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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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자리가 바뀌는 후반의 나이로 달려가면서 나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마음은 아직도 이십 대인데, 늘어가는 새치를 보면서도 현실의 나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나이가 든다는 건,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변한 자신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였다.’(p50)

마지막 책장을 덮고 표지를 보니 제목 아래 문장이 보인다. 편집자가 고른 문장일까, 저자의 의도일까. 누가 골랐든 이 문장을 택한 이는 스무 살을 한참 지난, 아마도 마흔은 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삼십 대였으면 아마도 고르지 않았을 문장이니까.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문장이다. 몇 번을 속으로 되뇌어본다. 여기에서 말하는 나이 듦은 적어도 늙어간다는 의미는 아닐 거라 생각한다.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영혼의 성숙 같은 의미라 해석하면 될까.

 

 

그 때가 좋았는데. 간혹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렇다면 나는?

한동안 표지를 넘길 수가 없었다. 스무 살, 스무 살. 내 스무 살은 어땠지? 제목만으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 한참을 생각할 화두를 던져준 것만으로 책으로서의 역할을 다한 책이었다.

스무 살. 다시는 그 시간들을 겪고 싶지 않다. 생각해보면 그 때의 상황들이 뭐 엄청난 시련은 아니었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리고 싶지는 않다.

그 때의 나는 서툴렀고, 그렇기에 두려웠다. 관계를 이어가고 매듭짓는 방법을 몰라 엉켰다고 판단되는 순간에는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 없이 가위로 자르듯 싹둑 끊어버렸다. 차라리 혼란스러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이라도 했으면 나았을까. 침잠되는 마음을 감당 못해 우울해하기도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 주말마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외버스를 타고 통학하면서, 주어진 환경을 원망하기도 했다.

지리하게 이어져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회색빛 시간들. 한 번쯤은 제자리에서라도 뛰어보았더라면 스치는 바람이라도 느꼈을 텐데, 그 시절의 나는 어리석을 정도로 고지식해서 시간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밖에는 몰랐다.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표지를 넘겼다.

 

작가가 말하는 스무 살은 성장을 의미하는 경계인지도 모른다. 살아오면서 나는 수많은 계기를 맞이했고, 곤충이 탈피를 하듯 조금씩 성장을 거듭했다. 그 계기라는 건 돌이켜보면, 기뻤던 것보다는 아팠던 순간들이 많았다. 분명 내 삶인데 시간에, 상황에 엑스트라처럼 끌려갔던 시기도 있었다.

나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치이지 않는 법을 알게 됐다. 그건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이면 모든 게 또렷하게 들린다. ’(p43)

감당하기 어려울 때마다 내 삶의 주인임을 포기하고 상황에 휩쓸리고 주변을 탓했다. 마음에 좀 더 귀를 기울여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었어야 했는데……. 상대에게 좀 더 다가가 그의 목소리를 들었어야 했다.

 

스무 살의 사진첩을 꺼내어 펼쳐본다. 초벌구이를 마치고 갓 나온 도자기를 보는 느낌이다. 그 때는 다 큰 어른이라 생각했는데, 사진 속에는 말끔한 어린아이가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다.

사진은 가장 현실적인 예술이다. 항상 사진기가 놓인 그 공간에서 시간의 가장 마지막 순간을 찍을 뿐이다. ’(p151)

그 시간의 마지막 순간. 몇 장의 사진에서는 찍었을 때의 느낌이 생생하다. 피식 웃는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더니. 사진이라는 건 시간과 공간이 만난 좌표에서 그 순간의 느낌을 박제해놓은 기록인 걸까.

 

한 글자(정철, 허밍버드, 2014.8.)에는 에 대한 의미가 나온다. “불이야!”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지만, “불이었다!”는 가장 무섭지 않은 말이라고.

난 저 사람들이 불쌍해. 다들 떨어진 유성 같은 거야. 궤도에서 벗어난 존재들이죠. ’(p216)

한 때는 밤하늘을 빛내며 소원을 비는 대상이었던 별 부스러기들이 차갑게 식은 돌덩이가 된다.

우리말이 참 기가 막히게 적절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별똥별똥별이 그렇다. ‘유성은 떠돌이별, 우리말로 별똥별’, 그러니까 이다. 그런데, 떨어진 돌멩이인 운석별똥’, 그러니까 에 불과한 거다.

떨어진 유성이나 궤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쌍한 걸까. 잠시 생각해본다.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이 된다. 똥이 되어 버린 돌이나 불이었던 성냥개비도 자신이나 타인에게 많은 의미를 주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연탄재 발로 차지 말라 했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한 때 뜨겁고 빛났던 것으로 의미는 충분했다. 그 시간만을 돌아보며 더 이상 나아가지 않으려는 자세만 경계한다면 나름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과학적으로 보면 유성도 원래의 궤도에서 이탈한 부스러기들이 대기권과 부딪혀서 빛을 내는 것이니, 궤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반드시 쓸모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거라 해석해본다.

