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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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아메리카노에 가득 담긴 얼음 같은 의미였을까. 주인공 커피에 꿀리지 않고 사이사이를 메우며 무심히 마수의 냉기를 뿜는 대상 말이다. 아에서 아아로의 정체성으로 탈바꿈시키는 장본인은 시간의 손을 잡고는 스르르 자취를 감춘다. 여백의 존재감 이상이다. 뒤늦게 컵 속을 들여다보면 인지할 수 없다. 신비주의다. 아의 우주, 그 안에서 얼음은 당당하게 시크하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추리소설과 시사고발 다큐멘터리와 내셔널 지오그래픽적인 요소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논픽션이다. 커피 속 얼음처럼 조용히 강하다. 담담하게 걸어가는 서술은 냉철하면서 차갑다. 무모하게 억지스런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근거로 제시한다.

이 책의 매력은 크레센도를 연상시키는 전개에 있다. 일상의 경험에서 출발한 저자의 문장은 소박한 결론을 향하는 듯하다. 독자는 담백한 문장에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인간 삶을 아우르는 영역 한가운데 서게 되는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때까지. 서서히 벌어지는 지퍼 사이로 놀라운 사실을 목도한다. 언제 사라졌을까. 소스를 제공한 저자의 흔적은 이미 남아있지 않다. 실체를 드러낸 이야기는 맨손으로 만지는 얼음인 양 뜨겁다. 이 얼음을 던져버릴 것이냐, 자신의 온기로 서서히 녹여낼 것이냐. 각자의 결론만이 몫으로 남는다.

 

혼돈이 가득한 세상에서 존재의 의미와 삶의 질서를 찾기 위한 여정을 담은 책이다. 이야기의 발단은 어릴 적 저자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서 오고 간 철학적 대화이다. 인생의 의미를 알고 싶었던 저자 룰루 밀러는 해답을 알려줄만한 인물을 찾는다. 그녀가 목적지로 선택한 이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다.

조던은 스탠퍼드대 초대 학장으로 물고기 연구의 시조로 일컬을만한 인물이다. 그의 업적은 독보적이다. 그가 이끄는 연구팀은 방대한 어류를 발견하고 이를 분류한다. 물고기에 필이 꽂힌 조던은 물고기의, 물고기에 의한, 물고기를 위한 탐구에 몰두한다. 충격적인 자연 재해가 일어나 연구 결과가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로 탈바꿈해도 전혀 굴하지 않는다. 다시 일어선다. 영혼을 끌어 모으는 집념은 신계에 속할만하다. 소위 어나더 레벨이다.

이 사람이라면 명쾌한 답을 보여주지 않을까. 단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물고기의 이름을 불러준 이. 빛깔과 향기에 맞는 네이밍으로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을 만들어준 인물. 미지의 영역에 흩뿌려진 별들이었던 어류에 질서를 부여한 사람이니. 그의 끈질긴 의지를 추동하는 요인은 무엇이일까. 작가는 그의 삶을 집중 탐구한다. 이 책의 첫 장은 조던의 소년 시절로부터 시작된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인양 설렘을 품은 저자는 그의 삶을 덮고 있던 외피를 하나씩 벗겨낸다.

 

조던의 삶에서 변곡점이라 할 만한 사건들을 추적하는 전개 과정은 추리 소설의 색채가 짙다. 작가의 전개 방식이 다분히 의도적이었음을 깨닫는다. 영리한 저자는 섣불리 일반화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조사한 자료를 근거로 자신만의 결론을 내보일 뿐이다.

추리 소설 소개의 불문율은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 금지이다. 이를테면, 비 내리는 밤에 공동묘지를 지나다가 줄기차게 스토킹 하는 흰 옷 입은 여자 귀신을 봤는데 알고 보니 삿갓에서 풀린 실오라기에 맺힌 빗방울이 귀신처럼 보인 거라는 결말 같은 거 말이다. 알고 나면 맥 빠지지만 추적추적 으스스한 날에는 나름 괴기스러운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까.

