단순하다고, 가볍다고?

세 식구가 함께 하는 여행은 이미 단순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여행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은 단순하고 가볍다고 했지만 그건 내가 나에게 거는 일종의 주문이다. 단순함을 가장한 무거움. 그 무게를 덜기 위한 교묘한 마음 속임이다. 떠나는 것도 공을 들여야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마음의 공을 들여야 한 번 떠날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다, 내게는.
그렇다면 물질적인 노력은?

<방콕>
이번엔 말로만 듣던 방콕엘 간다. 내 여행엔 도무지 두서가 없는 것 같다. 쉽게들 드나드는 방콕은 여행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도록 한번도 갈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교육 탓이다. 나에게 방콕보다 런던이나 로마 혹은 파리가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순전히 교육 탓이다. 고등학교 한 시절을 화실에서 보낸 것, 대학에서의 몇 계절을 무수한 영미 작가에게 바친 것, 그리고 직업으로서 아이들에게 영어 몇 마디 건네는 것, 이 모두가 나를 동양보다는 서양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방콕에서의 일정은 이틀이 채 되지 않는다. 밤에 도착, 다음다음 날 새벽 앙코르를 향해 출발이니 주어진 시간은 만 하루. 하루종일 유명 유적지만 본다?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얘기라도 하려면 그래, 한군데 정도는 가 줘야지. 왕궁엘 가본다. 초입에서부터 우루루 단체 관광객들 입장이다. 단체 사진 찍는 그들을 배경으로 한 장 찍는다. 아예 가이드북을 들고 태국이라고 쓰여진 부분을 찍히게 한다. 이번엔 서양 여행객 몇을 전경에 놓고 찍는다. "태국 벌은 참 작네!" 놀라는 남편 말에 자극을 받아 화분 속 연꽃 언저리에서 윙윙대는 작은 벌 두 마리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댄다. 표준렌즈 밖에 없는 내 카메라로는 찍어봐야 잘 찍히지도 않을텐데 그렇다고 호들갑을 떨며 찍고 싶은 곳도 특별히 없다.

그런 내 기억 속에 더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화려한 그 왕궁이 아니라 왕궁으로 가는 길에 겪은 작은 해프닝이다. 상상외로 깨끗한 전철에서 내려 배를 타러 갈 때였다. 갑자기 딸아이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한다. 딸아이의 배변은 늘 갑작스러워서 길을 나서기 전에 한번쯤은 변기에 앉혀야 한다. 하여튼 화장실을 찾아 두리번 거리길 10여분, 시간은 흐르고 영어는 통하지 않고, 화장실이 있을 법한 곳을 가보면 역시 아니다. 그때 우연히 눈에 들어온 사원 같은 건물이 있었다. 개인 법당쯤으로 보이는 데 노인 한 분이 마당에 앉아있어 화장실을 묻는데 안쪽에 대고 사람을 부른다. 밝은 미소를 띄며 또 한 노인이 나와서는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얼른 한국인이라 대답하고 화장실을 묻는 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남편이 오줌 누는 몸짓을 보여주자 뒤쪽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 와중에 노인이 화장실이란 단어를 태국어로 가르쳐준다. 고마운 마음에 약간의 돈을 시주함에 넣고 나온다. 지금도 그 법당의 노인의 미소를 떠올리면 마음이 밝아지곤 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화려한 왕궁보다 이름 모를 사원의 노인의 미소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카오산 거리에 드디어 입성. 얼마나 많이 듣던 거리이름인가. 방콕하면 떠올리게되는 여행자 거리. 내가 꼭 와보고 싶었던 곳은 바로 이런 거리였는데......

