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를 구출하라](4) 바리케이드를 쳐라
입력: 2007년 12월 11일 18:31:45
 
“이제 토플책 덮고 거리로” 자각하는 침묵의 세대
청소년들이 지난 10일 서울 이랜드 앞에서 비정규직 탄압에 항의하는 모임을 갖고 있다. |프레시안 제공
- 권익을 위해 싸우는 프랑스 청년들-

지난달 초 프랑스의 파리1·4, 툴루즈, 루앙, 페르피낭, 렌 등 전국 10여개 대학 학생들은 각 캠퍼스에서 시위를 했다. 등록금 인상과 기업 기부금 모금을 허용하는 내용의 ‘대학 자치법’이 대학을 사유화하고 대학 평준화를 깬다는 이유였다.

지난해 1월 프랑스 정부가 최초고용계약법(CPE)을 발표했다. 20인 이상 사업장에서 26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용자는 최초 고용 2년간 특별한 사유없이도 노동자를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첫 취업하자마자 해고에 직면하게 된 청년들은 법안 철회를 요구하며 대대적 시위를 벌였다. 3월에는 100만명이 대학과 거리에 모였다. 그리고 3개월 뒤 정부는 법안을 폐기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악조건 하에 있는 한국의 88만원세대는 조용하다. 교육권·노동권과 밀접한 등록금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다. 초·중·고 때부터 사회 과목에서 노동기본권은 물론 플래카드 작성법, 모의 노사 교섭까지 가르치는 독일·프랑스 등 유럽 국가와 달리 노동 문제를 거의 가르치지 않는 한국의 제도권 교육을 주요 원인으로 꼽는 이들이 많다. 교육부와 전경련이 함께 만든 경제교과서가 등장하고, 기업이 대학을 평가할 정도로 과도한 시장주의도 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조한혜정 교수는 이렇게 분석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같은 책을 읽으며 자란 이들 세대는 ‘모든 게 너 하기 나름’이라는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젊은 인재들은 자기 주도적으로 노동시장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저 삼성을 바라면서 시스템에 그대로 포섭돼 버립니다.”

- 88만원세대 책읽기로 시작된 자각 -

최근 발간된 ‘88만원세대’는 이런 침묵과 순응, 체념에 맞서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고 제안했다. 88만원세대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저항하고 조직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요구는 너무나 얌전하고, 기성체제에 안주하는 88만원세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88만원세대가 그런 것은 아니다. 여전히 소수이지만, 이런 문제 인식에 대해 공감하고 자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 공감은 우선 ‘88만원세대’라는 책을 사서 읽는 작은 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 ‘88만원세대’는 출간 4달 만에 2만5000부를 돌파했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꿈의 1만부’라는 판매량을 2배 넘어섰다. 지난 5일 8쇄로 1만부를 더 찍었다. 출판사 레디앙의 이광호 대표이사는 “젊은 세대를 소비 주체가 아닌 사회 경제적 의미로 분석한 이 책이 광고를 낸 것도 아닌데, 젊은 층에서 입소문을 타며 꾸준히 잘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사회과학 서적의 20대 구입 비율은 20%. 그런데 ‘88만원세대’는 40% 이상이다. 20대에게 인기 있는 책이 ‘부자학’ ‘처세술’ ‘취업교재’라는 점을 고려하면 ‘88만원세대’의 판매량이나 판매 추세는 이례적이다.

20대 블로거들이 온라인에 올린 ‘독후감’도 수백 건에 이른다.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시민독서프로젝트 교재로 사용하는 등 각 지역의 여러 독서모임, 문화사랑방에서도 책 읽기가 활발하다. ‘수유+너머’ 독서프로젝트 매니저 김연숙씨는 “우리의 ‘불안정한 삶’이 독서프로젝트의 키워드였는데, ‘88만원세대’는 사회 비정규직 문제와 세대 문제를 지식이 아닌 현실로 다루고 있어 교재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이 이랜드 비정규직 문제에 항의하며 쓴 구호, ‘비정규직 악법이 뿌린 저주, 다음은 우리 차례예요’라고 적혀 있다. |프레시안 제공
- 21세기의 의식화 교재로 -

성공회대·연세대·인천대 일부 수업에서도 ‘88만원세대’를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인천대에서 ‘한국사회노동문제’라는 이름의 교양 강의를 맡고 있는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은 “이 책은 지금의 20대들에게 가장 적나라하게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조한혜정 교수는 “학생들이 아주 공감한다. ‘이제 내가 정말 왜 불안한지 알겠다. 책 읽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짱돌을 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학생들이 많다. 대부분 똑똑하게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조교수 수업에 들어간 학생들이 과제로 써 낸 서평에서는 상위권 대학 학생들도 ‘88만원세대’로서 느끼는 불안감이 드러난다. 다음 학기 졸업을 앞둔 박모씨(25)는 지원 회사 10곳 중 7곳 정도가 서류 전형에서 떨어졌다. “(회사를) 골라가기는커녕 백수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는 시점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말 88만원을 받고 회사를 다니게 되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나는군요.”

기성 세대를 향한 불만도 터져나왔다. 김윤하씨(19)의 말이다. “기성 세대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왜 이렇게 힘들어 하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해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손을 내밀고 관심 가져주시면 될 텐데….” 윗세대의 관심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서명선씨(20)는 “기성세대에게 ‘우리 불쌍하니까 가엾게 여겨서 고쳐주세요’라고 할 건가. 그들이 나누어 줄 것 같은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했다.

- 개인아닌 사회문제로 보자-

이원희씨(20)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이는 사회적인 문제이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이제 이야기 좀 나누어 봅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잖아요.” 안슬기씨(20·여)는 “밤새 토플책을 읽기보다 하루치 토플 시험을 보지 말자. 시사 공부를 위해 신문 스크랩을 하기보다 아름다운 반항으로 신문의 기사거리가 되어보자”는 제안을 했다. 최모씨(19)는 “지금은 ‘노동 기회 소멸의 시대’다. 이제 이 판을 한 번은 엎어볼 때다. ‘배틀로얄’에서 게임의 룰을 한번 정도는 뒤집어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 용기가 존재함을 서로 깨달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88만원세대들이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도 했다. 성공회대에서는 11월27일부터 3일간 ‘비정규직 전시회 시즌 1’이 열렸다. 민주자료관과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가 주최하고 학생들도 참여했다. 유소라씨(24)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친구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다 같이 함께 노력하고 뭉치는 것이 대안임을 알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참여 학생들은 ‘우리가 바로 미래의 비정규직’이라며 전시 참여를 촉구하는 대자보를 붙였다. 전시장에는 홈에버, 롯데호텔 노조 등 비정규직 농성장에서 기증받은 글과 영상물로 빼곡히 채웠다. 3일 동안 2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다녀갔다. “4학년으로 취업준비를 하는 동안 저 역시 불안해요. 시험 때면 예민해져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해결하려면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잖아요.” 유씨의 말이다.

- 저항하는 사이 경쟁 탈락 걱정도 -

그러나 누가 나서서 바리케이드를 칠 것인가. 김모씨(20·여)는 “내가 (책에서 말한대로) 짱돌을 드는 사이에 다른 ‘현명한’ 이들은 좁은 취업문을 벌써 비집고 들어가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5% 정규직을 향해 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김씨의 손목을 붙들어 맨다. 박모씨(22)도 “짱돌을 들었을 때 생길 수 있는 모호함보다 누군가 짱돌을 들 때 나는 GRE(미국일반대학원 입학자격시험)를 공부해 얻을 수 있는 작은 이익을 추구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호경씨(25·성균관대)는 “20대가 처한 고민을 친구들과 나눠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면서도 “세대 중심으로 20대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와 닿지 않는다. 결국은 계급 문제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 아직 소수지만 곧 운동으로 확산될 것 -

이들 88만원세대들의 자각과 공감이 사회 변화의 에너지로 발전할 수 있을까. 하종강 소장은 “이랜드 신촌 본사에 와서 깃발 들고 오는 청소년들이 소수지만 있다”며 “소수의 정서가 다수가 될 수 있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1970~80년대 소수 극렬 운동권의 정서가 80년대 말 대중의 정서가 됐다”며 “지금도 대학 내에서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운동권은 백안시 되지만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면 대중의 정서로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세화씨는 “20대들은 이념적으로 보수적인 게 아니라 탈정치 때문에 보수적이 된 것”이라며 “88만원세대가 정치에서 벗어나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을 가질 때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목·유정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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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총 “李 지지·정책연대”…노동자의 ‘자기 배반’
입력: 2007년 12월 10일 02:56:27
 
-“계급 정체성 잃은 인기투표 아니냐”
-대상 제한 문국현·권영길은 아예 배제해 논란
-“85만 중 10만표로 결정 대표성 의문”

한국노총은 정책연대 후보 선정을 위해 지난 1~7일 휴대폰 번호를 제출한 조합원 45만6152명을 대상으로 총투표를 실시한 결과, 유효투표 23만6679표(투표율 52%) 중 이명박 후보가 9만8296표(득표율 41.5%)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7만3311표(31%), 무소속 이회창 후보는 6만5072표(27.5%)를 얻었다. 한국노총은 10일 이명박 후보측과 정책연대 협약체결식을 갖고 공개지지를 선언한다.


