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여행기
여행기간 : 2002년 1월 7일 ~1월 21일
훌쩍 떠난다고? 배낭 하나 둘러메고 마음가는 대로 가는 것이 진짜 여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 그런 여행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듯이 비행기 한 번 타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년 이상 땀을 흘려 악착같이 모아야한다. 여행 경비를, 여행 정보를, 그리고 튼튼한 다리의 힘을.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연이다. 오랜 기다림이다.
터키. 일년 내내 남인도만 생각하고 있었다. 작년에 인도에서 만났던 인도인 친구와 이메일도 꾸준히 주고받으며 마음은 벌써 인도의 남부를 헤매고 있었는데 미국 대참사 사건 여파로 인도도 평화스러운 땅이 이미 아니었다. 그러다 얼떨결에 생각한 곳이 터키였다.
얼떨결? 아니다. 10여 년 전 교무실 내 옆자리에는 박식한 선배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 분은 틈만 나면 지리부도를 펴놓고 상상 속으로 세계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 분은 여러 나라 중에 터키를 제 1의 여행지로 꼽았는데 그 이유는 동양과 서양이 그곳에서 만나기 때문이라 했다. 그때만 해도 터키는 저 멀리 관심밖에 있었다.
그러다 7년 전 런던의 어느 대형 서점에서 표지 사진이 마음에 들어 책을 한 권 산 적이 있다. 구부정한 허리에 우수에 젖은 눈빛을 한 평범한 터키인 사진이었다. 물론 한동안 그 책을 읽지도 못한 채 책장 한구석에 놓고 사진만 이따금씩 감상하곤했는데 바로 그 책이 터키에 관한 책으로는 꽤 유명하다는 것을 실제 이스탄불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터키는 이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내 속에도 터키에 대한 설렘과 긴 기다림이 있었다. 내 자신도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터키를 향한 마음이 이번에 터키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터키는 우선 어지러움으로 다가왔다. 가는 곳마다, 보는 것마다 모두 역사의 흔적이라 그 갈피를 헤아리기가 무척이나 힘겹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이스탄불을 일컬어 “인류문명의 살아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 했듯이 이 땅은 메소포타미아와 오리엔트 문명이 잉태된 곳이고, 그리스, 로마, 비잔틴, 이슬람을 비롯한 수많은 문명들이 거쳐간 곳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숨가쁘다. 난관에 처한 심정이다. 15일의 일정으로는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주먹을 불끈 쥔다. “가자! 가자!”
유명한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를 가 보았다. 엄청난 크기에 압도당한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둥근 천장의 아라베스크 무늬는 가히 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어떻게 그렸을까.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의 엄격한 전통에 따라 꽃과 나무 따위를 그려 넣는데 천장마다 같은 그림이 없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런 위압적인 건축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름답다, 멋지다, 근사하다, 대단하다, 고 놀래줄지언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 마음 속 울림을 자극하지 못한다. 로마 교황청의 그 엄청난 크기에선 신을 빙자한 인간의 헛된 욕망이, 인도 타지마할의 눈부신 하얀 대리석 앞에선 22년 간 그것을 짓기 위해 동원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크기라면 어디에 내 놓아도 빠지지 않을 북경의 자금성에선 권력의 무상함이 그저 감지될 뿐이다.
이런 유적지에는 관심이 있을 리 없는 6살짜리 딸아이가 순간 환호성을 지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보니 블루모스크 광장 한 모퉁이에 유치원 같은 건물이 한 채 소박하게 서 있는데 제 딴에는 창문에 그려진 아이들 그림들이 반가웠던 모양이다. 아이에게는 블루모스크 보다 유치원이 더 눈길을 끄는 것이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는 말은 여행에서만큼은 진리인 것 같다. 그렇다면 딸아이처럼 내가 환호성을 지른 곳은?
물론 있다. 사프란볼루라는 중세 도시에서였다. 크리스마스 카드에나 나옴직한 눈덮인 고요한 중세 마을에서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 있었다. 200년은 족히 된 옛 건물이다.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 커다란 연못이 앞을 막는다. 성큼 성큼 걸어가며 길이를 재어보니 일곱 이라는 숫자가 재어진다. 정사각형에 깊이는 1m 정도로 맑은 물이 넘치지 않을 정도로 그득하다. 별다른 장식이 없다. 연못을 둘러싼 테이블은 식당치고는 그 수가 참으로 적다. 열 개나 될까.
