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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철학자 강신주 생각과 말들 ㅣ EBS 인생문답
강신주.지승호 지음 / EBS BOOKS / 2022년 3월
평점 :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를 물방울들이 송골송골 컵 표면에 맺힌다. 주르르 흘러내리더니 유리컵을 둘러싼 물 받침이 된다. 컵 안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분명 공기 중에 있던 수증기일터이다. 투명하게 숨어있던 존재들이 실체를 드러내는 시간이다.
강신주의 책이 그렇다. 그의 문장을 따라가면 우아하게 덮여있던 가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흘러내린다. 잘 숨겨왔던 혹은 있었는지도 몰랐던 욕망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촌철살인의 문장은 도무지 숨을 곳을 주지 않는다. 휴식을 취하듯 느린 호흡으로 읽어지지 않는다. 쨍한 유리컵에 얼음 꽉꽉 채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닮았다. 냉철한 이성으로 혈 자리를 정확하게 지압하는 문장에 움찔하면서도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후련해진다.
책장 곳곳에 그의 책이 꽂혀있다. 그의 문장은 매번 그래왔다. <감정수업>에서는 49가지 감정을 디테일하게 정의하더니 <다상담>에서는 위안을 주다가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에서는 정면으로 화두를 던진다. 그의 철학이 얼마나 옳은지 논거가 타당한지는 상관없다. 중요한건 그의 문장들을 통과하면 생각이 많아지고 위안을 받으며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와 철학자 강신주가 여덟 번에 걸쳐 세상과 사람과 삶에 대하여 나눈 문답이 담긴 책이다.
전체적인 흐름을 보며 인터뷰어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인터뷰이의 답변이 달라지므로 결국 전체적인 내용이 달라지니 말이다. 질문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답변이 구현되니 인터뷰어의 역할이 크다. 그의 질문 방식은 몇 가지 면에서 내 스타일이다. 첫째, 문장에서 겸손함이 배어나온다. 둘째, 인터뷰이가 저술한 도서를 숙지한 상태에서 질문한다. 셋째, 논지를 정확하게 판단하며 다음 질문을 이끈다. 이런 점에서 지승호는 출판사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본다.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에서도 그들의 대화를 좋은 느낌으로 지켜보았다. 이번에도 그들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프롤로그에서 그는 강신주 선생님의 건강이 나빠졌음을 언급하면서 스스로 조울증으로 인한 알코올의존증이었음을 밝힌다. 선뜻 꺼내기 어려운 말을 당당하게 하는 모습이 멋져보였다. 인터뷰어 지승호를 인터뷰하는 책이 나오면 어떨까. ‘지승호’라는 사람이 궁금해진다.
마음 한구석 찜찜하지만 대놓고 물어보기엔 다소 새삼스러울 질문이 있었다. 강신주의 글은 나의 의문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첫째, 스스로를 진보적 지식인이라 칭하면서 외제차를 타고 비싼 옷을 사 입거나 어려운 이들에 대한 기부를 유도하면서 정작 본인은 아무 것도 안하는 사람을 진정한 진보인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런 모습을 마주칠 때면 모순이란 말을 떠올렸다. 이런 유형의 사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사생활의 영역이니 별개의 것으로 여겨야 하나. 낮은 곳에 있으려 한다는 말 앞에서 되묻고 싶었다. 강신주는 말한다. 그런 사람은 진짜 진보인이 아니라 ‘진보팔이’라고.
둘째,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건 종교인의 당연한 권리인가. 서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을 한다. 반면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스스로 노동을 하여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는다. 불공이나 기도를 노동이라 칭하지는 않으니까. 정신적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하여 득도하는 게 진정 타인을 위하는 것일까. 작가는 불교 세계에서 밥을 남기지 않는 이유로 나를 수긍케 한다. 다른 이의 노력으로 생계를 유지하므로 시주를 하는 이에게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 밥을 남기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강신주의 문장에는 ‘사랑’과 ‘자유’가 묻어있어서 좋다.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 가을하늘을 닮은 사랑이다. 쨍한 푸르름의 직진성이다. 하늘 가득 드넓은 햇살이 펼쳐지는 장면이 연상된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사랑과 자유가 동일한 개념으로 겹친다. 사랑과 연대는 자발적인 자기희생을 요구한다는 것, 사랑을 하려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 사랑을 하면 내 것을 기쁘게 덜어낼 수 있다는 것, 자유로운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상상만 해도 마음이 탁 트인다. 하늘은 더불어 있는 것이지, 누가 소유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그의 말처럼 작가가 말하는 사랑에 근접한다면 하늘의 느낌을 닮아갈 듯하다.
