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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븐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8
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잖아 ?
하고 싶으면 한면 돼.
아무도 너를 제지할, 그야말로 권리 같은 것은 안 갖고 있어.
소설은, 일본의 '청소년 문화'라고도 일컫는 집단 따돌림을 다룬 성장 소설이다. 따돌림, 전혀 낯설지않고 생소하지도 않은 단어이다. 집단 따돌림이 하나의 폭력적인 '문화'로 상징성을 띄게 된 것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학교'라는 의무 기관이 아니어도 따돌림이라는 비인격적 행위는 하나의 집단을 이룬곳이라면 공공연히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소설이라면 빠지지않고 다루어지는 집단 따돌림의 문제성은 사회적 폭력과 심각성으로 드러나는 한 편, 철저히 숨겨지거나 은폐되어진다. 그러니까 나는, 이러한 은폐적인 폭력에 휘둘렸던 학창 시절을 고립되어진 기억으로 각인되어있다. 적어도 그때의 나는, 소설의 주인공인 '나'처럼 남들과 다른 눈을 가진 사시도 아니었으며 고지마처럼 어떠한 증표를 간직하기위해 몸을 씻지않거나 지저분한 아이가 아니었다. 단지, 혼자가 편했을뿐이고 다른 아이들과의 접촉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좀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타인이라는 자체가 불편했으며 집단 생활을 함에 있어 필요한 '친구'라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강박들이 나를 더 괴롭게했음이 분명했다. 사치, 감정의 지나친 사치라고 하면 맞을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체에 맞지 않는 생각이었다. '개인'이 아닌 2인이상의 단체에 대한 소속감은 처절할 정도로 나를 궁지로 밀어넣었음이다. 그로인해 내 학창 시절은 짝을 이루어 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을 품고 있었고 점점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마저도 소멸되어갔다. 철저히, 나는 혼자였다.
소설은, 주인공인 '나'에게 책상 밑으로 전해져오는 누군가의 쪽지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학급 내의 집단 따돌림의 대상자였고, 쪽지를 건낸 아이 역시 집단 따돌림의 대상자이다. 머리를 얻어 맞고 발로 채이는 괴롭힘이 자신의 한 일부분으로 받아들일만큼 익숙해진 '나'와, 메모를 건낸 고지마는 학급 내에 유일한 '같은 상황'에 처한 친구가 된다. 그러나 이들은 학급 내에서 '말'을 하지 않는다. 학교 내 비상 계단 혹은 방과 후 그리고 방학의 일상들만이 존재 할 뿐이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받는 위로, 혹은 남들과 다른 눈을 가진 '나'의 눈과 기억의 증여물을 온 몸으로 드러낸 고지마의 상징적인 특성으로 인해 폭력에 노출 된 이들의 동질성이다. 내가 철처히 혼자였던 시절에는 물건을 던진다거나 머리를 후려치는 괴롭힘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그저 타인은 나를 모른체 할 뿐이었고 다가오지 않았다. 점심도 혼자 먹었으며 소풍이라도 가는 날에는 그저, 남은 자리나 선생님 옆에 앉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혼자가 편하다는 생각으로 한 학년을 졸업했을때에는 내게 미비하게나마 감지되었던 자존감이 소멸된 후 였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나'라는 자아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자아의 상실, 그것은 극심한 혼돈과 끝없는 어떠한 충동으로 나를 밀어넣기에 충분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가 느꼈던 수치심이라던가 모멸감이 축적되어 바닥으로 내몰리는 최후, 그것은 자살이라는 강력한-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보내는 충동적인 사고였다.
주인공인 '나'는 고지마와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마음을 키우고 대화를 나눈다. 반복되는 반 아이들의 괴롭힘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도 주인공의 '눈'과 고지마의 '증표'는 자신에게 주어진 몸의 일부분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다고 이야기 한다. 서로가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른척 눈을 감는 것이다. 괴롭힘을 당한 고지마가 '나'의 책상 옆으로 고꾸라질때에도 말이다. '나'와 고지마는 방학을 맞이해 헤븐이라는 그림을 찾아 길을 나서기도하고 방과 후 비상 계단에서 만나 지극히 평범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균열은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는 같은 편이야' 라는 쪽지로 시작해 서로의 기댈 어깨로 의존했왔던 '나'와 고지마의 사이가 소원해진 것은, 주인공인 '나'가 니노미야 패거리들에 의해 머리통이 공처럼 차여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모습을 고지마에게 들킨 후였다. 그로인해 다니던 병원에서 듣게 된 '나'의 눈을 교정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은 고지마와의 관계를 무너트린다. 어떠한 결정도 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이야기를 듣는 고지마는 울음을 터트린다. 그러니까, 그것은 '나'와 고지마를 이어주던 연결선이 끊어져버린 것이다. 고지마의 패닉, '나'의 무시당하는 편지들 사이에서 이 둘은 맞서서는 안되고 들켜서도 안되는 비밀의 관계가 위태로와진다.
문화가 문화를 낳는다고 했던가. 일본에서 일어나던 이지매 현상은 은폐져왔던 한국의 왕따 문화 역시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이 폭력적인 문화는 발달되어지는 속도에 맞추어 더욱 심각해지고 잔인해진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아이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성장해가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나'와 고지마는 니노미야 패거리들이 자신들에게 행하는 비인격적 행위들에 관해서는, 언젠간 제대로 알게 되고 바로잡을 수 있는 날이 올거라 믿는다. 이 둘에겐 그저 스스로에게 불어넣는 불확실성 희망만이 존재했지만, 니노미야 패거리들에게 휘둘렸던 '나'와 고지마가 그들에게 일말의 반항도 하지 않고 맞서지 않았다고해서 결코 그들보다 약자는 아니었다. 함께라는 안도감과 그 속에서 싹트던 사랑의 감정들이 그러했듯이 이들은 서로에게 버팀목이자 처해있는 상황을 비극으로 치닫지않게 견뎌냈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나'와 고지마를 통해, 그래도 나는 얻어 맞지는 않았다는 내 어린 날의 기억에 대해 위로를 받는다. 나 또한 간사한 인간인지라 나 보다 더 최악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보며 위로를 받는 셈이다. 하지만, 스스로 고립되어지길 원했던 나와 타인으로 인해 고립되어 상처받았던 '나'와 고지마의 상처는 별반 다를게 없다. 내가 나를 못 살게 구는 것과 타인이 나를 못 살게 구는 것 따위의 상대성은 비례하기 때문이다. 아픈 이야기, 그리고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 불편했던 마음들이 끝끝내는 아무런 여운도 스며들지 않게 만든다. 소설, 이지만 이것은 현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