한국노총의 총파업 진군대회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나 노동계 내부에선 “항상 여당을 지지하던 20여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며 노총으로서의 정체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지난 10월초 이후보와의 정책간담회에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해고 자유 확대’를 언급하는 등 대통령 후보로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후보는 지난 7월 당 경선 울산 합동연설회에서 “정치노조, 강성노조, 불법 파업을 없애겠다”고 했고, 지난 9월 대구 중소기업인 타운미팅 때엔 “우리나라처럼 비효율적이고 불법적이고 극렬한 노동운동을 하는 곳은 없다”며 노조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됐을까. 후보들의 정책을 자신의 정체성에 비춰 판단하기보다 당선 가능성 등 일반 유권자의 눈으로 이미지만 좇음으로써 ‘인기투표’가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손혁재 경기대 교수는 “우리는 노동자들이 계급적 투표를 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노동자 의식의 부족”이라고 진단했다.

조합원들의 ‘정치의식’을 제고하고 그 결과가 반영될 수 있는 충분한 장치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자성도 나온다. 각 후보들로부터 ‘10대 과제, 12대 요구’에 대한 답변을 받았지만 차이점을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실제 ‘동일업무에 대한 비정규직 계속 사용 규제’에 대해 이명박 후보가 ‘인사권 침해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사실상 반대인 ‘논의 필요’로 응답했지만 그 의미에 대한 평가는 없었다. 한국노총의 핵심 관계자는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에서 만든 답변 분석표가 중립적이어서, 어느 후보가 우리 요구를 더 잘 반영했는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초 노총 내부에서 별도의 평가위원회를 구성, ‘노동자적 평가’를 위한 잣대를 제공하자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나 지도부가 특정후보 지지를 유도한다는 비판을 살 수 있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특히 MBC와 공동 추진한 대선후보 TV토론회가 이명박 후보측 거부로 무산되면서 조합원들은 공개적 비교·검증 기회도 잃었다.

지도부가 조합원들의 선택을 제약한 측면도 지적된다. 정책연대 대상을 지지율 10%로 제한하면서 창조한국당 문국현,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아예 제외됐다. 한 조합원은 지난 2일 한국노총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한국노총이 상식을 가지고 일을 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전화투표하는 세 후보 말고 다른 분을 찍겠다”면서 투표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박영삼 한국노총 대변인은 “현재의 보수화된 여론이나 정치구도를 넘기엔 힘들었던 것 같다”면서 “이명박 후보 집권후 반노동(자)적인 정책이 현실화할 경우 정책연대는 언제든 파기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불안한’ 정책연대라면 조합원 총투표까지 실시하며 연대를 시도하는 명분이 약하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노조 진영은 과반수 투표에 과반수 득표가 원칙인데, 한국노총 조합원 85만여명 중 10만표가 안되는 지지를 가지고 노총의 공식 방향을 잡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김광호·김창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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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3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를 연이어 출간한 우석훈 씨를 만났습니다. 한국의 20대에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을 붙여준 경제학자의 안내를 따라 우리 사회를 돌아본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인문사회 독서 시장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함께 나눴습니다. (인터뷰 | 알라딘 편집팀 김현주, 박하영)

   

20대를 위해 쓴 <88만원 세대>

알라딘 : <88만원 세대>는 출간되자마자 책이 품절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출간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우석훈 : <88만원 세대>는 철저히 “20대의 입장에서 보고 20대를 위한 책을 쓰겠다”는 목표를 갖고 출발했어요. 그런데 20대는 사회과학 책을 많이 읽지 않는대요. 몇몇 출판사에서 386세대나 그 윗세대들이 원하는 내용으로 일부를 수정해달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책을 처음 만드는 출판사와 함께 작업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미리 점검해야 하는 부분들을 미처 다 챙기지 못했어요.

알라딘 : 8월 22일까지 <88만원 세대>를 구입한 분들 가운데 20대 독자가 25%입니다. 예상하신 비율과 비슷한가요?

우석훈 : 예상보다 20대가 조금 더 산거죠. (웃음) 책을 기획할 때는 20대가 70% 이상 사주길 바랬는데 주위에서 “그건 무리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든 20대가 많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래서 386세대나 50대의 눈에 맞춰 내용을 바꾸지 않고 처음에 생각한대로 마무리했고요. 20대 비중이 좀더 높아졌으면 좋겠는데, 지나봐야 알겠지요.

알라딘: <88만원 세대>를 읽은 20대 독자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386세대나 50~60대 분들은 어떤 소감을 밝히셨는지 궁금합니다.

우석훈 : 책을 읽은 20대는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요, 서평으로만 접한 20대는 “그래서(위기라서) 어쩌라는거야?” 하는 식이죠. 50~60대는 “문제를 어떻게 풀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는 반응이 주를 이루고요, 386세대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별 피드백이 없었어요.

알라딘 : <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 이어 ‘한국경제대안 연작 시리즈’를 2권 더 출간할 예정이시죠? 이 시리즈를 기획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우석훈 : 올해로 박사(경제학) 12년차거든요. 10년째 되었을 때 우리나라 경제와 사회에 대해 그간 생각해온 내용들을 정리하려고 했었는데 기회가 안 됐어요. 그걸 올해 하는거죠. 대선이 끝나고 내년이 되면 사회가 바뀔거고 그때는 이런 책을 출간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더 어려워질 것 같은 생각도 들었고요.

‘내 살길만 찾겠다’는 좋은 대응전략이 아니다

알라딘 : 2007년 상반기 베스트셀러를 보면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이 종합 15위, 신간 가운데서는 4위를 차지했습니다.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서는 위기의 본질이 ‘조직론의 부재’에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기업은 외부와 경쟁하고 내부에서는 경쟁을 줄여야 한다는 게 경제학의 기본 통찰이라고도 하셨는데요. 이른바 ‘직장에서 살아남는 법’ 류의 책이 인기를 얻는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대로 된 ‘조직론의 부재’에 대한 개인 차원의 대응일까요?

우석훈 : 경제학은 구조를 봅니다. 열 명이 가운데 아홉명을 떨어뜨리는 게임일때 그 가운데서 한 명이 되는 게 처세술의 접근이라면 경제학에서는 ‘어떻게 하면 열 명을 살릴지’를 고민하죠. 개개인이 열심히 살려고 해도 대한민국이라는 틀 내의 구조가 있고 회사라는 틀 내의 구조가 있어요. 사회나 회사가 어떻게 되든 ‘나는 내 살길만 찾겠다’는 건 좋은 대응전략이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는 개인이 그렇게 해도 회사에서 자르기로 한 사람을 안 자르진 않을 거고요. 개인이 대응전략을 세우면 조직은 그것을 솎아내기 위한 대응전략을 금방 만들죠.

위기가 오면 난파선에서 쥐가 먼저 뛰어내린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처세술 책이 그 쥐가 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어떻게 해야 내가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건데, 그건 대중적 인기는 높죠. 반면 사회과학이나 경제학에서는 배를 가라앉지 않게 할 방법을 논의 하고요.

20대 문제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20대에게 난파선이 아닌 멀쩡한 배를 줄 수 있을지 고민해야죠. 이런 얘기들은 경제학이나 사회과학이 하는데 거기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똑같은 얘기를 개인들한테 하면 거기엔 관심이 있고요. 기본 학문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흐름이죠.

이른바 명문대에서 논술 채점을 하는 교수님들께 들으니 학원을 다니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논술 채점의 기준이 된대요.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혼자 책을 읽고, 더듬더듬 하면서도 자기 글을 쓰는 사람을 찾는거죠. 학원에서는 트랜드라고 가르치지만 결국 논술 답안지에 있어서는 굉장히 떨어진다는 이야기거든요. 회사도 그렇고요. 회사는 유능한 사람을 원하지 살려고 아등바등 하는 사람은 원치 않아요. 처세술 책의 마음은 이해 가지만 개인에게 그렇게 도움될 내용은 아닌 것 같아요.


알라딘 : 네, 최근 2~3년 사이에 자기계발서 시장이 정말 크게 성장했습니다.

우석훈 : 사회가 불안해서죠. 어려울 때 종교나 예언서가 유행하잖아요. 사회가 안정되고 삶이 좀 평온해져야 끝이 나죠. 옛날에는 예언서가 유행했다면 21세기에는 자기계발서가 유행하는 것 같아요. ‘이런 주문 외우면 총 맞아도 안 죽는다’고 하는 것과 똑같아요. 자기계발서가 주는 처방이 몇 사람은 행복하게 해주겠죠. 하지만 평균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는지 한 번도 검증된 적은 없어요.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짱돌을 들어라

알라딘 : <88만원 세대>에서 신문독자로서 20대가 열악하기 때문에 신문들이 20대를 그저 ‘얼굴 없는 세대’ ‘부모들에게 기생하면서 독립을 포기한 세대’로 치부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석훈 : 당연한 거죠. 우리 사회도 마케팅 사회로의 전환이 끝났어요. 마케팅이란 건 구매력 있는 집단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 일 아니에요? 20대가 무슨 신문이든 구독을 많이 하는 집단이다. 그래서 20대가 신문을 끊으면 큰일이다고 하면 신문도 20대 문제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겠죠. 한 줄로 뭉뚱그려 쓰지 않고 20대 가운데서도 21살은 이렇다. 22살은 이렇다 하고 풀어 쓰겠죠. 화장품도 마찬가지거든요. 30대가 여성 화장품 시장의 중심이잖아요. 30대 용으로 신제품을 개발해서 라벨링을 없애고 포장을 싸게 하면 20대 용이 되요. 피부민감도는 20대, 30대 모두 다른데 20대용 화장품은 안 만든다는 거죠.

