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요즘 시 어떻습니까?"

오늘자 한국일보 문화란에 '요즘 시'의 경향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오늘이 '시의 날'인 걸 기념해서인 듯한데, 며느리도 모를 법한 이 날의 유래는 이렇다고: "11월1일은 제19회 '시의 날'이다. '시의 날'은 우리나라 현대시의 효시로 알려진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11월 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린 것을 기념해 1986년 제정됐다." 1986년이면 전두환 정권하이다. 5공 때 이어령 선생이 문화부 장관을 한 적도 있으니 그 분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딱 이어령표 마인드의 산물 같다. 어쨌거나, 그런 날이 벌써 19번째이건만, 무슨 행사를 벌인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시시한 날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저런 기념일을 챙기는 건 문화부 기자의 본분에 충실해 보이며, 덕분에 나는 아침부터 '요즘 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연예인들만한 사이즈로 지면에 오른 요즘 시인들의 면면들을 구경해볼 수 있었다. 혹 기사를 지나쳐버린 분들을 위해서 내용을 정리하고, 생각할 거리를 챙겨두도록 한다.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우리 시의 새로운 경향을 짚"고자 하는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요즘 시(詩)가 어려워졌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시인 평론가들조차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다. 한 두 사람 한 두 편의 돌출적인 현상이 아니라, 최근 등단했거나 한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뚜렷한 경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경향을 다른 말로는 '엽기시'라고 한다.

 

 

 

 

얼마전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되었는데, 수상자는 작년에도 시인들이 뽑은 최고작을 쓴 바 있는 문태준 시인이며 수상작은 <누가 울고 간다>이다. 짧은 시이므로 옮겨본다.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특별히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소품인데, 사실 이런 정서와 리듬감, 시상 전개 등이 한국 서정시의 주류를 형성해왔다(문태준 이전에는 장석남이 있었다). 기형도 이후에, 혹은 장정일, 유하 이후에 여전히 이러한 시가 씌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퇴행'이면서도 '관례'이다. 유구한. 그리고 그런 시인과 시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당연해 보인다. 2000년도 이후에 나는 시도 쓰지 않고 읽는 것도 게을리 하고 있지만(나는 시에 대한 '기대'를 거의 접었다) 요즘 동태를 보아하니 그 사이에 꽤 특이한 젊은 시인들이 여럿 등장한 모양이다. 세태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문학적 성감을 찾아나선 이들의 이름은 김행숙 황병승 김민정 김근 김언 이민하 김이듬 등이다. 기사에는 8명의 시인들이 8인방처럼 거명돼 있는데, 요약하면 1:8이요, '문태준과 아이들' 혹은 '문태준과 엽기들'이다. 이들을 차례로 호명해보자.

 

 

 

 

 

 

 

 

 

 모두가 올해 데뷔시집이나 새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이다. 김이듬, <별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 진수미,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문학동네, 2005); 김근,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김언, <거인>(랜덤하우스중앙, 2005); 이민하, <환상수족>(열림원, 2005);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 2005);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 김행숙,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5)

(평론가 이장욱에 의하면) '외계어'로 시를 쓰는 이들은 (평론가 권혁웅에 의하면) 우리 시단의 '미래파'이다. 물론 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외계인들끼리는 소통가능한가?) 하여간에 앞에서 인용한 문태준류의 시와는 달리 알아먹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 시의 특징이고 특장이다. 기자도 이 점을 표나게 지적하고 있다: "그 변화의 선두에 김행숙(35) 시인의 비교적 짧은 시 ‘달무리’를 보자. “그의 진동이 그에게 후광을 만든다. 그가 문둥이같이 뭉개질 때/ 배는 출렁이고 있었다. 내가 깔고 누운 파랑은 나를 통과한 그의 뒤편일까? (중략) 그의 뭉개진 코가 킁킁대며 누구니? 누구니? 묻고, 다시 물을 때// 아으, 부풀어 오르는 한 그루 버드나무.” 그의 시는 이성적 사고체계로 스며들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과 느낌, 환상ㆍ분열적 내면 풍경에 철저히 기대고 있는 듯하다. 전통 서정시의 독법에 따라 어떤 의미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무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알아먹을 수 없는 시가 문학사에 새로운 건 아니다. 이미 1930년대의 이상이 '욕먹는' 시 <오감도>를 썼다. 195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시'를 쓴 조향 시인 같은 분도 있었고(<조향 전집>(열음사, 1994)),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나 이승훈 시인의 비대상 시들도 다 낯선 시들이었다. 그렇다고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는 주류적인 시였나?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요즘의 '엽기시' 경향에 대해 특별히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만, 최근의 나온 시집들이 주된 경향을 이루면서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띌 뿐. 더불어, 현란한 이미지들이나 수사의 국적, 계보, 혹은 전통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게 이채로울 뿐. 해서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 

