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끼사스 > [펌] 오에 겐자부로가 발신하는 것

출처: 신교수 칼럼 2004년4월18일자 (http://www.e-nihongo.com/bbs/gnuboard.php?bo_table=sincolumn&page=1&wr_id=22)

‘노벨상 작가’ 오에겐자부로가 발신하는 것/독자가 발신하는 것
-‘대일본제국’ vs ‘마을=국가=소우주’를 시야에 넣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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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오에 문학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관심있는 독자로서 그의 소설을 접해왔다. 몇 년 전 금융통화위기가 아시아를 강타했을 때,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출판사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전집’을 발간하던 중 부도를 낸 ‘사건’이 있었다. 가까스로 회생한 뒤 출간한 첫 책이 필자(펌자 註: 신인섭 건국대학교 일어교육과 교수)가 번역한 오에의 ꡔ동시대 게임ꡕ이었다. 한국의 독서계와 오에 문학의 거리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관심있는 독자들이라면 오에의 노벨상 수상(1994)이 결정되었을 때, 한국의 신문들이 내놓은 오에 문학에 대한 알쏭달쏭한 논평들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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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 속의 오에, 그리고 ‘일본인’

일본근대문학을 전공하는 필자는 “오에 겐자부로는 어떠한 인물인가?”라는 질문에 한국의 독서인들이 어떠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인가 하는 점을 늘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벨상 작가’,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오에에 관한 정보가 의외로 적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손에 의해 쓰여진 오에에 관한 연구서가 전무하다시피 한 것도 일본문학연구자로서 마음이 어두워지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오에 문학의 독자가 형성되지 못한 것은 오에 문학의 성격상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일본의 독서 대중 역시 오에 겐자부로가 고명한 작가라는 것은 알면서도 그가  어떤 작품을 썼고, 어떤 작가인지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부터 서점에는 오에와 관련된 서적들이 진열되었고, 신문, 잡지에서 특집호가 기획되었다. 많은 비평가들의 찬사가 쏟아져 ‘서양’ 문학에 뒤지지 않는 ‘일본’ 작가 ‘Oe-Kenzaburo’가 탄생하였다. 초판 발행 이후 팔리지 않았던 그의 소설들이 ‘세계’ 수준을 확인하고자 하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문화현상으로서 노벨상 작가의 책을 샀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읽으려고 샀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다, 앞부분을 읽다가 그만두었다, 등등의 담론이 일본인 독서층에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전하는 일본의 매스컴은 타고르,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아시아에서 3번째로 수상하는 오에의 노벨 문학상을 ‘서양’, ‘아시아’,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 관계로서 그 윤곽을 잡고 있었다. 노벨상 작가로서의 오에는 “일본인으로서 일본을 뛰어넘는 세계 수준의 작가”라는 사고틀에 의해 단단히 중심화되고, 오에의 텍스트가 제기하는 담론 자체의 갈등은 노벨상 담론 속에 함몰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필자는 생각한다.  
오에는 ‘대일본제국’과, 그에 저항하는 일본 내에 속해 있지만 정신적인 차원에서 ‘마을=국가=소우주’를 구성하는 공동체간의 갈등이라는 독특한 발상을 소설화하고 있다(ꡔ동시대 게임ꡕ). 또 다른 소설에서 성적 에너지의 범람(치한 행위)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일본 청년을 그리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 일본은 어두운 공간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ꡔ성적 인간ꡕ). 또 다른 소설에서는 전쟁 때 피난 온 감화원의 소년들을 마을 사람들이 전염병 속에 방치한 끝에 반항하는 소년을 죽이려고 달려든다는 폐쇄적 공간을 그렸다(ꡔ나쁜 싹은 어릴 때 제거하라ꡕ). 즉 오에가 발신하는 것은 ‘일본’이라는 지정학적 위치의 불안정성이었지만, 일본의 평균적 독자들은 일본이라는 것을 안정성(seamless)으로 수용(혹은 발신)해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독서 대중이 환호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속의 오에’와 ‘일본인’을 부자연스럽게 결합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와 같은 텍스트의 발신과 독자의 발신 사이에 놓인 해석 공간의 매력(혹은 마력)에 대해 <노벨상/오에/일본>의 균열을 시야에 넣으면서 접근하기로 한다.  
그림  )2000/8/23에 발매된 오에 겐자부로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초상을 새긴 기념 우표. (전통 의상을 입은 가와바타와  연미복의 오에가 노벨상을 통해 통합되는 점이 흥미롭다.)