알라딘 : 20대 문제를 고민하는 책을 찾기 힘든 것도 같은 이유일까요?

우석훈 : 어차피 안 살거니까. (웃음) 예를 들어, 농업에 대한 책은 잘 안 쓰잖아요. 농민들은 책을 잘 안 읽으니까. 책 한 권을 쓰려면 저자가 최소 6개월에서 1년을 그 주제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데, 책을 써도 읽어주지 않으면 결국 고민을 하지 않게 되죠. 90년대 초반을 보면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 그 20대의 애환을 담은 소설이 굉장히 많았어요. 공지영 씨 책이 대표적이죠. 그 세대가 이제 서른이 되었다. 또 마흔에 가까워졌다. 그런 걸 담아가는 게 삶의 기록이거든요. 근데 지금 20대를 위한 삶의 기록은 거의 안 나와요. ‘너네는 무식하다’ 너네는 나약하다‘ ’너네는 생각이 없다‘는 식으로 꾸짖는 책이 좀 나오는데 그것도 주류가 아니죠. 이런 게 결국 고민이 적어진다는 얘기에요. 20대를 다룬 소설도 나오고 시도 나와야 그 다음에 분석서가 따라갈텐데 지금은 그것조차 없어요.

알라딘 : 반면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같은 책이 눈에 띕니다.

우석훈 : 그런데 미치면 더 불행해지죠. (웃음) 점점 더 수렁에 빠지는거죠.

알라딘 : <88만원 세대>에서 20대에게 “토플 책을 덮고 짱돌을 들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짱돌이 있을까요?

"짱돌" 얘기는 고민 많이 했어요. ‘한국경제대안 연작 시리즈’는 모두 생태주의 시각을 바탕으로 해요. 생태적 생각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제개 주문한 것은 ‘자발적 가난’이란 결론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모든 20대를 구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좀 과하죠.

결국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 관심도 없는 거고, 문제를 풀 수도 없어요. 토플책을 덮으라는 이야기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적 변화로는 문제를 풀기 어려울 정도로 이미 구조화되었다는 것이에요. 그 구조화에 맞서기 위해 자기도 구조화되어야하죠. 제가 생각한 것은 ‘20대 국회의원이 나온다 ’ ‘기업의 주니어 보드 같은 이사회에 20대가 들어간다’ 하는 것인데, 그런 것을 목표로 하면 굉장히 많은 20대가 모여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해봐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찾는 답이 뭐라고 좋으니 모여서 답을 찾기라도 하라는 거죠. 답이 안 나오면 20대가 아니에요.

대표를 만들고 스스로 조금씩 움직이기 위해서는 부딪히는 수밖에 없어요. 윗세대는 룰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요. 그들이 제시하는 룰을 하나씩 깨지 않으면 바꿀 방법이 없죠. 이를테면 고시를 보는데 거기에 부당한 문제가 나왔어요. 그럼 다같이 모여서 문제를 그렇게 내면 안 된다고 해야 그게 바뀌죠. 자기 혼자 방에 앉아서 ‘이번에는 떨어졌지만 내년에는 잘 풀어야지’ 해서는 답이 안 나와요.

싸워야죠. 안 되는 걸 안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죠. 그런데 20대가 싸워본 경험이 한 번도 없거든요. 소리 지르면 심장이 멎을 것 같다고 하고, 정색해서 말하면 바로 입을 닫아요. 그래도 싸움을 좀 해봐야죠. 정의롭고 명분있는 싸움 있잖아요. 나와는 상관 없어도 ‘저 사람들 불쌍하다’하며 나서서 싸우는 경험이 필요해요.

386세대는 지금도 ‘우리가 이런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 하면 광화문으로 모이죠.(웃음) 근데 20대가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하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그래도 참고 공부 열심히 하세요’ 하죠. 그렇게 하면 실체가 못 되는 거에요. 프랑스의 68세대는 평생 한 번도 당한 적이 없어요. 10대때 한번 화끈하게 싸우고 ‘우리 건들면 알지?’하게 된거죠. 그 사람들은 은퇴해서도 풍요롭게 살게 되는 거에요. 혼자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렇다는 거죠. 한 두 명은 살 수 있지만, 내가 그 한 두 명이 되긴 힘들어요.


알라딘 : 20대가 쓰는 책도 “짱돌”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20대 저자가 거의 없어요.

우석훈 : 두 가지가 문제인 것 같아요. 일단은 습작기를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안 되요. 두 번째는 과감하게 나오는 20대에 대해 사회가 용인하는 분위기가 죽었죠. 요즘은 20대를 애들 취급 하잖아요. 불만이 있으면 날것으로라도 그게 나와야 하거든요. 그래야 피드백이 있죠. 20대 가운데 정교하게 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대신 그때는 메시지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세대간 협동진화죠. 새로운 것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약해졌어요. 결국 이런 게 전체적으로 약자들, 어린 사람들이 움직이는 공간을 좁힙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만 힘든 게 아니라, 국민 전체가 힘들어져요.

우석훈이 말하는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

알라딘 : <88만원>세대에서는 20대에게 지금처럼 책 안 읽고는 386세대와 경쟁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고,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에서는 일주일에 책 두 권도 안 읽으면서 무슨 엘리트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20대에게 책을 읽으라는 메시지를 전하신 것 같아요.



우석훈 : 책이라는 게 단순한 정보가 아니에요. 책을 붙잡고 읽는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끈기를 요구하는 일이거든요. 책은 재미없어요. 좋은 책일수록 그래요. 그래도 도움이 되니까 참고 읽지요. 386세대는 해방 이후로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세대인데요. 그렇게 책을 읽은 사람들의 지적, 예술적 능력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따라갈 수 있겠어요? 또 그 사람들의 자식들이 지금 10대인데요. 청소년 책 시장도 크거든요. 제가 책에서 ‘세대간 경쟁’을 강조했는데, 지금 20대는 그런 386세대나 10대와 경쟁하게 되요. 그러니 책을 읽으라는 겁니다.

알라딘 : 20대때는 어떤 책을 주로 읽으면 좋을까요?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에 대해 조언해주세요.

우석훈 : 주위 사람들이 권하는 책을 불신하라는 얘길 하고 싶어요. 그 대신 읽고 싶은 주제를 하나 택해서 가장 최근에 잘 나온 책을 하나 골라요. 거기보면 그 책이 나오기까지의 책들이 쭉 소개되어 있잖아요. 그 계통을 따라 읽고 정리를 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식으로 읽으면 자기 지식으로 남아요. 아무거나 막 읽으면 남는 게 없는 것 같고요. 또 책을 읽으면서 갖게 된 생각들을 쓰는 훈련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책 전체를 포괄해서 서평을 쓰기 보다는 읽으면서 배운 것, 기분 나빴던 것 등을 그때그때 정리하는 거죠. 서평에는 과시적인 면이 있는 것 같고요.

알라딘 : 재미를 위해서는 주로 어떤 책을 읽으세요?

우석훈 : 일본 만화를 봐요. 또 요즘은 19세기 영국 소설들을 읽고 있고요. 디킨스나 홈즈 시리즈도 다시 읽고요. 19세기 영국을 다시 읽는 건 전세계적으로 굉장히 유행이에요. 최근에 나온 예술이나 창작들은 너무 복잡하잖아요. 그에 대응해서 원형들을 보려는 시도를 하는 거죠. 19세기 영국은 제국주의 시절의 심장이었어요. 21세기 미국 중심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게 파편화되어 있으니까 19세기로 돌아가 그 사람들이 품었던 고민을 보려는 거고요.

알라딘 : 20대에게 어떤 책을 권하고 싶으세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소설로 먼저 읽고 <스팀보이>라는 일본 만화를 봤으면 좋겠어요. <스팀보이>는 19세기의 영국과 미국 자본의 갈등을 일본 사람이 해석한 거거든요. 일본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고민들이 예술적으로 담겨있어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그 소설이 나쁜다고 말하는 <스팀보이>를 보면 민족주의, 쇼비니즘, 자본주의의 지나친 경쟁관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할 수 있게 되요.

알라딘 : 마지막으로 알라딘에 바라는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80~90년대에 아카데미 같은 걸 했잖아요. 조금 길게 보고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돕는 강좌를 마련하거나, 책을 읽은 사람들이 창작을 해보거나 토론을 하는 소통의 장을 마련했으면 좋겠어요. 책을 매개로 사회와 소통하는 부분에서 구심점이 되면 좋겠어요. 또 대부분의 출판사나 작가는 자기 책밖에 모르는데, 알라딘에서 일하는 분들은 출간되는 책을 다 접하잖아요. 그것들을 종합해서 보면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가 있을텐데, 그런 정보를 해석해주는 역할을 하면 좋겠어요.


