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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답이 되는 순간 - 어떤 세상에서도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김제동과 전문가 7인이 전하는 다정한 안부와 제안
김제동 외 지음 / 나무의마음 / 2021년 3월
평점 :
읽기 전에 살짝 불안했던 건 사실이다. 『코로나 사피엔스』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유명한 사람들 있는 대로 끌어다놓고 허우대만 멀쩡한 책이면 어쩌지. 가장 큰 기여도가 베개로서의 역할이면 어쩌나. 이것도 그런 거 아냐? 이 책의 제목처럼 나의 ‘질문이 답’이 될까봐, 이것도 그런 거가 될까봐 불안했다.
책날개를 펼치니 시선을 사로잡는 문구가 있다. ‘어떤 세상에서도 살아가야 할 ___에게 이 책을 선물로 드립니다.’ ‘어떤 세상에서도 살아가야 할’이라니. 천천히 음미하니 불현 듯 찡하다. 그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어떻게 변화하든. 그래, 우리는 살아야 하는 존재니까, 살아내야 하는 존재이니까. 이 책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방송인 김제동을 사회자로 각 분야의 전문가 일곱 명과 2020년 8월에 이루어졌던 대담을 정리한 책이다.
일곱 명 중 과학자가 네 명이지만 전문 분야의 콘셉트가 겹치지는 않는다. 물리학자가 두 명인데 김상욱 교수는 주로 양자 세계를, 정재승 교수는 인간의 뇌를 다룬다. 국립과천과학관 이정모 관장은 생화학이 전공이니 생물과 화학을 아우른다. 심채경 박사가 연구하는 천문학은 지구과학의 한 분야이므로 결국 기초과학인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이 고루 섞여있는 셈이다.
인간 삶의 기본은 식의주이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경제 분야의 전문가 이원재 대표와 주거 공간과 관련된 건축가 유현준 교수가 있다. 기본적인 삶이 해결되면 문화생활 쪽으로 관심이 옮겨지니 대중문화전문가 김창남 교수가 우리를 기다린다.
사회자 개인의 친분이든 의도된 선정이든 골고루 분포된 대담자의 구성이 생각의 폭을 확장시켜줄 것 같았다. 앞서 말한 불안감과 함께 기대감도 덩달아 품게 되었다.
속지 한 장을 넘기니 사회자를 비롯하여 대담자가 적은 간단한 문장과 친필사인이 담겨있다.
답은 종종 질문에 매달려 있다는 정재승의 문장이 와 닿는다. 답=f(질문)이라는 김상욱의 간결한 문장은 수학을 언어로 사용하는 물리학자답다. 진정한 이과스러움이 묻어있다. 군더더기가 없다.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고자하는 김제동의 문장에는 평소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담겨있는 듯하다. 이정모의 사인은 선입견을 지니고 봐서 그런지 귀여운 공룡을 닮았다. 유현준의 글씨체는 나를 설레게 한다. 그의 사인은 깔끔하고 유려한 다리 건축물 느낌이 난다. 거침없는 가로선과 세로선을 기준으로 나머지 알파벳들이 물결친다.
나머지 세 명의 대담자는 그들의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인지 낯선 느낌에 별 감흥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이원재의 문장을 보며 경제 관련 표어를 연상했다. 개인적으로 ‘최고의’라는 극단적인 어휘를 선호하지 않아서일까 심채경의 문장에서는 살짝 작위적인 느낌이 난다 싶었다. 김창남의 문장과 글씨체에서는 평범한 연륜만 보였다.
물리학자 김상욱 편에서는 자기만의 기준을 가져야 함을 말한다. 솔직히 눈에 보이지 않는 양자의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주로 바라보는 대상이 달라서일까.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그에게는 독특한 기준이 존재하는 듯하다.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의 가장 큰 차이는 시선이다. 잘 몰랐던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한 기회 같다는 김제동의 멘트가 마음에 남는다.
나는 가끔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에서 좌표 평면을 연상한다. 두 사람이 그리는 관계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장면이 흔히 과학에서 그리는 그래프와 닮아보여서이다. 과학에서는 독립 변인과 종속 변인과의 관계를 그래프로 그려서 설명한다. 결국 대상이 자연 현상이냐 사람이냐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공통점이 보인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세상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크고 작은 관계를 맺는다. 관계로 인해 세상의 그래프가 바뀌는 현상은 당연한 결과이리라. ‘관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과학자의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건축가 유현준 편은 공간에 의한, 공간을 위한, 공간의 이야기이다. 공간이 거울과 비슷해서 나를 반영한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기분 좋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가꿔야한다는 말을 들으며 나를 담고 있는 공간을 둘러본다. 주방 창가, 옷장, 책장 등 집안 곳곳이 새로운 시각으로 눈에 들어온다.
