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 코 소년 -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어느 소년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 둘레책방 1
로버트 호지 지음, 안진희 옮김 / 노란상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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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걸었다. 발바닥과 발가락에서 느껴지는 바닥의 감촉이 오늘따라 생경하다. 거울을 본다. 두 눈, , 입을 바라본다. 점이 있다며 투덜거리고 입술이 두껍다고 불만이던 20대의 철없음이 생각난다. 괜히 부끄러워진다.

 

로버트 호지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임신 사실을 모르던 어머니가 복용한 우울증 약 때문에 장애를 갖고 태어난 저자. 출생에서 현재까지의 성장 과정이 담담하게 담겨있다. 양 다리를 절단했기에 의족 두 개로 생활하며, 잘라낸 발가락으로 코를 만들어야 했던 소년. 입장 바꿔 상상조차 어려운 상황임에도 결코 어둡지 않은 시선으로 자신과 주변을 바라본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정갈해진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당당하고 치열하게 삶을 긍정하며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그 앞에서 드는 생각은 보다 복잡하다. 존재에 대한 경외감이 들면서 톨스토이의 책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제목을 떠올린다.

 

한 사람의 얼굴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그의 현재와 과거, 어쩌면 미래의 삶까지 보여줄 때가 있다. 찡그리거나 웃음 짓는 표정으로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드러내지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 같은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각보다 못생겼다. 또 자신의 생각보다 더 아름답기도 하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흉터가 있다.(p252)’

마지막에 나온 저자의 사진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한 눈에 보기에도 평범함과 거리가 먼 얼굴인데 자꾸 시선이 간다. 못생겼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장애가 있는 부분이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한 채 미소 짓는 표정은 맑고 편안하다. 표정 뒤에 담겨있을 많은 이야기들이, 책에 미처 담지 못한 더 많은 이야기들이 배어나오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이러한 것들에도 불구하고지금의 내가 된 게 아니다. 나의 못생긴 외모와 내가 가진 장애 때문에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p252~253)’

자신만의 흉터를 비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힘껏 껴안은 당당한 용기가 뭉클하다.

 

현재를 돌아본다. 멀쩡한 두 다리를 두고 가끔 엘리베이터나 차로 꾀를 부렸던 나태함을 반성한다. 거울로 얼굴을 본다. 평범한 얼굴이다. 점점 눈가 주름만 늘어간다며 한숨 쉬던 때가 생각난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인간의 DNA를 가졌다면 누구에게나 당연한 신체 구조가 어떤 이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평범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이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있음을. 평범하게 걷는 것이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어 판화를 찍듯 선명하고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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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서 거동이 잠시 불편할 때 농담으로 ‘장애인’ 같다고 하는데, 이건 장애인들에게 모욕 주는 말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도 있어요. 제가 초딩 때 이런 농담을 많이 했어요. 멀쩡한 신체로 움직일 수 있는 것에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나비종 2016-09-04 14:44   좋아요 0 | URL
어린이 독서모임을 위해 읽은 책입니다. 초딩용 도서는 시와 비슷해요. 짧고 단순해보이는데 어른이 읽으면 많은 생각을 안겨줍니다.
멀쩡한 몸, 감사하죠. 공기 중에 있는 산소의 존재처럼 종종 당연히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으로 멀리 뛰기 - 이병률 대화집
이병률.윤동희 지음 / 북노마드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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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나왔다. 오랫동안 안 풀리던 수학 문제를 갑자기 해결한 느낌이랄까. 얼마 전에 구입한사피엔스를 수용하기에는 마음이 무거워서 집어든 책이었다. <북노마드> 출판사의 대표 윤동희가 묻고, 작가 이병률이 답한 내용의 책이다. , 여행, 글을 쓴다는 것, 책을 만드는 것, 결혼, 관계, 사랑 등에 대한 생각들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후루룩 펼쳐보니 간간이 사진도 끼어있고 작가와의 대화집이라 부담감도 없을 것 같았다. 선택의 결과는 옳았다.

