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야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스칼렛 오하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마지막에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진짜? 그건 떠오르는 사람에게만 떠오르는 것 아닐까? 내일이 지나고 모레가 지나도 떠오르리라 믿었던 태양이 안 떠오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지? 그건 자신이 태양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태양이 되기 위해서는 밤길을 택해야만 한다. 낮의 태양과는 결코 어울릴 수도, 만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왜 <백야행>에서는 하얀 밤을 걸었었는데 이 작품은 그냥 <환야>일까? 그건 이제 걸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아이는 태어나고 걸음마를 배웠다. 한번 걸음마를 배우면 평생 불의의 일이 닥치지 않는 한 걷게 되어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제 행은 불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얗고 순수했던 시절은 지났기 때문이다. 이제 만들어야 하는 밤은 환상적이어야 한다. 환상이라는 몽환적이고 절대 빠져 나갈 수 없는 그런 밤을...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다. 마사야는 그날 자신의 운명을 바꿨다. 스스로의 손으로. 누구에게도 동정 받을 이유가 없다. 자신의 실수를 지켜주고 함께 걷겠다고 미후유는 제안한다. 낮에는 안 되지만 밤에는 언제나 함께 할 수 있다고. 이미 우리는 낮은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그는 미후유의 수족처럼 움직인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 전혀 다른 내용의 밤이다. <백야행>과 이 작품은. <백야행>은 아스라한 아픔이 있어 좋았고 이 작품은 그 작품에서의 센치멘탈한 면을 과감히 삭제한 면이 좋았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백야행>의 후속작으로도, 아니면 독자적인 <백야행>과는 다른 작품으로도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후속작이라는 생각을 하고 싶지만 다르게 봐도 상관없다. 그저 밤 시리즈라고 얘기해도 좋을 것 같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夜>시리즈...


또 진화하는 팜므파탈의 이야기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몇 번의 변태의 과정을 거쳐 화려하게 팜므파탈로 변신하는 여자의 이야기로.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듯이 불완전한 팜므파탈에서 완전한 팜므파탈로 환상의 밤을 날아다니는 불나방이 된 여자의 이야기. 그 여자는 <백야행>속의 여자이기도 하고 어쩌면 아니기도 하다. 팜므파탈은 언제나 자신의 변신 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읽어보면 아마도 같게도, 또는 다르게도 읽을 수 있다고 느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건 <신데렐라의 함정>과 같이 독자들에게 내기를 걸어오는 작가의 의도이므로.


그런데 언제나 그 여자는 독자들의 시각에서 약간 비켜나 있다. 독자들이 쫓는 것은 여자지만 사실 따라가는 것은 남자의 등 뒤다. 그녀는 언제나 남자의 등 뒤를 방패로 삼는다. 누군가 방아쇠를 당긴다 해도 총은 남자가 맞을 수 있게. 자신만은 그 누구의 시선에서도 안전하게. 그것이 독자의 시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작가는 독자의 동정의 싹을 잘라 버렸다. 그 누구에게도 동정 받는 것은 팜므파탈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녀가 이용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배는 떠났다. 과연 그녀는 이제 완전하게 높이 올라간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그녀에게는 몇 번의 고치 안으로 숨어들어야 하는, 그리고 그때마다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다운 독을 품고 변신할 일이 남은 것인가? 언제 그녀는 알게 될까? 그것이 한낱 바람과 함께 사라질 환상이었다는 것을. 자신이 가진 것은 결국 모래가 되어 산산이 부서지고 말 거라는 걸...

그날이 오면 큰 소리로 울리며 깨져 주기 바란다. 곤두박질도 아주 세게. 누군가의 가슴 속에 ‘앗’하는 회한의 숨소리가 남을 수 있게... 다음 작품의 제목부터 기대가 된다. 다음엔 어떤 밤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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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9-26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히히. 실은 어제 저도 다 읽고 짤막하게 리뷰를 썼는데, 제가 먼저 올리면 작품에 실례될 듯해서, 물만두 님의 리뷰가 올라오길 기다렸어요. 그러길 잘했네요.

물만두 2006-09-26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아유, 나무님이 더 잘 쓰시잖아요~

sayonara 2006-10-02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늘 독자를 흥분시키는군요. 물만두님의 리뷰를 보니까 더욱... ㅎ
아직 '용의자X의 헌신"도 못읽었는데..

물만두 2006-10-02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요나라님 서평 기대하고 있을께요^^

sayonara 2007-06-02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읽어보려 하는데... 과연 '백야행'을 안 읽은 것이 독이 될지, 약이 될지... -ㅗ-
서재2 가보셨나요? "다른 포털의 블로그와 다른 게 모야?!" -_-+

물만두 2007-09-22 10:45   좋아요 1 | URL
음, 님의 글을 이제 발견...
사요나라님 돌아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