2. 오에 겐자부로의 정치적 입장

오에 겐자부로는 1935년 일본의 시코쿠(四國) 지방에 속하는 에히메현(愛媛縣)의 산촌에서 출생하였다. 열 살 되던 해에 일본의 패전을 맞이한 그는 당시 자신이 체험했던 가치관의 혼란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즉 군국주의적 신념으로부터 전후 민주주의의 가치관으로의 변환에 따른 정신적 공황이 어린 시절 자신을 강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작가 스스로 규정한 ‘오에 문학의 에너지’는 문학적 담론의 ‘정설’로 자리잡게 된다. 조금 전문적으로 이야기하자면, 10살 무렵의 가치관의 혼란에 대하여 나중에 성인이 된 오에가 서술하는 것은 10세 무렵의 ‘자신’이라는 텍스트를 ‘분석’하는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10살의 오에 소년의 감정과 동일시하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무튼 오에는 도쿄(東京)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여 ꡔ죽은 자의 사치ꡕ(1957)로 학생 작가로서 문단에서 인정을 받고 그 다음 해 ꡔ사육(飼育)ꡕ으로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을 수상하였다. 초기의 오에는 인간 정신의 폐쇄된 상태를 목가적으로 그렸다는 평을 받는다. 소외당한 일본 청년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절망적인 초조감을 그린 ꡔ우리들의 시대ꡕ(1959), ꡔ늦게 온 청년ꡕ(1962), ꡔ우짖는 소리(叫び聲)ꡕ(1962), ꡔ성적 인간(性的人間)ꡕ(1963), 등 화제작을 잇달아 발표하여 그는 순수문학 영역에서 작가적 위치를 확고히 했다.  
한편 오에가 사르트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은 오에 문학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서두를 장식하는 강력한 담론 중의 하나이다. 그의 졸업 논문의 테마가 사르트르였다는 점 역시 영향론적 측면에서 회자되지만, 무엇보다도 ꡔ죽은 자의 사치ꡕ 등에서 보이는 존재의 감각적 표현은 사르트르의 초기 작품과 매우 흡사하다.
오에가 대학생이었던 50년대의 일본은 맑스주의와 프랑스 실존주의의 양대 조류가 유행했던 시기였다. 그들은 정치운동에 참여하던가 혹은 허무주의적 분위기 속에 몰입하던가 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오에의 작가로서의 정치적 선택에서 사르트르와의 유사성이 눈에 띤다. 사르트르는 시대의 상황에서 정치․사회적인 사건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밝힐 것을 천명하고, 지속적이고 정력적으로 발언을 했다. 프랑스 식민지에 대한 사르트르의 윤리의식과 같은 것을 오에에게서 읽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이와 같은 오에 겐자부로의 정치적 태도가 한국인에게 공감을 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예를 들면, 오에는 바로 얼마 전인 2001년 3월16일, 우리가 일본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항을 이루는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하여 ‘일본’의 태도를 비판하고, 검정에서 통과시키지 말라고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솔제니친 석방탄원서에서 서명하고(1974년), 김지하 시인 탄압에 항의하여 단식투쟁을 보이며(1975), 피차별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오키나와 문제와 베트남 전쟁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또 원폭 문제에 대한 르포르타쥬, 천황제에 대한 비판적 자세,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발한 ‘애매한 일본’ 비판 등등, 오에의 정치적 입장은 일본에 대해서 감정적인 응어리가 있는 한국인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오에에 대한 평가 중에서 자주 눈에 띄는 ‘일본의 양심’이라는 말은 평균적인 일본의 지식인들과 구별되는 ‘특수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위치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오에 겐자부로의 정치적 입장은 큰 틀에서 보면 일본에 대한 안티테제를 축으로 형성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노벨상 작가에게 수여해 온 일본 정부의 훈장을 거부한 예는 유명하다. 오에는 “예술원의 존재는 우리나라 문화에 바람직한 영향을 주지 못한다. 폐지해야만 한다. 문학자가 국가에 포섭되는 형태가 아니라, 그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형태에서 (작품을=인용자) 써야만 한다”면서 “나는 전후민주주의의 세대. 문화훈장 따위의 국가 관련의 상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근대 작가들 중에서 신화화된 인물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가 일본정부가 주는 박사학위 수여를 거부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신화의 확대재생산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오에의 경우 나쓰메 소세키처럼 신화화될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신화화된다면 오에 문학의 의의 자체가 진부해지겠지만) 그가 거부한 훈장은 거부의 변에서 밝힌 것처럼 작가로서의 오에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일본’이라는 국가와 거리를 두겠다는 발언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스․미디어는 오에를 ‘일본’을 뛰어넘은 세계적인 작가이면서 동시에 일본인 작가라는 관점에서 그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앞의 기념 우표를 예를 들어도, 노벨상 수상작가로서 오에는 ‘애매한 일본’을 비판해도 결국 ‘일본인’ 노벨상 수상 작가로서 통합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주장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매개로 끌어내는 ‘아름다움’은 ‘애매한 일본’에 대한 비판 정신, 윤리성과 결합하여  훌륭한 ‘일본인’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 연장 선상에서 ‘노벨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탄생한다.
오에가 연설, 강연,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본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재료가 되고, 노벨상이라는 이미지 속에 포용된다. 그 결과로 오에의 정치적 입장은 ‘안전한’ 영역에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오에가 일본을 비판하는 행위는 일본의 양심을 더욱 부각시키고, 비판받는 부분의 비양심을 은폐하는 아이러니를 초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노벨상 작가를 포섭하는 국가적 동인은 강력한 것이다. 오에가 훈장 서훈이나 에히메현에서 주는 상을 거절했지만, 정작 노벨상의 유혹에는 이길 수 없었던 것 같다.
노벨상 작가로서 중심화되는 오에.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정치적 입장이 일면 날카로운 반면에 ‘지나치게 담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는 지식인이지만, 그 양심에 따라 행동을 다함으로써 책임도 완결된다는 식으로 ‘사건’과 자신과의 일정한 거리를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행동파의 이미지로 각인된 진보적인 작가 가이코 다케시(開高健, 1930-89)와 비교할 때, 오에가 추구한 사회적 실천은 ‘비판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식의 ‘탈속’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노벨상의 이미지는 이렇게 ‘오에 겐자부로라는 작가’의 발신과 동시대의 독자가 발하는 메시지 사이에서 충돌하고 서로 흡수하면서 아주 강력한 노벨상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3. ‘흑인’ 병사이어야만 하는가?