 

이성한테만 국한된 게 아니라 그냥 나하고의 시간이 필요한 사람하고 함께하면서 서로 주고받는 것.(p42)’

당신에게 맘에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내 시간을 기꺼이 내주겠다 의 의미겠죠.(p260)’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와 시간의 의미를 음미해본다. 내 시간을 기꺼이 내준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이고, 삶에서 공통분모를 만드는 일이며, 비슷한 기억을 지니게 된다는 의미겠지.

 

그 사람한테서 느끼는 피로감이 제일 그 사람을 안 보게 하는 일이지요.(p45)’

난 그게 싫더라구요. 서로에게 쉬워지는 느낌이죠.(p207)’

퇴근 후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어느 순간 또 하나의 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너무 피곤했는데, 이제 생각하니 마음이 피곤했던 거였구나 싶다.

싫었는데,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고 멀어졌던 사람도 생각났다. ‘서로에게 쉬...는 느낌’ . 그래! 이거였어! 끝내 풀지 못한 채 덮어버린 문제의 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좋은 눈빛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p56)’

느낌이 있는 사람을 만날 때 행복합니다.(p113)’

이런 말은 듣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도 싶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친구를 만드세요.(p262)’

40대 후반이 되면서 인간관계에 대한 선이 선명해진다. 주변에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굳이 억지로 만나고 싶지는 않기에. 그래서인지 인간관계의 폭이 점점 좁아지는 듯하다. 간혹 마음이 맞을 것 같은 사람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도 섣불리 용기를 내기가 만만치 않다. 더군다나 젊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상대가 나를 부담스러워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늘 조심스럽다.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난다면 20대 후반 정도인데. 직장에서의 관계를 생각하면 아직까지는 그 이상 차이가 나는 사람들도 좋아해주기는 하지만(, 결코 착각이 아니어야 해^^;) 스스로 어색할 때가 있다. 이 문장을 읽으니까 용기를 내서 손을 내밀고 싶다.

 

내 마음인데, 내 마음을 정확히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마음이 답답했는데, 한 가지 해결방법을 알았다. 마음에 와 닿았던 문장들을 훑어보니 공통점이 보인다. 사람. 나는 사람에게서 상처받았으면서도 사람이 고팠던 거구나.

질문을 읽고, 작가의 답변을 읽고, 나만의 답변을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지금은 사람에 시선이 가 있지만, 또 다시 읽을 다른 날은 여행이 눈에 들어올 수도, ‘시와 글과 책이 마음에 들어올 수도 있겠다. 읽는 사람의 마음이나 상황에 따라 책의 빛깔이 달라지니 책은 카멜레온인가.

 

질문은 결국 그 사람이 누군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요.(p65)’

수업 시간에도 교사의 질문 방식에 따라 학생들의 답변은 180도 달라진다. 또한, 알아야 질문한다고 알지 못하면 질문조차 어렵다. 작가의 답변을 보면서 윤동희가 던진 질문들을 되짚어본다. 내 성향으로는 작가보다 질문자와 더 코드가 맞을 것 같다. 사유가 깊고 시선이 가는 사람이다. 음악과 미술을 좋아한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섬세한 편집 체계가 눈에 들어왔다. 띄어쓰기, 단어 관계없이 단락의 구분만 하는 보통의 책들과는 달리 단어 단위로 줄 바꿈이 되어있어 오른쪽 여백이 들쑥날쑥하지만 가독성이 매우 좋다.

중간 중간 다른 색지에 커다란 글자로 적힌 문장들도 본문과 겹치지 않아서 좋다. 본문에 나온 내용 중 편집자가 강조하는 문장들을 한 페이지를 이용해서 다시 커다랗게 적는 책이 많다. 마음이 강아지풀처럼 예민해져 있을 때에는 이런 것조차 은근히 거슬릴 때가 있었다. 편집자의 의도를 강요당하는 것 같고, 아까 본 문장을 또 적어놓는 것이 지면의 낭비라는 생각에. 커다란 글자가 색다른 지면에 떠억 있는 것에도 편집자의 의도가 들어있지만, 본문과 겹치지 않는다는 점이 산뜻하게 다가온다.