노천 카페, 기념품 가게, 게스트 하우스, 티셔츠 가게, 신발 가게,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쏘다니는 거리. 그런데 너무나 낯이 익다. 기지촌을 고향으로 둔 내게 이런 거리는 아늑한 고향으로 다가온다. 카페에 앉아 점심과 함께 맥주를 마신다. 맥주에 쉽게 취하는 나는 기분 좋은 취기를 느낀다. 아, 이대로 여기서 맥주만 마셔도 방콕 접수는 일단 성공이다.
백화점 쇼핑은 내게 피할 수 없는 여행지의 명소 탐방. 이름도 멋진 ZEN 백화점에서 가벼운 기념품을 두 어 개 산 후 밖으로 나오니 달리 가보고 싶은 곳이 없다.
백화점 앞 광장에는 테이블로 가득하다. 맥주 로고가 크게 있는 것으로 보아 노천 호프점인가 보다. 맥주보다는 새끼돼지 바베큐가 군침을 당긴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자 무대에서 밴드가 시작되고 하반신을 오묘하게 흔드는 여자 가수의 노래 소리가 들린다. 방콕의 유쾌한 밤 풍경 속에 절묘하게 어울리는 이 가수를 오래 기억하리라.
방콕에서의 하루가 아쉽듯이 여기서 끝나는 방콕 이야기가 서운해 하나 더.
유럽 배낭 여행이었다면 쓸 수 없는 이야기, 바로 먹는 얘기다. 가격이 저렴해서 잘 먹을 수 있다는 것말고, 열대 과일을 골라서 실컷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24시 편의점에서 종류별로 조금씩 사본다. 대여섯 가지를 조금씩 맛볼 만큼만 사니 값도 얼마 되지 않는다. 호텔에 돌아와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한 가지 한 가지 정복해 나간다. 우와, 기가 막힌 맛이다. 무척 달콤하다. 방콕에서의 하루가 더불어 달콤해진다.


<앙코르>

세계적인 유적지인 앙코르가 있는 씨엠립. 누군가는 그랬다. 앙코르 여행의 백미는 육로 이동에 있다고. 험하디 험한 비포장 도로를 먼지를 날리며, 혹은 웅덩이에 빠져가며 몇 시간씩 이동하는 데 나중에는 엉덩이가 짓무를 정도라고. 그래 기대가 컸다. 94년 초 인도 여행 때의 육로 이동의 매력이 그리웠던 터라 내심 엉덩이가 짓무를 각오를 하고 무너진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건너가는 스릴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아무런 탈 없이 예정시간 보다 일찍 도착하는 게 아닌가. 바람맞은 기분이 이럴까.
글로벌 게스트 하우스. 정문이 바로 마주 보이는 2층 한가운데의 방이 우리 방이다. 준비해간 전기 코펠에 누룽지를 끓여 저녁을 해결한다. 지난 가을, 하루에 한 번 레귤러 피자 만한 누룽지를 만드시느라 친정 어머니는 땀 깨나 흘리셨을 것이다. 철없는 딸 내외와 외손녀의 여행을 위해서.
할 일 없이 발코니에 앉아 있자니 깜깜한 밤하늘에 총총한 별들이 일제히 하늘로 올라간다. 하, 이곳은 별들이 하늘로 올라가기도 하는구나. 처음 맛본 열대과일 마냥 신기해했더니 이곳 특유의 불꽃놀이란다. 아마도 어느 사원에서 열리는 기도의식이리라. 앞으로 3일 동안 보게 될 앙코르가 서서히 신비스럽게 다가온다.

앙코르 제 2 일.

숙소에서 나오는 바게뜨와 커피, 바나나로 아침식사를 마친 후 간단한 준비를 하고 간밤에 예약한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웬 캄보디아 남자가 자신을 우리 운전기사라고 소개한다. 우리는 이미 예약했다고 하니 잠시 주춤거린다. 그 옆에 있던 사람이 우리 기사가 맞는다하기에 멋쩍게 인사를 나눈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주는 청년이다. 그 인상대로 그는 아주 성실하게 3일 동안 우리를 최고의 손님인양 최대의 예의와 성의로써 우리의 길동무 겸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어딘가 우수 어린 듯한 검은 눈빛은 언제나 우리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한 순하디 순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기사를 포함한 렌터카 비용이 하루에 20불. 2만원이 조금 넘는 돈으로 온갖 호사를 부리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조금 무겁다.

