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피엔스 - 문명의 대전환, 대한민국 대표 석학 6인이 신인류의 미래를 말한다 코로나 사피엔스
최재천 외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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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다니는 바이러스를 상상하게 되었다. 보이지도 않는 존재가 우리의 삶을 이토록 헝클어놓을 줄이야. 마스크를 쓰지 않은 상태가 특별함이 되어버린 요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는 중이다. 평범한 일상이 그립다. 당장 다음 주,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갑갑한 마음을 품고 종종 생각에 잠긴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오는 걸까.

여섯 명의 석학이 신인류의 미래를 말하는 이 책을 반갑게 펼쳤던 이유는 미래의 모습을 대략 그려볼 수 있어서였다. 정확한 상황 판단은 삶의 방향을 보다 쉽게 정할 수 있도록 해주니까.

동물행동학자, 경제학자, 진화 인류학자, 정치학자, 독일유럽학자, 심리학자가 바라본 미래를 예측해보며 변화될 세상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변화를 공통분모로 분석한 코로나19 사태의 원인과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답은 전공 분야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뚜렷한 색채를 띠었다. 이런 게 학자의 역할이지 싶었다. 삶이라는 여행지의 가이드가 되어주는 일 말이다.

 

동물행동학자이자 생태학자인 최재천은 생태와 인간의 관계에서 코로나19 사태의 근본 원인을 찾는다. 첫째, 인간의 자연 침범으로 생태계가 파괴되어 바이러스의 창궐 시기가 짧아진다고 보았다. 둘째, 지구온난화로 인해 바이러스와 세균을 옮기는 매개동물들의 분포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대안은 자연과 절제된 접촉을 하자는 생태백신과 사회적 거리두기와 같은 행동백신이다. 전문가의 시각으로 상황을 명확하게 해석한 점이 마음에 든다.

다만 인터뷰어의 질문 중 몇 가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석학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서는 전문가적인 답변을 얻기 위한 목적이 클 터이다. 우리가 사상누각 위에 경제를 세웠나? 라며 이에 대한 답변을 요구한다든지, 비대면 분야의 경제가 커지겠지요? 라 말한다든지, 인터뷰의 정리 단계에서도 거품에 의한 경제에 생길 많은 변화만을 언급한 점이다. 학문에는 궁극적으로 경계가 없다고 하지만 생태학자에게 경제 관련 질문을 한 부분이 논지를 산만하게 했다는 느낌이다.

 

경제는 실질적인 우리의 삶과 직결되는 분야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여섯 명의 인터뷰이 중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가 두 명이나 포함된 이유도 같으리라.

경제학자 장하준이 주장하는 바는 명쾌하다. 국민의 안전과 건강, 복지를 위한 근본적인 경제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 성장중심주의의 경제 질서를 재편하여 금융이 아닌 사람을 살리기 위한 고용 유지와 소득 보전을 향해 자본이 움직여야 한다는 거다.

그와의 인터뷰에서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말을 하다 중간에 끝내버린 느낌이 든다. 결말이 약하고 짧다. 가장 중요한 분야라는 생각에 내심 기대했는데 기본 개요 정도의 내용만 언급되어 있어 다소 아쉬웠다.

 

대안적 정치경제를 연구하는 홍기빈의 주장은 한마디로 결단이다. 어떤 가치를 중요시하고 어떤 미래를 만들어야 하는지, 어떤 원칙을 세워야 할지를 우리 스스로 결단하고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원칙은 세 가지이다. 첫째, 사회적 방역시스템을 갖추는 것. 둘째, 실업자들을 국가가 고용하는 것. 셋째, 무한한 욕망에 대한 반성이다.

고용보장제의 실례를 구체적으로 들어 이해를 도왔고 살아온 방식을 전환해야 함을 질문 형식으로 주장하여 설득력을 높였다. 바이러스가 좋은 삶을 생각해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일지도 모르겠다는 마지막 문장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문명을 읽는 공학자 최재붕은 4차 산업혁명의 관점에서 대안을 찾는다. 디지털 문명을 정해진 미래로 보고 디지털 플랫폼 중심의 삶을 제안한다. 디지털 세상에서 형성되는 인간관계를 수용하며 스마트폰을 신체 일부처럼 쓰는 인류인 포노 사피엔스의 문명을 가속화 하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열자고 한다.