이 책을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페이지는 맺음말이 적힌 p273이다. 편집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문장은 날 것 그대로의 마음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괜히 뭉클했다.

나중에 제가 유명해지면 인터뷰해주시겠어요? 그가 원하지도 않을 내 시간을 기꺼이 내드리고 싶었다.ㅋㅋ

 

글을 쓰는 건 사는 것하고 똑같아서 안으로 멀리뛰기 같은 걸 수도 있어요.(p165)’

책 제목 안으로 멀리뛰기의 의미를 곱씹어본다. 책을 읽고 감상문을 적다보니 마음을 한 바퀴 돌고 나온 느낌이다. 내 안을 돌아, 내 밖을 지나 주변을 바라보고, 다시 나에게로 향한다. 나는 안으로 얼마나 멀리 뛰었을까.

표지 안쪽을 다시 한 번 들춰본다. ‘가슴 두근거리는 좋은 일만/ 2016 여름/ 이병률’ . 진짜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아 가슴이 뛴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요’. 뒷장까지 사인펜 자국이 배어나온 진짜 사인본이다. 더욱 뿌듯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만 같아서 또 한 번 가슴이 뛴다.

 

희뿌연 안개가 낀 마음속을 맨발로 걸어가는 기분이 드는 요즘이었다. 슬픈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닌 날들이 나비 날개인 듯 조용히 접혔다 펼쳐지며 흘러갔다. 책이란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 아닐까. 마음에 담긴 문장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걸 보면. 이병률 작가가 표현한 대로 사람이 기타하고도 같다’(p43), 책 안에 있는 문장들은 마음의 기타 줄을 울려주는 손가락일지도.

사람을 흔히 책에 비유한다. 같은 책이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면을 보고 느끼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누구와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다른 깊이로 읽히기도 하니까. 두 권의 책을 읽은 기분이다. ‘이병률윤동희라는 책을. 전문용어로 일타쌍피’ ? 아니, ‘일타삼피가 더 적절하겠다. 두 사람 뿐 아니라 내 자신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

 

 

*아무리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다ㅠㅠ

p193 : 차마 돌아보기도 시간을 살았던 것 같은데

*눈에 띄었다.

p203 : 낯선 침대 위에 부른 바람』→ ~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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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29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학생 때 저보다 나이 어린 동생들과 친하게 지내기가 힘들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동생들도 저를 어려워해요. 그렇다 보니 저보다 나이 많은 형님들과 친하게 지내는 편입니다. 그런데 제가 40, 50 되면 형님들은 안 계실테고... 나이 어린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ㅎㅎㅎ

나비종 2016-08-29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님들을 너무 일찍 보내드리는 거 아닙니까?ㅋㅋ
20대 때에는 저도 나이 어린 친구들과는 소통이 어려웠던 것 같아요. 이제는 20대 후반에서 30대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편해지고 있습니다. 50, 60대 이상은 불편하더라구요. 입장을 바꾸면 젊은 친구들이 제게 혹시 불편함을 느낄까 다소 조심스럽기는 하지만요.
편안한 소통은 아무래도 공통된 관심사의 싱크로율에 의해 좌우되겠죠. 그래서 북플 안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위 아 더 북패밀리라며 주장하고 싶습니다만ㅎㅎ
 
심연 : 나를 깨우는 짧고 깊은 생각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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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 때문이었다. 세수도 안하고 한가하게 뒹굴며 인터넷을 뒤적이던 어느 휴일 오후, 벌떡 일어나 자세를 바로 했다.

