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종의 허리 가우디의 뼈 - 탐정이 된 의사, 역사 속 천재들을 진찰하다
이지환 지음 / 부키 / 2021년 9월
평점 :
언제 멍들었을까. 왼쪽 팔뚝에 1cm 가량 푸르스름한 흔적이 보인다. 모르는 새 어딘가에 부딪혔던가. 마음이 인지하지 못하더라도 몸에는 고스란히 흔적이 남는다. 몸의 시그널에는 일상의 촘촘한 이야기, 분명 일어났던 이야기가 있다. 그건 아주 섬세해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수증기로 증발해버리지 않고 우리 몸의 어딘가에 물의 얼룩으로 쌓인다.
쌓이는 게 무서운 거다. 그리움, 정, 추억, 하루, 몸에 나타나는 사소한 징후나 질병이 그렇다. 커다란 한 방이면 부러지거나 무너지거나 단 한 번의 충격으로 결론이 난다. 쌓이는 건 다르다. 무시하거나 말거나 물러서지 않는 시간처럼 계속 한 방향으로 다가온다. 가뿐한 듯 날리는 나뭇잎 한 장으로 와서 고요히 쌓인다.
쌓임의 시그널은 소리가 없다. 신경 써서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변화가 서서히 스며든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다. 어느 아침 온통 하얀 물감으로 채색된 세상을 맞이할 수 있다. 사람과의 이별이 힘든 것도 쌓임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았던 순간들이 우주를 지울 듯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세종의 허리 가우디의 뼈』는 몸에 쌓인 질병으로 삶의 방향이 바뀐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형외과 의사인 저자의 시각은 신선하다. 질병전문가로서 인물에게 나타난 변화의 징후를 탐색한 다음 정확한 질병을 진단한다. 주어진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다각도로 파헤치며 분석하는 접근방법이 탐정 못지않게 예리하다.
똑같은 자료와 현상이라도 다루는 이의 관점에 따라 활용도가 다를 수 있다. 감자 요리가 햄버거 옆 감자튀김처럼 사이드로서의 역할만을 하느냐 메인으로 주축을 이루느냐는 요리사의 선택이다. 의사 관점에서의 외모 변화는 질병의 징후를 알려주는 시그널로 작용한다. 당시 착용했던 의복과 초상화를 통해 체형을 짐작하는 통찰력도 놀랍다.
질병은 몸이 보내는 시그널이다. 몸의 신호는 쌓임의 결과물로 드러난다. 몸이 주는 영향력을 절감한다. 우리 몸은 긴밀한 협조 체계로 상호보완적으로 움직여 결국 삶의 방향까지 바꿔놓는다. 자폐증에 대한 보상으로 놀라운 기억력을 소유하거나 예술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도 한다. 모든 삶의 방향에는 이유가 있는 걸까.
자연사했거나 삶의 방향이 바뀔만한 질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 책에 실리지는 않았으리라. 세종이 운동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척추염이, 해골과 뼈의 형상이 반영된 가우디의 건축물에는 관절염이, 도스토옙스키가 도박꾼이 된 이유에는 간질 발작이, 모차르트의 죽음에는 균에 의한 감염이, 로트레크의 키에는 유전적 증후군이, 니체의 두통과 정신 이상에는 뇌종양이, 모네 작품의 색채변화에는 백내장이, 프리다의 작품에는 그녀의 고통이, 퀴리의 죽음에는 X선과 라듐이 뿜어내는 방사선으로 인한 백혈병이, 말리의 죽음에는 피부암이 연결된다.
육체의 기형이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는 모습을 본다. 유전적 증후군도 그의 잘못이 아닌 것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통증을 포용하는 모습에 가슴이 찡하다. 통증을 승화하여 박제해버린 당당한 예술성이라니! 아픔이 담긴 작품은 촉촉하고 탄력적이다. 감상하는 이들의 심장이 몰랑해지는 이유다.
요리사의 칼자국이 도마에 남듯 캔버스에는 화가의 흔적이 남는다는 문장을 읽는다. 글도 마찬가지겠지. 나의 글 곳곳에도 내 흔적이 묻어나리라. 통증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의지가 스스로의 어둠을 빛으로 승화한 것처럼. 빛의 부재나 여집합이 아닌, 어둠 자체로 존재를 인정하고 싶다.
들어가는 말과 나가는 말의 제목에서도 직업의 특이성이 드러난다. 책의 피부를 가르며 들어가서 책의 피부를 봉합하며 나온다. 의사의 시각에서 책은 이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종류별 통증 그래프, 나이대별 통증 그래프에 대한 분석력이 탁월하다. 역시 이과 전공이야 싶다가도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추가된다. 자연스런 전개, 뛰어난 가독성은 이과 계통 직업 종사자들이 취약한 문장력을 보인다는 통념을 깨뜨린다. 저자는 문‧이과 통합형의 적절한 예로 제시할만한 사람이다.
세종, 가우디, 도스토옙스키, 모차르트, 로트레크, 니체, 모네, 프리다, 퀴리, 말리. 책에서 다룬 10명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분야에서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이다. 이들의 대표적인 정체성을 나열하면, 왕, 건축가, 작가, 음악가, 화가, 철학자, 과학자이다.
저자가 선택한 이들을 분석하니 그의 관심 분야가 짐작된다. 음악가가 두 명, 화가가 세 명이다. 음악과 미술에 관심이 많은 걸까. 특히 화가가 등장인물 수의 30% 정도를 차지한다. 효과적인 상황 전달을 위해서겠지만 책 속의 유일한 컬러페이지가 화가의 색채감을 위해 특별히 삽입된 점도 미술에 대한 저자의 애정을 보여준다.
세상은 떨림의 집합체이다. 물질을 이루는 원자, 그 안의 소립자들도 매순간 진동한다. 실체로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진동하면서 서서히 변화한다. 공기를 울리지 못한다고 시그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몸도, 한때 시공간의 좌표축을 공유했던 이와의 어긋남도 각기 다른 방식의 시그널을 보낸다. 세심한 시그널은 당신과 당신 주변에 소리 없이 쌓인다.
태어나고 늙고 죽는 건 어찌할 수 없다. 질병에 대해서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질병은 몸에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고통으로 혹은 미세한 변화로 메시지를 보낸다.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삶은 질병으로 인해 서서히 궤적을 달리한다. 다만 몸이 보내는 시그널을 일찍 알아챈다면 조금이나마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몸은 맑은 유리와 같다. 외부 환경의 변화나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자극에도 분명 흔적이 남는다. 흔적을 세세히 들여다보는 건 우리의 몫이다. 눈은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마음이 향하는 대상만이 시선 끝에 존재한다. 당신의 몸을, 당신의 주변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눈길이 머무는 곳에 쌓임의 시그널은 반드시 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예쁘고 사랑스러운 풀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