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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예전에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 나오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참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갈 수가 있고,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할까. 루카치는 이런 시대는 모든 영혼이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그가 말한 '서사시의 시대'가 그런 세계이다.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는 제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류 최초의 서사시이다. 이 시기는 그리스 신화보다 먼저이고, 성경에 구현되어 있는 '아담과 이브'의 시대보다 더 먼저이다. 그러니까 이 책의 주장에 의하면 진짜 인류가 처음 만든 문명의 시대란 의미다.
그런데 이 시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원시적이 아니라 상당히 과학적이며 문명적이다. 문자가 있었고, 학교가 있었고, 법이 있었고, 또 계급이 있었으며, 신도 있었고, 돈도 있었다. 왕권이 있었고, 다툼도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하나의 문명을 읽는 즐거움이 상당한 편이다. 모든 것에서 최초이니까, 그 문명이 뜻하는 것을 파악하는 게 재미가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참 절망스러웠다. 혹시나 루카치가 말하는 '서사시의 시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인류 최초의 인간들은 지금 이 땅에 사는 인간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게' 서로 다투며 죽어갔다. 길가메쉬가 꿈꾸는 것은 유토피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벗어나기'였다. 사실 그는 폭군에 더 가깝다. 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인 길가메쉬는 자신의 백성들을 힘으로 제어했다. 모든 여자가 시집가기 전에 길가메쉬와 첫날 밤을 보내야 했으녀, 이 때문에 원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길을 나섰다. 신들의 권력에 도전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 엔키두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고작 깨닫는다는 것이 '인간이란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을 얻기 위해 또 길을 나서고...
고작, 그거 하나란 말이냐. 인류 최초의 영웅이란 사람이 고작 죽음이 두려워 자신의 모든 걸 걸어야 한단 말이냐. 그러나 인간의 삶은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인류 최초의 영웅 길가메쉬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인간은 곧 필멸의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영생을 얻으려고 길을 가는 길가메쉬에게 여인숙을 돌보는 씨두리라는 여인이 충고해준 말이다. "길가메쉬, 자신을 방황으로 몰고 있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요? 당신이 찾고 있는 영생은 발견할 수 없어요. 길가메쉬, 배를 채우세요. 매일 밤낮으로 즐기고, 매일 축제를 벌이고, 춤추고 노세요.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이. 옷은 눈부시고 깨끗하게 입고, 머리는 씻고 몸은 닦고, 당신의 손을 잡은 아이들을 돌보고, 당신 부인을 데리고 가서 당신에게서 즐거움을 찾도록 해주세요. 이것이 인간이 즐길 운명인 거예요." 참 씁쓸하다.
길가메쉬를 비롯한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국내에 소개한 책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니다. 그쪽 방면의 신화를 꾸준히 소개해온 조철수 선생의 책들도 있다. <메소포타미아와 히브리 신화>(길), <수메르 신화>(서해문집),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새겨진 한국신화의 비밀>(김영사) 등에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비롯한 이 지역 문명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특히 <...한국신화의 비밀>은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우리의 신화의 연관성을 추적한 역작이다. 여기에도 역시 '길가메쉬 서사시'가 길게 인용되어 있으며, 그것과 한국신화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살펴보고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김산해 선생과 조철수 선생이 국내의 인문계를 살찌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