그는 디지털 세상의 긍정적인 면을 말한다. 디지털 기기 사용이 주는 부작용이 염려되었던 차에 다소 안심이 되었다. 디지털 분야와 관련된 구체적인 사례가 듬뿍 들어있어 현실감이 피부로 와닿았다. 역동적인 인터뷰였다. 인터뷰어의 질문에 즉각 답을 하며 다양하고 심화된 예를 제시하는 문장들이 탁구 게임을 보는 듯 경쾌했다. 수치화된 통계 자료를 자주 곁들이며 주장의 신뢰도를 높였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세상을 맞은 어른들의 망설임에 내재된 심리를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았다. 많이 공감하며 위안을 얻었다.

 

독일유럽사회를 연구하는 김누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언급하며 자본주의의 인간화를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치명적 결함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냥 풀어놓으면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가 된다는 야수자본주의. 둘째, 과잉 생산 단계로 넘어온 무계획성이다.

그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 미국화를 비판하며 성찰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유럽 사회를 연구한 학자로서 북유럽형 복지 모델을 인간화한 자본주의의 모델로 제시한다. 인간 소외, 사회적 공동체 파괴, 무한히 자연을 침탈하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인간화해야 함을 주장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는 방법으로는 세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존엄성 사고로 바꾸는 거대한 인식의 전환. 둘째, 코로나 대응 모델을 사회 개혁과 한반도 평화 문제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것. 셋째, 재난 자본주의의 위험을 경계하는 것이다.

전환적 사고의 계기를 맞은 한국인의 세계관과 사고가 넓고 깊어졌다는 그의 맺음말이 희망적이다.

 

행복의 척도를 말하는 심리학자 김경일의 인터뷰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그는 코로나19 사태를 맞은 우리의 감정을 분노가 아니라 불안이라 정의한다. ‘사실진실의 차이점으로 불안분노의 차이점을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불안은 사실을 알려달라는 감정이고 분노는 진실을 말하라는 감정이라는 문장에 크게 공감했다.

경쟁보다 공존하는 삶, 인정 투쟁에서 벗어나 보람을 느끼는 삶, 사회적으로 강요된 원트(want)가 아니라 나만의 라이크(like)로 기준을 변화시키며 적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삶으로 향하는 나침반을 얻은 기분이었다.

 

여섯 명의 인터뷰를 접하며 코로나19 사태를 해석하는 전반적인 가이드라인을 잡을 수 있었다. 최재천 교수는 코로나19 사태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진단했고, 최재붕 교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 자라나는 포노 사피엔스의 속성을 설명하며 이미 우리 주변에 들어와 있는 디지털 세상을 보여주었다. 장하준 교수, 홍기빈 소장, 김누리 교수의 인터뷰는 체제와 이념의 전환 등 주로 거시적인 시각에서 해석한 내용이라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닿지는 않았다. 김경일 교수는 낯선 세상 안에서 당황하지 않고 당당한 나만의 삶을 찾아가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을 제시해주어 가장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내가 살아가는 시대가 전환점이 될 줄은 몰랐다. 한쪽은 비가 오고 다른 쪽은 비가 오지 않는 경계에 서 있는 듯 묘하다. 변해가는 온도 차이를 체감하는 중이다. 신문물을 접한 구 시대인이 된 기분으로 지난 몇 달간 여러 기기를 접하고 시도해본 적 없는 기능들을 배웠다.

구글폼의 유용성과 간편함에 감탄했으며 교과서 pdf를 띄우고 수업을 녹음하면서 아이패드를 처음 써보았다. 용어 하나 잘못 언급해서, 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 가족 때문에, 위층에서 나는 드르륵 드릴 소리 때문에, 발음이 꼬이는 바람에, 혼자 말하고 혼자 농담하고 혼자 웃는 억양이 내가 봐도 어색해서, 새벽녘 졸린 목소리로, 10분 남짓한 영상을 원테이크로 녹음하느라 몇 시간씩 걸린 날들이 떠오른다. 300MB의 용량 제한으로 힘들게 찍은 영상을 업로드하는 데 실패하여 다시 찍어야만 했던 분노의 시간도 있었다. 영상 편집 기술을 몰라 비루했던 나는 다음 날 바로 용량을 줄이는 방법을 배웠다. 녹음된 내 목소리도 질릴 정도로 들어보았다. 태블릿 펜이 손에 익지 않아 그 위치를 감지하지 못해 몇 번이나 헤매었던 기억도 난다. (zoom)을 이용한 실시간 조회, 수업을 시도해보았고 교육청의 원격 회의에도 참석해보았다.