오후,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저녁도 먹을 겸 올드 마켓에 간다. 전력사정이 좋지 않은지 동네가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다. 캄보디아에서 치안이 가장 잘 보장된 곳이라고 하니 별 일이야 없겠지. 가이드북에서 본 식당을 찾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길 수 차례, 드디어 가긴 갔는데 책에 소개되어 있는 곳 치고는 좀 그렇다. 아니어도 할 수 없다. 배고 너무 고파 가릴 처지도 못되었으니까. 출입문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광고 전단 마냥 매달아 놓은 맥주병들이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다. 주문한 샌드위치와 볶음밥 1인분이 먼저 나와 딸아이와 남편 앞으로 돌려놓는다. 나머지 1일분이 영 나오지 않는다. 먹어보란 말 한마디 없이 혼자 조용히 먹고 있는 남편이 순간 미워진다. 빈말이라도 좀 해주면 안되나. 딸아이가 먹지 않고 접시 한 쪽으로 골라놓은 샌드위치의 야채를 주어먹고 있자니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참지 못해 한마디 던지니 남편이 먹다말고 밥을 내 앞으로 밀어놓는다. 배고픔에 한 숟가락씩 세면서 먹자니-남편 몫이니까- 이번에는 식당 종업원에게 자꾸 눈이 간다. 아니 우리보다 늦게 온 옆 테이블엔 벌써 음식이 나오고 있잖아. 다시 재촉을 해서야 겨우 밥을 더 먹을 수 있었는데, 이 일 이후로 나는 남편에게 무서운 여자로 다시 한번 각인시키게 되었다.

숙소로 돌아올 때는 재미 삼아 시클로를 탔다. 1달러 부르는 것을 겨우 3000리엘(1달러=4000리엘)로 흥정을 하고 숙소 근처에서 내려 차비를 주려고 하니 돈이 모자란다. 1달러 짜리 주어도 되는데 거스름돈 몇 푼(300원) 아끼겠다고 순간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지갑 한쪽에 남아있던 태국 지폐 100바트(1바트=30원) 짜리 두 장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 다시 태국에 가랴. 어차피 쓰지 못할 남의 나라 돈. 주저 없이 두 장 모두 꺼내 시클로 기사에게 건네며 태국 돈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보니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아니 겨우 600원인데 뭘 그리 좋아하나 하며 우리도(남편, 나) 껄껄 웃으며 돌아왔고, 여기에서 생각이 멈추었으면 그것으로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이일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돈을 잘못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600원이 아니라 6000원 이었던 것이다. 6000 - 900 = 5100원을 팁으로 주게 된 것이다. 좋은 일 했다고 돌려 생각한다. 한 가정의 가장일 그가 오늘은 기분에 고기라도 한 근 사 가지고 가면 그래 그것으로 족하지. 나도 이런 횡재를 바라노라!

앙코르 제 3 일.

새벽 5시에 일출을 보러 가기 위해 단잠에 빠진 딸아이를 깨운다. 안쓰러운 생각에 "대체 여행이 뭐기에" 잠시 자책에 빠지는 순간 우리의 착실한 기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차 문을 열어준다. 깔끔한 어제와는 달리 낡은 티셔츠 차림으로 보아 정문 옆에 있는 간이 숙소에서 이곳 종업원들 틈에서 잠을 잔 모양이다. 집은 어디일까.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여기저기 웅성거리는 소리로 보아 벌써 사람들이 많이 와 있는가 보다. 새벽 추위를 피해 딸아이와 나는 택시 안에서 잠시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 각 나라 사람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왜 일출과 일몰 장면을 좋아하는 걸까. 인도의 바라나시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안개 속을 오토릭샤로 달리던 일, 네팔 포카라의 히말라야 일출을 보기 위해 보이지도 않는 새벽길을 앞다투어 걷던 일 등이 떠오른다.

그러나 장엄한 앙코르와트사원 위로 솟는 태양은 결코 장엄하지도 화려하지도 설레게 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히말라야의 일출은 장엄하고, 바라나시의 일출은 나름대로 새벽 질주의 수고로움에 답하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는데 말이다. 차라리 내가 살고 있는 소래 포구의 해뜨는 광경보다 못하다. 야트막한 산세에 이리저리 가려 시원한 지평선은 아닐지라도 소래 포구의 일출은 주위에 있는 산, 들판, 포구, 도로를 모두 감싸안으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하게 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데 말이다. 앙코르와트 때문일까. 태양의 화려함을 압도하는 그 무엇이 앙코르와트 사원에 있는 것일까.

