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
“대저 [무원록]은 형옥을 다스리는 자의 지남指南(지침)이다. 만일 초.복검에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비록 고요皐陶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더라도 반드시 그 요령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형옥의 어그러짐이 대개 이로 말미암는 것이다. …… 오호라, 이 책이 원래 원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제 조선에서 주해를 달아 상세하고 명백해졌다. 이제부터 형옥을 다스리는 자들이 진심을 다해 이 책에 근거하여 검험한다면, 거의 중정中正을 얻고 백성들이 원통함이 없게 될 것이니, 임금께서 백성을 사랑하고 형률을 신중히 하려는 뜻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
‘통정대부 강원도관찰출척사 겸병마절제사 겸감창 안집 전운 권농관 학사제조 형옥공사 지초토영전사 臣 최만리’가 지은 발문의 한 대목이다. (최만리 앞에 무려 42자는 관직과 벼슬 등등이다. 암호다. 아직 나는 이 글자들이 가리키는 온전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언제 한번 장계나 기타 문서 등에 쓰이는 이런 직제 법칙을 알아봐야겠다. 또한 죽은 후에 하사하는 시호도 그 뜻이 다 있다 한다. 시호만을 다룬 책도 나온 걸 봤는데 그것도 궁금하다. 선조들의 삶의 모습을 너무 모른다. 나이 탓인가? 그런 게 궁금해지니…. )
발문에 나오는 고요는 중국 순임금의 신하로 법을 세우고 형벌을 정하였으며 옥獄을 만들었다고 한다. 전설 같은 중국 고대 왕국에도 죄를 논하고 벌을 부과해야 하는 일이 있었으니 인간사가 그런 것이리라.
이 책을 통해서 당시의 살인사건, 사체에 대한 인식, 수사절차 등을 알 수 있다.
책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사건을 맡은 관리의 도리, 철저한 관찰과 기록, 그리고 청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형옥사건을 맡은 관리들이 사체를 임함에 있어 직접 관장하지 않는 무관심 또는 대충주의를 엄격하게 비판한다. 사건을 맡은 관리가 험악한 꼴을 보길 저어하여 대충 오작仵作과 항인行人(검시에 참여하는 서리배들, 시체를 매장하는 일 따위를 맡는다)에게 맡겨 그들이 말하는 대로 보고 하는 태도를 먼저 문제삼는다. 당시 오작이나 항인은 대개가 도축일을 하는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인명을 귀중히 생각지 않고’ 범인이나 기타 이해 당사자들의 청탁에 노출되어 있는 경향이 많음을 지적하고 이들에 대한 불신도 감추지 않는다. 따라서 관리는 이들을 관리하고 엄중히 경계함은 물론 자신들이 직접 검험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리라고 했지만 이것은 단순히 관리의 덕이나 품성에 맡길 일은 아니다. 이 역시 법률적 근거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응당한 대우가 주어져야 하며 또한 인간사, 인체, 죽음에 대한 전문 식견을 갖추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서는 그러한 관리의 대우나 양성체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또한 사건에 임해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경우에는 공개성을 원칙으로 해야 하며 철저한 관찰과 주변 심문, 관련 당사자들의 일치된 의견을 통해서만 최종 결론에 이르게 하는 등의 공정성에도 주의를 두고 있다. 참여한 관리나 기타 인물들이 보고서에 이견이 없음을 인정하는 수결을 갖추도록 하는 문서서식을 만듦으로써 그야말로 억울함이 없도록 하는데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과학수사’란 시대적 한계도 가질 수밖에 없을 터, 해부까지 할 수 없는 시대이니 만큼 드러난 증거들은 철저히 채집하고 드러나지 않은 것들은 드러나게 하는 방법들을 찾고 연구하는 것을 과제로 하고 있다. 이 책은 당시까지 이루어진 ‘과학수사’의 최대치를 집대성한 것이다. 아마도 범죄 또한 시대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벌어질 것이다. 보다 교묘하고 복잡한 ‘과학적’ 범죄는 꽤나 드물었을 것이고 이 한계를 벗어난 범죄가 발생하면 그를 해결하기 위한 더 발전한 수사 또한 나타나게 될 것이었다.
범죄의 재구성을 위한 과학수사는 다른 모든 인간사가 그러하듯이 그렇게 진화했으리라.
따라서 죽음에 대한 연구가 이 책엔 망라되어 있다.(물론 장담할 수는 없다.)
구타로 인한 죽음, 목을 매단 죽음, 익사, 독에 의한 죽음, 불에 타 죽는 것, 끓는 물에 빠져 죽는 것, 칼에 찔려 죽는 것, 이러한 것들에도 여러 가지 변종들이 있다. 목을 매단 죽음에도 죽은 후에 목을 매단 것으로 위장한 것인지 죽기 직전에 목을 매단 것인지, 익사도 물의 깊이, 물의 종류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며, 독에 의한 죽음도 약물인지, 독충에 의한 것인지 등등.
그밖에 병사, 더위 먹어 죽는 것, 풍風을 맞아 죽는 것, 얼어 죽는 경우, 굶어죽는 경우, 수레에 치어 죽는 경우,놀라서 죽는 경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죽음의 경우를 나열해 놓고 그에 따른 증상들을 일일이 적었으니, 읽으며 상상까지 하면 이 보다 더 지독한 독서가 있겠나 싶다.하긴 사체 근처에도 안 가본 사람에게 한한 것이겠지만.
600여년 전 당시 조선에서 이 책이 자기 손에 들어왔을 때 기뻐 어찌할 바 몰랐을 젊은 관리나 기타 관속이 있었으리라 상상해본다. 궁금하다. 간행을 했으니 형옥관련 관리들만 읽지는 않았을 것이고 호기심 많은 선비들도 읽었을 것이고, 범인들도 읽었겠지?
15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간 200여년 기간 동안 조선의 범죄와 형옥은 얼마나 변화되었을지, [증수무원록언해]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