우석훈 : 서울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인생의 1/4을 독일,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의 외국에서 지냈고, UN 기후변화협약의 정책분과 의장과 기술이전분과 이사를 마지막으로 국제협상과 공직생활에서 은퇴했다. 한겨레신문에 '여기는 명랑국토부'을 연재하던 시절을 행복했던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지은책으로 <아픈 아이들의 세대> <음식국부론>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88만원 세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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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1 통권 573 호 (p160 ~ 180)



전설의 디바 김추자 1981년 결혼 이후 최초 인터뷰
“난 은퇴하지 않았어요,‘공백기’가 길어졌을 뿐”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 재평가되는 김추자…‘솔 사이키 창법의 창시자’
● 독창적 창법 근간은 고교시절 익힌 국악
● “30년 전 김추자 노래 의상 춤, 지금 내놔도 ‘첨단’”
●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 없다”
● 중앙정보부, 재벌 회장 모임 불려가
● 청와대 비서실 요청 거절했더니 ‘김추자 간첩설’
● 김추자 인생 영화화, 뮤지컬화 움직임
● 지난해 10월 음반 내려 기획사 설립
● 소주병 난자 사건…“난 독해요, 오직 무대 다시 설 생각만 했어요”





군사독재의 음영이 짙게 드리웠던 1970년대, 독창적 창법과 섹시한 춤으로 온 국민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 여걸이 있었다. ‘한국 최초의 댄스 가수’ 김추자(金秋子·56). 치마와 머리칼 길이조차 통제의 대상이던 그 시절, 그는 우울한 대중의 감성을 폭발시키며 ‘문화적 다이너마이트’ 노릇을 자임했다. 꽉 죄인 옷의 터질 듯한 곡선은 돌부처도 돌아앉게 할 만큼 뇌쇄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광기(狂氣)까지 내비치는 김추자의 춤사위와 파격적인 의상은 30년이 지난 요즘 연예판에서도 전위적 시도로 꼽힐 만하다. 끓어오르듯 한을 내뱉다 어느덧 엉덩이와 어깨를 들썩거리게 하는 독특한 창법은 동서양 어디에서도 듣지 못한 스타일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그가 솔(soul)과 사이키델릭의 복합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라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당대가 소화하기엔 그의 창법이 너무나 앞서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의 노래는 대학가의 응원가로, 진화한 7080세대의 애청곡 또는 애창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다.
무릇 ‘전위’란 시대의 탄압을 피해갈 수 없는 법.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공연을 펑크 내고 서슬 퍼런 군사정권의 호출을 거부한 그의 초현실적 저항성은 가수 제명과 간첩설, 대마초 파동 등으로 이어지며 갖은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 김추자 - 님은 먼 곳에

1981년 당시 동아대 정치학과 교수이던 박경수(現 명예교수)씨와 결혼한 그는 무대, 지면, 브라운관 할 것 없이 모든 곳에서 자취를 감췄다. 1986년 리사이틀을 위해 잠시 바깥나들이를 한 것을 제외하면 언론과의 접촉을 일절 거부한 채 전업주부로 살아왔다.
26년의 세월을 뚫고 ‘가수 김추자’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어렵사리 세 차례에 걸쳐 5시간이 넘는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인터뷰를 계속 거부하던 그였지만, 추억이 하나하나 되살아나자 곰살궂은 큰누이처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시원스럽게 쏟아냈다.
“물세례밖에 더 맞겠어요?”
뚜우, 뚜우~
“여보세요, 김추자 선생님 댁이죠.”
“예, 제가 김추자인데요.”

   





1975년 대한극장 리사이틀 때의 김추자.

심장이 멎는 듯했다.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미리 질문지를 만들어놓았지만, 막상 기대하지도 않던 전화 통화가 이뤄지니 도통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공연히 시답지 않은 얘기 몇 마디 늘어놨다가 제꺽 전화를 끊어버리면 어떡하나. 비음이 약간 섞인 매혹적인 목소리, 당당하고 거침없는 말투는 옛 방송에서 듣던 김추자의 그것이 분명했다.
“나 인터뷰 안 해요. ‘신동아’하고만 인터뷰를 하면 오래전부터 몇 년씩 내게 연락해온 다른 기자들은 뭐가 되겠어요. 집 앞에 와서 쪽지 남기고, 꽃 보내고, 전화로 통사정을 하던 사람들인데, 너무 미안하잖아요. 괜히 적을 만들고 싶진 않아요. 좋은 소식 있으면 내가 최 기자에게 전화할게요. 그간 꾸준하게 활동했던 사람이면 이런 얘기 안 하겠지만, 여러 모로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고.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하면 나를 어떻게 볼까 아찔하기도 하고. 별다른 뜻이 있어 인터뷰를 거절하는 것은 아니니까 잘 생각해주세요.”
▼ 근황만이라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팬이 궁금해하는데요.
“다른 기자들도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뭘 궁금해하는지 잘 알아요. 일과 사랑, 결혼, 아이, 인생 설계, 라이프스타일, 개인 철학…뭐 이런 것 아닙니까. 제목 몇 가지 보태지긴 하겠지만, 기자의 질문이란 게 다 비슷비슷하죠.”
기자들의 취재 생리까지 꿰차고 있었다. 그래도 계속 매달렸다.
▼ 제 정성이 부족하다는 말씀이군요. 한 일주일 쯤 집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면 될까요?
“물세례밖에 더 맞겠어요? 요즘 날씨가 좀 더우니 쿨하긴 하겠네요, 하하.”
▼ 선생님 전화번호를 알아내느라, 또 통화 연결되기까지 정말 고생 너무 많이 했습니다.
“알고 있어요. 얼마나 고생했는지. 최 기자가 접촉한 곳들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제가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연락처를 가르쳐주지 말라고 했어요.”
▼ 어쨌든 목소리를 직접 들은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언젠가 와인 한 잔 앞에 두고 친구처럼 이런저런 이야기 나눌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럴 나이도 됐고….”
▼ 부군인 박 교수께서 외부 노출을 말리십니까.
“우리 남편은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에요. 처음 만났을 때는 제가 가수라는 사실조차 몰랐죠. 약혼한 뒤 ‘결혼을 미뤄도 좋으니 음악은 계속하라’고 할 만큼 스케일이 큰 남자죠.”
1970년대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유학 중이던 박 교수는 1981년 가수 김추자와 처음 만났는데 그때까지도 그의 유명세를 모르고 있었다. 박 교수가 유학한 지역은 한국인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서로의 화끈함과 진지함에 반한 두 사람은 그해 비밀리에 약혼을 하고 명동성당에서 양측 가족들과 작곡가 신중현, 가수 박상규가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불후의 명곡 ‘님은 먼 곳에’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그래서 무대를 떠난 후 그녀가 가장 애정을 쏟는 대상인 딸 소식부터 물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 얘기를 묻는데 딸깍 전화를 끊어버릴 엄마가 있겠는가. 예상대로였다.
“외대를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에 학사 편입했어요. 거기에서도 장학생인데 요즘 교생실습을 나가 있어요. 참, 오늘 같이 밥 먹는 날이에요. 어려운 시험이 있다고 했는데 잘 치렀는지 몰라. 우린 금요일마다 운동을 같이 해요.”
딸과 따로 살고 있는 모양이다. 아닌 게아니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그의 집과 서울대는 꽤 먼 거리다. 일단 대화의 물꼬는 튼 것 같다.
   





1978년 김추자 재기 리사이틀 공연 때 찍은 사진. 1980년 1월 앨범으로 출시됐다.

▼ 선생님의 빅 히트곡인 ‘님은 먼 곳에’의 진짜 작사가가 누구인지를 두고 작사가 유호씨와 작곡가 신중현씨가 서로 자신이 작사했다고 주장하면서 현재 2심 소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1심에선 유씨가 승소). 선생님도 증언을 한 것으로 압니다만.
“신중현 선생님이 (악보에) 4B 미술연필 같은 것으로 뭔가를 썼다는 기억만 나네요. 유호 선생님의 노랫말 글자 수가 많아서 신 선생님이 ‘리모델링’을 한 것 같아요. 저는 신 선생님이 그걸 고치는 과정은 못 봤어요. 다 된 것만 봤지. 그러니 잘 모르죠 뭐. 우리는 노래만 잘 부르면 됐으니까요.”
요즘 젊은 층에겐 조관우의 리메이크 곡으로 더 유명한 ‘님은 먼 곳에’는 1970년 동양TV의 드라마 주제가로 만들어졌다. 연속극 작가는 유호씨였고 처음 이 곡을 부르기로 내정된 가수는 패티 김이었다. 그런데 녹음 당일 패티 김이 “이런 곡은 못 부르겠다”고 거절하면서 김추자가 급하게 대타로 선정됐다. 데뷔 앨범(1969년)에 수록된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로 각종 가요상을 휩쓸던 김추자는 이 곡으로 스타의 입지를 완전하게 굳혔다. 그는 당시 신중현이 이끌던 덩키스의 멤버로, 김추자의 히트곡 대부분은 신중현 작곡이다.
‘님은 먼 곳에’는 그 후 여러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됐지만, 가장 호응을 받고 있는 조관우조차 “김추자 선생님의 원곡을 따라갈 리메이크 곡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할 만큼 김추자의 음색은 흉내내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독특하다. 워낙 히트를 하자 “리듬이 내게 맞지 않다”고 거절했던 패티 김도 후일 이 노래를 불러 자신의 앨범에 끼워 넣었다
가사 중 특히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대목에서 ‘꿈도 주고’ 부분은 당시 최고의 섹시 스타였던 김추자의 터질 듯한 몸매와 겹쳐지며 ‘몸도 주고’로 야릇하게 개사돼 불렸다. 영화 ‘왕의 남자’를 만든 이준익 감독이 ‘달려라 허동구’ 후속 작으로 준비하고 있는 영화의 제목도 ‘님은 먼 곳에’다. 김추자의 데뷔 앨범에 들어 있는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도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1971년) 된 바 있다.
▼ 30년 넘게 사랑을 받고 있는 ‘님은 먼 곳에’가 거의 연습 없이 녹음됐다면서요.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 있었는데, 스튜디오에서 빨리 오라는 연락이 와서 1~2시간 연습하곤 그냥 녹음했지요. 일일연속극 첫 방영이 다음날이었는데 그 전날 노래를 녹음한 거예요. 오전 8시에 콜을 받고 운현궁 스튜디오에 가서 악보를 받은 뒤 11시에 연습과 녹음이 다 끝났으니까요.”
▼ 몇 시간 만에 어떻게 그런 노래가 나올 수 있습니까.
“‘빗속의 여인’ 앨범도 아침 10시에 모여서 11시쯤 점심 먹고 오후 2시에 다시 연습 들어가서 4~5시에 녹음을 다 마쳤는데요 뭘. 그 앨범에 20곡가량이 들어갔는데 그걸 2시간 만에 다 녹음했으니까요. 연습은 거의 못 했죠.”
▼ ‘님은 먼 곳에’를 리메이크한 가수가 많은데 누가 제일 마음에 듭니까.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각자 스타일이 다 다르니 어떻게 평을 하겠어요. 어떤 가수든지 곡을 받고 나면 자기 목소리가 허락하는 대로, 드는 느낌대로 부르니까 말입니다.”