 

대학 다닐 때, 데모를 하는 친구에게 물은 적이 있다.

-데모를 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거니?

그 친구는 답했다.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안 해.

-그럼,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도화선. 내가 하는 이 일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기를 바랄 뿐이지. 그것으로 충분한 거 아닐까?

도화선. 한동안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돌다 지나갔다.

누구나 어떤 사람의 후원자는 되어줄 수 있겠지만, 아무나 그 사람의 마음에 불을 밝혀주진 못한다. 그런 점에서 임씨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전기기사인 셈이었다.’(p309)

한 사람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은 결국 그 자신이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그에게서 나온다. 활활 타는 불도 나무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쌓여있는 장작에 불을 붙이지 않으면 따스함을 발할 수 없듯이, 사람에게도 불을 밝혀주는 계기가 필요한 거다. 그건 어떤 사건일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마음에 불을 밝힌다는 표현이 참 멋지다. 그런 의미로 비유한 전기기사란 말도.

내 삶에서 불을 밝혀주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몇몇 사람이 떠오른다. 한 때는 내가 잘나서 그리 되었다고 자만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의 도화선이 되어주었기에 가능했던 거였다. 이 책 스무 살도 어쩌면 나에게 도화선이 되어줄 지 모르겠다.

 

 

-엄마! 시접이 뭐야? 시접을 1cm 남기고 박음질을 하고 뒤집으라는데?

학교 숙제로 책 크기 정도의 주머니를 만들면서 설명서에 나온 용어를 묻는다.

-. 여기 이 그지 같이 삐뚤빼뚤한, 쓸데없는 부분. 이렇게 뒤집어 까서 안으로 집어넣으면 안보이지? 끝에서부터 1cm 남기고 박으라는 얘기야.

-아하!

아이가 다시 바느질을 하러 가버린 후에, 내가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시접이 쓸데없는 부분인가? 시접이 없으면 두 장의 천을 이어 붙일 수 없지 않은가. 보이지 않는다고 불필요한 건 아닌 건데. 잠시 시접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의 스무 살은 이런 의미였을지 모르겠다. 시접을 만드는 경계가 된 박음질선 같은. 결코 쓸모없는 시간이 아닌, 오늘의 내가 드러나기 위해 꼭 필요했던. 그 선을 경계로 드러나는 삶이 펼쳐지고 이전의 삶은 안으로 감추어진다. 하지만, 감추어진 부분이 없으면 이후의 삶은 결코 이어질 수 없다.

경계가 서른이든, 마흔이든, 마흔 여덟이든, 우리는 수많은 경계를 만나고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스무 살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 이 순간이 또 다른 경계가 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이제는 내 나이를 긍정하려 한다. 미니에게 농담처럼 말하는 자식에게 의지하는 늙은 애미도 아니고, 중년의 흔한 아줌마도 아니고, 이 나이가 의미하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사람은 나이 들면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거라 여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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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6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6-01-06 00:26   좋아요 1 | URL
스무 살이 가진 매력 중 하나는 가능성이겠죠, 뭐든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 .^^

2016-01-06 0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6-01-06 07:44   좋아요 1 | URL
여기서 핵심어는 믿.고.싶.습.니.다. .인거죠?ㅎㅎ

2016-01-06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종 2016-01-06 10:00   좋아요 1 | URL
무한공감합니다~~ 어째 동병상련의 마음이ㅎㅎ

서니데이 2016-01-07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 스무살이후로 더 어른스러워지지 못했어요. 얼굴만 달라지고요.
시접이 없으면 애써 박음질 한 경계가 예쁘지 않고, 많이 남겨도 필요하지 않은데, 읽으면서 저의 그런 시간을 생각했어요.
나비종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나비종 2016-01-07 20:18   좋아요 1 | URL
몸의 성장이 다 이루어지는 시점(25세 정도?)이 분기점인 것 같아요.
그 이후로 몸은 늙어가지만, 마음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구요. 몸과 같이 늙어가거나 깊어지거나 제자리에 머물거나 뭐 그런^^

풀꽃놀이 2016-01-07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 개정판에서 아쉬웠던 점이 `사진` 이었어요! 초판본에서 풋풋한 20대였던 작가의 사진이 근래의 사진으로 대체되었더라구요. 물론 그리하는게 맞는 것이겠지만....그래도 책 제목이 ˝스무살˝이잖아요. 초판본을 다시 꺼내어보니 이 책에는 젊은 김연수의 사진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젊은 얼굴에 괜히 그립고 맘이 짠한게 ... 아마도 저도 늙은(?)거겠죠...