하루는 한 생애의 축소판/ 아침에 눈을 뜨면/ 하나의 생애가 시작되고/ 피로한 몸을 뉘여 잠자리에 들면/ 또 하나의 생애가 마감됩니다’-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울리히 샤퍼

우연히 다가온 이 순간으로 하루라는 시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 책은 자기 성찰의 과정을 4단계(고독, 관조, 자각, 용기)로 나누어 깊이 성찰한 결과물이다. ‘나를 바라보고, 발견하고, 깨닫고, 나다운 삶을 만들자.’는 주제로 28개의 아포리즘을 제시한다.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고전문헌학을 전공한 저자는 주로 언어학의 관점에서 주제에 접근하여 사유를 풀어간다.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랍어, 아람어, 인도유럽어, 수메르어, 바빌로니아어로부터 영어, 한자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대어들이 각각의 소주제들에 대한 어원으로 등장한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듣는 것처럼 고대와 중세 유럽, 로마, 그리스, 이스라엘 등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한다. 곳곳에 인용된 철학자, 작가의 저서들과 시의 문구, 영화 관련 일화, 작가 자신의 경험도 화두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28가지 글 사이에는 신비로운 푸른빛 바위에 새겨진 잠언인 듯 철학자, 작가, 학자의 말이 문을 연다. 중간 중간 본문의 내용을 다시 한 번 강조하여 구성한 부분은 쉼터에서처럼 한 호흡 멈추고 주제를 음미하게 한다.

 

인상 깊었던 주제는 현관이다.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장소, 바로 현관이다. 현관은 내부를 외부로부터 구별하는 특별한 공간이다.’(p38)

근래에 접했던 생각들 중 가장 신선한 관점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나. ‘현관에 서면 신발이나 벗어놓고, 우산이나 꽂고, 거울이나 볼 줄 알았지, 이 공간이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된다니! 이 부분을 읽고 나서부터는 현관을 나설 때마다 생각난다. 4차원으로 넘어가는 관문 앞에 선 듯,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은근히 긴장된다. 이런 모습이 괜히 우스워 오늘도 배시시 웃으면서 집을 나섰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다. 한동안 개념을 잘못 알고 있었다. ‘무소유란 아...도 소유하지 않는 거라고. ‘난 가끔 책도 갖고 싶고, 예쁜 귀걸이를 보면 사고 싶을 때도 있으니, 에잇, 무소유의 삶은 글러버렸어.’라 생각했다.

어느 날, ‘무소유의 개념을 검색해 보았다. ‘가진 것이 없이 모든 것이 존재하는 상태’(네이버-두산백과). 당최 뭔 소린지. 가진 것이 없.., 어떻게 모든 것이 존..한단 말인가! ‘소리 없는 아우성이란 표현처럼 모순이 되는 개념이다. 언뜻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여기 저기 인터넷을 뒤져본 끝에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다. 아예 가진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최소한의 것을 소유한 상태라고. ‘~ 그렇다면 나도 조금은 가능성이 있겠어.’괜히 뿌듯해져서 히죽거렸다.

에 대한 사유는 무소유를 떠올리게 한다.

몫은 내게 맡겨진 절체절명의 임무이자 나만이 할 수 있고 나의 개성이 마음껏 드러나는 그 어떤 것이다.’(p236)

자신이 생전에 해야 할 운명적인 일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부차적인 일은 과감히 잘라내야 한다.’(p244)

과감히 잘라낸다는 문장은 일에 대한 표현이지만, 불필요한 물건을 과감히 버려야하는 무소유가 연상된다. ‘버린다는 개념은 이 책에서 꽤나 많이 등장한다. ‘창조, 관찰, 몰입, 생각, 자립, 에 관한 사유들은 모두 쓸데없는 것들을 제거하라 한다. 시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퇴고하는 과정에서 처음 적은 내용의 절반 이상을 깎아내고 다듬게 되니까.