모바일뱅킹과 G마켓을 처음 사용했을 때가 생각난다. 처음에는 그렇게도 접근하기가 망설여지고 두렵더니 금세 익숙해졌더랬다. 이제는 은행을 방문하는 일이 드물게 되었다. 온라인 주문도 자연스러워졌다. 익숙하지 않았던 올해의 경험들도 조만간 익숙한 일상으로 자리 잡으리라 믿는다.

 

반쪽 얼굴로 띄엄띄엄 수업하며 어느덧 2학기의 한 가운데에 있다. 제대로 된 얼굴도 모른 채 중학교 졸업을 시키게 생겼다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찡하다.

지난주 수업 시간에는 실시간 온라인 수업을 처음으로 시도해본 학급의 아이들에게 마음을 전했다.

저번 주, (zoom) 수업이 너무 미약해서 미안하다. 너희 반이 처음이라 선생님이 실시간의 장점을 다양하게 활용할 줄을 몰랐다. 선생님이 녹음한 영상을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허접한 수업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좀 그랬다. 두 번째 반부터는 간단한 문제나 시사 퀴즈를 내서 채팅으로 답도 하고, 한 줄 소감이나 질문도 받았는데.”

괜찮아요, . 끝은 창대해질 거예요.”

서투른 선생님을 이해해주는 한 마디가 어찌나 기특하던지. 다음에 실시할 혈액형 가계도 관련 줌(zoom) 수업에서는 이모티콘으로 혈액형 통계조사도 해보고 삼행시도 하고 시사 퀴즈도 내봐야겠다. 내신성적에 반영되는 기말고사가 끝나면 소회의실을 활용해서 간단한 토의를 한 후 의견을 교환하는 방식도 시도해볼 생각이다.

 

변화가 어려운 이유는 그 예측 불가능함에 있다. 뜨고 지는 태양처럼 느리든 빠르든 규칙성을 지닌 대상은 안정감을 준다. 수시로 방향을 바꾸는 바람처럼 변화하는 세상의 풍경을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모순일지 모른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가졌던 의문에 대한 답은 나왔다. 뒤표지에 나온 말처럼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걸어갈지, 잠시 쉬어갈지, 살짝 빗기어갈지 판단하여 결정하는 건 각자의 몫이다. 여러 학자의 가이드라인을 참고한다면 조금은 덜 힘들게 결정할 수 있으리라.

이제는 내 삶의 속도를 조절하며 나만의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뿌연 안갯속에서 한 줄기 불빛을 발견한 듯 반가웠다. 새로운 지도를 들고 가야 할 우리는 모두 처음이지만 서로 의지해가며 함께 걸어간다면 덜 외롭고 덜 불안한 마음으로 앞으로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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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를 사서 친정에 가니 

주섬주섬 분주해진 손길로 

인스턴트 볶음밥을 들려주신다 

요즘 밥하기 싫으면 이거 먹는다 

한번 먹어봐라 너무 편하다 

 

한 장씩 재운 향긋한 파래김을 

작은 조개 닮은 새하얀 송편을 

코 틀어막던 누런 메줏덩이를 

무지개를 품은 고소한 김밥을 

추억의 상자에 담아주신 당신 

 

인스턴트의 시간처럼 휘리릭 

여든 너머도 후다닥 흘러갈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느릿느릿 

가슴 속 상자를 꺼내어 보다 

포도알처럼 톡 물기가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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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꺼진 눈꺼풀 뒤로 

작아져만 가는 눈 

반걸음만치 좁아진 보폭 

어기적어기적 걷는 당신 

 

니 아부지 아까 또 

도롯가에서 넘어지셨다 

불긋불긋한 손바닥으로 

괜찮다며 내젓는 당신 

 

요즘 뭐가 기억이 잘 안 난다 

당신의 웃음은 허허 퍼지는데 

나두 그래요 맞장구치는 

자식의 웃음은 흐흐 시리다 

 

휘몰아치는 여든의 시간이 

덜 서럽기를 조금만 두렵기를 

아이였던 내게 그랬듯이 

톡톡 어깨 두드려드리고 싶어 

 

천천히 당신 걸음 좇아가다 

시간아 느릿느릿 흘러가라 

간절한 주문을 걸어보며 

총총 발길을 재촉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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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쪼그라드셨나 