나비종 2016-01-07 21:51   좋아요 0 | URL
두 권 다 가지고 계시는 군요. 음. . 저같으면 개정판에서는 after 를 앞에, before 를 뒤에 두고 나란히~~ 성형외과포스가 날라나요?^^;
그래도 세월이 흐르면서 변해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

페크pek0501 2016-01-10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화선의 중요성을 되새겨보고 갑니다.

나비종 2016-01-10 00:37   좋아요 0 | URL
예. 중요한 건 항상 절실함이 모아지는 절묘한 시작의 순간이죠^^
 
소중한 경험 - 김형경 독서 성장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사람풍경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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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침팬지의 DNA 일치율이 97%나 되고, 나머지 3%의 유전자가 인간을 인간이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언젠가 동물원에서 보았던 침팬지를 떠올리며 놀랐던 적이 있다. 생각보다 훨씬 높은 수치였다. 하지만, , 침팬지나 오랑우탄이나 인간과 비슷한 유인원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후성 유전학에 대한 인터넷 자료를 찾다 알게 된 또 다른 3%의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을 마주한 듯 묘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염색체는 기다란 실처럼 생긴 DNA 가닥이 알사탕처럼 생긴 단백질들을 칭칭 감고 있는 구조를 가진다. DNA의 특정 부분에는 유전정보물질이 들어있어 자손에게 전달되면 어버이를 닮은 형질이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전달된 정보 중 형질이 발현되는 비율이 단지 3%라니! 나머지는 단백질을 꽁꽁 묶은 채로 봉인되어있다나. 그러다 담배를 피우거나 방사선을 쬔다든가 외부 환경의 자극을 받으면 잠자고 있던 유전자가 깨어나 특정 형질을 나타나게 하고, 이것은 다시 유전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이 된다. 이를 연구하는 분야가 후성 유전학이다. 타고난 유전자가 같은 일란성 쌍둥이에게서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서 설명이 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후성유전학을 떠올렸다. 만화영화 <포켓몬스터>에서 지우가 던지는 포켓볼처럼 공중으로 던지면 갈라지며 각종 몬스터가 튀어나오듯 97%의 일부가 봉인이 풀려 깨어나는 장면을 상상했다. 아팠던 감정이나 슬픈 기억도 봉인된 DNA처럼 마음 깊이 묶여있다 어떤 자극에 의해 풀리는 것이 아닐까.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책 안에 담긴 누군가의 경험은 나의 경험과 공명되어 마음을 묵직하게 흔들었다. 웃음으로 포장하고 깊은 곳에 숨겨왔던 내 아픔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하며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면에 웅크린 아이 같은 나를 느낀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위로를 받은 듯 따뜻했다.

분노에 대한 심리학적 정의에 공감이 갔다. ‘분노는 본질적으로 받지 못한 사랑이다. (중략) 분노는 또한 울지 못한 울음이다.’(p254) 언젠가 느꼈던 분노를 생각했다. 분노란 둔탁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슬픔의 다른 얼굴인걸까.

에세이지만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 관련 책을 읽은 듯 했다. 지나왔던 행동이나 감정을 많이 생각하였다. 저자의 글은 밑바닥에 숨어있던 나의 이야기를 좀 더 위로 끌어올렸고, 마지막 장을 덮은 나에게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선물해주었다. 프롤로그에서 스스로 언급한 재능처럼 저자에게는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리뷰나 시를 쓰고 나면 느껴지던 후련함도 이런 이유에서였나.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한 사람을 간절히 찾고 있다.’(p6)는 말이 맞았다. 드러내고 싶지 않아 꼭꼭 숨겨두려 했던 만큼 내 이야기를 들어줄 대상을 찾고도 있었던 거다.

 

10년 독서 모임 경험의 결과물이라는 이 책을 읽으면서, 2007년부터 참여한 독서 모임이 가져다준 의미를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독서 모임 이전에는 다른 이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부끄러웠고, 자신이 없었고, 누군가 말을 시킬 때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지곤 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제는 눈에 띌 정도로 변화된 모습의 내가 있다.

그것이 모임을 통해 읽었던 책의 힘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물론 책이 준 영향이 가장 컸겠지만, 또 다른 힘은 바로 그 책과 함께 했던 사람이었다. 나와는 다른 시각을 이해하며 공감했고 때로는 반박도 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모든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p53)라는 말처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을 거울삼아 끊임없이 나를 바라봐왔던 거다. 그리고, 그 시간의 끝에는 성장한 내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외부를 향한 반응이 한 템포 느려졌다. 화가 나는 상황에서 저 사람에게 화나는 내 마음은 무엇이지?’하고 한 번 더 내 안을 들여다보면 속상한 마음이 웅크리고 있었다.