판소리+솔+사이키델릭
김추자는 2000년대 들어 7080세대 음악의 르네상스 바람이 거세게 부는 와중에도 지금껏 TV 브라운관이나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다. 대형 가수로는 거의 유일하다. 김추자 음반을 누구보다 많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는 “이제 딱 두 사람 남았다. ‘그리운 사람끼리’ ‘목마와 숙녀’를 부른 박인희와 김추자다. 대중음악사적 관점에서 보면 김추자의 족적은 박인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은 관중을 압도하는 김추자의 현란한 춤사위와 섹시한 의상을 먼저 논하겠지만, 사실 그의 음악세계는 창법부터 30년을 앞서가고 있었다. 애절하고 구성지면서도 시원스레 탁 트였고, 어두운 듯하면서도 눈부시게 밝은 야누스 같은 창법은 당시 전위 음악의 장르였던 사이키델릭 음악에 흑인의 한(恨)이 배어나는 솔을 합친 것으로 평가된다. 최규성씨는 한을 내뱉는 듯 구성지면서 한편으론 탁 트인 김추자 노래법의 근원을 창이나 판소리, 민요와 같은 국악적인 면에서 찾는다.
   





1975년 대한극장 리사이틀 때의 김추자. 핫팬츠, 모자, 무릎 아래 리본 차림이다. 의상 설정이 놀랍다.

“김추자는 춘천여고 재학시절 ‘춘천 향토제’에 나가 ‘수심가’를 불러 3위에 입상했지요. 당시 배뱅잇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였으니 그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죠. 그런 국악적 소질이 신중현 사단의 사이키델릭 음악과 만나면서 김추자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녀가 1970년대에 민요 메들리 음반 몇 장을 낸 것도 그런 이력과 관계가 깊죠. 단조롭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묘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솔 사이키 가요’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습니다.”
김추자 본인의 설명은 이렇다.
“판소리나 창을 딱히 어디에서 배운 건 아니었어요. 어릴 때부터 웬만한 노래는 몇 번 들으면 그대로 따라 부를 수 있었어요. 그때 부른 노래가 ‘수심가’인지는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상을 받은 것은 맞습니다. 제가 워낙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국악에도 관심이 있었어요. 궁중무용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인 김천흥 선생의 초대로 탈춤공연을 한 적도 있죠.”
김추자가 데뷔한 1969년은 베트남전 파병 문제로 민심이 흉흉하고, 반전(反戰) 히피문화가 전세계를 풍미하던 시기.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사랑을 받은 것도 전쟁의 상처, 히피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에 이미 사이키델릭과 솔 음악을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한 김추자를 두고 문화평론가 이성욱은 “우리나라 가요사에서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 없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천부적 재능
사이키델릭과 솔은 21세기 들어 전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장르가 됐으니 김추자의 음악이 지금도 전혀 ‘촌스럽게’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든 가수는 목소리가 허락하는 대로, 드는 느낌대로 노래를 부른다”는 김추자의 말은 어떻게 보면 그 스스로 ‘천부적 재능을 지닌 가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김추자의 예술적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싹수’를 보였다. 1951년 춘천의 딸부잣집(5자매) 막내로 태어난 그는 춘천여중, 춘천여고를 거쳐 1969년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다. 활달한 성격에 운동, 노래, 무용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이던 그는 춘천문화방송 합창단과 무용연구소(무용학원), 노래학원(개나리학원) 등을 다니며 ‘끼’를 가다듬었다. 운동에도 소질을 보여 강원도 배드민턴 대표선수와 기계체조 선수로 활동했다.
고교 비평준화 시절, 춘천여고는 강원도 지역의 여학생 수재들이 모이던 곳. 김추자의 언니들도 사범대나 약대를 졸업했을 만큼 공부를 잘했다. 공부, 노래, 춤, 운동까지 못하는 게 없고 미모에다 춘천여고 응원단장까지 했으니 춘천시내 남자 고등학교에서 그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춘천고등학교 미술선생님이 모델이 돼달라고 해서 몇 차례 간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남학생들이 유리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추자 왔다’며 환호해 부끄러워 혼났다”고 한다.
▼ 고교시절부터 가수의 꿈을 가지고 있었군요. 이런저런 준비를 많이 한 것 같네요.
“처음엔 미대에 가려고 했지요. 대학교수로부터 데생과 구상을 중심으로 레슨도 받고 실습도 열심히 했는데, 실기시험은 합격했지만 필기에서 떨어졌어요. 당시 동국대가 2차라, 그래도 예술 분야를 선택한다는 게 연극영화과였어요.”
▼ 가수가 된 건 어떤 계기였습니까. 신중현 사단에는 어떤 인연으로 들어갔고요. 대학교 노래자랑에서 1등을 한 게 계기라는 얘기도 있던데요.
“신 선생님 매니저이던 맹승호씨가 제 형부와 잘 아는 사이였는데, 그분 소개로 가게 됐어요. 그때 신 선생님은 최고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대형 가수들과 작업하느라 매우 바빴어요. 그냥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는데 노래를 시키길래 불렀죠. 그 자리에선 별말씀이 없었는데 며칠 후 ‘늦기 전에’라는 곡을 툭 던져주셨어요. 기회가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죠. 선생님이 저를 무척 잘 본 모양이에요.”
결국 ‘늦기 전에’는 그의 데뷔곡이 됐다.
▼ 신중현 사단에서 노래 배우던 얘기 좀 해주세요.
“신 선생님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같이 호흡을 맞춰 노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워 나간 거지요. 제 노래는 몸에서 나와요. 머리에서 생각해서 나오는 게 아니고. 느낌 그대로이죠. 사이키델릭이나 솔 창법도 신 선생님에게 배웠다기보다는 생래적인 것으로 봐야겠죠.”
   





1986년 영국 버크셔 주의 윈저성을 방문한 김추자.(좌) 1973년 하와이 공연 당시.(우) 1984년 딸과 함께.(작은사진)

▼ 천부적 소질을 타고났다고밖에 볼 수 없군요.
“아버지가 창도 잘하시고 예술방면에 관심이 많으셔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공부와 늦은 귀가에는 엄하셨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남다른 애정을 갖고 지원하셨어요.”

“감옥살이가 따로 없어요”
때로는 ‘솔직한 아부’가 상대를 감동시키는 법. 이번에는 기자의 경험담으로 이야기의 끈을 이어가기로 작정했다. 그의 어조는 딱 부러졌지만, 노력하는 자에겐 매정하게 대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인터뷰가 계속됐다.
▼ 어제 후배들과 술 한잔하면서 ‘님은 먼 곳에’와 ‘봄비’를 불렀습니다.
“오! 그래요. 스케일이 아주 크군요.”
▼ 요즘도 비오는 날이면 ‘님은 먼 곳에’ ‘봄비’ ‘꽃잎’을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곤 합니다. 아마 제 술친구들은 ‘내가 김추자와 얘기를 했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 같군요. 정 저를 만나기 싫으면 전화로라도 인터뷰를 하시죠.
“그런 분들도 있었어요. 문화방송 보도국인가에서 5분 뉴스에 잠깐만 녹음을 해달라고 하길래 안 된다고 했죠. 전화 인터뷰도 마찬가지죠. (언론 때문에) 감옥살이가 따로 없어요. 입도 감옥살이, 몸도 감옥살이.”
▼ 선생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저는 주로 술을 마시면서 듣는데요.
“그렇더라고요. 대개 내성적이고 섬세하고 그러더라고요. 속도 여리고 그런 경향이 있죠.”
19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닌 기자는 ‘금지곡’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김추자의 노래를 좋아했다. 운동권 학생들이 김추자의 노래를 널리 좋아했던 것은 그의 저항적이고 자유로운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30대 중반을 넘어서자 김추자의 음악은 7080세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그 무엇인가가 돼 있었다.
▼ 인터넷에 있는 선생님의 팬 카페에도 가입했는데, 팬들이 선생님에게 정기모임에 꼭 한번 나와달랍니다.
“알아요. 회원분들이 저를 얼마나 아끼는지. 늘 고맙지요. 저도 잠깐씩 들어가 보곤 하는데, 제가 닉네임을 써서 들어가는데도 귀신같이 다 알아요. 카페 회원 중에는 우리집 앞을 지나다니면서 지켜보는지, 정원에 목련이 폈다 뭐가 어떻다 아주 유리문 들여다보듯, 손금 들여다보듯 하는 분들도 있어요.”
▼ 카페 회원들을 취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 딸아이의 고교시절 담임선생님도 거기 가입돼 있어요. 그 선생님이 처음엔 제가 누구인지 몰랐죠. 아무개 엄마로만 알았지. 나중엔 이런저런 것을 다 상의할 만큼 친해졌지만 제가 김추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너무 영광’이라고 하더라고요.”
지난해 겨울 그는 다음 카페의 김추자 팬 모임인 ‘김추자 forever(cafe.daum. net/kimchooja)’에 자신의 옛 사진들을 공개해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나같이 언론매체에서 보지 못한 개인적인 사진들이었다. 카페지기 남종근(53)씨는 “2004년 4월 정기모임을 할 때 김추자씨는 오지 않고 남편인 박 교수가 꽃과 와인, 케이크, 카드 메시지를 들고 왔다”며 “처음에는 퀵 서비스 직원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박 교수였다”고 했다. 앞에서 언급한 딸의 담임선생님도 이 카페 운영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네이버에도 김추자의 팬 카페(cafe. naver.com/chooja)가 있다. 네이버 팬 카페는 다음 카페와 달리 김추자의 전성기를 직접 보지 못한 30대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곳으로 음악적 색채가 짙다. 이곳에는 전문 뮤지션도 많이 속해 있다. 카페지기 김모씨는 “지난해 모임에 김추자 선생이 와인 7병과 카드를 보내왔다. 회원들 중에는 처음엔 신중현의 음악에 심취하다 김추자의 존재를 발견하고 거기에 푹 빠진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카페 회원들은 “김추자 선생이 다시 음반을 낸다면 젊은이들에게도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녀의 음악은 너무나 신선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30년 세월이 흘렀는데 “신선하다”니.
   