그 역시 건축이 관계를 조율한다며 관계를 언급한다. 전문적이면서 코로나 시대와도 연결되는 내용이 있어 알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면적은 내가 가진 물건의 양과 연결된다는 말에 움찔한다. 종종 했던 생각을 들킨 기분이랄까. 무소유를 추구한다며 말은 습관처럼 내뱉는 나. 너무 많은 물건이 내 공간에 있다. 버려야하는데, 정리해야하는데.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밀려있던 생각이 다시 앞으로 다가온다. 실질적으로 나에게 필요한 내용이 많이 담겨있는 대담이었다. 내가 사는 이 공간은 지금 당장이라도 나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대상이니까. 이론만이 아닌 실전의 노하우를 전수받은 것만 같아 참 좋았다.
천문학자 심채경 편에서는 신선한 정보를 얻었다. 나사(NASA)의 화성 유인 프로젝트만 얘기하던 내게 아르테미스 프로젝트는 수업 시간에 도입할 수 있는 따끈따끈한 이슈였다. 화성을 향하는 길목으로 달을 지목하고 있다는 것. 3학년 과학의 우주 탐사 분야에서 최근 동향으로 언급할 수 있겠다. 달의 중요성이 새삼스럽다. 무지한 교사가 중요한 포인트를 놓쳤구나 싶어서 작년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실패 박람회와 실패 이력서에 대한 내용에 공감했다. 과거의 실패담은 종종 유쾌한 대화의 소재가 되어 친밀감을 높여준다. 수업 현장에서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도 유전자 친자 확인결과처럼 99.999%에 육박하는 성공률을 보이는 팁이다.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냐는 아이의 질문에 별 가루에서 왔다고 대답했다는 천문학자의 이야기도 뭉클했다. 자연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우리 모두 같은 재료에서 출발한 다른 존재라는 점도.
다른 행성에서의 일출과 일몰을 상상한다는 그녀의 말에 나도, 나도 하며 손을 들고 싶었다. 수성에서의 태양을 상상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별이든, 시든, 음악이든 쓸데없는 것들이 우리를 살리는 것 같다는 김제동의 멘트에도 공감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삶에 가장 근접한 주제이다. 경제전문가 이원재 편은 현실적인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게 해주었다. 그는 미래를 예측하는 변수로 인구, 기술, 기후를 말한다. 노령층이 많아지는 인구 구성의 변화는 새로운 사회를 살아가야함을 시사한다. 드론이 나온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제는 드론 택시가 언급될 정도로 기술은 도약적으로 발전하는 중이다. 얼마 전에는 지구 온난화를 가르치면서 작년과 올해의 인터넷 뉴스들을 보여주었다. 교과서를 빠져나온 현실은 빠른 속도로 생생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들 역시 시험을 벗어나 진지하게 현실을 돌아보는 모습을 보였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언급했다던 노동, 작업, 활동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노동하지 않고도 기본 생활이 보장되더라도 사람들은 할 일을 찾아서 한다는 것. 인간 존재의 본성에 대한 믿음이 실린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가난도 자격이라는 말이 마음 아팠다. 기초생활수급자임을 증명하려고 각종 서류를 발급받아 주민자치센터에 제출해야 하는 우리 아이들의 부모님이 생각나서였다.
막연하게만 보였던 기본 소득의 개념과 취지를 확실하게 알았다.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을 가치로 추구하는 제도이며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 구체적인 금액과 재원을 계산한 전문가다운 데이터를 보며 감탄했다. 그런 세상이 올까. 그런 세상이 오면 좋겠다. 왠지 뭉클했다.
뇌과학자 정재승 편은 샤프하면서도 유쾌했다. 벌써 다섯 번째 전문가와의 대담이며 앞으로 두 번의 대담만이 남았다는 생각을 하자 끝나가는 게 아쉬웠다. 그의 멘트는 과학자의 그것을 넘어 심리학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리했다.
초기 경험이 이후의 판단과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에 몇몇 경험을 돌아보았다. 인식체계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깨달음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깊이 마음에 새겼다.
거대한 뇌를 가진 동물들은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뇌전문가의 말에 희망을 갖게 되었다. 지금 품고 있는 질문들과 앞으로 품게 될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언젠가는 찾게 될 것 같아서이다.
좋은 의사결정의 첫 단계는 스스로 결정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며 가장 높은 수준의 의식 활동은 자기 객관화라는 말은 두고두고 나의 삶에 적용해야 할 내용으로 마음에 담았다.
국립과천과학관 이정모 편에서는 과학의 의미와 과학적인 태도를 심도 있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공룡처럼 과거에 멸종한 다른 종의 역사를 통해 인류의 미래를 유추한다는 시각이 새로웠다. 화학 반응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분자의 잘못이 아니라 환경의 문제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첫 수업을 시작할 때 매번 강조하는 말이 있다. 왜? 라는 질문을 항상 품어야하며 우리가 배우는 지식은 교과서에 실릴 때까지의 진리이므로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이 진리가 아니며 일시적으로 인정해준 답이라는 그의 말이 반가웠다. 평소 아이들에게 했던 말과 비슷해서였다.
과학 논문에는 ‘나(I)’로 쓰는 게 없으며 ‘우리(We)’로 쓴다고 한다. 여럿이 관계를 형성하고 의지하며 세상을 탐구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는 사람 '인'이라는 한자가 떠올랐다.