감정의 미세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었다. 아파트 화단을 지나칠 때마다 노랑과 주황빛이 섞여있는 국화를 본다.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모습이 너무 이뻐 드라마처럼 꽃다발을 받는 상상을 한다. 그냥 나에게 선물한다 치고 내가 살까. 만 원어치 정도만 사면 될 텐데. 하지만 꽃집을 가려다 문득 깨닫는다. 내가 받고 싶은 것은 꽃이 아니라 꽃을 선물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 지금은 가을이고, 낙엽은 바닥에 뒹굴고, 집에 있는 사람을 비롯해서 내 친구들은 먹지도 못하는 꽃은 선물 취급도 하지 않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들이다.

예전에 읽었던 어떤 책은 나를 가라앉게도 했는데, 이 책을 읽어보니 그 시간들은 자기성찰의 과정이었다.

오랜만에 송창식의 나의 기타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가사를 음미해보기도 했다.

꿈 일기’(p80, 301)에 대한 글도 흥미로웠다. 며칠 동안 꿈 내용을 생각하면서 잠시 메모를 해보았다. 저질 기억력의 한계를 깨닫고 바로 접기는 했지만. 꿈을 통해 나의 심리를 분석한다는 점은 대학교 때 관심을 가졌던 심리학에 대한 기억과 함께 <꿈의 해석>을 떠올렸다.

삶의 십진법과 정신 발달 단계’(p207)라는 소제목의 글에는 속이 후련해질 정도로 무한 공감이 갔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또 다른 사람의 존재가 많은 위안을 주었다.

책 표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겨 어딘가를 응시하는 그림 속 사람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깊은 호수 속애 웅크려있는 자아를 마주하였다. 그것은 나에게 아주 소중하고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용기(courage)라는 단어는 심장(coeur)을 뜻하는 프랑스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p173)고 한다. 깊은 곳에 있던 내 이야기가 조금은 위로 올라온 듯하지만, 아직은 꺼내어놓을 용기가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심장을 울리는 책을 조금씩 접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계속 나누다보면, 언젠가는, 가까운 언젠가는, 스스로 봉인을 풀고 담담하게 마음을 꺼내어놓는 날도 오지 않을까.

허남혁의 책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라는 제목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음식이 사람의 몸을 자라게 한다면, 마음은 무엇을 먹으며 성장하는 것일까. 아니면 성선설이나 성악설처럼 원래 잠재되어 있던 것이 어떤 계기로 드러나는 것 뿐 인걸까.’ 그때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막연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나의 경험이 마음으로 들어가 97%DNA처럼 봉인되어 있다가, 다시 이야기로 꺼내어놓는 용기를 내는 순간 마음은 성장한다는 것을.

 

 

잘 모르겠다^^;

신비적이고 혼돈스러운 정신 역역에 대한 규명 노력은~(p296)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관련 지식이 거의 백지 상태라서 역역이라는 말이 영역의 단순 오타인지, 아니면 전문 용어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을 해서 찾아낸 몇 가지 역역이 있지만 의미를 집어넣으면 해석이 이상해진다. ‘역역의 정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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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 글쓰기 -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삶을 바꾼 쓰기의 힘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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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친, 지가 쓴 글에 혼자 감탄하고, 도랑 치고 가재 잡으려다 쫄딱 망한, 초보 리뷰어가 벌인 쌩쇼 분투기이다. 동시에, 좌절했던 그 인간이 극히 서...인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릴 용기를 냈다는 감사의 글이기도 하다.

 

정말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단 말이다, ~ 파랗게 펼쳐진 바다 위를 씽씽 날기도 했다. 심지어 새하얗게 펼쳐진 눈밭을 보기도 했다. ‘뭔가 학업적인 성취를 얻을 꿈입니다. 당신의 재능은 여러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겁니다.’꿈 해몽을 검색하며 입이 쭉 찢어졌다.‘음하하~ 뭔가 조짐이 좋아. 예지몽까지 꾸다니!’지난 9월은, 핸드폰 캘린더에 당첨자 발표 일자를 입력해놓고 매일 확인하며 목 빠지게 기다리던 달, 결과 발표에 목이 축 늘어진 달이기도 했다.

 

8월 말, 오늘의 작가상 수상 선정 이벤트였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리뷰를 올렸다. 구병모작가가 직접 심사한다는 말이 강하게 나를 유혹했다. 8편의 단편을 꼼꼼히 분석하고 인상 깊은 구절과 나의 느낌을 적었다. ‘알라딘에 등록하고 나니, 리뷰대회 공지 이후 올라간 첫 번째 글이 된다. 수시로 확인해도 최초 마감일이던 831일까지는 몇 편 올라오지 않는다. ‘오예~’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수상 예정인원과 응모자 수가 거의 비슷한 것 아닌가. 이 중에서는 뽑히겠지 싶었다.

