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무 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앞자리가 바뀌는 후반의 나이로 달려가면서 나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마음은 아직도 이십 대인데, 늘어가는 새치를 보면서도 현실의 나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나이가 든다는 건,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변한 자신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였다.’(p50)
마지막 책장을 덮고 표지를 보니 제목 아래 문장이 보인다. 편집자가 고른 문장일까, 저자의 의도일까. 누가 골랐든 이 문장을 택한 이는 스무 살을 한참 지난, 아마도 마흔은 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삼십 대였으면 아마도 고르지 않았을 문장이니까.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문장이다. 몇 번을 속으로 되뇌어본다. 여기에서 말하는 나이 듦은 적어도 늙어간다는 의미는 아닐 거라 생각한다.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영혼의 성숙 같은 의미라 해석하면 될까.
그 때가 좋았는데. 간혹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렇다면 나는?
한동안 표지를 넘길 수가 없었다. 스무 살, 스무 살. 내 스무 살은 어땠지? 제목만으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 한참을 생각할 화두를 던져준 것만으로 책으로서의 역할을 다한 책이었다.
스무 살. 다시는 그 시간들을 겪고 싶지 않다. 생각해보면 그 때의 상황들이 뭐 엄청난 시련은 아니었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리고 싶지는 않다.
그 때의 나는 서툴렀고, 그렇기에 두려웠다. 관계를 이어가고 매듭짓는 방법을 몰라 엉켰다고 판단되는 순간에는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 없이 가위로 자르듯 싹둑 끊어버렸다. 차라리 혼란스러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이라도 했으면 나았을까. 침잠되는 마음을 감당 못해 우울해하기도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 주말마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시외버스를 타고 통학하면서, 주어진 환경을 원망하기도 했다.
지리하게 이어져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회색빛 시간들. 한 번쯤은 제자리에서라도 뛰어보았더라면 스치는 바람이라도 느꼈을 텐데, 그 시절의 나는 어리석을 정도로 고지식해서 시간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것밖에는 몰랐다.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표지를 넘겼다.
작가가 말하는 ‘스무 살’은 성장을 의미하는 경계인지도 모른다. 살아오면서 나는 수많은 계기를 맞이했고, 곤충이 탈피를 하듯 조금씩 성장을 거듭했다. 그 계기라는 건 돌이켜보면, 기뻤던 것보다는 아팠던 순간들이 많았다. 분명 내 삶인데 시간에, 상황에 엑스트라처럼 끌려갔던 시기도 있었다.
‘나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치이지 않는 법을 알게 됐다. 그건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이면 모든 게 또렷하게 들린다. ’(p43)
감당하기 어려울 때마다 내 삶의 주인임을 포기하고 상황에 휩쓸리고 주변을 탓했다. 마음에 좀 더 귀를 기울여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었어야 했는데……. 상대에게 좀 더 다가가 그의 목소리를 들었어야 했다.
스무 살의 사진첩을 꺼내어 펼쳐본다. 초벌구이를 마치고 갓 나온 도자기를 보는 느낌이다. 그 때는 다 큰 어른이라 생각했는데, 사진 속에는 말끔한 어린아이가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다.
‘사진은 가장 현실적인 예술이다. 항상 사진기가 놓인 그 공간에서 시간의 가장 마지막 순간을 찍을 뿐이다. ’(p151)
그 시간의 마지막 순간. 몇 장의 사진에서는 찍었을 때의 느낌이 생생하다. 피식 웃는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더니. 사진이라는 건 시간과 공간이 만난 좌표에서 그 순간의 느낌을 박제해놓은 기록인 걸까.
『한 글자』(정철, 허밍버드, 2014.8.)에는 ‘불’에 대한 의미가 나온다. “불이야!”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지만, “불이었다!”는 가장 무섭지 않은 말이라고.
‘난 저 사람들이 불쌍해. 다들 떨어진 유성 같은 거야. 궤도에서 벗어난 존재들이죠. ’(p216)
한 때는 밤하늘을 빛내며 소원을 비는 대상이었던 별 부스러기들이 차갑게 식은 돌덩이가 된다.