 

뜻 깊은 시간이었다. 나를 들여다보고 온전히 나에게로 마음의 눈을 집중했다. 책 제목 <심연>깊은 연못이라는 뜻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마음의 연못을 의미하기도 한다. 짙푸른 표지는 고요한 바다를 연상케 하지만, 짧고 깊은 사유를 표현하기에는 깊은 연못이라는 제목이 적절해 보인다. 이토록 깊은 생각들이 내 안에 고이면 나의 자아는 깊고 푸른 바다처럼 드넓게 확장되겠지.

 

사람들은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이 변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레프 톨스토이(p36)

유사하게 반복되는 프랙탈처럼, 되풀이되는 하루가 모여 일생이 만들어진다. 변화는 하루에서 시작된다. 하루가 변하면 일생이 변한다. 흔히 변화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대안으로 연대를 말한다. 연대도 변화된 개인의 삶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변화된 삶들 역시 프랙탈처럼 연대로 이어진다면, 변화된 세상이 오는 거라고.

매일 아침, 기꺼이 인생의 초보자가 되십시오.’-마이스터 에크하르트(p6)

인생은 두 가지 길뿐이다. 하나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삶이다.’-아인슈타인(p234)

내가 해야 할 운명적인 일을 찾을 것이다. 현관을 힘차게 나서며 하루의 첫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사람처럼, 기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올 사람처럼.

 

 

* 살짝 마음에 걸렸던 표현들, 그러나 생각에 대한 서술들이고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표현들이니 크게 잘못되었다고 하기도 애매한...^^;

 

1. p106 3번째 줄, p268 8번째 줄 : ~ 지구라는 별~

-둘리도 물론 지구별로 떨어졌지만, 지구는 행성이다. 별은 스스로 타면서 빛을 내는 태양과 같은 천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행성이나 천체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p305 5번째 줄 : 새벽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별을~

-샛별은 새벽에 뜨는 금성을 표현하는 명칭이다. 그런데, 금성은 초저녁에 떠오를 때도 있기 때문에, ‘어김없이떠오르지는 않는다.

 

3. p305 7번째 줄, p311 1번째 줄 : 샛별은 밤이 가장 깊을 때 떠오르는 별이다. 그가 발견한 샛별은 가장 깊은 밤에 모습을 드러냈다.

-금성은 내행성이다. 지구보다 태양 쪽으로 안쪽에 위치한다. 태양 가까이 공전하는 행성은 태양 가까이에서 관측된다. 그러므로 내행성은 해뜨기 전 새벽이나 해 지고 난 초저녁에 볼 수 있다.

보통 밤이 가장 깊을 때한밤중을 의미한다. 해뜨기 직전을 말하는 새벽가장 깊은 밤은 내 생각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밤의 끄트머리밤의 마지막정도면 될까. 끄트머리는 다소 하찮아 보이긴 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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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8-19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성이 초저녁에 뜬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

나비종 2016-08-19 17:12   좋아요 0 | URL
태양으로부터 일정 각도 이상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새벽에 보일 때는 해뜨기 전이니 동쪽에서, 초저녁에 보일 때는 해지고 난 다음이니 서쪽에서 보입니다.
초저녁에 뜨는 금성을 `개밥바라기`라고 부르죠. 개의 주인이 금성이 너무 아름다워 밥도 안주고 금성만 봤대요. 그래서 개가 밥을 주기를 바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ㅎㅎ요즘엔 서쪽에서 보입니다~^^
 