이렇게 자그마하게 

팔 두르니 내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어깨라니 

 

목욕탕에서 나를 안고 

머리 감겨주시던 당신이 

종종 내 손 붙들고 

시장 데려가시던 당신이 

 

바스락 이파리 떨군 

앙상한 나무인 양 

스르르 녹아버릴 듯 

흩날리는 눈꽃인 양 

겨울을 닮아가는데 

 

가을을 서성이는 나는 

줄지 않는 거리를 품고 

희끗희끗한 겨울을 향해 

먹먹한 웃음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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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5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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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주는 선입견이란. 러시아어는 도통 모르니 책 표지에서 이반 투르게네프로 짐작되는 이름 옆의 제목이 거의 직역인 줄 알았다. 에곤 실레의 표지 그림도 한몫했다. 어디서 이런 그림을 적절하게 찾아왔는지. 딱 봐도 아버지와 아들의 대치 상황 아닌가. 표지를 넘기기 전에 했던 상상은 어쩌면 당연했다. ! 아버지와 아들이 대립하는 소설이겠구나.

결론적으로 대립은 맞으나 대상이 살짝 어긋난다. 소설의 중심 무대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은 주인공의 큰아버지와 친구이기 때문이다. 줄기차게 라떼를 부르짖는 큰아버지와 아아를 연상시키는 친구는 결코 서로에게 섞여 들어가지 않는 중심인물이다.

주인공의 아버지와 아들이 언제 대립하나 하염없이 기다리다 드라마가 끝나버렸다. 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각각 두 명씩이라 제목의 <아버지와 아들>이 어느 팀인가 판단하기 어려웠다. 처음 부분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아들의 친구가 급부상하면서 그의 아버지의 비중도 만만치 않아지는 게 아닌가. 뒷부분의 해설을 보니 비로소 이해되었다. 원제는 <아버지들과 아이들>로 주인공을 복수의 인물로 설정했던 거다. 서브로 여겼던 아아도 주인공이었다는 것.

 

러시아 이름은 이름(예브게니), 부칭(바실리예비치), (바자로프)’, 세 부분으로 나뉜다고 한다. 애칭으로 비스므레한 발음도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오타인 줄 알았다. 보통 헷갈리는 게 아니라 처음에는 그냥 읽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가계도를 그려가면서 읽었다. 예브게니 바실리예비치 바자로프를 바실리치였다가 바실리예프였다가 성만 불렀다 이름만 불렀다 부칭을 불렀다. 이런, 된장! 적으면서 짜증났지만 인물들의 관계도는 파악이 되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대략 ,,,등의 어미로 끝난다. 리뷰에서 그들의 풀네임을 적다 보면 스팸처럼 도배될 것이므로 아버지 1, 2와 아들 1, 2로 적기로 한다.

아들 1과 아들 2 중 앞에서 언급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아들 2로 명명하려고 한다. 그는 니힐리스트이다. 비중으로만 보면 원톱 주인공이다. 아들 1의 친구인 그는 대사량도 많고 액션도 화려하고 사건도 파란만장하다. 순간적이지만 조연급의 여인 1, 2에게 찝쩍대는가 하면 권총으로 결투도 하게 된다. 발진티푸스에 걸린 환자의 시체를 해부하다 손가락을 베이는 바람에 감염이 되어 죽는다는 급작스런 설정은 이건 뭥미? 이다. 허무주의자가 허무하게 죽는다. 복잡하게 여기저기 다 얽히는 인물을 만들어놓고 끝내 감당이 안 되니까 제거해버린 느낌이랄까. 어쨌든 주인공이 죽는 법은 거의 없으니까 끝까지 살아남은 아들 1을 주인공 1으로 여기기로 한다.

 

소설 속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라떼를 고집하는 구세대와 모든 권위를 부정하는 신세대 아아의 갈등과 대립 상황이다. 당시 러시아의 시대상과 맞물리며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가정으로 끌어와서 구현하고 있다. 둘째, 등장인물들의 각기 다른 사랑 방식이다. 사랑에 빠져드는 심리의 그러데이션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사랑의 관점이든 이념의 관점이든 한 가지 관점으로 소설을 음미해도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나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작가의 문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러브러브한 분위기에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작위적인 어투도 사건 전개도 도통 못마땅한 데다 재미도 없어서 집어던지고 싶은 책의 필수 조건을 골고루 겸비한 책이었다.