‘70년대의 효리’

1976년 미스박테일러 패션쇼에서.

▼ 요즘 젊은 세대들도 김추자 선생님의 노래, 춤, 의상 등 모든 이미지가 친숙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냥 좋으니까 그렇겠지, 하하하. 내 노래가 왜 좋은가 하면…. 다른 좋은 가수도 많지만 순수함과 세련됨의 만남이라고나 할까. 화장을 짙게 하고 명품을 입어야 꼭 세련된 건 아니잖아요. 화장을 안 하고 자연스럽게, 옷도 그냥 아무렇게나 입어도 어울리는 것, 그러면서도 멋이 풍기는 것, 그런 게 세련된 거지. 난 뭘 바르고 그러지 않았거든요. 음악도 그래야 제대로 나오지요.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음악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지요.”
기자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1970년대 중후반, 교실에서, 또는 소풍 가서 벌어지는 장기자랑의 주메뉴는 노래와 춤이었다. 열 중 아홉은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 아니면 김추자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불렀다. 김추자의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은 그의 춤도 따라 췄다. 007 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손 모양과 비슷한 손가락 춤(이은하의 ‘찌르기 디스코’의 원조)이 그것이다. 골반을 묘하게 뒤흔들며 추는 춤은 내 아버지 세대에게는 수컷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었는지 몰라도 꼬맹이들에겐 또래 속 인기관리 수단이었다. 동네 할아버지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세상 말세’라며 혀를 찼다.
어깨와 손, 골반이 따로 또 같이 움직이며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김추자의 춤은 그에게 ‘국내 최초의 댄스 가수’라는 별칭을 안겼다. 관능적인 골반춤은 뭇 남성의 가슴을 ‘폭파’시켰다. 그래서 붙은 김추자의 별명이 ‘다이너마이트’다. 요즘 안무가들은 격렬하고 과격한 그의 춤 동작을 조금만 다듬으면 지금 이효리가 추는 춤과 흡사해진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한 방송사가 대역을 시켜 김추자의 춤을 이효리의 ‘애니클럽’에 맞춰 다시 추게 해봤는데 전혀 무리 없이 잘 맞아 들어갔다.
과거에도 이금희나 펄시스터즈와 같이 노래를 부를 때 춤을 가미한 가수들이 있었지만 김추자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른 이들의 것은 단지 율동일 뿐 노래와 하나 된 춤이 아니었다. 김추자에게 춤과 노래는 분리된 그 무엇이 아니다. 그에게 노래를 가르쳤던 작곡가 신중현은 “김추자는 움직이지 않으면 목소리가 안 나온다. 김추자는 몸에서 노래가 나온다. 김추자의 춤은 ‘소리를 내기 위한 율동’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 한 가지, 춘천여고 시절 응원단장을 지냈고 강원도를 대표하는 배드민턴, 기계체조 선수였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상은 또 어떤가. 앨범 재킷에 나온 의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최근 유행 패션이 망라돼 있다. 몸이 터져라 꽉 조여 상대적으로 엉덩이가 강조된 나팔바지, 목에 두른 머플러, 핫팬츠, 민소매 윗옷에 짧은 치마, 딱 붙는 가죽옷에 네크라인이 깊게 파인 윗도리, 골반바지…. 2007년의 스타일리스트들은 1970년대의 김추자 패션을 “이탈리아 컬렉션에서 금방 나온 디자인이라고 할 만큼 카리스마를 풍긴다”며 혀를 내두른다. 도대체 김추자와 관련해서는 ‘전위’가 아닌 것이 없다.

간첩說의 진상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김추자는 이른바 그 전위적인 춤 동작 때문에 난데 없는 간첩설(說)에 휘말리기도 했다. ‘거짓말이야’(1971년)를 부를 때 선보인 특유의 손짓이 ‘북한과의 수신호’라며 그가 간첩이라는 소문이 불거진 것이다. ‘거짓말이야’라는 제목 자체가 유신정권에 대한 은유적 비판을 담고 있던 터에 이런저런 이유로 스케줄에 줄줄이 펑크가 나면서 ‘간첩처럼 이사를 자주 다닌다’는 헛소문까지 퍼졌다. 그의 집에서 간첩들이 사용하는 난수표가 발견됐다는 루머도 돌았다. 그런데 이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었다.
▼ 어쩌다 간첩으로까지 몰리게 됐습니까.
“저는 음악이 주어지면 그때마다 동작이 저절로 나와 거기에 맞추거든요. 그뿐이죠. 그런데 그 무렵 청와대 비서실에서 저더러 청와대에 들어오라고 했지만 결국 안 들어갔거든요. 왜 오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청와대에서 부른 것과 간첩으로 몰린 사건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팍팍 올라가던 저를 꺾어놓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죠. 복합적인 이유로 저를 매장시키려 한 것이겠죠.”
▼ 청와대 제의를 거절해서 이른바 괘씸죄에 걸렸다는 뜻인가요.
“그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시절이었어요. 저뿐만이 아니고 많은 가수가 중앙정보부 파티에 불려갔었죠. 1971~72년 언저리쯤입니다. 재벌회장이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나간 적도 있고 ‘저무는 바닷가’ 노래를 촬영하러 바닷가 인근의 컨트리클럽에 갔을 때는 녹화 도중에 모 언론사 사장이 밥을 먹자고 해서 불려간 적도 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블랙리스트 올라

1971년의 김추자.

▼ 2000년 각 신문에 다시 음반을 내고 복귀한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결국 안 나왔으니 오보(誤報)가 되고 말았네요.
“만회해야지요 뭐. 그때 (음반을 내기 위해) 작곡가도 자주 만나고 재즈발레도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몰라요. 개인 레슨을 받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출퇴근을 했지요. 헬스장에 가서 매일같이 몸매를 가다듬고 그랬는데….”
▼ 그런데 왜 음반 작업이 중단됐습니까.
“음반을 내고 공연도 하기로 기획자와 계약을 했는데, 그 사람은 음반보다는 공연에만 관심이 있었던 거죠. 그게 돈이 되니까. 좀 지켜보니 음반은 내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려는 게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때 저는 음반 취입에 비중을 더 두고 있었거든요. 지금처럼 음반시장이 어렵진 않았으니까.
약속한 녹음 날짜는 다가오는데 데모 테이프도 가져오지 않고 시간만 끌기에 계약이 자연스럽게 깨졌는데, 글쎄 그 기획자가 나 모르게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을 낸 거예요. 음반을 내기 위해 각종 비용이 들었다며 그걸 나보고 물래요. 계약서에도 분명 쌍방간에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자동으로 파기한다고 돼 있었는데. 결국 제가 이겼지만, 소송이 2년을 넘게 끌면서 소금에 절어 시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속앓이를 좀 했죠.
그뿐이 아니에요.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러 남편이 세종문화회관엘 갔는데, 글쎄 제가 그쪽 대관(貸館) 부서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더라고요. 음반을 내기로 한 기획자를 비롯해서 제가 한 번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공연을 한다며 대관신청을 마구 해놓은 거예요. 그것도 골든타임에. 저는 동의하기는커녕 전혀 알지도 못한 일이었으니 당연히 공연은 펑크가 났겠죠. 영문을 모르는 회관측에선 저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은 거고요.”
▼ 음반을 내겠다고 했으니 곡을 주려는 작곡가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
“그랬죠. 작곡가가 대여섯 명 있었는데 그중 2~3명만 곡을 잘 뽑아냈으면 됐는데…. 이름이 있든 없든 말입니다. 마음을 많이 썼는데….”