"이들 시의 메커니즘은 다양하다. 빛이나 공기 입자의 산란처럼 어지럽게 좌충우돌하는 사유의 혼종성, 세계와 자아의 대립과 반영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 성적ㆍ관능적 환상과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상징 등….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 시어들이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김행숙 시인은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말한다. “어떤 시는 시인/평론가보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이 오히려 뜨겁게 반응합니다. 폭 넓게 소통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좁은 대신 깊이 소통하는 층이 분명히 있어요.” 그는 그것을 생물학적 세대차이라기 보다는 차별화한 문화체험에서 비롯된 문화적 세대차이일 것이라고 말했다."(강조는 나의 것) 참고로 기자가 나열하고 있는 찬반론은 이렇다. 

이들 시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문학의 본령이 문자언어를 통한 소통이다. 암호에 가까운 자의적 기호와 자폐적 무의식의 흔적들이 어떻게 문학인지 모르겠다.

-환상이 없는 문학은 없다. 두보의 시에도, 카프카의 글에도 환상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삶의 리얼리티를 상실한 채 머리(환상) 속에서 떠오른 느낌들을 시적 긴장 없이 풀어놓은 것 같다.

-하나 하나의 작품을 놓고 보면 참신하지만 모아놓고 보면 시를 형성하는 문법이나 문장을 엮는 방법 등이 흡사하다. 일종의 유행 같다는 생각이다.

그에 대한 반론이다.

-나는 말쑥하고 균형 잡힌 시를 혐오한다. 안정감 있고 깨달은 자는 침묵하면 좋겠다. … 나는 내가 쓴 시에 관해서 말하기가 뭐하다. 낯설고 잘 모르겠고, 몰라서 쓴다.… ‘노력’해야 한다면 그때는 안녕.(김이듬, ‘시와 반시’여름호-현대시와 퇴폐)

-시단에서 유일하게 죄악인 것이 있다면 바로 다양한 꼴을 못 보아주는 태도이다. 시적으로 봐도 그렇고 생물학적 측면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태도다.… 자신 안에 스스로 잡종의 비율을 높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김언, ‘웹진 문장’ 10월호-우리 시의 다양성과 새로움)

-아름다움은 움직이는 거다. …최근 시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논거로 삼은 자리는 절대로,항구적인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차라리 최근 시들이 진리로 간주되어온 그 자리를 비판의 대상으로 겨누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 (권혁웅 비평집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

긍정적인/전향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경향을 바라보는 세 평자의 의견:

-황현산(고려대 불문) 교수는 “한국 현대시단의 양대 흐름을 형성했던 농경사회적 정서와 도시적 정서의 굳은 틈을 비집고 서울의 하위정서 혹은 지방도시적 정서들이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 듯하다”며 “하기에 따라서는 향후 2~3년 내에 우리 시단의 지형도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문제와 관련, 그는 “승리한 자의 말은 상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소통되지만, 억압 받는 자는 말 한 마디 하기도 힘들고 하더라도 타박 당하기 일쑤”라며 “하지만 그 말은 우리가 반드시 소통해야 할 말“이라고 말했다.

-2003년 김행숙씨의 첫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의 해설에 이장욱(시인ㆍ소설가ㆍ평론가)씨는 “우리가 도달해가는 현대시의 어떤 징후”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쓴 바 있다. 이제 그 징후는 좋든 싫든 하나의 도도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경향이 우리 현대시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배적 경향을 형성할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최근 낸 비평집에서 이들 젊은 시인들의 경향을 ‘미래파’라 명명한 권혁웅(시인ㆍ평론가)씨는 “60년대의 김수영, 80년대의 이성복이 당대 시단에 충격을 준 것처럼, 이들 시가 낯설고 불편한 것은 새로운 미학과 세계관을 한 발 앞서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먼 훗날, 이들의 작품이 낡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다.”(‘미래파’ 171쪽)

이어서 기자는 두 편의 시를 예시하고 있다. 나의 독후감으론 황병승과 진수미의 예시된 시는 종류가 좀 다르다. 그것은 시가 그 독법에 있어서 어느 만큼의 논리를 허용하는가, 혹은 어떤 종류의 논리를 요구하는가에 달려 있다. 더불어, 시의 난해성이 시적 주체의 개성과 연관되는 것인지, 아니면 개별성 이전의 전주체성(presubjectivity)과 연관된 것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요즘 시'를 한번 읽어보시라. 그리고 해독/해석해 보시라. 나의 생각은 조만간 다른 자리에서 정리해두도록 하겠다.

