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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가죽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귓가에서 처음으로 금붙이가 찰랑거렸던 날, 거리엔 온통 귀걸이를 장착한 인간들로 그득했다. 털모자를 새로 사고 바라보는 거리에는 어디에 숨어 있다 이제야 나타난 거냐! 모자 인간들이 창고 대 방출 하듯 쏟아져 나왔다. 욕망했던 물건들은 타이밍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눈앞에서 찬란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욕망이 사그라지면 증발해버리는 물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반복되는 경험으로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내게 보이는 것, 마음을 흔드는 문장, 고막을 울리는 선율, 나를 향해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나의 욕망과 다름 아니라고.
욕망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바닷물을 들이켰을 때 경험한다는 타들어가는 갈증처럼 경계를 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부드러운 필기감을 안겨주는 볼펜을 소유하고 싶다는 바람부터 불로장생을 꿈꾸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나를 중심으로 가족, 직장, 사회, 국가, 세계, 우주까지 영역을 넓히면 욕망하는 대상은 무한대로 확장되리라.
추적! 욕망 편!『나귀 가죽』은 욕망의 본질을 낱낱이 파헤치는 소설이다. 스토리라인은 단순하다. 자살을 작정한 청년 라파엘이 우연히 목숨을 대가로 욕망을 이루어주는 나귀 가죽을 득템한 후 인생역전하려다 망한 이야기이다.
알라딘 요술램프는 문지르는 수고만 하면 된다. 나쁜 놈에게도 절대복종하는 요정 ‘지니’는 자체판단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뇌의 존재이다. 그래도 얘가 낫다. 이노무 가죽때기는 어마무시해서 소원의 경중에 따라 불에 굽는 쥐포인 양 사이즈가 줄어드니. 붉은 경계선을 긋고 시뻘건 눈으로 나귀 가죽의 사이즈에 집착하는 주인공. 욕망이 실현될 때마다 줄어드는 테두리를 보며 멘붕에 빠져든다. 두문불출하며 무소유의 해탈인간으로 변신을 도모하지만 실현불가능한 시도의 끝은 파국이다.
얼핏 독일 고전 소설에 등장하는 파우스트가 연상된다. 영혼의 자리에 목숨이 들어간다. 아류작으로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파우스트는 그나마 세속적인 쾌락을 누렸지만 라파엘은 가죽 습득 초반을 제외하고는 욕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발자크가 욕망 속으로 한 걸음 더 접근했다는 느낌이랄까.
작가는 욕망과 행함이 지닌 모순을 까발린다. 인간 존재 원천을 고갈시키는 본능적인 요소로 ‘바람’과 ‘행함’을 꼽는다. ‘바람’의 대가와 목숨을 등치시키며 주인공을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간다.
오래 살기 위해 감정을 죽일 것이냐, 열정의 수난을 받아들여 젊어서 죽을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선택할 운명이라고 말한다. 욕망하자니 목숨이 줄어들고 욕망하지 않자니 사는 것 같지 않다. 살기 위해 삶을 포기하게 되는 아이러니다. 발자크가 독자에게 던지는 물음은 결국 하나다. 욕망은 선택의 문제로 귀결되는 듯 보이지만 선택이 불가능한 모순이라는 거다.
요즘 연모하는 드라마에서도 세손저하가 부르짖는다. ‘어쩌면 영영, 내 삶은 목숨만 연명하는 것 말고는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느냐. 그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중략) 겨우 이 자리 하나 지키자고 눈 감고 귀 막고 살아가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feat. 드라마 <연모>) 이런 생각으로 액션을 취했다는 세손저하는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진다.
책을 읽을 때면 내 옆에는 A4절반만 한 이면지와 연필이 놓인다. 마음에 들어오는 문장을 적기 위함이다. 글에도 방향성이 있다. 메모들을 훑어보며 리뷰의 방향을 정한다. 다큐냐, 산책 모드의 수필이냐, 약간의 허풍을 MSG로 뿌려댈 거냐. 한 번 더 입 안에서 문장을 굴리며 맛을 본다.
읽을 때는 감탄했던 문장이건만 다시 읽으면 왜 샀나 싶은 옷이 된다. 독서속도가 느리면 문장을 꼼꼼히 음미할 수 있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한다. 생각이 방향성을 잃기 쉽다는 것. 수시로 변하는 욕망들을 수용하다보니 열 장 가까운 메모에는 당최 일관성이 없어진다. 울다 웃다 다시 울어 엉덩이에 뿔이 나는 송아지 글이 된다.
『데미안』을 재독하고 리뷰를 쓴 적이 있다. 처음에 쓴 리뷰를 읽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두 번째 리뷰를 작성했다. 두 편의 글을 비교해보았다. 같은 인간, 다른 리뷰였다.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드는 건 한 권의 책만이 지닌 특별함이 아닐지 모른다.
『나귀 가죽』은 어디까지 보고자하느냐, 얼마만큼 보고 싶은가에 따라 시야의 편차가 큰 책이다. 츤데레 까도남에 양파 모드까지 장착한 소설이다. 까도 까도 생각거리가 쏟아진다.
