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유독 마음 속에 박히는 글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요한 부분도 아닌 것 같은데 눈을 뗄 수 없는 부분. 오래 마음이 머무는 글. 

 

 

  이때는 나도 글쓰기에서 별로 재미를 못 보고 있었다. 성인 잡지에는 공포 소설이나 과학 소설, 범죄 소설 대신에 섹스 이야기가 실리고 그 내용도 점점 더 적나라해지는 추세였다. 그것도 문제였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 심각한 것은 내 평생 처음으로 글쓰기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교직이었다. 나는 동료들을 좋아했고 아이들도 사랑했지만 - 심지어는 '영어 생활'시간에 들어오는 비비스와 버트헤드 같은 아이들에게도 흥미를 느꼈지만 - 금요일 오후쯤 되면 머리에 전선을 연결해놓고 한 주를 보낸 것처럼 피곤해지게 마련이었다. 내가 작가로서의 미래에 절망한 적이 있다면 바로 이때였다. 30년 후의 내 모습을 그려보면, 여전히 팔꿈치에 가죽을 덧댄 허름한 트위드 외투를 걸친 모습,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셔 카키색 '갭' 바지 위로 똥배가 출렁거리는 모습이었다. 펠멜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고, 안경알은 더 두꺼워지고, 비듬도 늘어나고, 책상 서랍 속에는 미완성 원고가 예닐곱 편쯤 들어 있는데, 이따금씩 (대개는 취했을 때) 끄집어내어 만지작거린다. 누가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책을 쓴다고 대답한다. 조금이라도 자존심을 가진 문예 창작 선생이라면 여가 시간에 할 일이 그것 말고 또 있겠는가? 그리고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너무 늦지 않았다고. 왜냐하면 쉰 살이나 예순 살에 글을 쓰기 시작한 소설가도 있으니까. 어쩌면 꽤 많을 테니까.

 

 

알라딘서재에서 논 지도 몇 년 되니 그간 끄적거린 서평 따위 글이 쌓였다. 어쩌다가 지난 글을 읽어볼라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글도 아니고 뭣도 아닌 감상 나부라기 따위, 그것도 문장이라고 써놓고 좋아했겠지, 아마. 언제가는 삭제해야지, 마음 먹는다.

 

고혈압. 15년 넘게 먹던 혈압약을 끊은 지 2년 6개월 쯤 된다. 체중을 6~7kg 줄이고 나서다. 그런데 요즘 다시 혈압이 오르기 시작한다. 여름 무더위로 운동량이 줄어들어서 그런 것 같다. 하루 만 보 정도는 걸어야 혈압 걱정을 덜 수 있다. 지금은 괜찮아도 머잖아 다리마저 아파오면 걷는 것도 힘들어질 텐데....앞날이 훤히 보인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 고 생각하면서도 혈압 조금 오른 것에 이렇게 엄살을 부리는 걸 보면 나 자신이 가소로워진다.

 

세월과 맞바꾼 교직 생활. 교직이란 게,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시간이 저절로 흐른다. 힘들어서 죽겠다고 아우성치면서도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과 여름, 겨울 방학의 달콤한 휴식을 즐기다보면 세월이 저만치 흘러가 있다. 퇴직 후의 연금은 또 얼마나 든든한가.

 

스티븐 킹의 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 아무나 교직을 때려치울 수 있나, 재능 있는 사람이나 가능한 거 아닌가? 차라리 재능 없음에 안도하고 만족해야지. 그러나. 자신도 안다, 자신이 얼마나 비겁하게 살아왔는지. '30년 후의 내 모습'이 내 모습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일말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너무 늦지 않았다고.' 나는 나에게 너무나 너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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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9-11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a님, 잘 지내셨나요. 추석을 맞아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가족과 함께 즐겁고 좋은 추석 명절 보내세요.^^

nama 2019-09-11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풍요로운 한가위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