김추자 LP음반, 최고 호가 300만원
▼ 어떤 음반을 낼 계획이었나요.
“새로운 곡은 몇 곡만 하고 내 히트곡을 다시 부를 계획이었어요. ‘빗속의 여인’ ‘비련’ ‘마른 잎’ 같은 노래들 말이에요. 옛날엔 신중현 선생님 밴드에 맞춰서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밴드에 맞춰서 새롭게 하면 또 다른 느낌의 노래가 나올 테니까.”
중고 LP음반 경매시장에서 김추자의 중 희소가치가 있는 음반은 30만원에서 300만원을 호가한다. 그는 1969년 데뷔 앨범 발표 이후 2년 동안 무려 12장의 음반을 발매했다. 아마 국내 가수 중 해적판 음반이 가장 많이 나온 이도 김추자일 것이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기에 이러저러한 이유로 몇 개월에서 몇 년씩 공식적인 가수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에 앨범업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판을 내고 싶어했다. 해적판도 보관상태만 좋으면 경매시장에선 비싼 값으로 낙찰되고 있다.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는 “1971년 가요음반사상 최초로 외국으로 수출한 음반이 탄생했는데, 1호 음반의 주인공 역시 김추자였다. 영국의 세계적인 회사에서 리매스터링하고 재킷 디자인까지 제작해 외국 원판과 동일한 규격의 녹음 수준을 뽐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김추자 음반을 40여 장 소장하고 있지만 제일 비싼 것은 김추자가 철모를 쓰고 총을 잡고 있는 재킷 사진이 실린 음반이다. 그건 내게 없는데 최근 경매시장에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김추자가 전부 몇 장의 앨범을 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했다.
김추자의 음반 재킷 중에도 쇼킹한 ‘작품’이 적지 않다. 최씨가 소유한 음반 중에는 남성 성기와 비슷하게 생긴 그림을 재킷 오른쪽 윗부분에 그려넣은 것과 성적으로 절정에 다다른 여성의 표정을 담았다고 해 ‘섹스신 음반’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다.
   





1974년 나온 김추자의 민요 메들리 음반(위쪽)과 남근과 비슷한 그림이 삽입돼 경매시장에서 값이 뛰고 있는 음반.

▼ 2000년에 음반을 만들기 위해 몸매를 가다듬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관리를 하고 있습니까.
“운동은 필수죠. 안 하면 안 되죠.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죠. 어쩌다 천지가 개벽을 한다면 모를까 운동은 계속합니다. 골프도 하고, 헬스장 러닝머신에 오를 때도 있고, 운동장에 가서 흙을 밟으며 걷기도 하고 그래요. 저는 웬만해선 차를 타고 다니지 않습니다.”
▼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요.
“모자를 쓰고 옷도 구호물자 같은 것을 입고 다닙니다. 얼마 전에도 예술의전당에 가서 ‘우모자’라는 뮤지컬을 봤는데 사람들이 전혀 못 알아보더라고요. 송승환씨가 저와 함께 하자고 했던 바로 그 뮤지컬 말입니다.”
▼ 뮤지컬 제의가 들어왔다고요?
“어느 날 이현승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송승환씨가 저의 음악인생을 주제로 ‘맘마미아’ 같은 뮤지컬을 만들고 싶어한다나요. 이현승 감독이 제 인생을 시나리오로 옮겼거든요. 그런데 그걸 달라고 하더래요. 그래서 제가 ‘그걸 파세요’ 했더니 이 감독은 ‘그걸 어떻게 팔아요’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일단 송승환씨측으로부터 기획서를 받아서 읽어보니까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초상권을 무제한으로 쓰겠다는 조항이 있더라고요. 가령 찻잔 같은 데에도 내 사진을 넣고 해서 기념품을 만들어 팔 모양이었어요. 무제한으로 쓰는 것은 문제가 있지요. 그때그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써도 되지만, 사진을 찍다보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을 텐데. 그렇게 예민하고 심각한 부분을 ‘무한정’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쓰게 한다는 게 꺼림칙했습니다. 그래서 보류했지요. 아이템은 많고 좋은데….”

신비주의는 연예인의 미덕?
▼ 이현승 감독의 시나리오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습니까.
“저의 음악인생을 중심으로 내게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등등.”
▼ 시나리오 작업이 끝났다면 영화는 언제 만나볼 수 있나요.
“제 인생 이야기이니까 적합한 대역 배우를 구해야 하고, 제 노래도 불러야겠지요. 시대극이라 제작자의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당시의 자동차, 건물 등을 재현하려면 돈 들어갈 일이 많을 테니까요.”
이현승 감독과 인터뷰가 이뤄지지 않아 김추자 영화 제작에 대한 뒷이야기만 귀동냥을 하게 됐는데, 아직 투자자를 찾지 못해 충무로에서는 ‘물 건너간 것 아닌가’ 하는 추측만 무성하다는 소식이었다. 김추자의 팬들을 안타깝게 하는 소식이다.
▼ 인터뷰를 거절하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게 언제가 다시 무대에 설 때를 위해 자신을 신비화하려는 의도 때문은 아닌가요.
“예로부터 신비주의는 연예인의 미덕이죠. 그러느라고 다들 썩지 썩어(웃음). 농담이고요. 그런 심리도 있죠. 하지만 제가 제 관리를 못해서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제 관리를 하고 있거든요. 정말 제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지나온 세월을 생각해보면 저도 참 독한 사람이에요. 인터뷰도 영원히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어떤 작품, 뭔가 건수를 갖고 나서겠다는 겁니다.”
김추자는 한 번도 은퇴선언을 하지 않은 ‘현역가수’다. 다만 공백기가 길어졌을 따름이다. 그는, 가수는 노래를 부르면서 대중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는 듯했다. 그는 “판사는 판결로, 검사는 기소장으로, 기자는 기사로, 배우는 연기로, 가수는 노래로 말해야 한다”고 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본업은 제쳐놓고 입으로 자신을 돋보이려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존심은 대단하군요.
“아니, 자존심이 대단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게 김추자입니다.”
김추자의 자존심은 당대에도 유명했다.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출연 스케줄 펑크와 잠적을 남발해 ‘구름 같은 김추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는데, 1971년 초 부산의 한 공연 때는 피날레 가수를 누가 할 것인지를 두고 김세레나와 ‘자존심 대결’을 벌이다 공연장에서 그대로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이 일로 가요계에선 처음으로 가수분과위원회로부터 3개월 가수자격 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오해와 진실


김추자는 이 사건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펑크’라고 표현하는데, 제 처지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계속됐기 때문에 공연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던 것뿐이에요. 부산에서의 리사이틀은 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공연이었습니다. 당시 포스터를 보면 제가 제일 크게 나와 있고 다른 사람들은 게스트 형식으로 참가했어요. 당연히 제가 피날레 가수가 돼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로잡아달라고 요구해도 안 되기에 그런거죠. 자격정지의 이유는 김세레나씨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워 가수의 품위를 손상했다는 것인데 그건 완전한 오보였죠. 홧김에 제 화장품 박스를 걷어찬 게 전부예요.”
그해 12월에는 더욱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동료 가수이자 전 매니저였던 S씨가 깨진 소주병을 김추자의 얼굴에 휘둘러 100바늘이 넘게 꿰매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성형수술을 6번이나 해야 했을 만큼 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나 사건 며칠 후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붕대를 친친 감은 채 공연장에 나가 “오늘은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팬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대에 섰다”고 말해 무대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갔다.
▼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그 사람과 저는 매니저와 가수로서의 공적인 관계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저보고 결혼을 해달래요. 그래서 거절했더니 그 난리가 난 겁니다. 그 사람은 해병대 출신에다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를 지냈는데, 당시 조직폭력배가 분장실과 공연장에 마구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여서 보디가드 겸 매니저로 썼는데 어이없게 됐죠.”
▼ 그 사람이 김 선생님 때문에 모 가수와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죠.
“명보극장 앞에 있는 오나시스 다방에서 그랬는데, 자기들끼리 싸운 사정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 공연 펑크를 낸 적이 자주 있었지요. 잠적했다는 소문도 나고.
“당시 공연을 기획한 사람들 중에는 폭력배 비슷한 사람이 많았어요. 지방공연을 자주 다녔는데 개런티를 안 주는 사람도 많았죠. 1회 공연 끝나면 ‘2회 공연 끝나고 주겠다’는 식으로. 그래서 2회 공연 마치고도 개런티를 못 받아 보따리를 싸 올라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죠. ‘잠적’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왔고. 왜 가수가 그런 눈치를 봐야 하나요. 전 그 사람들이 아무리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해도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

1971년 국내 최초로 해외 수출된 김추자 골든히트앨범(오른쪽). 왼쪽은 골반바지를 입은 김추자의 1973년 음반.

그는 시련을 겪어도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가수자격이 정지됐을 때도 그랬지만 ‘소주병 난자 사건’ 1년 후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고 해외공연을 다니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975년 8월, 광복 30주년 기념 예술제에 참가한 그에게 언론은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해 12월 그는 ‘가요계 정화운동’이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일명 ‘대마초 가수 사건’에 휘말려 한동안 암흑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신중현 선생님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다 목소리가 안 나와서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션 중에 베이스기타를 치던 사람이 대마초를 구해와 ‘이걸 피우면 목이 터진다’고 했어요. 저는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목에 좋다고 계속 권하기에 한 모금 빨았는데 기침이 나와서 바로 뱉어 버렸습니다. 사레가 들려 도저히 피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후 지금껏 담배 한 개비 피운 적이 없어요. 대마초를 담아둔 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검찰 수색에서 그게 나왔지요. 통에는 곰팡이가 슬어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한번 쳐다본 적도 없으니까요. 제가 대마초를 피운 적이 없다는 사실은 검사도 잘 알고 있었는데….”
그는 3년 후 다시 한 번 재기 리사이틀에 나섰다. 1978년 대한극장에서 있은 공연은 뭇 남성에게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엄청난 관객이 모여든 가운데 열린 당시 공연에서 얼마나 열심히 노래를 불렀는지 드레스가 흘러내려 가슴이 다 드러난 줄도 몰랐다. 그만큼 몰입과 열정의 무대였다. “한번 어디에 빠지면 다른 것은 모른다”는 김추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김추자 LP를 가장 많이 소장한 것으로 알려진 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씨.