어른들을 위한 과학관을 만들어낸 넓은 사유의 폭과 추진력이 존경스러웠다. 과학의 수준을 내릴 게 아니라 대중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하며 과학관은 새로운 질문을 얻어가는 곳이라는 말에 과학자로서의 자부심과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대중문화평론가 김창남 편에서는 두 명의 대담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신영복 선생님에 대하여 나눈 대화들이 좋았다. 살아계셨더라면 분명 여덟 편의 대담이 이 책에 실렸으리라. 내 카카오톡의 배경 화면과 상태 메시지에는 그분의 글씨 ‘처음처럼’이 있다. 볼 때마다 마음이 데워지는 글씨체이다. 세수할 때마다 보려고 세면대 옆에도 알라딘 사은품으로 받은 작은 나무 액자가 있다.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로 시작되는 캘리그라피 문장들이다. 당신의 글씨체는 나의 원픽이다. 캘리그라피도 멋지지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편지지의 글씨체는 볼 때마다 감탄스럽다. 내용은 또 어떠한가. 인간과 세상을 통찰하며 관계를 말했던, 거목과도 같았던 당신.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에 대한 문장과 그림 앞에서 삶을 돌아보며 한참을 머물렀다.
대중문화로 주제가 옮겨지면서 긴장감이 살짝 떨어진다 싶었는데 ‘자유’가 언급되면서 다시 텐션이 올라갔다. 대중문화전문가인 그는 뭐가 됐든 자기가 좋아하는 이유를 스스로 생각하라며 문화적 주체를 언급한다. 자유로운 삶이란 자기의 이유로 사는 거라는 말과 나의 문화라는 말이 가장 좋았다. 남들 좋아하는 대로 덩달아 휩쓸려가기 십상인 요즘이다.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이 마음 깊이 남았다.
읽는 내내 따뜻한 차를 머금은 듯했다. 문장에서 흘러나오는 온기에 지친 마음을 기대었다.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들은 나름의 목적과 고유한 온도를 지니고 있을 터이다. 지식을 주는 책, 지혜를 주는 책, 웃음을 주는 책, 감동을 주는 책, 생각거리를 주는 책. 뜨거운 책, 차가운 책, 미지근한 책. 이 책은 앞에서 생각한 모든 범주를 조금씩 아우른다. 온도는 36.5도보다 살짝 높다. 온실 효과를 나타내 듯 적절히 따스하다.
그걸 가능케 하는 건 뭘까. 생각 끝에 김제동이 떠오른다. 음성 지원이 되는 듯 자연스러운 진행, 어떤 주제로 대화해도 상대방의 능력을 끌어내어 핵심으로 유도하는 부드러운 리더십, 감성이 담긴 해석, 맛깔 나는 대화가 될 수 있도록 중간 중간에 뿌려지는 유머. 650쪽의 두께를 가벼운 산책길로 만들어버리는 사회자. 그의 당당한 매력이 나는 참 좋았다.
책은 논리를 뛰어넘는 대상이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책 안의 사람을 향해 일어나는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무생물인 종이에 글씨 몇 자 적혀있을 뿐인데. 종이 한 장 한 장을 모두 넘기고 나면 책은 살아있는 대상이 된다. 책 속의 인물을 만나고 온 듯 잔잔했던 마음에 파도가 출렁인다.
책 안에 담긴 신영복 선생님의 깊은 문장과 글씨를 보며 내내 찡했다. 반갑고 그리웠다. 또,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삶의 무대가 달라 아마도 평생 만나지도 못할 사람들에게는 친숙함이 느껴졌다. 그들과의 대담 장면도 좋았지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인 듯 김제동의 독백으로 서술된 짤막한 문장들도 좋았다. 주제의 포문을 자연스럽게 열어 그들만의 대화에 나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였으며, 그만의 생각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문장은 나에게 생각거리를 안겨주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했던 질문은 ‘이 책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답을 찾을 수 있을까.’였다. 책에 적힌 수많은 글자의 강을 건너보니 알겠다. 이 책에 내가 찾는 정확한 답은 없다는 것을. 다만 이 책은 다양한 사람들의 이정표를 제시해주는 역할을 했던 거다. 나의 답은 내 스스로 찾아야 하리라. 선택은 나의 몫이고 걸어가는 것도 나의 몫임을 새삼 깨닫는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저자들의 사인을 다시 보니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오른쪽 아래의 문장이 들어온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문장을 내려올 때 보게 되었구나. ‘사람과 사람의 작은 만남이 모든 변화의 시작입니다.’ 김창남 교수의 문장이다. 살아있는 대상을 담고 있는 책 역시 살아있는 대상과 동급 레벨이다. 비대면 일지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책에 담긴 저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들의 말에 나의 마음이 움직였으니 그들과의 만남으로 나의 변화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 다시 무언가를 하고 싶어졌다. 그게 무엇이든 나만의 이유로 만들어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