우리말이 참 기가 막히게 적절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별똥’과 ‘별똥별’이 그렇다. ‘유성’은 떠돌이별, 우리말로 ‘별똥별’, 그러니까 ‘별’이다. 그런데, 떨어진 돌멩이인 ‘운석’은 ‘별똥’, 그러니까 ‘똥’에 불과한 거다.
떨어진 유성이나 궤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쌍한 걸까. 잠시 생각해본다.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이 된다. 똥이 되어 버린 돌이나 불이었던 성냥개비도 자신이나 타인에게 많은 의미를 주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연탄재 발로 차지 말라 했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한 때 뜨겁고 빛났던 것으로 의미는 충분했다. 그 시간만을 돌아보며 더 이상 나아가지 않으려는 자세만 경계한다면 나름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과학적으로 보면 유성도 원래의 궤도에서 이탈한 부스러기들이 대기권과 부딪혀서 빛을 내는 것이니, 궤도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반드시 쓸모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거라 해석해본다.
대학 다닐 때, 데모를 하는 친구에게 물은 적이 있다.
-데모를 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거니?
그 친구는 답했다.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안 해.
-그럼,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도화선. 내가 하는 이 일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기를 바랄 뿐이지. 그것으로 충분한 거 아닐까?
도화선. 한동안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돌다 지나갔다.
‘누구나 어떤 사람의 후원자는 되어줄 수 있겠지만, 아무나 그 사람의 마음에 불을 밝혀주진 못한다. 그런 점에서 임씨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전기기사인 셈이었다.’(p309)
한 사람의 삶을 이끌어가는 것은 결국 그 자신이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그에게서 나온다. 활활 타는 불도 나무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쌓여있는 장작에 불을 붙이지 않으면 따스함을 발할 수 없듯이, 사람에게도 불을 밝혀주는 계기가 필요한 거다. 그건 어떤 사건일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마음에 불을 밝힌다’는 표현이 참 멋지다. 그런 의미로 비유한 전기기사란 말도.
내 삶에서 불을 밝혀주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몇몇 사람이 떠오른다. 한 때는 내가 잘나서 그리 되었다고 자만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의 도화선이 되어주었기에 가능했던 거였다. 이 책 『스무 살』도 어쩌면 나에게 도화선이 되어줄 지 모르겠다.
-엄마! 시접이 뭐야? 시접을 1cm 남기고 박음질을 하고 뒤집으라는데?
학교 숙제로 책 크기 정도의 주머니를 만들면서 설명서에 나온 용어를 묻는다.
-응. 여기 이 그지 같이 삐뚤빼뚤한, 쓸데없는 부분. 이렇게 뒤집어 까서 안으로 집어넣으면 안보이지? 끝에서부터 1cm 남기고 박으라는 얘기야.
-아하!
아이가 다시 바느질을 하러 가버린 후에, 내가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시접이 쓸데없는 부분인가? 시접이 없으면 두 장의 천을 이어 붙일 수 없지 않은가. 보이지 않는다고 불필요한 건 아닌 건데. 잠시 ‘시접’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의 스무 살은 이런 의미였을지 모르겠다. 시접을 만드는 경계가 된 박음질선 같은. 결코 쓸모없는 시간이 아닌, 오늘의 내가 드러나기 위해 꼭 필요했던. 그 선을 경계로 드러나는 삶이 펼쳐지고 이전의 삶은 안으로 감추어진다. 하지만, 감추어진 부분이 없으면 이후의 삶은 결코 이어질 수 없다.
경계가 서른이든, 마흔이든, 마흔 여덟이든, 우리는 수많은 경계를 만나고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스무 살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 이 순간이 또 다른 경계가 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이제는 내 나이를 긍정하려 한다. 미니에게 농담처럼 말하는 ‘자식에게 의지하는 늙은 애미’도 아니고, 중년의 흔한 아줌마도 아니고, 이 나이가 의미하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사람은 나이 들면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거라 여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