▲ 커밍아웃 / 황병승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 그러다가 어느 날 / 진수미

유방은 부풀어오른다 터질 듯이 고요한 프로펠러
갈증을 느낀 비행선이 그림자를 몰고 나타난다.
보라색 태양일랑 내가 오려냈다오.

승냥이들이 거품 무는 파도가 쫓아오고
내장 없는 배의 항로를 걱정하는
어머니, 이 배에 앓는 항구가 누워 있어요.

사랑스런 임차인들아,
나는 그들에게 돌려줄 것이 있다오.

당신의 장기를 물어뜯는 거리의 개들
적선은 더 큰 바람을 부를 거예요.

소유를 짤랑이는 열쇠와 함께
집달리들이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냉장고는 머리가 깨져 시큼한 국물을 지리는데
벌레들이 바람의 커튼을 흔들며 날아올라요.

뒤엉킨 서랍의
껍질 벗고 교미하는 실뱀 한 꾸러미,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05. 11. 01.

P.S. 다시 생각해보니까, '시의 날'은 5공때 문공부 장관을 지낸 정한모 시인의 '작품' 같다. 이어령 선생은 노태우 정권때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확실하진 않지만, 내 기억이 말해주는 건 거기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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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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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예전에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나오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참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갈 수가 있고,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할까. 루카치는 이런 시대는 모든 영혼이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그가 말한 '서사시의 시대'가 그런 세계이다.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는 제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류 최초의 서사시이다. 이 시기는 그리스 신화보다 먼저이고, 성경에 구현되어 있는 '아담과 이브'의 시대보다 더 먼저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주장에 의하면 진짜 인류가 처음 만든 문명의 시대란 의미다.
그런데 이 시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원시적이 아니라 상당히 과학적이며 문명적이다. 문자가 있었고, 학교가 있었고, 법이 있었고, 또 계급이 있었으며, 신도 있었고, 돈도 있었다. 왕권이 있었고, 다툼도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하나의 문명을 읽는 즐거움이 상당한 편이다. 모든 것에서 최초이니까, 그 문명이 뜻하는 것을 파악하는 게 재미가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참 절망스러웠다. 혹시나 루카치가 말하는 '서사시의 시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인류 최초의 인간들은 지금 이 땅에 사는 인간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게' 서로 다투며 죽어갔다. 길가메쉬가 꿈꾸는 것은 유토피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벗어나기'였다. 사실 그는 폭군에 더 가깝다. 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인 길가메쉬는 자신의 백성들을 힘으로 제어했다. 모든 여자가 시집가기 전에 길가메쉬와 첫날 밤을 보내야 했으녀, 이 때문에 원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길을 나섰다. 신들의 권력에 도전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 엔키두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고작 깨닫는다는 것이 '인간이란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을 얻기 위해 또 길을 나서고...
고작, 그거 하나란 말이냐. 인류 최초의 영웅이란 사람이 고작 죽음이 두려워 자신의 모든 걸 걸어야 한단 말이냐. 그러나 인간의 삶은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인류 최초의 영웅 길가메쉬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인간은 곧 필멸의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영생을 얻으려고 길을 가는 길가메쉬에게 여인숙을 돌보는 씨두리라는 여인이 충고해준 말이다. "길가메쉬, 자신을 방황으로 몰고 있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요? 당신이 찾고 있는 영생은 발견할 수 없어요. 길가메쉬, 배를 채우세요. 매일 밤낮으로 즐기고, 매일 축제를 벌이고, 춤추고 노세요.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이. 옷은 눈부시고 깨끗하게 입고, 머리는 씻고 몸은 닦고, 당신의 손을 잡은 아이들을 돌보고, 당신 부인을 데리고 가서 당신에게서 즐거움을 찾도록 해주세요. 이것이 인간이 즐길 운명인 거예요." 참 씁쓸하다.