저녁에 압살라 공연을 보러간다. Koulen Ⅱ 레스토랑이라는 곳인데 엄청 사람이 많다. 앞 뒤 옆이 거의 한국사람들이다. 공연은? 소박하다고 할까, 상품화가 덜 되었다고 할까. 네팔에서 본 민속춤도 그렇듯 대부분이 갑돌이, 갑순이 내용이다. 압살라춤은 앙코르 사원에 조각된 압살라의 여러 동작을 재현한 것이라는 데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인도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아무래도 인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이다. 또 대책 없이 인도가 그리워진다. 재미있는 것은 압살라 춤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무희와 기타 다른 무희를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인데 복장의 화려함말고 몸의 특정 부분의 과장이 심하다는 점이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가슴과 엉덩이를 최대한 앞뒤로 빼는 데 내가 직접 해보니 전혀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갑돌이, 갑순이가 더 정감이 가고 흥겹다.


앙코르 제4일

마지막 날이니 뭐 특별한 일을 저질러야하는데.
내리 사흘이나 앙코르 유적을 보려니 머리에서 쥐가 나려고 한다. 많이 보고 생각도 많이 키워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좀 벗어나고 싶기도 하다. 질질 끌며 숙제를 못 마친 기분이라고나 할까. 왜 이렇게 볼 게 많은지.

그래서, 북한 사람들이 경영한다는 <평양랭면>으로 점심 먹으러 가는 발걸음이 경쾌하고 들뜬다. 함께 온 일행에게서 들은 것도 있겠다, 기대감과 호기심을 채우러 간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북한 아가씨의 서빙을 받으며, 직접 북한에서 공수해와서 만든 냉면을 먹는 맛은 내가 그동안 먹어 본 것 중 으뜸이다. 부모님의 고향인 개풍과 해주를 말하니 고개를 갸우뚱, 바뀐 지명 탓이겠지만 왠지 서운하다. 짝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마음은 설레는 데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어색하고 쑥스럽다. "바늘로 콕 찌르면 하얀 우유가 나오겠습니다." 피부가 하얀 딸아이를 보고 던지는 말이다. 그들 특유의 억양과 예기치 못한 표현에 반쯤 넋이 나갈 정도가 된다. 하하하.

삼일 동안 함께 한 택시 기사에게 북한과의 관계를 대강 설명해주며 냉면을 대접한다. 냉면 한 그릇에 담긴 우리의 흥분과 남북한의 뜨거운 동포애를 그가 알까마는 말없이 맛있게 먹어주는 그가 애처로와 그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차라리 악착같은 그래서 은근히 수고료를 바라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애처롭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물 같은 깊은 눈망울에서 대접받는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 그간의 경비를 계산하며 이름과 주소를 묻는다. 어색하게 적어주는 그의 이름은 Mr. No. 이제야 이름을 물어 보다니, 우리도 참 무심한 사람들이구나.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늘 그를 찾으면 옆에 있어주었으니까. 주소는 쓰지 못한다. 어쩌면 주소가 없는 집에서 살고 있는 지도 모를 일.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보내주고 싶었는데. 약간의 수고료를 주며 좋은 아내 얻고 부자가 되길 바란다고 말해준다. 그간 정이 들었나보다. 그를 보내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진다. 오늘따라 우리 방 앞 발코니에 있는 테이블이 텅 비어 있다.


<앙코르와 영화>

여행 전에 이곳에 관한 영화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니 보았다고 하더라도 정확하게 앙코르를 짚어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한달 남짓 되는 기간 동안 세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비로소 앙코르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본 세 편의 영화에선 공통적으로 앙코르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강한데 그런 만큼 화면에 비치는 앙코르는 대단히 짤막하고 압축적이어서 앙코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알아보기도 힘들 것이다.

「지옥의 묵시록」에선 거의 영화의 마지막 장면쯤에 앙코르가 나오고 자야바르만 7세의 두상도 빠르게 지나간다. 앙코르의 모습도 정글 속에 묻힌 상태여서 복원되기 전의 앙코르가 저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울창하다 못해 공포감마저 어린 앙코르를 배경으로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전쟁과 광기? 전쟁과 공포? 무의미한 전쟁?

