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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적 글쓰기 -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삶을 바꾼 쓰기의 힘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평점 :
이 리뷰는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친, 지가 쓴 글에 혼자 감탄하고, 도랑 치고 가재 잡으려다 쫄딱 망한, 초보 리뷰어가 벌인 쌩쇼 분투기이다. 동시에, 좌절했던 그 인간이 극히 서.민.적.인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릴 용기를 냈다는 감사의 글이기도 하다.
정말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단 말이다, 쩝~ 파랗게 펼쳐진 바다 위를 씽씽 날기도 했다. 심지어 새하얗게 펼쳐진 눈밭을 보기도 했다. ‘뭔가 학업적인 성취를 얻을 꿈입니다. 당신의 재능은 여러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겁니다.’꿈 해몽을 검색하며 입이 쭉 찢어졌다.‘음하하~ 뭔가 조짐이 좋아. 예지몽까지 꾸다니!’지난 9월은, 핸드폰 캘린더에 당첨자 발표 일자를 입력해놓고 매일 확인하며 목 빠지게 기다리던 달, 결과 발표에 목이 축 늘어진 달이기도 했다.
8월 말, 오늘의 작가상 수상 선정 이벤트였던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의 리뷰를 올렸다. 구병모작가가 직접 심사한다는 말이 강하게 나를 유혹했다. 8편의 단편을 꼼꼼히 분석하고 인상 깊은 구절과 나의 느낌을 적었다. ‘알라딘’에 등록하고 나니, 리뷰대회 공지 이후 올라간 첫 번째 글이 된다. 수시로 확인해도 최초 마감일이던 8월 31일까지는 몇 편 올라오지 않는다. ‘오예~’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수상 예정인원과 응모자 수가 거의 비슷한 것 아닌가. 이 중에서는 뽑히겠지 싶었다.
그런데, 오! 마이! 갓! 리뷰의 수준에 따라 수상 인원이 조정될 수 있다는 공지가 뜬다. 후진 글은 상을 주지 않겠다는 얘기다. 살짝 찔리며 불안해진다. 나름 긴 리뷰를 썼는데. 모나리자의 미소도 책의 분위기에 접목시키고, <어린 왕자>도 다시 읽으면서 의미를 부여하고, 최신 인터넷 뉴스와 최근 읽은 단편 <표류>의 구절 등을 인용했다.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그런 대로 괜찮다며 자기 암시를 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된다.
설.상.가.상. 이런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한 고사 성어다. 마감 일자가 9월 4일까지로 미뤄진다. 겨우 4일 미뤄졌을 뿐인데, 분열법으로 번식하는 아메바처럼 리뷰들이 실시간으로 늘어난다. 심지어 감탄이 나올 만큼 잘 쓴 글들이 대거 속출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실패로구나! 명예도 얻고 상금도 얻으려던 무모한 도전은 당선자 발표가 되기도 전에 결과를 예감하게 한다. 노래가사처럼 어찌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지. 4명의 당선자 목록을 본다. 그들의 글을 찾아 읽어본다. 내 리뷰를 다시 읽는다. 좌절한다. 낯선 이름들 사이에 끼인 *표시가 차가운 눈처럼 내렸다.
아직 포기할 순 없다. 나흘 뒤에 또 다른 리뷰에 도전한다.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이건 좀 더 난이도가 높다. 원고지 9매 이내라니! 분량 제한이 있다. 글쓰기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이 들으면 두 팔 벌려 환영할 말이지만, 요즘의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학창 시절에는 뭔 뜻인지 이해는 안가지만 길다는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감동적인 시로 탈바꿈한 시를 일기에 적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분량을 확보하려는 얄팍한 수작이었다. 이렇듯 처음부터 글을 길게 쓰지는 않았는데, 틈틈이 리뷰를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분량이 길어져버렸다. 평소 말이 별로 없다보니 글로 수다를 떨게 된 건가. 주저리주저리 쓰다보면 20매를 훌쩍 넘어가버리는 건 예사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긴 글이 반드시 좋은 글과 비례하지는 않으므로, 가끔 시를 쓰며 글을 압축시키는 연습을 하고 있다. 여전히 산문인지 시인지 구분되지 않는 정체오묘한 시를 올리기도 하지만.