 

큰아버지와 아들 2의 대립이 선명하게 부각되지만, 나는 상대적으로 희미한 색채로 배경처럼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더욱 시선이 갔다.

첫째, 아들 1이다. 친구인 아들 2를 존경하다시피 하며 그를 추종하는 인물이다. 얼마간은 주체성 없이 아들 2에 끌려다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극단적인 아들 2에 비해 이 인물의 내면에는 낭만적인 면모가 자리하고 있다. 소설을 통틀어 가장 많이 갈등하는 인물이다. 나중에는 스스로 일어서서 마이웨이를 걸어가는 모습이 가늘고 길게 걸어가는 인간 승리를 연상케 한다.

둘째, 아버지 1이다. 근본적으로 지닌 이념은 아들 1의 큰아버지인 형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훨씬 따뜻하고 사랑이 충만한 인물이며 당신의 이념을 아들 1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많이 속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선한 사람의 결이 보여서 마음이 짠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착한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셋째, 아버지 2와 어머니 2이다. 소설 속의 어머니들은 한결같이 일찍 죽어서 존재감 제로인데 유일하게 등장하는 어머니이다. 물론 아버지 1의 어린 부인도 아들 1의 어머니 급이지만, 그녀는 어머니로서보다 한 남자의 여인으로서의 면모가 더욱 부각 되므로 제외한다. 집을 버스 정류장으로 아는 아들 2의 들락거림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묵묵히 맞이하고 기다리고 아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가슴 졸이는 인물들이다. 헌신적인 그들의 사랑은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모습과 아들의 무덤을 찾는 모습에서 극치를 이룬다. 불효막심한 아들이 뭐라고! 이념, 그게 뭣이 중헌디!

 

라떼의 고지식함과 허세도 밥맛이지만 아아의 극단적인 이념도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사랑에 빠진 것을 자각하면서도 이념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비겁하게 떠나버리는 아들 2의 모습은 이중적이다. 사랑은 이념보다 상위 개념인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배반했던 걸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소설의 처음 부분에서 마부를 텁석부리라며 무시하는 모습에 인성 쓰레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말만 번드르르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살아가는데 중요한 건 과연 무엇일까. 커다란 나무로만 보였던 나의 부모님들은 어느덧 자그마한 관목이 되셨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옳은 줄로만 알았다. 부모님의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은 부모님 세대의 모순적인 면과 약간은 권위적인 면과 고집이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당신들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모 세대가 되어버린 나도 가끔은 라떼를 찾게 되니 자식들이 지금 나를 바라보면 내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리라. 나의 아이들이 자라면 또 다음 세대들이 아마도 이런 감정을 느낄 것이다. 세대 간의 간극은 어쩌면 반복되는 현상일지 모른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노부부가 죽은 아들의 무덤을 찾는 장면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한결같은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세대, 이념 따위는 다 날아가 버린다. 작가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주제는 이런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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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11-01 0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러시아 문학은 이게 처음이었는데요, 어려운 이름과 지명을 보면서 일본소설을 처음 읽던 때가 떠오르더라구요. 입에도 붙지 않는 이름들을 메모해가며 읽다가,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 것이 바로 인물을 이니셜로 외우는 거에요. 그래서 아르카디는 A군, 바자로프는 B군으로 리뷰에 적었어요 ㅋㅋㅋㅋ 적응되면 생각보다 편합니다. 암튼 저는 올드보이와 영보이로 나누었는데, 나비종님은 라떼와 아메로 나누셨군요! 재밌는 표현입니다 ㅎㅎㅎ

일단 양쪽의 입장이 확고하고 어떻게 다른지는 초반부터 잘 나왔지만, 타협의 기미가 안보이니 이 대결구도가 끝까지 가는 것 같아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더라구요. 그래서 작가가 ‘사랑‘에 대한 내용으로 방향을 튼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었으면 뭐 별 내용없이 끝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흑과 백의 중간인 회색으로 살아도 문제없는 세상인데, 모 아니면 도를 외치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웃긴 건 본인들도 힘들고 피곤한 성격인 걸 알더군요. 근데 이렇게 쭉 살아와서 고칠수 없다는 거죠.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요. 그게 다 쓸데 없는걸 형님처럼 총까지 맞아봐야 아는건지 ^^;; B군도 마찬가지죠. 그렇게 신봉하던 니힐리즘도 죽음에 이르고 보니 중요한 게 아님을 알게 되다니요.