▼ 김 선생님에 대해 공부를 할수록, 이야기를 할수록 참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이 있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하지만 마음먹으면 정말 열심히 하죠. 소주병 난자 사건 때도 그랬죠. 코가 잘리고, 눈이 벌어지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 뒤집어진 상황에서도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보통 여자 같으면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얼굴이 이렇게 됐으니 난 이제 죽었구나 하고 약이라도 먹고 죽을 생각을 했겠죠. 그런데 저는 어떻게 하면 성형을 잘 해서, 또 몸매를 더 예쁘게 해서 다음 무대에 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죠.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할까 하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면 모든 것에서 집니다.”
▼ 은퇴한 적이 없으니 음반은 다시 내야죠.
“당연하죠. 그런데 요즘 음반시장이 너무 죽었어요. 사실 지난해 10월부터 음반을 내려고 ‘김추자·컴퍼니’라는 기획사를 설립하고 작곡가를 만나러 다녔어요. 사업자등록도 제 이름으로 했어요. 지난 10년 넘게 많은 음악을 들어온 덕에 직접 음반 제작을 하려고 했던 거죠. 내게 맞는 작곡가를 찾으려고 이런저런 사람을 만났는데, 음반시장 상황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저는 그 사람의 작품을 들으면 대충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런데 대다수의 작곡가가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의욕 상실이라고나 할까. 작곡을 해서 음반이 팔려야 먹고사는데 그게 안 되니까.
음반을 내려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저를 참 많이들 보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면에서 팬들에게 빚이 많아요. 1982년에 신중현 선생님에게 받은 곡이 열 곡 정도 있습니다. 신 선생님이 젊을 때죠. 그 데모테이프와 악보가 아직 있어요.”

“지금 본업은 주부”
▼ 폭발적인 가창력과 충격적인 춤사위로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로서 다시 무대에 서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참아왔습니까.
“저는 뭐든 한 가지를 하면 거기에 미치는 경향이 있어요. 두 가지를 같이 잘 하진 못하죠. 살림을 하다보니까 거기에 푹 빠졌죠. 친정어머니가 예전에 큰살림을 하셨어요. 2년 전 병원으로 모시기 전까지는 함께 살았습니다.”
▼ 시어머니도 아닌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게 흔한 일은 아닌데요.
“제가 어머니한테 잘하니까 제 딸도 제게 잘하는 것 같아요. 남편도 옹졸하지 않고 따지지 않는 스타일이고. 배웠다는 사람이 그런 것쯤 이해 못 하면 안 되지요. 그렇지 않나요?”
▼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 말뚝에도 절한다’잖아요.
“우리 남편은 저보고 속아서 결혼했다고 말하곤 해요. 처음에는 외모만 보고 성격도 와일드하고 조금 난(亂)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니거든요. 무슨 일, 예를 들어 집을 지을 때도 미장일, 벽돌 쌓는 일, 관공서 일 이런 것들도 제가 다 시키고 나서서 했거든요. 남편은 어떻게 그렇게 신이 나서 일하느냐고 의아해했죠. 아마 제가 집에서도 노래를 부를 때처럼 하고 있을 줄 알았나봐요. 내숭도 떨고, 애교도 부리고, 좀 야한 쪽으로 기대했겠죠.”
▼ 가수 김추자가 살림을 살고 있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됩니다.
“저는 그게 제 본업인 것 같아요. 부엌일이나 세탁일 모두 날래요. 빨래도 어머니가 하던 방식으로 삶고 방망이질하고 그래요. 밀린 빨래 세탁기 돌려서 헹구고 그러지 않아요. 푹푹 삶아서 두드려야 직성이 풀리지. 지금도 그런 도구들 다 갖춰놓고 살아요. 삶는 들통도 크기마다 다 있죠. 저는 아날로그 식입니다. 딸아이는 저더러 왜 이렇게 사냐, 조선시대 여자냐, 엄마가 가수 맞냐고 묻지요. 거울도 안 보고 양말도 아무렇게나 신고 하니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다고 해요.”

‘인간 김추자’
▼ 늘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건 아니죠. 예쁘게 차리고 나가면 백화점 언니들이 우리 모녀가 자매인 줄 알아요. ‘언니 참 이쁘다’는 말을 들으면 딸이 그러죠, ‘물건 팔려고 저러는 거야’라고. 하지만 주인들은 한사코 그럽니다. 진짜 언니처럼 보인다고. 상황이 그 지경쯤 되면 딸애가 이래요. ‘엄마, 이제 대충 입고 다녀 그럼’.”
▼ ‘인간 김추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다 얘기했잖아요. 인간 김추자는 된장, 고추장 담그는 데 명수고 젓갈도 잘 알고 김치도 잘 담그며 이 세상에 지배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존재. 다만 자연만이 김추자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자연을 노래한 것 들어보세요. 거기에 김추자가 있어요.”
전화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사진을 좀 찍게 해달라고 넌지시 말했다. 팍 튕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솔직하게 현재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며 양해를 구했다.
“제가 기자들이 찾아오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수술하러 갔다, 병원 갔다…이렇게 하면 더 이상 말을 안 하거든요. 호텔에서 디너쇼 하자고 전화 오면 얼굴 수술했다고 거절해요. 이런 사실을 알면 사람들이 얼마나 저를 미워할까요. 그런데 지금은 진짜로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상황이에요. 지난해 말부터 얼굴을 조금씩 손보고 있거든요. 저도 여자이니까 이해를 좀 해주세요.”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 지난해 말 그를 만난 한 취재원은 “그녀가 이번에는 진짜 수술을 한 게 맞다”고 확인해줬다. 전화 인터뷰를 한 며칠 후 그녀의 딸에게서 e-메일이 왔다. 개인적으로 찍은 사진이 8장이나 들어 있었다. 김추자 선생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씀을 전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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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여 서양에서 벗어나라
서양사학회 50주년 기념 학술대회
 
 
한겨레 강성만 기자
 






최갑수 교수 ‘한국 현대사 연구 개입’ 주장

“서양을 운위하는 것으로 서양사의 존재성이 인정받는 시대는 지났다. (중략) 아예 한국 현대사 연구에 직접 개입”하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

올해로 한국서양사학회가 꾸려진 지 50년이 된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5~6일 한국서양사학회 주최로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및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리는 학회 창립 5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에서의 서양사연구, 근대성의 인식과 유럽중심주의의 극복’에 발표한 논문 ‘한국의 서양사학과 근대성의 인식’에서 통합적인 역사상 구축과 이에 대한 서양사학계의 구실을 강조했다.

최 교수가 보기에 지난 50년 국내 서양사학은 ‘근대주의’의 한 표현이었다. “근대화를 서구화와 동일시해 온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암묵적 합의” 때문에 서양사 연구자들은 단순히 서양의 역사적 경험이나 역사 이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근대성의 핵심 이념을 ‘발전’으로 본 국내 서양사 연구자들은 “(근대성이) 우리에게 제국주의로 다가온 점이나 (근대성의) ‘인권 혁명’이 예속을 해외로 수출하는 과정을 수반했음을 명쾌하게 짚어내지 못했다”고 최 교수는 지적했다.

이런 ‘인식지평’은 해방 직후 한국 역사학이 일본 선례를 따라 (한)국사-동양사-서양사로 삼분돼 출범한 것과 잘 맞아 떨어진다. 서구를 특화시켜 주는 동시에 역사학 내부에 칸막이를 만들어 장기적으로 통합적인 역사상 구축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국내 서양사학의 선구자들을 일본이 ‘공급’했다면, 이를 독립적인 분과 학문으로 키워낸 ‘원동력’은 미국이었다. 1차대전 이후 미국 대학에 국민윤리과목으로 도입된 ‘문화사’는 해방 직후부터 각 대학 교과과정에 예외없이 포함됐다. 서양사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이 과목은 유럽이 이룩한 근대성의 밝은 면만을 주로 부각시켰다. 친서방적인 태도를 길러준 것이다.

서양은 이제 우리의 미래가 아니다. ‘근대화’에서 ‘선진화’로 바뀐 구호가 이를 입증한다. 그렇다면 서양사학의 정체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최 교수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서양사 연구와 교육에 적극 반영하려는 노력”을 넘어서, 한국 현대사 연구에 직접 개입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최근 몇몇 서양사학자들이 연구중인 ‘과거청산과 집단기억의 역사학’ ‘대중독재론’ ‘영국을 통한 한국과 일본의 근대성 비교’ 등의 주제가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그는 서양사학이 역사분쟁을 헤치고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공존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제시했다. 서구 중심의 세계사에서 비주체화의 길을 강요당했던 동아시아 역사세계의 공통의 구조를 발견해봄으로써 자국과 지역사(동아시아사) 사이의 괴리를 뛰어넘어 소통을 꾀하는 것이 온당해보인다고 최 교수는 밝혔다. (02)820-5167.

강성만 기자




 
기사등록 : 2007-07-04 오후 05:5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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