그런데, ! 마이! ! 리뷰의 수준에 따라 수상 인원이 조정될 수 있다는 공지가 뜬다. 후진 글은 상을 주지 않겠다는 얘기다. 살짝 찔리며 불안해진다. 나름 긴 리뷰를 썼는데. 모나리자의 미소도 책의 분위기에 접목시키고, <어린 왕자>도 다시 읽으면서 의미를 부여하고, 최신 인터넷 뉴스와 최근 읽은 단편 <표류>의 구절 등을 인용했다.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그런 대로 괜찮다며 자기 암시를 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된다.

.... 이런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한 고사 성어다. 마감 일자가 94일까지로 미뤄진다. 겨우 4일 미뤄졌을 뿐인데, 분열법으로 번식하는 아메바처럼 리뷰들이 실시간으로 늘어난다. 심지어 감탄이 나올 만큼 잘 쓴 글들이 대거 속출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실패로구나! 명예도 얻고 상금도 얻으려던 무모한 도전은 당선자 발표가 되기도 전에 결과를 예감하게 한다. 노래가사처럼 어찌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지. 4명의 당선자 목록을 본다. 그들의 글을 찾아 읽어본다. 내 리뷰를 다시 읽는다. 좌절한다. 낯선 이름들 사이에 끼인 *표시가 차가운 눈처럼 내렸다.

 

아직 포기할 순 없다. 나흘 뒤에 또 다른 리뷰에 도전한다.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이건 좀 더 난이도가 높다. 원고지 9매 이내라니! 분량 제한이 있다. 글쓰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이 들으면 두 팔 벌려 환영할 말이지만, 요즘의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학창 시절에는 뭔 뜻인지 이해는 안가지만 길다는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감동적인 시로 탈바꿈한 시를 일기에 적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분량을 확보하려는 얄팍한 수작이었다. 이렇듯 처음부터 글을 길게 쓰지는 않았는데, 틈틈이 리뷰를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분량이 길어져버렸다. 평소 말이 별로 없다보니 글로 수다를 떨게 된 건가. 주저리주저리 쓰다보면 20매를 훌쩍 넘어가버리는 건 예사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긴 글이 반드시 좋은 글과 비례하지는 않으므로, 가끔 시를 쓰며 글을 압축시키는 연습을 하고 있다. 여전히 산문인지 시인지 구분되지 않는 정체오묘한 시를 올리기도 하지만.

이건 리뷰를 어떻게 쓸까? 책의 내용을 인용하기에는 제한 분량에 대한 압박이 크다. 그래! 경험담을 쓰자. 그 즈음에 경험했던 일을 책 내용과 연결시켰다. 제목은 어떻게 지을까? 가만있자, 오늘이 음력으로 며칠이지? 보름에 맞춰 리뷰를 올리고, ‘보름, 또는 내가 책을 기억하는 방식이라며 책 제목을 패러디할까? 아니지, 너무 작위적이다. 고민하다 세 단어로 된 차례를 패러디하여 쓴다. ‘역쉬~ . 이러다 패!!(패러디의 달인) 되는 거 아냐?’‘..류의 말을 일상으로 사용하는 중딩과 지내다보니 많은 단어들을 압축하여 표현하는 증상이 나타난다. 스스로 감탄하며 말도 안 되는 자아도취에 빠진다.

결과는 실패였고, 그로부터 열흘 동안 좌절한 나르시스는 어떤 리뷰도 엄두를 내지 못한다.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반영된 칙칙한 시 2편은 암흑기를 보내고 있음을 드러내놓고 암시한다.

 

다시 읽어보면 응모 결과를 쉽게 예견할 수 있는 리뷰였다. <서민적 글쓰기>에 나온 내용은 이 사실을 튼튼히 뒷받침했다.

첫째, 난 서평의 금기사항을 어기는 오류를 범한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리뷰에서는 그녀는 결국 마을을 ~ 게 한다.’등 곳곳에 스포일러를 심는다. 더군다나 글이 난잡하고 어수선하다. 마지막 문장은 억지웃음처럼 부자연스럽다. ‘아픈 그림이 되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말하고 있으나 전체적인 글의 느낌은 그리 아팠던 것 같지 않다.

둘째,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리뷰는 책의 내용과 연결된 고리가 다소 뜬금없고 부실하다. 개인사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 리뷰라기보다는 페이퍼에 가까운 글이다. 그나마 세 번째 단락부터 책의 내용에 대한 리뷰가 시작되나 싶은데 이내 끝나버린다. 뽑아져 나오던 가래떡에 랙이 걸린 느낌이랄까. 이 책에 나오는허리가 좋아야 글이 튼튼하다.’(p207)는 문장에서 허리가 나쁜 바른 예로 들기에 적합한 글이다.