1830년의 7월 혁명으로 전복된 프랑스 사회의 정치적 상황의 프리즘을 통과하면 이보다 더 정치적일 수 없다. 소설이 출간된 1831년을 살아갔던 이들에게는 정치 다큐에 가까울 정도의 현실감으로 다가갔으리라. 무위도식하는 자연 인간상을 추구하는 나의 욕망을 중심으로 놓으면 정치라고는 가문 논바닥에 말라비틀어지는 풀때기 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
19세기와 21세기의 시간이 벌려놓은 틈,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국가 간 문화의 이질성, 30대의 발자크와의 나이 차에서 오는 사유의 각도, 남자인 작가와의 성별의 차이. 타고난 정체성을 차치하고라도 대략 가늠해도 해석이 달라지는 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코끼리 전체를 보지 못하느니 오른쪽 새끼발가락 주변에 난 털 하나의 움직임을 묘사한들 뭔 상관이랴. 내 시선이 거기에 집중되는걸. 이 리뷰로 『나귀 가죽』의 전체 모습을 가늠한다는 건 우연히 발굴한 갈비뼈다귀 하나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전신상을 유추하는 행위라고 보면 된다. 한마디로 저만 믿지 마소서.
빽빽했던 문장 덩어리들에 비하면 가독성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이 ‘생각보다’가 생각보다 만만치는 않지만. 종교적 방언 터지듯 주인공이 꾸역꾸역 말하는 부분 역시 토 나올 정도로 갑갑하지는 않다.
초반이 지루해 질랑 말랑 할 때 메피스토펠레스의 스멜을 풍기는 노인 한 분이 납신다. 동굴을 벗어나 탁 트인 공간으로 나온 느낌으로 봇물이 터지듯 문장이 흐른다. 노인을 묘사한 문장에 흡인력이 있다. 드디어 나귀 가죽이 등장한다. 흥미진진한 대화가 시작된다.
대화의 무대가 바뀔 때마다 각기 다른 관점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여 주장을 펼친다. 개성적인 등장인물들의 성향을 분석하며 나의 생각은 어떤 이의 견해에 가까울까 가늠해보는 과정도 흥미롭다. 과학적인 내용이 나올 때는 과학적 요소와 인간의 본질이 의외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놀라기도 했다.
신의 한수라고 생각하는 편집 체계는 옮긴이의 각주가 해당 페이지의 하단에 있다는 점이다. 뒷부분에 부록처럼 한꺼번에 빼놓아서 왔다갔다 짜증나는 책도 있는데 현명한 선택이다. 옮긴이가 구사하는 어휘력이 상당하여 낱말 뜻에 대한 검색도구는 필수이다.
사랑만이 최고의 가치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의 나라면 여주인공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리뷰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을 거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시선이 집중되는 문장들을 바라보며 달라진 나의 욕망을 본다.
첫째,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묘사이다. 관념이란 유기적인 존재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 기거하면서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인간의 정신은 요정 같아서 지푸라기라도 다이아몬드로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인간의 사유 작용도 운동이라는 것. 정체 모를 물체에 영향력을 가하려면 그 물체를 연구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속성에 따라 충격을 받고 부서지거나 저항하거나 하리라는 것. 작가는 물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사람으로 대상을 도치해도 맥락이 통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예술을 ‘방탕’과 연결 짓는 관점이 신선하다. 예술은 방탕이 주는 가장 희귀한 감동을 일상적인 감동으로 수립하고 요약하여 삶 안에 또 다른 극적인 삶을 창조한다는 것. 또한 힘을 최대한도로 신속하게 소진시킴으로써 그 감동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체계라는 것. 예술가 역시 격렬한 일탈의 욕망을 대립시켜 평범한 삶을 벗어나겠다는 욕구가 강렬하므로 방탕의 길로 들어선 거라는 것. 문학도 결국 마찬가지 아닌가.
셋째, 힘에 대한 서술이다. 인간이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의 길을 터줄 뿐이라는 것. 힘은 꼭 우리만큼의 크기를 가진다는 것.
욕망은 변화무쌍한 물처럼 흐른다. 이에 따라 마음에 들어오는 문장이 달라질 터이다. 리뷰를 분석해보니 사유와 글쓰기를 욕망하는 내가 보인다. 책을 읽는 시기에 따라 다른 느낌의 글이 쓰인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껏 책을 읽고 글을 썼던 시간들은 바로 나의 욕망을 바라보는 과정이었던 거다.
진로를 선택하지 못하고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 이것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저것이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는 거다. 이것도 괜찮지 않고 저것도 괜찮지 않다는 거다. 욕망을 하던 욕망하지 않던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상황은 결과적으로 동일하다.
발자크가 분석했던 것처럼 삶에서의 욕망이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요소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뜨거운 감자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니. 자신의 욕망을 감당한 채 앞으로 나아가야 하므로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걸어가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 책에서 어떤 욕망을 발견할까. 나의 욕망이 당신에게 정답이 아니듯 그게 어떤 것이든 보편적인 정답은 아닐 터이다. 분명한건 그 순간의 당신에게는 최선의 정답이리라는 것. 이런 이유로 나는 모순을 품에 안고 내 욕망이 보여주는 길을 가려는 것이다.
※ p55, 밑에서 3째줄: 편암 더미 속에서 한 겹씩 한 겹씩, 한 층씩 한 층씩 (중략) 화석을 발견했을 때
→ 편암은 변성암이므로 열과 압력의 정도가 몹시 약하면 발견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문맥상 페이스트리 분위기의 저 문장에는 퇴적암 중 하나를 언급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생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