유시민의 공감필법 공부의 시대
유시민 지음 / 창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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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학창시절, 시험에 임박해서 교과서 대신 만화책을 정독했을 지라도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으니. 이 책을 보니 알겠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것을. 나는 공부를 잘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시험을 조금 잘 보았던 것뿐이라고. 뇌에 잠시 머무르던 지식은 시험이 끝나면 증발되는 물처럼 사라졌다. 교과서를 통해 인간과 사회와 생명과 우주를 이해한 기억도, 삶의 의미를 찾아본 기억도 없다. 16년의 공부가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공부와 글쓰기를 주제로 저자가 강연한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된 책이다. ‘공부란 무엇인가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뒤표지 안쪽에는 공부의 정의가 네 가지로 제시되어 있다. ‘1. 세상의 겉과 안을 동시에 바라보는 일, 2. 더불어 나의 바깥을 이해하는 일, 3. 타인과 함께 사회를 고민하는 일, 4. 읽고 쓰고 말함으로써 참여하는 일.’이다. 작가는 공부, ‘인간과 사회와 생명과 우주를 이해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는 작업(p17)’이라 말한다.

 

공부했던 경험이 그렇게도 없나. 한참을 생각한다. 그러다 스스로 찾아서 했던 세 가지의 공부가 떠오른다.

 

첫째, 우주에 대한 공부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백과사전에서 천체에 대한 부분을 정독한 경험에서부터 시작된다. 혜성의 꼬리가 생기는 방향, 3개의 고리(당시 백과사전에는 그렇게 나왔다.)로 둘러싸인 토성과 카시니 틈 등.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용어를 알게 되다니! 된장 넣고 쓱쓱 비빈 보리밥을 든든하게 먹은 기분이었다.

고등학교 때, 내 마음을 사로잡은 별은 시리우스’였. 우연히 읽은 순정만화주인공 이름이기도 했던. 만화영화 캔디테리우스처럼, ‘시리우스, 시리우스는 발음만 해도 혀끝에서 설레는 남자주인공이었다. 실제로 있는 이름일까 궁금했다. 사전을 찾아봤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름이었던 거다. 그 후로 시리우스의 팬이 된다. 편지든 크리스마스카드든 직접 작성하는 모든 문구에는 ‘Sirius’라는 글자가 배경으로 포함된다. ‘시리우스는 음식에 들어가는 소금과도 같았다. 야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나 밤하늘을 바라볼 때면 마치 내 별 인양 시리우스를 찾곤 했다.

삼십대 초반, 이번에는 별자리에 필이 꽂힌다. 한동안‘Starry Night’란 별자리 검색 프로그램으로 미친 듯이 성도를 들여다본다. 그러다보니 실제로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해지는 거다. 도시의 불빛은 별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한숨을 유발한다. 그것은 시야를 흐리게 하는 매연과도 같아서 광해로도 불린다. 인적이 드물고 음침한 곳에 갈 여건이 안 되었던 나는, 인적이 없고 음침한 한겨울 새벽, 아파트 옥상에 혼자 올라가는 무모함을 보인다. 지금 생각하면 무섭고 손 시려서 엄두도 못 낼 일을, 그 때는 뭐가 그리 궁금했던지. 처음으로 겨울철의 다이아몬드(시리우스, 프로키온, 폴룩스, 카펠라, 알데바란, 리겔)를 보고 우와! 생각보다 크구나!’하며 두근거렸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오리온자리 옆에 있던 토끼자리를 보던 기억도.

 

둘째, 운명에 대한 공부이다. 이건 사실 공부를 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얄팍한 깊이지만 스스로 찾아서 했다는 점에서 꼽아본다.

시작은 대학 다닐 때 읽었던 <주역>이다. 집에 있는 책꽂이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펼쳤던 책이다. 뭔 뜻인지 심오한 깊이도 이해하지 못한 채 무작정 64괘를 짚어나간다. 성냥개비를 이용해 이리저리 배치해가면서 문장들을 읽고, 오늘의 운세인양 나름대로 점을 치고 심각하게 해석까지 해보는 같잖은 일을 한다.

운명에 대한 관심은 고미숙의 <나의 운명사용설명서>를 읽으면서 사주에 대한 공부로 이어진다. 주변 사람들의 사주를 따져보고, 인터넷의 각종 사이트를 뒤져가면서 공부를 한다. 그러다 수그러들었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은 분야이다.