「툼 레이더(Tomb Raider)」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답게 우선 재미있다. 마치 끈끈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듯 이곳 저곳 사원을 감싸고 있는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따 프롬>에서 촬영한 부분은 매우 적절하고도 감동적이다. 그곳은 확실히 지상보다는 지하의 세계가 더 그럴 듯해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홍콩 영화「화양연화」가 있다. 주인공들은 각기 바람을 피우고 있는 남편과 아내를 두고 있다. 그들 역시 서로를 위로하며 가까운 사이가 되어간다. 그들에겐 '바람 피운다'는 속된 표현 이상의 진지함과 긴장감이 있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놓고 떠나는 이별 연습은 애처로움마저 짙게 배어있어 가슴 아리게 한다. 재회의 가능성은 우연을 허락하지 않고 세월은 어느 덧 3년이 흘러 서로를 그리워만 할 뿐 다시 혼자가 되어 버린다. 왜 남자 주인공은 앙코르로 갔을까. 폐허 같은 사원에서 그는 벽돌 틈으로 무엇인가를 찾는 듯 깊이 들여다보다가 무표정한 얼굴이 된다. 실망도 절망도 아닌 체념 같은 것. 과거는 돌아올 수 없고 어쩔 수 없는 것. 돌 벽 위에 피어난 한 송이 야생화 혹은 야생초 같은 것. 그리움과 슬픔 속에서 한 송이 꽃을 피워낸다. 외롭게. 조용하게.

이 부분은 앞으로도 계속 채워나가야 할 분야이다. 할리우드가 90년대의 티베트에서 이곳 캄보디아로 관심을 바꾸고 있다 하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영화가 이곳에서 만들어질 지는 모를 일이다. 앙코르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무궁무진할 터이니 말이다.


<프놈펜>

새벽 6시. 프놈펜을 향해 출발. 며칠 동안 먹은 바게뜨와 맛없는 커피도 언젠가는 문득 그리워지겠구먼. 똑 똑 흐르던 화장실 수도꼭지와 내 손만 대었다하면 하루 한차례씩 고장났던 세면대와 열심히 고쳐댔던 솜씨 좋은 남편, 모처럼 맡긴 세탁에 속옷이 벌겋게 물들어 황당했던 일, 숙소 종업원들이 여가에 즐기는 그네들식 제기차기를 일없이 멍청이 바라보던 일, 종업원들에게 군림하는 한국인 주인과 야무진 그의 부인(태국인 인지, 캄보디아인 인지 잘 모르겠다), 혹시나 했던 기대를 무참히도 무너뜨린 된장찌개. 그래도 이곳 글로벌 게스트 하우스를 떠나려니 서운하고 아쉽다.

버스를 타고 얼마나 갔을까. 적당히 흔들리는 비포장도로가 편안해질 무렵 동이 터 오르는 모습이 자못 감동적으로 다가오지만 카메라는 꺼내지 않는다. 누군가 그런다. 연하장에 나오는 그림 같다고. 렌즈 쓸만한 것 하나 장만하지 못해 매 번 벼르기만 하더니. 렌즈 보다 여행비 마련에 늘 급급했으니 어쩔 수 없지. 모두 기억 속에 담아가야지.

배로 갈아탄다. 갑판 위의 벤치에 겨우 자리를 잡고 좋아했더니 아래층 통로 간이의자에 앉아 가는 것만도 못하게 될 줄이야. 서 너 시간 내내 세찬 바람을 막느라 겨울옷과 담요를 모두 꺼내 입고 뒤집어써야했으니. 그래도 우리가 떠있는 똔레삽 호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이국적이어서 그 추위를 보상하고도 남았다. 우기 때를 대비해 긴 막대기들 위에 지은 원두막 같은 집들, 중고등학교 시절 사회과부도에서 보던 그 수상가옥이다. 우리야 한갓 관광객일 수밖에 없음을 그네들의 보금자리를 스치듯 지나면서 깨닫는다. 우리에게야 한 폭의 낭만적인 풍경화지만 저네들의 삶은 또 얼마나 고단할까. 그래도 여전히 이국적으로 다가오는 호숫가 집들을 몇 장 카메라에 담으며 어린 시절 동네를 찾은 한 미군병사의 카메라를 떠올린다. 우리의 과거 모습도 그들에겐 이국적이었을까?