두 가지 주제가 보인다. 첫째, 책 제목의 의미에 관한 것, 둘째,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리뷰 작성에 고민이 많았다. 제목의 의미는 스포일러로 향하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등장했다 사라진 글자들이 A4용지 한 장을 넘어가지 못한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마무리 지으리라. 결국 달리기의 출발과 결승선의 풍경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이제부터는 왜 이런 내용이 여기서 나와버전이 전개될 것임을 예고한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나에게는 이 책이 참 좋았다는 것과 책을 읽고 나면 리뷰의 후반부에 적는 문장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세상에서 인위적으로 삶의 질서를 만들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인다. 인간의 의지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끊임없이 세상과 삶을 관통하며 의미 있는 질서를 찾으려한다.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 중 하나가 공통된 특성을 찾아 하나의 범주를 만드는 일이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범주를 규정하는 행위에 경고메시지를 보낸다.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으니 범주란 하나의 대용물이지만 동시에 족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운동장에서 질서를 지켜 한 줄로 선 사람들을 상상해보라. 그들은 한 방향을 가리킨다. 무질서는 줄서기 전, 제각기 흩어져있던 상황이다. 개개의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을 화살표로 표시한다면 사람 수만큼 다양한 방향이 만들어질 터이다. 100명의 사람이 존재한다면 100가지의 방향이 나오리라. 세계로 영역을 확장하면 80억 가지의 방향이 존재한다. 수용하기 벅찬 숫자는 인간에게 두려움을 안겨준다. 품지 못하는 영역을 알지 못한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질서란 두려움에서 만들어진 울타리인지도 모른다.

세상과 인간의 삶은 어떤 모습에 가까운가. 완벽한 무질서이다. 유전적으로 DNA가 일치하는 일란성 쌍둥이조차 완벽하게 똑같은 삶을 사는 건 아니니. 무질서를 이루는 각각의 화살표는 동등한 정체성을 갖는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프랙털의 구성 요소처럼 각각은 독립적이다.

 

혼돈이 가득한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까. 저자는 자연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방식으로 민들레 법칙을 제안한다. 어떤 사람에게 잡초처럼 보이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훨씬 다양한 무엇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약초 채집가에게는 약재로, 화가에게는 염료로, 히피에게는 화관으로, 아이에게는 소원을 비는 존재로, 나비에게는 생명 유지의 수단으로,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의 의미일 수 있다고.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은 N분의 1일 뿐이다.

삶에서도 같은 맥락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다른 이에게 무의미하게 비춰지는 어떤 일이 나에게는 인생 전체를 던질만한 의미일 수 있다. 중요한 건 관점 하나하나가 같은 무게를 갖는다는 점이다.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사람과 새 한 마리의 가치를 동일하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고구마와 감자와 땅콩이 땅속에 있다고 같은 부류에 속하는 건 아니지만 이들은 각각 담당하는 역할에서 당당하다.

별들을 포기하면 우주를 얻게 된다는 멋진 문장을 바라보며 연극 무대를 떠올린다. 주인공만을 비추는 핀 조명이 질서와 범주라면, 환하게 무대가 밝혀지는 순간은 무질서와 혼돈일 터이다. 세상은 어디에 가까운가. 주인공뿐 아니라 엑스트라, 무대 소품, 조명, 음향, 무대 장치 등 전체를 담은 게 세상이고 우주 아닌가.

 

물고기 이야기 못지않게 시선을 끌어당긴 건 섬세한 삽화와 에필로그에 스치듯 언급된 세 글자 사이질이다. 인상적이고 멋진 삽화이다. 바늘을 이용했다는 스크래치보드 기법은 세밀한 집중력과 의지를 요구하는 작업으로 보인다. 본문과 잘 어울린다. ‘사이질은 인체의 장기라고 한다. 생소한 이름에 필이 꽂힌다. 교과서에 버젓이 등장하지도 않기에 몇 시간 동안 인터넷을 뒤적인다.

사이질사이에 있는 물질을 의미한다. 2018, 우연히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 세포 사이를 메우는 물질 정도로 사소한 정체성을 지녀온 장기이다. 피부 아래 구석구석 물로 채워진 고속도로처럼 존재한다고 한다. 어쩌면 암 세포의 이동 통로인지 모르는, 인체에서 가장 큰 장기라나.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조직 샘플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르르 무너져 수분이 빠져나와 납작해진 건물의 잔해만 보았기 때문이란다. 검색하다보니 또 다른 침샘의 발견과 장간막이 기관임을 밝히는 뉴스도 눈에 띈다. ‘이 세계 안에 있는 또 다른 세계’. 저자의 문장이 떠오른다.

습관적인 풍경인 듯 생물을 바라보던 시선이 자연스레 바뀐다. 한 권의 책이 상식의 범주를 무너뜨린다. 모르지만 분명 존재하는 세상을 상상한다. 세상은 넓고 상상의 범주를 벗어난 대상은 넘쳐나리라. 모른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범주는 일시적인 편의를 위해 규정한 틀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는 여전히 우주의 일부이니 경계를 지을 게 아니라 인정하고 전체를 품으면 그만이다.



p218, 밑에서 4째줄: 내가 자기를 필요할 때면 ~ 필요로 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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