산촌 마을에 어느 날 흑인 병사가 비행기 추락과 함께 떨어져 포로가 된다. 전쟁과 아무런 관계가 없던 산촌 마을이 갑자기 흑인 포로를 두고 술렁거리고, 고립된 산간 마을에서 포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게된 소년과 그의 아버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오에가 전후작가로서 혜성같이 등장하는 ꡔ사육(飼育)ꡕ(1958)이라는 중편 소설의 내용이다. 오에는 ꡔ사육ꡕ으로 문단 작가의 등용문인 아쿠다가와 상을 수상하였다. 일반적으로 아쿠다가와 상 수상 작가는 순수 문학 진영에서 작가 활동이 보장되는 프리미엄(지명도)을 획득하게 된다. 이야기가 약간 탈선하지만, 재일 교포 작가 유미리와 근래에 들어서 오키나와 출신 작가들에게 아쿠타가와 상이 수여되는 것은 일본의 문단사의 대단한 변모라고 할 만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ꡔ사육ꡕ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국가와 개인과의 격리된 감정이다. 이와 같은 감정은 ꡔ동시대 게임ꡕ의 ‘대일본제국’ 대 ‘마을=국가=소우주’의 도식으로 크게 선회하게 되지만, 오에가 그린 텍스트 공간은 불안정성 그 자체인 것이다.
전후의 시공간, 그것은 국가와 개인의 격리된 감정을 맛보고, 그 위에 일본인들이 새롭게 일본인으로서 자기 규정을 해나가던 시기였다. 일본은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통해 경제대국으로서의 일본으로서 새롭게 명명할 수 있었다. 대동아의 맹주로부터 아시아 경제의 맹주로. 일본은 아시아에서의 미국이 되기 위해 백인 콤플렉스를 매개로 한 ‘일본’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ꡔ사육ꡕ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국가가 개인을 얼마나 소외시키는지, 그리고 개인은 타자를 얼마나 소외시키는지 적절하게 제시한 작품으로, 국가와 개인과의 격리된 감정을 공통 함수로 지니고 있던 당시 지식인 사회에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왜 산간 마을에 추락한 미국 병사가 백인이 아닌 흑인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오랫동안 지녀왔다.
“우리는 깜둥이를 둘도 없는 훌륭한 가축, 천재적인 동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었다.”(ꡔ사육ꡕ)라는 서술이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처럼, 이 소설은 ‘깜둥이’라는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흑인병사로 인해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 빠지게 되지만, 흑인병사를 적군으로서의 미국인이 아닌, 단순한 동물로 간주함으로써 주인공인 나의 ‘아이덴티티’의 규정도 따라서 모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인공인 나는 ‘일본’에 속해 있는 산촌에 사는 소년이다. 하지만 읍내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는 사람으로 ‘국가’에 소속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나’에게 흑인은 적군이 아니라  색깔이 다른 인종적인 차이 이외에는 아무런 변별성도 자져다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흑인병사와 인간적인 감정을 교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서 이 작품을 읽어도 여전히 남는 의문은, 그런데, 백인 병사가 포로로 잡혔어도 동물처럼 ‘사육’하였을까? 그리고 ‘사육’당하는 백인 병사의 이미지가 당시 일본 사회에 용납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작품 분석의 차원에서는 백인이 아닌 흑인을 등장시킴으로써 (일본의) 굴절된 욕망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더 심층적으로 분석하면 미국을 거울로 자기규정하는 방식에 대해 야유하고 있다고 읽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위기에 직면한 흑인 병사의 폭력적 에너지--흑인 병사는 자신에게 솔직한 감정을 보여준 소년을 붙잡아 인질로 잡고 결국 마을 사람들의 공격에 의해 머리가 박살난다. 그때 소년의 손도 잘려 나가게 된다-- 에 담긴 야만성으로부터 개운하지 못한 느낌을 오늘날 오에를 다시 읽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울 수 없는 것이다.