작가는 바자로프를 인성 쓰레기로 만들기로 작정한듯 싶어요 ㅋㅋㅋ 사랑도 저버리고, 친구도 잡지 않고, 노인공경도 없고, 귀족도 아니면서 아랫사람들을 막 대하는 모습도 그렇고. 그런데 적어놓고 보니 ‘요즘애들‘이 딱 바자로프를 빼닮았네요. 그리고 아메였던 저는 어느새 라떼가 되어버렸구요 ㅎㅎㅎㅎ 아이가 자라서 부모가 되어봐야 부모마음을 알게 되듯이, 아메는 라떼를 이해 못하니까 라떼들이 이해해줘야 할거 같아요^^

이번에도 책보다 서로의 리뷰와 감상이 훨씬 재미있는 시간이었네요 ㅋㅋㅋ 이번 리뷰는 언제쯤 올라올까 계속 기다렸는데, 아슬아슬하게 성공하셨네요 ㅋㅋㅋㅋ 댓글 적다가 어느새 11월이 되었네요. 10월도 고생하셨어요. 점점 연말이 다가와서 여러모로 바쁠텐데 컨디션 조절 잘하시고 건강하세요^^

나비종 2020-11-01 07:59   좋아요 1 | URL
페테르부르크란 도시를 검색해서 찾아보고 그곳이 레닌그라드인 줄 이번에 알았습니다.^^; 일본소설은 자주 접하지 않은 장르인데요, 매력이 있나요? 오호! A군, B군. 좋은 방법이네요. 예전에 비슷한 문장들을 겹치지 않게 쓸 때 번호를 붙여서 순서쌍으로 돌린 적이 있었거든요. 1,2 7,8 2,5 이런 식으로요. 다음번에 복잡한 이름이 나오면 써먹어보겠습니다. 도통 이름이 헷갈려서 말이죠.ㅎㅎ 올드보이와 영보이도 정체성이 확 드러나서 좋은 표현 방법이네요.^^ 저는 큰아버지 캐릭터를 보고 라떼는 말야~ 를 자꾸 외치시길래 그와 대비되는 차가운 지성을 지닌 친구를 아이스아메리카노로 비유를 했거든요.

맞아요. 갑자기 중간부터 사랑이 툭 튀어나온 느낌이 강하더라구요. 오딘초바의 캐릭터가 그렇게 끝까지 갈 줄 몰랐거든요. 책 뒤에 나오는 작가 연보에 나오는 비아르도라는 여인을 많이 반영한 걸까요. 평생에 걸친 사랑이라는 여인이요.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벨린스키와의 추억에 바친다고 나오잖아요. 바자로프의 캐릭터에 그렇게 공을 들였던 것도 그 친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요. 벨린스키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까지 남겼다는 걸 보면요.
그나저나 뜬금없이 결투 장면이 나와서 이건 뭐야 했었는데 작가 연보를 보고 푸시킨이 결투로 사망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톨스토이와 결투까지 갈 정도로 언쟁도 벌였다는 걸 보면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 중 하나였더군요.
이런 요소들을 보면서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글이란 작가의 삶을 많이 반영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습니다.

형님이나 B군이나 다 쓰잘데기 없는 객기로 보여지더라구요. 신념을 굽히지 않던 박새로이는 멋있기라도 했지ㅋㅋㅋ 아! 이태원클라스의 그분이요~ㅎ 저는 드라매니아^^;

작가 현실의 삶에서도 A군의 모태로 추정되는 작가와 B군과 O양의 삼각구도가 있었던 걸까 잠시 근거없는 상상을 해보았어요.^^;
맞습니다. 저 역시 아메였는데 라떼가 되어버리고 이게 투비컨티뉴드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흐름 같기도 해요.ㅎㅎ

물감님의 리뷰와 댓글로 독서 레벨이 몇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ㅋㅋ 책보다 리뷰가 더 흥미있고 댓글도 만만치 않게 작은 리뷰 수준이니 그나마 이 재미로 고전의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ㅎㅎ
아슬아슬^^;;; 네. 이번 달에는 좀 더 분발해볼게요. 11월의 첫 날, 눈 비비고 일어나 대댓글부터 쓰는 이 미친 정성의 클라쓰! ㅎㅎ 물감님도 잘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