드디어 프놈펜. 육로 이동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니구먼.
걸리버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 점심을 먹는다. 김밥이다. 모처럼 맛있게 먹는 딸아이를 보니 흐뭇하다. 몇 군데 볼만한 곳을 찾아보지만 못 찾아도 그만, 하는 심정으로 시내를 서성거린다. 인솔자의 사전 주의도 있어 될 수 있는 한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 밤에 으슥한 곳을 다닌다거나 마약을 팔기 위해 접근하는 사람들을 조심하란다. 치안이 아직 불안하다고는 하지만 잘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저녁을 먹기 위해 유명하다는 식당엘 간다. 낮에 시클로를 타고 돌아다니다 우연히 찾게 된 곳이다. 역시 눈이 보물이라니까. 전망이 좋은 2층은 손님들로 혼잡하고 몹시 시끄럽다. 주로 외국인이다. 유명하긴 유명한가 보네. 사진첩으로 된 메뉴는 영어로도 씌어 있어 보기는 쉬운 데 종류가 100여 종이 넘는다. 코끼리 고기, 비둘기 요리도 있다. 야, 굉장하다. 맛이 어떨까, 궁금해진다. 주문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일단 주문이 끝나면 종업원들이 많아 신속하게 식탁이 차려진다. 음식은, 흠잡을 데가 없다. 캄보디아에서 먹은 음식 중 제일이다. 가격도 적당하다. 맛있는 음식 덕분에 프놈펜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다음 날.
인솔자의 주선으로 버스를 한 대 빌렸다. 일인당 2달러. 다름 아닌 킬링필드의 현장을 답사하러 가는 것이다.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는 역사의 현장. 희생자의 두개골을 모아 탑을 쌓고 수십 명이 죽임을 당한 구덩이들을 보존하고 있다. 당시 감옥과 고문실로 쓰였던 박물관도 갔다. 이젠 아우성도 분노도 절규도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저 마음 속으로 조용히 묵념을 올린다.

뭐라 해도, 누가 뭐래도 구경 중의 구경은 역시 시장이다. 프놈펜에선 어느 곳보다도 중앙시장이 우리 가족의 주무대였다. 유진이의 1달러 짜리 선글라스, 남편과 나의 새 신발(샌달), 4달러 짜리 DVD 대 여섯 장, 티셔츠 두 어 장, 그리고 시장 한구석에서 먹는 현지 음식. 몇 푼 깎기 위한 치열함이 살아 있는 곳. 어느 새 나는 흥정을 즐기고 있었다.

프놈펜의 마지막 밤이다. 먹는 게 남는 것? 불타는 밤? 더도 말고 딱 커피 한 잔만 마셨으면. 자판기 커피라면 더 좋을 텐데. 간절한 커피 생각을 접어두고 저녁을 먹으러간다. 남편은 알고 있으리. 마누라 제 때에 밥 먹지 않으면 사나워진다는 것을. 어제 갔던 그 식당엘 다시 간다. 오늘은 메뉴 선택에 고민이 없다. 이미 랍스터로 결정하고 들어왔으니까. 값은 또 얼마나 저렴한가. 지난 번 한국에서 먹던 10만원 짜리는 맛이 형편없었다. 그것도 벼르고 별러 몇 년 만에 먹었는데. 그런데 이곳은 너무나 저렴한 것이다. 12달러.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런데, 결론은? 너무 맛있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싹싹 밥을 비벼서 다 먹었다. 비록 우리가 생각한 모양의 랍스터는 아니어서 크기가 작고 모양도 길쭉했지만. 돌아가면 한 번 확인해봐야지.

커피를 드디어 마시긴 마셨다. 숙소 앞 Rose Bar에서. Bar가 본래 의미하는 것을 잠시 망각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옷을 야하게 차려입은 호스티스에게 커피만 주문하다니 왠지 쑥스러워 얼른 커피만 마시고 나와 버렸다.


<호치민(사이공)>

내가 북인도와 네팔을 좋아하는 것은 유채 꽃을 질리게 보면서 길을 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스페인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가을 코스모스 마냥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선인장이라는, 우리에겐 화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야생초일 수 도 있다는 색다름 때문이다. 내가 한겨울의 영국을 좋아하는 것은 저 푸른 초원 위에 원 없이 양떼를 보며 양을 셀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기록을 추가한다.