4. ‘대일본제국’ vs ‘마을=국가=소우주’

ꡔ동시대 게임ꡕ(1979)에서 ‘대일본제국’과 50일 전쟁을 벌이는 ‘마을=국가=소우주’의 이야기는 오에의 사상의 한 핵을 보여주고 있다. ‘대일본제국’이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군국주의를 야유하기 위한 표현일 것이다. 반면에 ‘마을=국가=소우주’라고 불리는 시코쿠의 작은 산간 마을은 천황제 혹은 대일본제국에 부정하기 위한 에너지로 가득 찬 공간이다. 그 마을에서 내려오는 신화와 전승은 ‘마을=국가=소우주’가 얼마만큼이나 ‘일본국’이라는 개념 정의를 거부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소학교(초등학교)에 다니던 서술자가 천황에 대한 경외심을 거부하고 ‘마을=국가=소우주’의 창건신인 ‘파괴자’를 숭배하는 에피소드는 제국주의 파쇼화에 대한 결별의 메시지인 셈이다.  
ꡔ동시대 게임ꡕ은 서술자, 즉 ‘마을=국가=소우주’의 신화와 역사를 쓰는 ‘나’는 여러 갈래의 신화 전승을 쌍둥이 누이동생에게 6통의 편지 형식으로 서술하는데, 그 4번째 편지가 대일본제국이라는 군국주의 일본과 일본 안에 있으면서도 일본의 지배로부터 멀어져 있는 산간 벽지의 마을이 자존심을 걸고 격돌한다는 ‘무훈 혁혁한 오십일 전쟁’인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줄거리를 소개하기로 한다.
시코쿠의 산간 마을인 ‘마을=국가=소우주’는 역사적으로 국가 권력에 대항적인 의식을 지닌 일족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예전에 마을=국가=소우주에는 한 명의 새로운 아이가 탄생하면, 또 한 명의 영아 출산을 기다렸다가 한 쌍을 만들어 둘을 하나의 호적에 등록하는 시스템이 있었다.” 두 명 중의 한 명은 국가 권력과 무관하게 ‘마을=국가=소우주’의 인간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하게 하는 이중제 호적의 술책이 국가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왜냐 하면, 두 명 중의 한 명은 납세, 병역 등 국민으로서 국가로부터 부과된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남은 한편은 반대로 국민으로서 자기 규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 안에 국가에 포함되지 않은 영역을 매개로 마을=국가=소우주라는 명명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사실이 외부에 노출되어 ‘대일본제국’의 군대가 치안출동을 한다. 이때 ‘마을=국가=소우주’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일본제국’을 맞아 싸워 승전을 거두지만, 그들의 삶과 정신적 배경인 산림을 불태우려는 적 지휘관(무명 대위)의 계책에 항복을 하고 만다. 그리고 무명 대위가 연 군사재판에서 호적 등본에 기재된 두 명 중 한 명은 모두 학살당하고, 그로 인해 ‘마을=국가=소우주’의 저항은 막을 내린다. 그리고 양민 학살에 가담한 군인들이 모두 다른 지역에 전속되어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려는 ‘대일본제국’의 전략에 의해, 군사작전에 참가한 군인들은 모두 아시아의 전쟁 지역에 보내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은 소멸된다. 제국주의 정부가 대규모 양민의 반란을 표면화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명 대위는 이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 대위라 명명되는데, 그 역시 양민을 학살한 뒤 자살해 버린다.  
‘마을=국가=소우주’라는 독특한 명칭으로 서술되는 시코쿠(四國)의 산간 마을이 파쇼화로 치닫던 대일본제국과 50일간 전쟁을 하면서 저항하다가 결국 패하고 만다는 이야기는 매우 함축적으로 제국주의 일본의 조직화된 전쟁범죄, 베트남전, 나아가서 텍스트가 발표된 이후의 사건들인 걸프전 등에 대한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무명 대위로 상징되는 호명되지 않는 군인들의 모습이야말로, 전쟁과 개인의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6. 결-가족 이야기 혹은 공생의 테마로

오에 문학이 발신하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나 전쟁과 개인의 문제, 허무적인 주체의 갈등적 공간으로서의 일본에 관한 문제화는 일본의 독서인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와 같은 테마를 다룬 소설들이 어렵기도 했지만 독자가 수신하고 싶어하는(즉 독자가 발신하는) 것은 ‘구원’ 혹은 공생의 테마였기 때문이다. 노벨상의 수상 이유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그 자신, ‘글을 쓰는 것은 악마를 물리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이 만든 상상의 세계 속에 개인적인 것을 파헤침으로써 인간에게 공통되는 것을 묘사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뇌에 장애가 있는 아이의 아버지가 된 후의 작품에 특히 농후하다. 동 씨의 ꡔ만연원년(万延元年)의 풋볼ꡕ(1964)은 대표적 작품으로, 지식, 열정, 꿈, 야심, 갖가지 인간의 태도 등이 서로가 융합하는 혼란한 세계에서의 인간관계를 그렸다. (왕립 아카데미 발표의 수상 이유 중에서)