 

스스로 만족하며 올렸던 리뷰의 단점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넓고 글 잘 쓰는 사람은 많았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좀 더 많이 연습해야했고, 나르시스와 같은 자만심을 걷고 겸손해야했다. <서민적 글쓰기>는 그런 면에서 부드러운 채찍이었다.

수필과도 같은 저자의 글을 보니 장점이 확실히 보였다. 댓글에 대한 내용을 읽고 나서는 초특급 레시피를 전수받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함과 유머로 무장한 그의 글에는 따뜻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애인이 생긴 기분이랄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악의 무리를 모조리 무찌를 수 있을 것 같은 든든함이 생겼다. 나도 열심히만 한다면 꽤 봐줄만한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글이 주는 힘이었다.

글쓰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p247)는 에필로그의 제목은 태엽 풀린 장난감처럼 멈춰가던 마음에 용기를 주었다. <노빈손과 위험한 기생충 연구소>의 리뷰를 쓰고, ‘심페소생식이라는 경험담을 가벼운 마음으로 써내려갔다. 손가락이 키보드 사이를 경쾌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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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빈손과 위험한 기생충 연구소 노빈손이 알려 주는 전문가의 세계 1
서민 지음, 이우일 그림 / 뜨인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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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지를 바닥에 펼쳤다. 나무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저녁도 잔뜩 먹었으니 모든 준비는 완벽하다. 힘을 모은다. 1차 시기, 실패다. ! 좀 더 집중해서 다시! 역시 실패다. 식은땀이 흐른다. 중력 방향으로 배를 문지르며 간절히 주문을 왼다. ‘성공하게 해주세요! 그나마 저밖에 없단 말이예요. 나무아미타불!’순간 뱃속을 내려가는 묵직한 느낌. 올레~ 미션 클리어! 콧등에 송송 맺힌 땀을 손등으로 쓰윽 닦고, 섬세한 집중력이 요구되는 마무리 작업에 들어간다. 왼손으로는 비닐봉투의 입구를 조심스럽게 벌리고, 오른손으로는 정교하게 한 점 찍어 주변에 묻지 않도록 집어넣는 기술이다. 마침 배탈이 나 고체 상태의 그것을 확보할 수 없었던 언니, 변비 때문에 도무지 작은 덩어리로의 해체가 어려웠던 동생 것까지 무사히 성공했다. 그렇게 변까지 나눈 우애는 끈끈하게 지속되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 부르는 사람은 나와서 약 먹으세요.’얼마 후 학교에서 구충제를 먹게 된 나는 집에 돌아와서 언니와 동생의 원망을 들어야 했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지! 화장실 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조금만 나눠달랄 때는 언제고!’변 한 번 나눴다가 변변한 소리도 못 들었다. 이 책의 에필로그 뒤에 나온 채변봉투 사진(p189)을 보니 예전 생각이 스물 스물 났다. 당시 기생충 이름이라고는 회충밖에 몰랐던 나는 괜히 회충을 원망했는데, 가끔 항문이 가려워서 긁었던 기억으로 유추해 보건데, 서민 박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그건 요충이었다.

 

진한 쌍꺼풀에 눈 화장을 한 여자를 보면 나는 회충을 떠올리곤 했다. 그 생각은 순전히 중학교 때 들었던 괴담 비슷한 이야기에서 기인한 건데, 미술 재료로 신문지를 가져왔을 때였다. 전면 광고로 나온 여자 사진을 보고 어떤 친구가 그러는 거다.

“얘들아! 어떤 사람이 눈이 계속 꺼끌거리고 쌍꺼풀이 짙어졌는데, 어느 날 거울을 보니, 눈꺼풀 사이로 뭔가 희미한 실 같은 것이 나와 있더래. 그래서 그걸 잡아당겼더니 30cm 정도의 회충이 쭈욱 나왔단다!”꺄악! 주변에 있던 우리는 징그러움에 몸서리를 쳤고, 한동안 등하교 길에서 눈 화장한 여자를 마주칠 때면 나도 모르게 움찔하곤 했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온 설명으로 판단한다면 회충이 아니라 눈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동양안충(p164)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두통-치통-생리통세트처럼 흔히기생충하면 회충-편충-십이지장충세트로 불리는 바람에 선두에 선 회충이 억울한 오해의 화살을 맞았던 거다.

 

영화 <쥐라기 공원>이 연상되었다. 보통 재미있는 책은 내용이 헐렁하고, 지식이 많은 책은 설명문처럼 지루하기 마련이건만, 치밀한 구성은 영화처럼 이미지화되어 박진감 넘치게 그려졌다. 무심코 읽다 빵 터지는 유머는 덤이었다. 길이로 보았을 때 기생충도 결코 공룡의 스케일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파라지 파크>로 영화화되어도 재미있겠다 싶다.