내가 캄보디아를 가슴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무자비한 비포장도로 옆에 피어난 그 수많은 연꽃 때문이리라. 진흙 속에서 피어난다는 꽃, 연꽃. 길가에 잠깐 잠깐 나타나는 작은 연못에는 가녀린 연꽃이 하나 둘 씩 다소곳하게 피어있었다. 내 눈은 언젠가부터 연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꽃, 연꽃. 작은 연못이건, 큰 연못이건 으레 물이 있는 곳에는 연꽃이 피어 있었다. 물 속에서 피어난 꽃. 비포장도로 위, 차가 지나갈 때마다 먼지 바람이 뽀얗게 일어났지만 연꽃은 그 고상한 자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고고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베트남 국경을 겨우 통과하니 베트남 인부 두 명이 우리의 배낭을 하나씩 들고 간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벌써 저 만큼 앞서가고 있다. 뜨거운 뙤약볕에 모처럼 빈 몸으로 걸어가는 남편을 보니 덩달아 내 마음도 가벼워진다. 그런데 이런 일에는 늘 대가가 있는 법, 2달러를 요구한다. 마침 국경 사무실에서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베트남화폐단위)을 꺼내 이것저것 뒤적이고 있었더니 50,000동 짜리를 가리킨다. 2달러면 30,000동(1달러=15,000동)인데, 이 사람들이 우리를 뭘로 보고......어쩐다. 분명 우리가 바가지를 쓰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이 난감한 상황을 피할 도리가 없다. 베트남은 처음이고, 일행들은 저만치 뒤에서 올 생각도 않고 있고, 주위엔 온통 베트남 사람들이고, 할 수 없이 1달러 짜리 두 장을 주고 만다. 그래도 잠시나마 짐에서 벗어나지 않았던가. 나중에 베트남 물가가 엄청 싸다는 것을 알고 분개하긴 했지만.
공항에서 호치민 시내까지의 도로는 잘 닦여져 있었다. 말 그대로 발전도상에 오른 듯한 활기찬 분위기다. 어둑해질 무렵 우리의 목적지이며 여행자거리로 알려진 팜 응우 라오에 거의 도착할 무렵 그동안 조용히 있던 딸아이가 반색을 하며 떠들기 시작한다. '실내포장마차'라는 한글 간판을 보고 흥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한글을 더 많이 찾아내나, 게임을 딸아이와 하고 있자니 차창 밖으로 밀려오는 오토바이 물결에 정신을 빼앗기고 만다. 도도한 물결이란 표현이 이런 경우에도 어울릴까? 지금까지는 인도 자이푸르와 바라나시의 오토바이 행렬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기록 갱신이다. 기록 갱신에 더해 그림 한 폭 두뇌에 각인시킨다. 새하얀 아오자이, 베트남 밀짚모자에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마스크를 한(매연이 심해서 마스크를 쓰는 사람이 많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베트남 아가씨들이 당당하고 능숙하게 오토바이를 타고 간다. 그네들은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우리가 부럽겠지만 나는 오토바이를 맘껏 탈 수 있는 그네들이 참 부러웠다. 그건 딸아이도 그랬다. 프놈펜에서 오토바이를 딱 한 번 탈 기회가 있었는데 난생 처음 타보는 딸아이가 너무나 좋아하는 거였다. 제 아버지한테 한국에 돌아가면 오토바이 한 대 사서 학교 갈 때 태워달라고 할 정도였다.

사이공(공식명칭은 호치민)에서 삼일을 잤는데 역시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은 먹는 게 단연 압도적이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잘 먹는 편이어서 어딜 여행해도 음식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황에 따른 적응과 호기심 때문이지 그 자체가 늘 즐겁고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곳 사이공은 그렇지 않다. 먹어 본 모든 음식이 맛있다. 7년 전 유럽 여행 때는 주로 빵 종류로 끼니를 해결했는 데 그중 만만한 것이 바게뜨 인지라 물릴 정도로 많이 먹어서 나중에는 바게뜨의 '바'자만 들어도 인상을 그을 정도로 후유증(?)이 심각했는데 이곳의 바게뜨(베트남어로 반미라고 부른다)가 그 원한을 해독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곳 음식 중 제일 맛있게 먹은 것은 퍼(Pho)라고 불리는 쌀국수로 특히 함께 넣어 먹는 향미 채소가 좋았다. 인도의 맛살라와도 또 다른 맛이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도 왔다 갔는지 그 사진이 붙어있는 유명한 식당(「Pho 2000」)의 쌀국수는 정말 맛있어서 그릇을 입에 대고 국물까지 후루루 마셨더니 종업원이 숟가락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먹는 것이 식사 예절에 어긋난다는 것을 돌아와서야 알았다. 이런 사소한 깨달음도 여행이 주는 매력이겠지?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맥주에도 얼음을 넣어 마신다는 것이다. 우리 맥주의 톡 쏘는 맛도 없는 밋밋한 맛에 얼음까지 넣다니, 이곳에 일년쯤 살아본다면 이해가 가려나? 하여튼 그런 대로 이곳에서도 맥주는 여행의 멋을 더해주는 본연의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방콕 카오산 거리의 오픈 카페에서 한낮에 마시는 맥주는 그 맛보다 한낮에 알콜을 입에 댈 수 있다는 일탈이 해방감을 주는데, 이곳 사이공에서 마시는 맥주의 맛은 그냥 별 의미 없이 한가하게 마실 수 있어서 좋다. 안주를 따로 팔지 않는 맥주는 아무리 마셔도 몇 푼 되지도 않는다(우리나라에 비해).
별 의미 없이 한가하게? 마약을 하는 영화 속의 남자주인공(마이클 케인)이 그렇게 보였다. 영화 The Quiet American에서였다. 사이공에서의 마지막 날, 일찌감치 호텔 체크아웃을 한 우리 가족은 비행기 탑승 시간인 자정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말이 밤 12시지 정말 긴 하루였다. 시장 쇼핑(아오자이를 사달라는 딸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일찌감치 가야했음),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통일궁 관람 등 시내 순례를 마친 우리는 더위를 피해 다이아몬드 백화점으로 갔다. 갑자기 쐬는 에어콘 바람 때문에 화장실을 두 세 번 다녀오니 아이쇼핑할 기운도 없다. 물어물어 영화관을 찾아 제일 빨리 볼 수 있는 프로를 고르다가 보게 된 것이 바로 The Quiet American이였다.