‘사람의 문맥을 읽는다’는 제목부터 좋았다. 사람이 마치 책인 듯이 여기는 시각에 크게 공감한다. 어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콘텍스트까지 이해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 부분을 지나면서 주변인들을 둘러보았다.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잘 읽고 있을까. 나를 볼 때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대상을 볼 때는 주관적인 시선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마음에 새긴다.
작은 자본가에 대하여 말한 문장들 앞에서는 생각이 많아진다. 스펙을 상품명세서라 말하는 철학자의 시선이 냉철하다. 노동자의 삶을 예전의 노예와 비교한 말은 매우 직설적이다. 타율적 노예인가, 자발적 노예인가의 차이일 뿐이라고. 출퇴근 노예가 노동자라는 말과 생산의 자유는 없고 소비의 자유만 있을 뿐이라는 말에 순간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으로 공감이 갔다.
허용된 자유는 기만일 뿐이라는 말에 아하! 무릎을 친다. 내게는 이런 자유만 허용될 뿐이야. 간혹 했던 생각의 모순성이 까발려졌다. 자유 자체가 허용과 상반된 의미라는 걸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뜨끔한 문장을 또 발견한다. 최악은 세상이 막연히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절망하는 것이고,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분노하고 바꿔버리는 거라고.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막상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소심함에 스스로 작아지는 기분이다. 작가는 말한다. 아무도 내 앞에 있는 똥을 치워주지 않는다고, 스스로 치워야 한다고. 적절한 비유로 와 닿는 문장이다.
나는 배려의 아이콘이었다. 웬만하면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르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거절’은 사전 속에나 존재하는 말이었다. 오로지 YES만을 부르짖는 인간. 언심(言心)일치라면 크게 상관은 없을 터이다. 문제는 마음속으로는 거절을 외치지만 그 마음을 차마 말로 뱉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기꺼운 거절이 마지못한 승낙보다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수많은 책 덕분이다. ‘어, 그건 아냐~’ 라는 메시지가 파도처럼 마음을 들락거리면서 나의 성격은 노을빛으로 점차 변하게 된다. 배려를 몽땅 수거한 건 아니지만 때로는 부드럽게 거부할 줄 아는 인간으로 서서히 거듭나는 중이다. 비중 있는 기여를 한 작가 강신주의 역할이 크다.
이 책을 마주하면서 다시 한 번 나를 객관적으로 분석해본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을 주인이라고 하고, 남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을 노예라고 부른다는 문장에 뜨끔하다. 예전의 나는 진정한 배려 인간이 아니었다.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가 빠져 있었으니 노예와 같은 삶이었던 거다. 칼바람 쌩쌩 부는 냉철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청을 수락하기 전에 스스로 묻는다. 진정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가. 그렇다는 답변 앞에서 움직이려 노력한다.
먹을 것에 그다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종종 핸드폰을 충전하듯 밥을 먹었다. 음식은 에너지 발생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끼니를 때운다는 말은 적어도 내게는 적절한 표현이었다. 생각이 많아졌다. ‘혼자서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는 것은 사료’라는 말이 날카롭게 다가왔다. 음식은 나누고 함께할 때만이 비로소 음식다워진다는 발터 벤야민의 말이 마음에 남는다. 커피 카피가 떠오른다. 네가 그냥 커피라면 난 티오피~. 사료와 음식의 차이는 이런 것이리라. 요즘은 고속 충전하듯 밥을 밀어 넣던 식습관을 릴렉스하는 중이다.
간혹 음식을 먹을 때 숙연해진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이 한때는 생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채식주의자라 외치면서도 가끔은 삼겹살이 땡기고 식물만을 먹는 것은 괜찮나 헷갈렸다. 식물도 생명이니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명의 삶을 취해야하는 건 필연이건만. 강신주의 문장에서 명쾌한 답을 얻는다. 최소한의 폭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 음식을 남기지 않아야 하는 이유와도 연결이 된다. 죽음도 이런 관점이라면 더 이상 다른 생명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거라고.
팬데믹, 언택트, 스마트폰 사회경제학, 스펙, 가족공동체, 기브 앤 테이크 등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바라보니 돋보기로 어떤 대상을 관찰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선명한 상을 보기 위해서는 정확한 초점을 맞추기 위해 왔다 갔다 거리 조절의 과정이 필요하듯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각도에서 현상을 바라봐야 하는지 중심을 잡을 수 있어서 좋았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그 존재 자체를 오감을 통해 만나는 것이라는 말, 인간이 가진 최고의 감각이 촉감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사랑의 관계에 대한 관점도 신선하다. 사랑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걷는다는 말을 별생각 없이 받아들여 왔다. 작가의 말은 다르다. 서로 얘기하고, 산책하고, 너와 내가 마주 보는 관계가 사랑의 관계라는 것. ‘사랑’의 속성을 다시 한 번 톺아본다.