이슬람식 정원에는 대개 사각형의 연못이 있는 데 그것은 사막에서의 오아시스를 상징한다고 한다. 오아시스란 낙원이다. 따라서 연못을 통해 그들은 낙원을 꿈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식당의 실내 연못은?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은 정말 멋진 곳이다. 정원수를 잘 가꾼 정원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정원 중에서 제일 인상깊은 곳인데, 하지만 그곳의 연못은 이 실내 연못만큼 충격적이진 않다. 인도 타지마할의 정원도 잔잔하고 아름답긴 한데 이 실내 연못만큼 몽환적이지 않다. 도대체 이 연못을 만든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이런 연못을 만든 사람을 드디어 만났다. 스타 워즈 에피소드Ⅰ의 촬영지가 있는 카파도키아의 한 동굴 호텔에서였다. 도시 전체가 기괴한 돌로 이루어졌는데 지구를 벗어나서 우주를 헤매다 어느 혹성에 떨어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그 기묘한 도시에는 바위를 파서 호텔을 만든 곳이 있는데 이 호텔에서 하루를 묵는 기분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내가 묵은 호텔의 주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손님이라고는 우리 뿐이라 비워두었던 방엔 냉기가 심했는데 방이 가열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를 안채로 부르기에 음식 대접도 받으며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헤밍웨이같이 생긴 이 주인은 45살로 부인은 벨기에 사람인데 7살 먹은 아들과 함께 벨기에서 살고 있다한다. 떨어져 살고 있는 아들 생각이 났던지 방 한쪽에 장식품으로 올려놓았던 그곳 전통 인형을 하나 집어 선물이라며 선뜻 우리 딸에게 준다. 시장했던지라 저녁을 사먹을 생각으로 식당을 물어보았더니 또 선뜻 물고기 저녁식사로 우리의 허기를 해결해준다. 국물용 멸치 만한 물고기를 간을 해서 조리한 것인데 삶은 것인지 튀긴 것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지만 담백한 게 맛이 그만이다. 후식으로 나온 작은 사과 알갱이는 보기보다 맛이 훨씬 좋다. 잠시 밖에 나갔다오느라 모포를 뒤집어 쓴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헤밍웨이였다. 객실에 있는 소품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은 것들이다. 잡지 한 권, 비누 한 조각에도 상당한 안목이 배어있다. 멋진 주인이다. 실내에 연못을 만들어 낙원을 꿈꾸었던 조상의 후예답게 동굴을 파서 만든 호텔을 낙원으로 삼고 있는 그가 순간 부럽다.
Imagine! 성서에도 나오는 에페소스에서였다. 가이드로 나온 Mehmet라는 이름의 터키 청년은 다 허물어져가는 유적지에서 우리를 안내했다. Imagine! 이 단어로 시작하는 그의 설명은 너무나 열정적이었다. 내가 아마 수업 시간에 저렇게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존경받는 교사가 되었으리라. 찌를 듯한 눈빛에 숨도 쉬지 않는 그의 설명도 인상적이지만 상상력을 일깨우려는 Imagine 이라는 단어는 그의 열정적인 설명에 타임머신 같은 날개를 달아 고대의 세계로 훨훨 날아가게 했다.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야외극장은 지금도 공연장으로 쓰이는 데 세계적인 팝 가수인 엘튼 존도 여기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한다. 터키 출신의 유명한 가수인 탈칸도 여기에서 공연한 적이 있냐고 물어보니 그런 적이 없다한다. Big Big Girl이라는 팝송을 흥얼거리기에 함께 흥얼거렸더니 노래를 바꾼다. 터키 노래다. 가사는 모르지만, 그 역시 훌륭한 가수는 아니지만 정성을 다해 부르는 노래는 감동을 준다. 이럴 때 한 곡 정도 화답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내겐 감동을 줄만한 솜씨가 없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는 아르테미스 신전에 갔다. 그리스 시대의 가장 큰 신전이며 대리석으로 만든 최초의 신전으로 높이 18미터의 기둥을 127개나 사용한, 길이 120미터, 폭 60미터의 대형 건축물이다. 지금도 위압감을 주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은 높이 10미터의 대리석 기둥을 58개 사용했다는 데 18미터의 기둥이 127개라니! 그런데 시야에 보이는 것은 달랑 기둥 하나뿐이다. 그 많은 기둥이 다 어디로 갔을까. 역시 Imagine!
메블라나 춤으로 유명한 콘야에 갔다. 흡사 가수 송창식이 노래 부를 때 두 팔을 옆으로 벌리는 것 같은 모습으로 한 손은 하늘을 향하고 한 손은 땅을 향한 채 빙빙 도는 게 전부인데 이게 또 볼만하단다. 무용수들의 의상은 흰색으로 둥근 모자는 비석을, 상의는 무덤을, 치마는 장례식에 사용되는 흰 천을 의미하며 춤이 절정에 올랐을 때 무용수들은 그들의 상의를 벗어 던지는 데 이는 지상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무덤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의미한다고 한다. 일종의 종교의식인 셈이다.