깨알같이 소개된 박사님의 멘트는 어린이 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기생충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알려주고 있었다. 처음에 광절열두조충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에는 지어낸 이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박사님의 멘트를 읽고 실존하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몇 번에 걸친 인터넷 검색 끝에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정말 많구나, 기생충이! 연가시, 편충, 십이지장충, 디스토마 등 어렴풋이 들어본 기생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게 되었고, 몰랐던 기생충까지 알고 나니 상식의 세계가 넓어진 듯 뿌듯함이 일었다. 책 내용이 너무 사실적인 나머지 공간적 배경인 홍합도까지 검색해 보았다는 건, ! 비밀이다.

 

한 땀 한 땀 이태리 장인이 떴다는 현빈의 츄리닝을 보는 것처럼, 기생충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에서 저자의 애정이 느껴졌다. 멧돼지의 기생충을 연구하기 위해 120여 마리의 근육을 일일이 현미경으로 검사했다는 일화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열정을 느끼게 했다. 나도 무언가에 저런 열정을 쏟을 수 있을까. 애정을 가지고 공부하면 저토록 쉽게 설명도 할 수 있을까. 부럽기도 하고 나도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생충에 대한 편견이 깨져 버렸다. 생존을 위해 제각각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살아남아 온 그들의 삶은 놀라움을 넘어 찡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기생충 때문에 감동받는 순간이 올 줄이야! 가장 바뀌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생각이라지만, 바뀌기 쉬운 것도 생각이었다. 다만 그 계기가 99를 넘어가는 강렬함이라면, 발화점에 도달한 듯 순간적으로 바뀌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 책을 좀 더 일찍 읽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이번 추석에 친정 식구들 모였을 때, ‘그 때 걔가 회충이 아니었어~’라며 듬뿍 얻게 된 나의 지식을 뽐낼 수 있었을 것을. 더불어 채변봉투에 대한 추억도 나누었을 텐데. 밥상머리에서 얘기하기에는 좀 거시기한가? , 기생충에 대한 애정이 좀 더 필요하다. <서민의 기생충열전>으로 충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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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첫 문장 -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세계문학의 명장면
윤성근 지음 / MY(흐름출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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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밋밋했다. 줄어드는 핸드폰 배터리인양 여름 끝자락으로부터 가을을 향해 가는 마음이 점점 가라앉던 시기였다. 간신히 이 책의 글자를 매달고 느린 시간을 걸었다. 낙엽처럼 바삭거리던 마음이 점점 따뜻해졌고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는 코끝이 찡해졌다.

누군가 돌아가셨다거나 말기 암에 걸렸다더라는 소식을 자주 접했던 9월이었다. 한동안 마음이 가라앉아 간단한 글조차 끄적일 수 없던 것은 그래서였을까. 아님 계절이나 중년을 지나고 있는 나이 탓인지도 몰랐다.

책이란 참 묘한 존재다. 그저 종이와 잉크로 구성되어있는 무생물인걸, 종종 온기가 느껴질 때가 있으니. 따뜻한 글자가 내 안으로 들어와 식어가는 마음을 데우는 듯한 느낌이랄까.

 

 

흥미로운 통계가 첫 화면에 떠있었다. 오랜만에 접속해본 SNS. 내가 올렸던 글과 사진을 분석한 내용이었다. words...‘사람, 마음, 시간, 생각, 그대’. 이런 단어를 주로 썼던가. 살짝 전율이 일었다. 어쩌면 이리 마음이 가는 단어들만 찾아냈는지. 나도 모르게 내가 읽히고 있었다.

수많은 데이터를 토대로 숨겨진 패턴을 발견하고 새로운 정보를 알아낸다는 빅데이터 마이닝이란 게 있다고 한다. 데이터가 세상을 읽는 시대가 되었다. 질병의 확산 시나리오를 쓰고, 태풍의 경로를 예측하고, 이제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읽히는 세상이다.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마음에 와 닿던 문장을 정리해보니,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을 생각했는지 알 것 같았으니까.

소설가들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그 안에서 드러내려고 하는 진짜 주제는 삶이다.’(p86)

너는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 있느냐고’(p97)

살아가는 것에 정답이란 없다. 인생은 언제까지나 진행형일 뿐이고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빛나는 가치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다.’(p113)

사람의 인생은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한 덩어리가 아니라 작은 별빛으로 가득한 캄캄한 밤하늘이다’(p128)

그들의 인생은 모두 정답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 정답이라기보다도, 이 사람들은 모두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어떤 사람과 비교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p219)

서로 다른 23편의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는 제각각일 텐데, 내가 그은 밑줄에 가장 많이 올라온 단어는 인생이었다. 마음 한 구석, 삶이 허무하다는 느낌을 심어두면서도 눈은 삶을 좇고 있었던 거다.