길가메쉬를 비롯한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국내에 소개한 책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니다. 그쪽 방면의 신화를 꾸준히 소개해온 조철수 선생의 책들도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히브리 신화>(길), <수메르 신화>(서해문집),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새겨진 한국신화의 비밀>(김영사) 등에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비롯한 이 지역 문명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특히 <...한국신화의 비밀>은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우리의 신화의 연관성을 추적한 역작이다. 여기에도 역시 '길가메쉬 서사시'가 길게 인용되어 있으며, 그것과 한국신화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살펴보고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김산해 선생과 조철수 선생이 국내의 인문계를 살찌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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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 리라이팅 클래식 8
권용선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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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까다로운 <계몽의 변증법>을 참 매끄럽게 잘 정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개인의 해석이 좀더 가미되었다면 더 좋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아도르노의 음악에 대한 단상들, 문화산업에 대한 시각 등을 그대로 전달하다보니 (저자도 밝혔지만) 지금 시대와는 너무 다른 생각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아도르노를 잘못 해석한 경우에 해당하며, 자칫 그의 생각을 오해할 소지도 있다. 매스미디어와 현대 대중의 관계를 역작용만으로 바라보고 저자가 다양한 예를 든 장면은 정말 기계적인 예에 해당될 뿐이다. 정말 아도르노가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했을까? 그의 미학과 예술이론을 더 인용하며 해석했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생각도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물론 그의 재즈와 대중음악에 대한 생각이 편견에 가득차 있긴 하지만). 노명우의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라는 책을 읽어보면 그의 음악관이 철학과 얼마나 연관관계가 큰지를 잘 알 수 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계몽의 변증법> 속의 문화산업 부분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을 곧이곧대로 오늘날의 대중에게 적용시키면 대중은 모두 노예가 될 뿐이다. 좀더 변증법적으로 이 관계를 규명하고, 대중의 성향을 분석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다 바보로 만드는 시각은 정말 잘못된 이분법에 불과할 뿐이다. 또 <계몽의 변증법>에 나와 있는 유대인 문제를 오늘날에 대비시켜 아직도 그들을 '소외받는 타자'라고 결론짓는 부분은 정말 아쉬웠다. 그들이 정말 그런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은 국내 학자의 해석이 가미된 좋은 책이다. 하지만 저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좀더 가미되어 더 발전된 논의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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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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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놀라웠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 세월을 감내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드디어 사랑을 이루는 것.

그것이 과연 위대한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다. 마르케스의 작품을 참 좋아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는 왜 내가 그를 좋아했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의 독특한 성향을 감지할 수 없어서일까? 군데군데 서술되어 있는 콜롬비아의 역사와 사회의 모습이 너무 낯설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외형적으로 보면 이 소설은 낭만주의 시대의 소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두 주인공의 삶의 궤적을 만연체로 따라가는 장면은 재미있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참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과거와 현재, 미래(의 암시)가 자유자재로 왔다갔다 하지만 주인공의 총체적인 모습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과연 대가다운 필력이다.

한 가지 흠이라면 문장 교열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점이다. 문장의 호응이 잘 맞지 않는 부분이 간혹 눈에 보여서 조금 언짢기도 했다. 그리고 본문 디자인에도 더 신경을 써주었으면 한다. 벙벙하게 편집된 본문 디자인은 성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좀더 밀도 높게 편집해 한 권으로 만들었으면 더 좋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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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한길로로로 54
베른트 비테 지음, 윤미애 옮김 / 한길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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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냉정하리만치 객관적이다. 벤야민의 사상과 행적을 사진 찍듯 따라갈 뿐이다. 어떤 논평도 하지 않고, 그저 시간순으로 벤야민을 말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벤야민의 전체를 쉽게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벤야민의 사고의 행적을 좇기엔 역부족인 듯싶다. 그가 신비주의자이면서 유물론자가 된 이유를 이 책에서는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한다. 왜 그는 혁명에 몰두했을까, 그러면서도 왜 적극적인 행동은 하지 못했을까. 그는 왜 카프카를 좋아했으며, 프루스트와 보들레르에 열광했을까. 이와 같은 사고의 행적은 시간순에 의해 그냥 설명될 뿐이다. 그의 고민의 정도가 더 깊이 투여됐으면 더 좋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벤야민은 실패한 지식인일 것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끊임없이 글을 쓰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 했지만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지식인이란 과거를 향하는 자라고 했다. 또 역사가는 역사의 실패를 인식한 자일 뿐 아니라 그 자신 역시 실패한 자로 나타나고 있다고도 했다. 정치적 현실주의자인 그는 자신이 현실주의자로서 실패하면 할수록 더욱더 깊이 자신의 세계, 즉 유럽의 세계가 구원되리라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그리고 생을 자살로 마감했다. 그리고 그의 글과 사상이 오랫동안 후세에 남아 읽히고 쓰이고 있다.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얻어야 할까? 그에 관한 책을 좀더 읽어봐야겠다.

'세속적 행위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 동시에 종교의 신화적 내용을 파괴하는 벤야민의 극단적 허무주의는 신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부정한다.'

'지식인은 조금도 노동 계급과 결합되지 않으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호색을 갖추고 있다.'

'벤야민 사고의 메시아적 계기는 인간적인 것의 부정에 근원을 두고 동시에 이를 목표로 한다. 인간에게 희망을 품지 않고 또한 인간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갖지 않은 변증법적 유물론자는 세계를 순식간에 바로잡을 종말론적 파국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벤야민이 갖가지 좌절을 겪으면서도 느긋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처음부터 이와 같은 종말론적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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