오에가 뇌에 장애가 있는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은 ꡔ개인적 체험ꡕ(1964) 이후 그의 소설에서 반복해서 등장한다. 오에의 가족을 소재로 하는 소설들은 장애아인 아들 히카리(光)와의 공생을 모티브로 한 인간애를 그리고 있어, 독자들에게 훈훈한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가족소설을 사소설로 읽어내는 일본적 독서 방식으로는 오에의 문제의식을 개인의 영역으로 환원하는 작용을 할 것이고, 그것은 오에와 오에의 가정을 신화화하는데 이용될 우려가 크다.  
오에 히카리의 인간 승리를 작가 오에의 승리이자, 일본인의 승리를 만드는 장면을 우리는 노벨상 수상 직후 히카리의 부각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작곡가 히카리에 대한 관심과 조명은 오에 없이는, 나아가서 노벨상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오에의 강연회와 그에 대한 뉴스에는 늘 ‘노벨상’의 관사가 따른다. 오에의 발신과 독자의 발신이 만나는 지점, 그곳이야말로 ‘노벨상’이라는 ‘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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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cedes Sosa - Acustico en Vivo
메르세데스 소사 (Mercedes Sosa)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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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년 전인가.  내한공연 일정이 잡혀 있던 메르세데스 소사가 한국에 오지 못한다고 하니 무척 서운했던 기억이 있다. 건강상의 이유였다. 이로써 우리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세기의 명가수의 라이브 공연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해에 때마침 그녀의 라이브 앨범 ‘Acustico En Vivo’가 국내에 소개되어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 음반은 2001년 11월 16일과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공연 실황을 담은 것으로, 이것은 그녀가 1982년 아르헨티나 귀국 공연 실황과 1980년 유럽 라이브에 이어 세 번째로 선보이는 실황 음반이다.

우선 가장 인상적인 것은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이다. 곡이 끝날 때마다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성이 들려오고, 소사도 그런 관객들과 교감을 나누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특히 두 번째 CD 마지막 부분에서 소사의 이름을 외치며 앙코르를 요구하는 관객들의 목소리를 대할 때는 자연스레 소사의 위대함, 그녀가 아르헨티나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가수였는지를 새삼 되새겨보게 만든다.

수록곡은 타이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어쿠스틱 노래들로 짜여 있다. 누에바 칸시온 류의 노래에서부터 최근 히트곡까지를 망라하며 소사의 진면목을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칠레 출신의 가수 빅토르 하라가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 곡을 붙인 ‘Poema No.15’, ‘galopa murieta’를 비롯해 ‘태양 아래’, ‘어린 시절’, ‘단지 삶에 대해서’, ‘내게 힘이 되어주는 노래’ 등이 수록되어 있다. 1935년에 태어나 평생을 세계의 양심으로 활동해온 소사의 정수가 담겨 있는 음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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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sa Sannia - Mela Granada
마리사 산니아 연주 / 이엠아이(EMI)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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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노래 칸초네를 담은 음반. 국내에는 거의 인지도가 없는 가수 마리사 사니아가 부른 것이지만, 음반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사니아는 1947년 지중해에서 시칠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섬 사르테냐에서 태어나 1966년 이탈리아 RAI 방송사에서 주최한 음악제에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 뒤 본격적인 가수로 활동했고, 돈 베키가 만든 화제의 곡 ‘Casa Bianca’(KBS '여름향기‘ 피아노 테마의 원곡)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 노래는 국내에도 소개돼 1970년대 당시 많은 인기를 끌었다. 1970년과 71년에는 칸초네 가수의 등용문 산 레모 가요제에 결선에 오르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6년 ‘Lapasta Scota’ 앨범을 끝으로 활동이 뜸했다가 1993년 이후로 활동을 재개했다.

이 음반은 그녀가 1997년에 선보인 것이다. 간간이 편집 음반에 수록돼 알려졌던 ‘하얀 집’의 목소리보다 약간 굵게 변모했지만, 그 목소리가 더욱 칸초네다운 맛을 더해주고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음반에 담긴 가사가 이탈리아어가 아닌 사르데냐 어라는 점이다. 곧 이 음반에 담겨 있는 음악은 정통 칸초네라기보다는 사르데냐(이탈리아 지중해 서부에 있는 섬들 가운데 시칠리아 다음으로 큰 섬. 한때 사르데냐 왕국도 있었다.)의 민속음악과 칸초네, 팝 선율이 뒤섞인 음악인 것이다. 그렇지만 칸초네의 특성이 가장 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좀더 듣기 좋게 꾸미기 위해 팝 음률을 첨가하긴 했지만, 모든 노래에는 칸초네의 밝고 정열적인 모습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다.

