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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 나를 깨우는 짧고 깊은 생각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시 한 편 때문이었다. 세수도 안하고 한가하게 뒹굴며 인터넷을 뒤적이던 어느 휴일 오후, 벌떡 일어나 자세를 바로 했다.
‘하루는 한 생애의 축소판/ 아침에 눈을 뜨면/ 하나의 생애가 시작되고/ 피로한 몸을 뉘여 잠자리에 들면/ 또 하나의 생애가 마감됩니다’-『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울리히 샤퍼 |
우연히 다가온 이 순간으로 ‘하루’라는 시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 책은 자기 성찰의 과정을 4단계(고독, 관조, 자각, 용기)로 나누어 깊이 성찰한 결과물이다. ‘나를 바라보고, 발견하고, 깨닫고, 나다운 삶을 만들자.’는 주제로 28개의 아포리즘을 제시한다.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고전문헌학을 전공한 저자는 주로 언어학의 관점에서 주제에 접근하여 사유를 풀어간다.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아랍어, 아람어, 인도유럽어, 수메르어, 바빌로니아어로부터 영어, 한자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대어들이 각각의 소주제들에 대한 어원으로 등장한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듣는 것처럼 고대와 중세 유럽, 로마, 그리스, 이스라엘 등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한다. 곳곳에 인용된 철학자, 작가의 저서들과 시의 문구, 영화 관련 일화, 작가 자신의 경험도 화두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28가지 글 사이에는 신비로운 푸른빛 바위에 새겨진 잠언인 듯 철학자, 작가, 학자의 말이 문을 연다. 중간 중간 본문의 내용을 다시 한 번 강조하여 구성한 부분은 쉼터에서처럼 한 호흡 멈추고 주제를 음미하게 한다.
인상 깊었던 주제는 ‘현관’과 ‘몫’이다.
‘건물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장소, 바로 현관이다. 현관은 내부를 외부로부터 구별하는 특별한 공간이다.’(p38) |
근래에 접했던 생각들 중 가장 신선한 관점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나. ‘현관’에 서면 신발이나 벗어놓고, 우산이나 꽂고, 거울이나 볼 줄 알았지, 이 공간이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된다니! 이 부분을 읽고 나서부터는 현관을 나설 때마다 생각난다. 4차원으로 넘어가는 관문 앞에 선 듯,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은근히 긴장된다. 이런 모습이 괜히 우스워 오늘도 배시시 웃으면서 집을 나섰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다. 한동안 개념을 잘못 알고 있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거라고. ‘난 가끔 책도 갖고 싶고, 예쁜 귀걸이를 보면 사고 싶을 때도 있으니, 에잇, 무소유의 삶은 글러버렸어.’라 생각했다.
어느 날, ‘무소유’의 개념을 검색해 보았다. ‘가진 것이 없이 모든 것이 존재하는 상태’(네이버-두산백과). 당최 뭔 소린지. 가진 것이 없.는.데, 어떻게 모든 것이 존.재.한단 말인가! ‘소리 없는 아우성’이란 표현처럼 모순이 되는 개념이다. 언뜻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여기 저기 인터넷을 뒤져본 끝에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다. 아예 가진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최소한의 것을 소유한 상태라고. ‘흠~ 그렇다면 나도 조금은 가능성이 있겠어.’괜히 뿌듯해져서 히죽거렸다.
‘몫’에 대한 사유는 ‘무소유’를 떠올리게 한다.
‘몫은 내게 맡겨진 절체절명의 임무이자 나만이 할 수 있고 나의 개성이 마음껏 드러나는 그 어떤 것이다.’(p236) ‘자신이 생전에 해야 할 운명적인 일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부차적인 일은 과감히 잘라내야 한다.’(p244) |
‘과감히 잘라낸다’는 문장은 일에 대한 표현이지만, 불필요한 물건을 과감히 버려야하는 ‘무소유’가 연상된다. ‘버린다’는 개념은 이 책에서 꽤나 많이 등장한다. ‘창조, 관찰, 몰입, 생각, 자립, 몫’에 관한 사유들은 모두 쓸데없는 것들을 제거하라 한다. 시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퇴고하는 과정에서 처음 적은 내용의 절반 이상을 깎아내고 다듬게 되니까.
뜻 깊은 시간이었다. 나를 들여다보고 온전히 나에게로 마음의 눈을 집중했다. 책 제목 <심연>은 ‘깊은 연못’이라는 뜻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마음의 연못’을 의미하기도 한다. 짙푸른 표지는 고요한 바다를 연상케 하지만, 짧고 깊은 사유를 표현하기에는 ‘깊은 연못’이라는 제목이 적절해 보인다. 이토록 깊은 생각들이 내 안에 고이면 나의 자아는 깊고 푸른 바다처럼 드넓게 확장되겠지.
‘사람들은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이 변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레프 톨스토이(p36) |
유사하게 반복되는 프랙탈처럼, 되풀이되는 하루가 모여 일생이 만들어진다. 변화는 하루에서 시작된다. 하루가 변하면 일생이 변한다. 흔히 변화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대안으로 연대를 말한다. 연대도 변화된 개인의 삶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변화된 삶들 역시 프랙탈처럼 연대로 이어진다면, 변화된 세상이 오는 거라고.
‘매일 아침, 기꺼이 인생의 초보자가 되십시오.’-마이스터 에크하르트(p6) ‘인생은 두 가지 길뿐이다. 하나는 아무것도 기적이 아닌 것처럼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삶이다.’-아인슈타인(p234) |
내가 해야 할 운명적인 일을 찾을 것이다. 현관을 힘차게 나서며 하루의 첫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사람처럼, 기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올 사람처럼.
* 살짝 마음에 걸렸던 표현들, 그러나 생각에 대한 서술들이고 일상적으로 많이 쓰는 표현들이니 크게 잘못되었다고 하기도 애매한...^^;
1. p106 3번째 줄, p268 8번째 줄 : ~ 지구라는 별~
-둘리도 물론 지구별로 떨어졌지만, 지구는 ‘행성’이다. 별은 스스로 타면서 빛을 내는 태양과 같은 천제를 의미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행성’이나 ‘천체’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p305 5번째 줄 : 새벽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별을~
-샛별은 새벽에 뜨는 금성을 표현하는 명칭이다. 그런데, 금성은 초저녁에 떠오를 때도 있기 때문에, ‘어김없이’떠오르지는 않는다.
3. p305 7번째 줄, p311 1번째 줄 : 샛별은 밤이 가장 깊을 때 떠오르는 별이다. 그가 발견한 샛별은 가장 깊은 밤에 모습을 드러냈다.
-금성은 내행성이다. 지구보다 태양 쪽으로 안쪽에 위치한다. 태양 가까이 공전하는 행성은 태양 가까이에서 관측된다. 그러므로 내행성은 해뜨기 전 새벽이나 해 지고 난 초저녁에 볼 수 있다.
보통 ‘밤이 가장 깊을 때’는 ‘한밤중’을 의미한다. 해뜨기 직전을 말하는 ‘새벽’과 ‘가장 깊은 밤’은 내 생각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밤의 끄트머리’나 ‘밤의 마지막’정도면 될까. 끄트머리는 다소 하찮아 보이긴 하는데,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