강연에 대해서는 강연 이후의 시간에 진정한 강연이 시작된다는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수업 관련 연수를 받으며 잠시 쉬는 시간에 이루어졌던 대화에서 꿀팁을 얻은 기억이 많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동안에 오고 갔던 말들이 정말 도움이 되었다. 본 강연은 단지 소스를 제공하고 거들뿐이었다.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글을 쓰고 싶다고 종종 말해왔다. 나의 글은 누구를 위한 따뜻함인가. 예컨대, 거리를 걷다보면 폐지를 줍는 노인들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폐지 줍는 노인에 대한 시를 여러 편 짓는다. 당신들의 고단한 삶을 시로 그린다. 한데 정작 폐지 줍는 노인들은 나의 시를 읽을 일이 거의 없다는 게 팩트이다. 생계가 힘들면 인권도 의미가 없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당장 오늘 하루의 생계에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하는 절박함 앞에서 시는 설득력을 잃는다.
나의 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는 이런 생각도 해, 이런 시각으로 소위 사회적인 약자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무의식적인 자기만족 내지는 자기 과시가 아닌가. 이런 고민에 대한 답은 스스로 찾아가야 하리라.
더 이상 쓰지 못하면 작가는 살아도 죽은 것이고, 설령 살아 있다고 해도 그의 마지막 책은 묘지명이 되고 만다는 문장을 읽고 글을 쓰는 미래를 상상해본다. 프로가 되든 아마추어로 살든 지금처럼 같은 결로 글을 쓴다면 나의 마지막 문장은 무엇이 될까. 깊어지고 넓어지는 사유로 계속 다듬고 나면 어떤 문장이 남을까. 막연하면서도 설렌다.
강신주의 글은 다른 방향을 보게 한다. ‘변화’에 대한 관점도 그중 하나다. 사람들이 조화보다 생화에 더 끌리는 이유도 본능적인 이끌림일까. 시들어가는 꽃을 보며 허무하다 여겼던 관점이 그렇게 변해가니까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변한다. 같은 맥락으로 나이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이겠지. 불로장생의 삶을 살아간다면 오늘의 삶도 크게 의미 없으리라. 어차피 영원히 이어질 내일이 다가올 테니. 우리의 삶이 제한되어있기에 오늘 하루가 그만큼 소중한 것인지도 모른다. 같은 모습으로 제한된 삶이 주어진다면 지루할 수도 있겠다. 늙어가는 모습으로 변주를 준다고 생각하면 아쉽지 않다. 다만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려 노력해야 하리라.
작가는 멋진 철학자이다. 익숙했던 것을 낯설게 만들고, 낯선 것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철학자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 사이사이에 간간이 끼워진 사진을 보며 안타까웠다. 많이 야윈 작가의 얼굴을 보며 예전의 강연 동영상 몇 개를 찾아본다. 다시 돌아와 세월이 담긴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생명체가 변화하는 건 당연한 현상이리라. 느낌 탓일까. 표정에서 깊이가 보이는 듯하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의 마지막 구절이다. 빙산의 꼭대기만 바라보고 빙산 전체를 판단하지 말지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의 의미를 너무 얕게 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이 들어본 말이었기에 낯설지 않았던 문장이다.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평범한 직역만을 알아왔다. 에필로그에서 제목을 보고 뒤에 이어지는 문장을 읽는 순간, 거대한 쓰나미급 물결이 심장을 훑고 지나갔다.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 / 세찬 바람이 내 책을 펼쳤다가 닫고, / 파도의 포말들이 바위 틈에서 작열한다! / 날아 흩어져라, 찬란한 모든 페이지들이여!’ 문장들을 연결해서 음미하니 훨씬 더 깊었다. ‘바람이 분다’와 ‘살아야겠다’ 사이에 있는 말줄임표에서부터 많은 말들이 담겨있음을 깨달았다. 무덤들 앞에서 바람을 맞는 시인. 말줄임표 끝에 ‘살아야겠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철학자 강신주가 어떤 마음으로 이 시를 적었는지, 왜 이 책의 제목을 저렇게 정했는지를 가늠해본다. 사랑과 자유와 인간의 삶을 말하던 책 속의 문장들과 잘 어울린다. 바람이 불 듯 다가온 문장들을 통과하고 나니 어떤 방향을 향해 걸어가야 할지 시야가 선명해진다. 흩어질 나날, 찬란한 내 삶의 페이지들이 포말처럼 뿜어져 나오는 장면을 상상하는 순간 울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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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7, 밑에서 7째줄: 환경 문제 에 → ~ 문제에
p116, 밑에서 6째줄: 기배계급은 → 지배~
p208, 마지막 줄: 메를리 퐁티 → 메를로~
p240, 3째줄: 빈인빈 → 빈익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