이 음반에서도 드러나지만 사실 칸초네라는 장르에는 이것이다라고 정의내릴 만큼 확고한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의 대중가요를 통틀어 부르면서도 어떤 느낌이 살아 있는 음악을 칸초네라고 부르는데, 이것도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가고 있다. 13세기 나폴리에서 유행하던 나폴레타나라는 대중가요가 칸초네의 시초라고 부르지만, 이 노래를 실제 들어보면 지금의 칸초네와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국내에도 내한한 바 있는 토니 달라라의 노래와 지금 소개하는 사니아의 노래도 다르고, 마찬가지로 피노 단지오와 산드로 조코베의 음악도 서로 다르다. 하지만 이들 노래에는 ‘이것이 칸초네구나’라고 느껴질 감성과 선율이 있다. 사니아의 노래에도 정통 칸초네는 아니지만, 이탈리아의 칸초네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가 많이 베어 있는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앞서 말했듯이 청초한 느낌보다는 중년의 걸걸한 목소리에 더 가깝다. 칸초네의 국제적인 스타 밀바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르지만, 밀바가 가지고 있는 깊이 있는 표현력이 사니아의 목소리에도 감지된다. 세자리아 에보라, 메르세데스 소사 등 세계를 대표하는 월드뮤직의 여성 가수들에게서 느껴지는 진한 감동과 표현의 깊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사니아의 목소리에는 그에 버금가는 호소력이 담겨 있다. 특히 ‘Una Istella’, 'Melagranda Ruju'와 같은 곡에서 그녀는 진한 삶의 느낌을 표현하며 듣는 이의 가슴을 사로잡는다. 이 곡뿐만 아니라 다른 곡에서도 발랄하고 산뜻한 감정으로 칸초네를 친숙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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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조인간
시마다 마사히코 지음, 양억관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지은이가 주장한 바는 잘 알겠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하지만 지은이가 전개하는 방식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나와는 잘 맞지 않았는지 그 전개 방법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인공은 앙큼하고, 자학을 하며, 어찌보면 사악하기도 하다. 이 주인공의 개성과 소설의 설정은 정말 매력적이다. 그리고 초반부의 소설 전개는 이 주인공의 매력을 한껏 발산시킨다. 하지만 중반에 이르러 소설은 축 처지고 만다. 전반부에서는 주인공이 겪은 여러 정황들이 소설의 주축을 이루지만 중반부 이후부터는 주인공의 사변에 의해서 소설이 전개된다. 그 부분이 개인적으로 정말 지루했다. 초반에 설정된 주인공의 성격을 더 멋들어지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더 필요할 텐데 저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주인공의 얕은 철학관이 드러난 것 같아 더욱 지루했다. 서술이 묘사나 이야기의 힘보다는 약하다는 사실을 한번 더 깨닫게 해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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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난 2002년 연말 무렵 문망에 오르내렸던 글들을 찾아 읽고 있습니다. 그 무렵 이곳 문망에서는 진보와 개혁,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시 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입장과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는 입장들이 이곳 문망에서 격돌했던 시절이었지요. 오늘 지방 선거 결과를 바라보면서 그래도 그때는 행복했구나 라는 생각을 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대통령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노무현 대통령의 약력을 살펴보니 간단하게는 아래와 같이 정리되어 있더군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경남 김해의 시골 농가에서 태어나 1966년 부산상고를 졸업했다.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법 판사를 지내다 1978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했다. 1981년 시국 사건의 변호를 맡기 시작하면서 인권변호사로 변신해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민주화의 한길을 걸었다. 1988년부터는 정치에 참여해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정치변화를 선도했다. 제13, 15대 국회의원과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고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이 과정에서 지역주의의 장벽에 막혀 네 번이나 낙선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현실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2002년 최초의 국민경선제에 의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그 해 12월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지지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출처 : http://www.president.go.kr/cwd/kr/president/story/basic.html


1981년 부림사건 변호를 맡으며 인권변호사가 된 노무현 대통령은 이후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대우조선 사건으로 구속되어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고, 이듬해인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5공청문회를 통해 유명해졌습니다. 그는 전두환에게 명패를 집어던지며 그의 순수한 분노를, 아니 우리들의 분노를 대신 몸소 실천하여 우리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 3당 합당을 거부하며 지역주의의 벽 앞에서 연이어 낙선의 고배를 마시는,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해 걷는 올곧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따지고보면 그에겐 변호사, 국회의원들에게 그리 흔한 서울대학교는 커녕, 대학 졸업장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학연으로 지원받을 수 없는 그가 스스로 든든한 배경이 될 수도 있는 지연마저 거부하였습니다. 그의 순수한 분노와 학연, 지역주의를 타파하려던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우리에게 감동이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2002년 12월... 저 역시 많은 고민을 했더랬다. 정당이냐, 인물이냐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노무현이란 한 개인은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정된 지위가 보장되는 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명패를 집어던지는 순수한 분노가, 노회한 3김 시대의 지역주의 정치를 거스르는, 그가 걸어온 가시밭길이 순수하였기에 그가 말하는 개혁이 기존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운동권 출신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정당에 비해 현실적으로 보였기에 우리는 그를 놓고 그렇게 열띤 토론을 벌였고, 무수한 사람들이 무수한 시간을 공들여 거리에서, 직장에서 그를 위해 논쟁하고, 그를 위해 희망돼지를 모았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솔직히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이들을 곳곳에서 만나며 나도 저들과 함께였다면 좋았을 텐데 하며 부러운 마음을 갖기도 했다.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연극하는 이들을 부러워하기 마련이지요. 가난하기야 피차 일반이더라도 그들에겐 관객의 열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백컨대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던 이들의 그 열광과 열정, 호응이 부러웠습니다.