 

셋째, 야생화에 대한 공부이다. 디카를 장만하고, 접사 기능을 사용하면서부터였다. 몇 달 동안 퇴근 후에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무작정 찍어대다 보니 이름이 궁금해지는 거다. 노란 꽃이라고는 민들레와 호박꽃 밖에 구분하지 못하던 나는, 맨땅에 헤딩하듯 꽃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한다. 검색어가 봄 노란 꽃이런 식이었으니까. 그것으로 모자라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식물도감>을 구입한다. 쌍둥이처럼 비슷하게 생긴 드넓은 식물의 세상을 접하고 겸손해진다. 생각보다 많은 야생화가 도시에서도 피어난다는 사실과 작은 꽃이 주는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생각해보니 공부에 대한 내 작은 기억에는 독서가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책은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고, 글쓰기가 공부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마음속으로 정리할 수 있게 해준다.

독서는 글쓴이가 텍스트에 담아둔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껴야’(p8)하며, ‘타인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을 느낄 능력이 없다면, 타인이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글을 쓸 수 없다’(p43)는 저자의 생각에 공감한다.

글쓰기에 대해서는 건축자재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다’(p81)며 어휘의 중요성을 강조한 문장이 인상 깊다. ‘구사할 수 있는 어휘의 양이 생각의 폭과 감정의 깊이를 결정’(p81)하며, ‘자기의 생각과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해야 글로 표현할 수 있다’(p81)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From one Sapiens to another’이 의미하는 정체성과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저자가 느꼈다는 공감이 궁금하다. ‘세상과 사람과 인생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가 조금 또는 크게 달라지는 순간을 체험’(p30)하고 싶다. 알라딘 장바구니에 두 권을 담는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진다. 읽은 시기에 따라 가슴에 와 닿는 문장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려준 책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였다. ‘내가 달라지면 같은 텍스트도 다르게 해석하게 되고, 텍스트를 다르게 해석하면 그 해석을 토대로 한 삶의 태도도 달라진다는 것을 경험했다’(p64)는 저자의 말이 와 닿는다. 달라진 내가 책을 읽으면 또 달라진 내가 만들어질 것이고 그렇게 계속 책을 읽다보면 도미노처럼 생각의 폭이 확장되겠지.

 

강연 내용 뒤에 나온 질의응답 내용에서는 세 개의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평소 책 읽는 속도가 지나치게 느린 것이 일종의 콤플렉스였는데,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맛입니다.’(p103)라고 한 저자의 말이 힘이 된다.

책을 읽을 때마다 그래야 할 것 같은 삶과 그러지 못하고 있는 내 삶과의 간극에 크고 작은 갈등이 있었다.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까지’(p124)라는 저자의 말에 마음이 다소 편해진다.

남에게 위로를 구하기보다는 책과 더불어 스스로 위로하는 능력을 기르는 쪽이 낫다고 저는 믿습니다.’(p131)는 말에 동의한다.

 

무중력 공간에 놓인 촛불은 동그란 모양으로 탄다고 한다. ‘공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동일하게 산소가 공급되는 촛불을 상상했다. 어떤 방향에서 무슨 공부를 하든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목적은 같을 것이다. 결국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니까.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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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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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일까. 정리되지 않았다. 실려 있는 7편의 소설들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던져버리고 싶은 느낌과는 또 달랐다. 유쾌한 양지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아주 극한 상황 속 인물들도 아니었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각사각 연필 소묘로 묘사된 그림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6편의 이야기에는 모두 누군가의 죽음이 담겨있다. <쇼코의 미소>에서는 암으로 돌아가시는 소유의 할아버지가, <씬짜오, 씬짜오>에서는 엄마가,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는 순애 언니가, <먼 곳에서 온 노래>에서는 미진 선배가, <미카엘라>에서는 미카엘라가, <비밀>에서는 손녀 지민이 죽는다. <한지와 영주>에서 죽는 사람들은 없지만, 영원히 만나지 못할 이별이라면 관계에 있어서는 죽음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물론 죽음이 이 책의 주요 테마는 아니다. 7편의 이야기가 공통적으로 도달하는 주제는 이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별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관계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단지 이별의 경계일 뿐이다.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이별이라는 마침표가 찍힐 때까지 이루어지는 관계는 세밀화를 보듯 자세하게 묘사된다.