그런데 공연이 없단다. 다음날이나 단체 여행객들을 위한 공연이 있다하기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니 특별히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단다. 250달러(325,000 원정도)를 내면 우리 세 식구만을 위해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 나는 풀장 같은 실내 연못을 만들거나 동굴 호텔을 운영하며 헤밍웨이 같이 살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누구는 오로지 메블라나 춤을 보러 일부러 비행기 타고 온다는데. 바로 다음날 기회가 있는데도 이미 예약해놓은 나머지 일정 때문에 발을 돌려야만 했다. 몇 걸음만 걸어도 뼛속까지 한기가 차 올랐던 이곳 콘야, 아쉬움 때문에 더더욱 춥기만 했다.
그래도 5만원의 택시요금을 물어가며 기분 낸 곳이 있으니, 이스탄불의 피에르 로티 카페였다. 프랑스 해군인 피에르 로티가 유부녀였던 아지야데와 밀회를 즐겼다는 언덕 위 무덤 가에 있는 조그마한 찻집이다. 1876년부터 시작되는 얘기다.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 찻집에서 자주 만났다. 어느 날 피에르 로티의 근무가 끝나 프랑스로 돌아가자 아지야데는 죽었다는데 정확한 사인은 모른단다. 그후 로티는 유명한 시인이자 소설가가 되어 돌아오는데 그는 이곳에서 아지야데의 무덤을 찾는 일과 소설을 쓰는 일로 여생을 보냈다한다.
정말 궁금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로마인 이야기>를 쓴 일본 여류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구상하며 그 책을 썼던 곳이라기에 더더욱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스탄불에서 다른 것은 놓치더라도 이것만은 꼭 봐야겠노라고 가기 전부터 작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갔던 날은, 십 몇 년만에 왔다는 폭설로 인해 사방이 눈이었다. 날도 잔뜩 흐려있었고 카페 옆 무덤 가에선 상복 차림의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언덕 아래로는 멀리 동․서양을 가르고있는 보스포루스 해협과 더불어 이스탄불 시내가 펼쳐져 있었다.
말 그대로 조그마한 찻집에는 한 떼의 유럽인들로 빈자리가 없어 전망이 전혀 없는 뒷방으로 가서 잠시 몸을 녹이고는 이내 나왔다. 유명하긴 유명한가보군, 하며 자리를 털며 나오는 데 우리를 태우고 왔던 택시 기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가 주차장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얼마 후 다 왔다해서 미터기를 보니 22,850,000리라였다. 1천만 리라 두 장과 나머지 돈을 조수석에 앉은 남편에게 분명 주었는데 1천만 리라 짜리 한 장을 덜 받았다며 자꾸 우기는 택시 기사. 미터기 조작에 당하고 바꿔치기 손놀림에 당하고, 그래서 왕복 5만 여 원을 들여가며 그 유명하다는 피에르 로티 카페에 다녀왔다. ( 터키 리라 1,000,000은 우리 돈 약 1,000원에 해당)
여행에서 돌아온 지 20여 일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사실 초라하다. 난 이런 것을 보았노라, 라고 내세울 만한 것도 그리 많지 않다. 우리나라의 7배라는 땅 넓이 때문에 이동시간이 길고, 십 몇 년 만이라는 폭설로 가는 곳마다 눈이었고, 짧은 세계사 상식으로 히타이트 시대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역사를 가늠하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15일 정도의 일정이 빠듯했다.
그러나 나는 친절한 사람들을 오래 기억하리라. 사프란볼루의 작은 박물관에서 만났던 한 무리 청년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들과 단체 촬영, 에페소스에서 길을 어슬렁거리던 우리가 한국인임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승용차가 대우의 세피아인데 아주 좋은 차라고 자랑을 하던 고등학교 독일어 교사(선생은 선생을 알아본다), 콘야에서 길을 가던 아가씨 둘이 우리 딸아이가 신기했던지 사진을 함께 찍어도 되냐고 물어왔던 일, 환전을 하지 못해 토큰을 사지 못하는 우리에게 자신의 정기권을 빌려주려던 청년과 무임 승차를 허락해 주었던 역무원 아저씨, 무엇보다도 이방인 어린이에게 쉽게 마음을 열어준 대다수의 사람들이 두고두고 고맙다. %3(터키인들은 3%를 이렇게 표기한다)은 유럽에, 나머지 %97은 아시아에 적을 두고 있지만 유럽이기를 고집한다는 그들, 그러나 짧은 내 경험으로 본 그들은 유럽보다는 아시아에 더 가깝다. 왜냐,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잠시 내려 둘러봤던 암스테르담에선 아무도 정말 아무도 동양인인 우리 딸에게 눈길조차 두지 않기 때문이다.(인도에선 이방인을 향한 관심이 대단하다) 터키인들은 어딘가 우리와 많이 닮아있다. 그게 무엇일까. 숙제를 한아름 안고 돌아온 기분 마저 든다. 따라서 이 여행기는 지금 쓰여져서는 안될지도 모른다. 어딘가 불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