지난 2004년 3월 12일 국회본회의장에서 야당 국회의원 195명 중에서 193명이 찬성하여 진행된 우리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 때 저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 끝을 보고 있는 기분입니다. 아직 개표 결과가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누구도 개표 결과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워낙 일방적인 게임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단 한 차례도 순위가 바뀌지 않은 채 당선 유력, 당선 확정으로 개표 방송이 진행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주와 대전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곳에서 열린우리당의 대패는 선거 훨씬 전부터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단 한 차례도 이런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한나라당 국회의원이자 고위 당직자의 동아일보 여기자 성추행 파문에도, 공천비리 파문에도 분위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17대 총선에서 당시 분위기가 열린우리당 일방에게 거의 파란이라 할 만큼 불어갈 때조차도 지금과 같은 몰표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민심이 돌변한 까닭에 대해... 이제 많은 정치분석가들이, 시사평론가들이 분석을 하겠지요.  

어떤 이들은 노무현 정부의 무능과 독선을 비판할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노무현 정부의 기본적인 성격이 신자유주의적 인데서 그 원인을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열린우리당 내에서 이번 지방선거의 희생양을 찾아내기 위한 마녀사냥이 시작되겠지요. 당이냐, 대통령이냐? 어떤 한 사람이 배우자를 골라 결혼을 하고 3-4년을 살다가 헤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원인을 따지자면 결국 그 책임을 골고루 돌아가기 마련일 겁니다. 그만큼 당이냐, 대통령이냐라는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소모적 공방에 불과합니다. 굳이 잘못을 논하자면 대통령의 잘못이 더 클 것이고, 그 잘못은 대선 진행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도 민주주의 시대의 대통령을 권위주의 시대의 대통령 모시듯, 떠받든 사람들, 혹은 무슨 구세주라도 되는 양 대통령 개인을 찬양하느라 입이 닳도록 떠들어댄 숱한 선동가들이 골고루 나눠져야 할 겁니다.

이 땅의 많은 지식인들이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호응을 표명했었습니다. 그런 이들조차 이제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대해 등을 돌립니다.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하자면 지난 3년 3개월여에 걸친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이 민중의 삶과 괴리된 채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간 노무현 대통령 개인에 대한 많은 진단과 분석이 있어 왔지만, 저는 그와같은 대통령 개인에 대한 리더십 분석은 마치 마케팅 이론에서 무수히 많이 등장했던 "모모 리더십" 트렌드와 같이 하등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담론들에 불과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대통령 개인의 인기와 이미지에 기대 정치인 개인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대통령은 단순한 인기스타가 아니라 정치인이며, 정치는 우리들 모두의 일상을 지배하고, 영향을 끼치는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정책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대신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초반부에 많은 지식인들, 아니 우리들 자신은 슬금슬금 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그에 대한 실망감과 불신감을 표출하거나 지지를 철회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어왔던 것은 아닌가 반성해야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바로 오늘 우리가 느끼게 되는 이 낭패감은 어쩌면 우리들 자신이 자초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여정부는 철학은 커녕 생각도 없는 정부였고, 설령 철학이 있더라도 그것을 수행할 정책이 없었고, 정책이 있더라도 어느 정책이 좀더 중요하고, 어느 정책이 중요하지 않은지 판단하기에 앞서 무조건 올인하고 보자는 무책임한 정책으로 일관하였고, 그나마도 일관성 없이 추진되어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린 정부였습니다.

충청, 호남, 경남 일부가 연합하여 영남 고립 전략으로 당선된 대통령이 지역주의 타파를 논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을 따지기에 앞서 그렇게 당선된 대통령이 연일 호남 때리기를 하고, 민주당을 탈당한 대통령이 도리어 한나라당이 정권 잡아도 괜찮다는 발언을 하며 대연정 제안을 하여 영남 패권주의를 부추겼습니다. 집권 초반부터 애초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을 지지했던 이들의 바램을 연달아 실망시켰습니다. 노동 문제가 그러했고, 환경 문제가 그러했습니다. 참여 정부 안에 그 어떤 이도 제대로 된 노동정책전문가가 없었고, 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해결할 의지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이렇다 할 대처도, 정책도 만들어보지 못한 채 그대로 휩쓸려 들어가 버렸고, 외교 정책면에서도 처음에는 동북아 균형론을 주장하다가 나중엔 이라크에 앞장서 파병하더니 나중에는 파병을 연장하고, 이젠 평택 대규모 미군기지를 건설하는 데까지 나가버렸습니다.