주인공 마이클 케인(Michael Caine, 69세)이 지난 2000년에 영국에서 엘리자베스2세로부터 지사작위를 받은 사실이나 얼마 전 영국에서 The Actor of the Year로 선정된 사실은 여행 후 돌아와서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고, 이 보다 내가 이 영화를 진지하게 보게 된 이유는 이 작품이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의 소설을 영화화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대학 시절 영미소설 시간에 읽은 <사건의 핵심(The Heart of the matter)>의 영향력은 큰 것이어서 그 후 종교에 대해서 혹은 자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싹튼 종교에 대한 고민들은 인도 여행을 통해 한층 가열되어 어느 덧 겉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긴 했지만. 그뿐인가. 벽 위로 기어다니는 도롱뇽에 대한 아주 사소한 묘사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여행 중 도롱뇽을 보게 되면 나는 자연스레 그린의 <사건의 핵심>을 떠올리고 주인공 스코비가 되어 그의 고민을 다시 생각해 보곤 한다. 하여튼 20대 초반의 나는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행복할 수 있었고 지금도 추억처럼 그를 떠올리곤 하는 데, 이 영화가 바로 그의 영화라니. 예기치 않은 해후에 가슴 설레며 영화에 빠져드는 데, 옆에 있는 유진이는 팝콘과 음료수를 모두 해치우고는 단잠에 빠져들었고 그 옆에 앉은 남편도 별 기척이 없다.

점심을 먹으러 어제 갔던 식당에 다시 간다. 두 번 째. 익숙하다. 설렘은 줄었지만 여전히 쌀국수는 맛이 좋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그것이 대부분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에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이상하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서 다시 시간이 흘러 여행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해질 무렵, 가장 오랫동안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기막힌 풍광, 화려한 유적지, 유쾌하게 보낸 시간들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조용히 시간을 보냈던 순간들이 아닐까. 딱히 말하기는 힘든 그러나 기억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굳이 기록을 남기지 않아도 언제나 반추할 수 있는 것들 말이다.

작년 터키 여행 때, 다른 여행자들은 가이드를 동반하여 바쁘고 알차게 시내 투어를 하는데 우리는 미처 그 방법을 몰라 한나절 동안 배만 왕복으로 타고 있었다. 할 일도 없어 2층 식당에 앉아서 한가하게 물고기를 고르고 있는 그곳 주민들과 그 옆을 얼씬거리고 있는 고양이 몇 마리를 우리 역시 아주 한가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어느 경험보다 선명하게 남아있다. 반면 한때 감탄과 기쁨, 놀람을 자아냈던 것은 사진이나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어느 새 사르르 잊혀져갈 뿐이다.

그래서 나는 길지 않았던 이번 여행을 사진처럼 이렇게 기록을 남기려고 애쓰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록하지 못하는 무위의 순간을 나는 아직도 여행하고 있다.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2003.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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