 

어떤 문장은 나를 토닥이며 강해져야함을 말해주기도 했다.

필요한 것은 자기가 서 있는 발아래, 거친 땅바닥을 파헤치고 그곳에 나무를 세울 수 있는 작은 용기와 결단이다.’(p81)

선택은 곧 행동이다.’(p187)

선하다는 건 자신의 자아와 조화를 이룰 때 가치가 있다’(p201)

그래서 따뜻했다. 표지에 나와 있는 글처럼, ‘천천히 소리 내어 당신과 함께 읽고 싶다는 문장을 따라 3주에 걸쳐 느리게 읽었던 내내. 가끔은 한 호흡 크게 내쉬고, 글쓴이의 이야기도 들어가며, 그가 해석한 소설을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기도 하며 산책하듯 책을 읽었다.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헤밍웨이가 썼다는 여섯 단어로 된 소설이었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팝니다: 아기 신발. 한 번도 안 신었음)(p73)

이 짧은 문장에서는 음미할수록 깊고도 슬픈 이야기가 우러나왔다.

학창시절 억지로 읽었던 책 <노인과 바다>. 그의 일화가 얽힌 문장 하나로 새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결국 어르신은 내일 택배로 도착하게 되었다.

첫 문장으로 문학 작품에 접근한 저자의 시각도 신선했다. 평소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 신경을 쓰는 편이긴 하지만, 이 리뷰는 특히 첫 문장을 쓸 때 좀 더 고민을 했다. 결과물이 썩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카페에 앉아 무심코 흘려들었던 노래 가사가 오늘따라 선명하게 들렸다.

도대체 인생이란 놈은 대체 뭔데 뭐길래/ 얼마나 만만찮은 거길래/ 왜 늘 헉헉대게 하나

대체 세상이란 놈은 뭔데 뭐길래/ 왜 매번 뒤통수만 치는 건지

매일 사는 게 참 팍팍하고/ 모진 현실 앞에 막막할 땐

눈감고 그려봐요/ 야자수 그늘아래/ 보석 빛 푸른 물결/달콤한 칵테일

다 함께 저 바다로 가요/ 탁 트인 해변으로 가요/ 열심히 수고한 그대여 오늘을 누려봐요/ 신나는 여름이잖아요/ 지친 마음 멀리 던져버리고/ 우리 지금 함께 떠나요

I say 라라라라라 오 라라라라라

대체 행복이란 놈은 뭔데 뭐길래/ 왜 나만 비껴가고 있는 건지

같은 하루하루 갑갑하고/ 왠지 가슴속이 답답할 땐

눈 감고 들어봐요/ 숲 속의 바람소리/ 초록빛 나무 사이/ 별들의 속삭임

다 함께 저 산으로 가요/ 시원한 계곡으로 가요/열심히 수고한 그대여 오늘을 누려봐요/ 신나는 여름이잖아요/ 지친 마음 멀리 던져버리고/ 우리 지금 함께 떠나요

그대여 어디로든 가요/ 원하는 그곳으로 가요/ 열심히 수고한 그대여 오늘을 누려봐요/ 신나는 여름이잖아요/ 지친 마음 멀리 던져버리고/ 우리 지금 함께 떠나요

I say 라라라라라 오 라라라라라

지금껏 잘 견딘 그대/ 오늘도 사느라 애쓴 그대/ 떠나요’... 2BiC<여름이잖아요>

 

 

이미 읽은 한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책을 소개해주는 책은 이런 점에서 매력적이다. , 읽을 때의 기분에 따라 마음으로 들어오는 문장들이 달라진다는 점도.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는다면 아마 다른 문장들이 나를 두드리게 될 것이다.

아직 뜨거운 햇살이 비치는 여름은 아니지만, 마지막 문장에 울컥했던 순간, 마음속에서 묵직한 덩어리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내 속의 나를 용서하고 부둥켜 안아주는 일, 나는 그것이 진정한 해방이라고 믿는다.’(p369)

나는 나를 사랑한다.

 

 

 

*그냥 눈에 띄었다..

p77, 인용문, 내가 할 수 이는 내가 할 수 있는

p80, 더 컬러 퍼플에 각주2 표시 없음

p220, 태양계 8개 행성 외에 발견된 외계 행성은 많아야 2,000개 정도라 들은 것 같은데, 2,817번째라는 것이 혹시 소행성아닐까? 소행성의 이름은 발견자가 부여하는 경우가 많으니...

p260, 인용문, 마날 수 만날 수

p295, 인용문, 맨 앞 따옴표 빠졌음

p324, 각주번호 05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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