참여정부의 정책 추진 방향은커녕 이 정부의 자세를 보면 과연 이 정부가 스스로를 정부로 생각하는지, 시민단체로 생각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철부지 같은 정치 마인드 밖에 갖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참여정부의 대언론 정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수구언론과의 싸움에 정부가 직접 나서는 바람에 시민단체들이 수구언론들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 자체가 그대로 정부를 지지하는 것처럼 비추게 만들어 시민단체들이나 언론감시기구들이 제 역할을 못하도록 도리어 봉쇄하였고, 이후 참여정부가 벌이는 수구언론과의 싸움은 연일 수구언론의 좋은 기사거리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스스로의 정체성 혼돈은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스스로를 "신자유주의적 좌파"로 규정한 언설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형용 모순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발설될 수 있다는 그런 단세포적인 정치가 대립각을 세워야 할 대상에 대해선 제대로 대립각을 세울 수도 없게 만들었고, 친자본적인 정책으로 일관했음에도 자본에게 버림받고,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야 할 순간마다 자신을 지지해줄 세력들을 내치는 정책만을 추진했던  총체적 혼돈의 정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참여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의 실책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이 모든 실패와 패착의 결과가 개혁 세력, 진보 세력 전체의 무능과 부재로 낙인 찍혀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 단적인 사례가 바로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정책과 대안들이 유권자들에게 별로 큰 호소력으로 다가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번 선거 결과가 보여준 가장 가슴 아픈 부분입니다. 나쁜 정책 집행자를 처벌하기 위한 결과가 더 나쁜 정책 집행자를 불러들이는 패착으로 귀결되는 이 결과... 여당 사상 최악의 패배 보다 저를 더욱 경악시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민주노동당이 진보세력을 홀로 대표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정당 형태로 진화된 진보정치세력으로 의미를 둘 수 있다는 점에서 지난 2002년의 지지율 8.1%에 비해 불과 2.9%밖에 늘어나지 못했다는 현실은 한나라당의 압승에 비추어 보았을 때, 또 그동안 민주노동당의 아성으로 인식되어 왔던 울산 지역의 지지율이 오히려 줄어들었고, 울산 동구에서는 무소속 후보가 구청장에 당선되었다는 점을 크게 느껴야만 합니다.

영남의 지역주의가 계속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호남에서 민주당이 부활하고, 충청권에서 국민중심당이란 지역주의에 기초한 정당이 창당된 결과를 보아도 알 수 있듯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질기고 질긴 지역주의의 망령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결과들을 단순히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무능과 독선에서만 찾아서도 안 될 것이며, 기존의 정치 질서를 개혁하는데 시간이 너무 짧았다고 볼 문제만도 아닙니다. 또한 이런 사태를 우리 민족이나 지역의 기질적인 차원이나 지역주의적 차원에서만 인식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위에서 제가 혹은 다른 이들이 내리고 있는 분석은 물론 진실이겠으나 그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먼저 이 사태를 마르크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작용"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며, 새로운 생산방식은 이전의 물질적 어려움을 덜어줄 것(혹은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보입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세계체제는 새로운 생산방식과 더불어 노동과 자본의 에 대한 새로운 재현체계를 만들어냈다. 새롭게 구성되는 생산양식과 물적 토대는 사회구성원들에게 새로운 사회관계를 수용하던지 아니면 이와 같은 체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할 것인지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이번 선거의 결과를 바라보건데 사회구성원들은 새로운 생산양식을 받아들이고, 이를 내면화하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속에서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역학관계와 동학에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올바로 알아야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Wise Up(올바로)알다

Aimee Mann
(Magnolia. O.S.T)

It's not what you thought
When you first began it
You got what you want
now You can hardly stand it thought by now you know

내가 생각하던 그런 것이 아냐
네가 처음 그것을 시작했을 때
너는 얻었어 네가 원하는 것을
이제 너는 힘겹게 겨우 서 있어 네가 이제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It's not going to stop It's not going to stop
It's not going to stop 'til you wise up

멈추지 않을꺼야 멈추지 않을 꺼야
멈추지 않을꺼야 네가 알때까지

You're sure there's a cure and
You have finally found it you think one drink
Will shrink you til you're underground and living down
but it's not going to stop It's not going to stop
it's not going to stop 'til you wise up

확신하고 있잖아 치유될 수 있다는 걸
너는 마침내 그걸 발견했잖아, 너는 한잔을 생각하고
움츠려 들려하니? 네가 이해하고 잊게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꺼야 멈추지 않을꺼야
멈추지 않을꺼야 네가 알때까지


Prepare a list of what you need
before you sign away and do the deed
Cause it's not going to stop
it's not going to stop it's not going to stop
'til you wise up no it's not going to stop
'til you wise up no it's not going to sop
So just give up

네가 필요한 것들의 목록을 준비해
네가 사라지는 신호를 주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멈추지 않을 것이기에
멈추지 않을 꺼야 멈추지 않을 꺼야
네가 알 때까지 멈추지 않을 꺼야
네가 알 때까지 멈추지 않을 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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