이건 리뷰를 어떻게 쓸까? 책의 내용을 인용하기에는 제한 분량에 대한 압박이 크다. 그래! 경험담을 쓰자. 그 즈음에 경험했던 일을 책 내용과 연결시켰다. 제목은 어떻게 지을까? 가만있자, 오늘이 음력으로 며칠이지? 보름에 맞춰 리뷰를 올리고, ‘보름, 또는 내가 책을 기억하는 방식’이라며 책 제목을 패러디할까? 아니지, 너무 작위적이다. 고민하다 세 단어로 된 차례를 패러디하여 쓴다. ‘역쉬~ 난. 이러다 패!달!(패러디의 달인) 되는 거 아냐?’‘뻐.카.충’류의 말을 일상으로 사용하는 중딩과 지내다보니 많은 단어들을 압축하여 표현하는 증상이 나타난다. 스스로 감탄하며 말도 안 되는 자아도취에 빠진다.
결과는 실패였고, 그로부터 열흘 동안 좌절한 나르시스는 어떤 리뷰도 엄두를 내지 못한다.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반영된 칙칙한 시 2편은 암흑기를 보내고 있음을 드러내놓고 암시한다.
다시 읽어보면 응모 결과를 쉽게 예견할 수 있는 리뷰였다. <서민적 글쓰기>에 나온 내용은 이 사실을 튼튼히 뒷받침했다.
첫째, 난 서평의 금기사항을 어기는 오류를 범한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리뷰에서는 ‘그녀는 결국 마을을 ~ 게 한다.’등 곳곳에 스포일러를 심는다. 더군다나 글이 난잡하고 어수선하다. 마지막 문장은 억지웃음처럼 부자연스럽다. ‘아픈 그림이 되어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말하고 있으나 전체적인 글의 느낌은 그리 아팠던 것 같지 않다.
둘째,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리뷰는 책의 내용과 연결된 고리가 다소 뜬금없고 부실하다. 개인사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 리뷰라기보다는 페이퍼에 가까운 글이다. 그나마 세 번째 단락부터 책의 내용에 대한 리뷰가 시작되나 싶은데 이내 끝나버린다. 뽑아져 나오던 가래떡에 랙이 걸린 느낌이랄까. 이 책에 나오는‘허리가 좋아야 글이 튼튼하다.’(p207)는 문장에서 허리가 나쁜 바른 예로 들기에 적합한 글이다.
스스로 만족하며 올렸던 리뷰의 단점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넓고 글 잘 쓰는 사람은 많았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는 좀 더 많이 연습해야했고, 나르시스와 같은 자만심을 걷고 겸손해야했다. <서민적 글쓰기>는 그런 면에서 부드러운 채찍이었다.
수필과도 같은 저자의 글을 보니 장점이 확실히 보였다. 댓글에 대한 내용을 읽고 나서는 초특급 레시피를 전수받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함과 유머로 무장한 그의 글에는 따뜻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애인이 생긴 기분이랄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악의 무리를 모조리 무찌를 수 있을 것 같은 든든함이 생겼다. 나도 열심히만 한다면 꽤 봐줄만한 글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글이 주는 힘이었다.
‘글쓰기는 계속 되어야 한다.’(p247)는 에필로그의 제목은 태엽 풀린 장난감처럼 멈춰가던 마음에 용기를 주었다. <노빈손과 위험한 기생충 연구소>의 리뷰를 쓰고, ‘심페소생식’이라는 경험담을 가벼운 마음으로 써내려갔다. 손가락이 키보드 사이를 경쾌하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