 

사랑하던 마음이 변하면 이별을 하지만, 어떤 경우의 이별은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레 일어난다. 계기는 사람일 수도 있고, 갑작스런 죽음일 수도, 사회적인 사건일 수도 있다. <씬짜오, 씬짜오>의 베트남 전쟁이나,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의 인혁당 사건이나, <미카엘라>의 세월호 사건처럼. 혹은 <한지와 영주>의 이별처럼 무엇 때문인지 명확한 원인도 모른 채 관계가 단절되는 경우도 있다.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p89)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p164)

 

가족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라는 말이 있다. 가족이 어느 한 구성원의 희생을 강요하는 경우를 간혹 본다. 흔히 엄마라 불리는 희생자이다. <씬짜오, 씬짜오><미카엘라>의 엄마를 보고 속이 많이 상했다.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삶을 사는, 가까운 이들로부터 가장 많은 상처를 받는 사람들. 이런 이야기가 소설 속 상황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답답했다.

 

학창 시절, 1차적인 관계는 가족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배웠다. 가장 기본적인 핵가족은 엄마, 아빠, 나로 구성된다. 그런데, 소설을 보면 가장 친밀한 관계가 반드시 가족 사이에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쇼코의 미소>에서 소유의 할아버지와 공감대를 형성했던 사람은 친손녀 소유가 아니라 일본인 쇼코였다. <씬짜오, 씬짜오>에서도 누구보다 엄마를 인정해주었던 사람은 베트남인 응웬 아줌마였고, <비밀>에서 할머니 말자의 동무가 되어준 사람은 딸이 아니라 손녀인 지민이었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해옥과 끈끈한 관계를 형성했던 사람은 먼 친척언니인 순애였고, <미카엘라>에서는 처음 본 할머니와 함께 할머니의 친구를 찾아주려 하는 엄마가 있고, <한지와 영주>에서는 영주를 깊이 이해해준 케냐인 한지가 있다. <먼 곳에서 온 노래>에서는 선후배 사이인 소은과 미진도 있지만, 러시아인 율랴는 두 사람과 각각 중요한 관계를 맺는다.

 

관계의 매개물은 물건 이상의 의미를 지닌 상징으로 남는다. <쇼코의 미소><비밀>에서는 편지가,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는 해옥이 순애 언니에게 주었던 가죽지갑이, <씬짜오, 씬짜오>에서 주인공의 엄마가 투이네 가족을 위해 짰던 목도리, 털모자, 털장갑이, <한지와 영주>에서 영주가 썼던 일기가 그렇다. 그러므로 <한지와 영주>에서 영주가 빙하 속에 일기를 묻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묻는 행위가 아니라 한지에 대한 마음을 묻는 이별의 의식이다. 마음이 담겨있는 물건은 곧 그 사람을 상징하니까.

 

마냥 어둡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7편의 먹먹함 뒤로 올라오는 이 느낌은 무엇 때문일까. 며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오늘에서야 어렴풋이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것은 작가의 시선 때문이었다.

신영복 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는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는 말이 나온다. 소설 속에는 함께 비를 맞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심하게 묘사된 아픔을 담담하게 그릴 수 있던 힘은 그들처럼 기꺼이 함께 비를 맞으며 걸어가려는 작가의 마음에 있었다.

시선이 다시 책에 닿는 순간, 자그마한 구멍이 생긴 물 풍선에서 따뜻한 물이 흘러나와 마음을 적시는 듯 했다. 나도 누군가와 함께 걸어갈 수 있을까.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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