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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ㅣ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6
이사카 코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있을 수 있는 얘긴데 좀처럼 만나기 힘든 일상들이 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데, 하고나면 누군가는 무척 쉽게 하고 또 별거 아니잖아 생각하게 되는데 좀처럼 어렵게 생각해 다가가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의외로 많다. 지금 나는 그런 주인공을 만나러 간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아버지의 삶 자체를 원수처럼 여기고 의절하고 은행 강도에게 인질이 되었어도 뻔뻔하게 가짜 총이라고 대들다가 총소리에 물러나 무서워하는 아줌마에게 비틀즈의 <헤이, 쥬드>를 불러주며 캐릭터 인형가면을 쓴 채 인질이 된 것을 더 끔찍하게 생각하는 남자. 그 남자는 소년에서 어른이 되었지만 변하지 않았다. 엉뚱하게 가정 재판소에 소년사건 담당관이 된다. 비행청소년을 선도하거나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런 아이들도 있고 저런 아이들도 있다는 식으로 아이들을 일정한 틀이 아닌 그 아이가 바라보고 싶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누군가 그에게도 그런 방향을 제시해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문제아 뒤에는 문제 부모가 있기 마련이라고. 하지만 문제 부모가 있다고 그 아이들이 모두 문제아가 되는 것은 아니고 문제 아이 뒤에 반드시 문제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 또한 우리가 만든 나가세가 생각하는 랭킹은 아닐까. 그에게 방향을 그 스스로가 제시했을 수도 있다. 똑같이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두 가지 타입으로 자라게 된다고 한다. 하나는 그 아버지의 폭력 성향을 배워 폭력적이 되는 타입이고 다른 하나는 절대로 폭력을 쓰지 않는 사람이 되는 타입이다. 통계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가 진나이에게 자신이 선택할 길을 제시한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은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가 있다. 진나이를 주변사람들이 바라보는 진나이에 대한 느낌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과 진나이의 직업 속에 등장하는 비행청소년들의 모습을, 그들을 대하는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다. 나는 비행청소년들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더 좋았던 모양이다. 진나이 자체가 아닌.
세상을 살다보니 어렸을 적에는 부모도 아이였을 때가 있으니까 아이들을 잘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아이 적에 우리는 그런 편견에 사로잡혀서 자신들을 더욱 자신들은 벗어나고 싶어 하고 싶어 하면서도 어른을 또 다른 자신들이 생각하는 틀 속에 가두어 생각하고 이상화해서 스스로가 실망하고 어려운 현실을 만든 것은 아니었는지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점점 부모의 나이, 내 부모가 나를 키웠을 그 나이에 다다르고 보니 부모를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인간은 거꾸로 흐를 수 없는 강물 같은 존재인가보다. 되돌아갈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정체된 부모의 배와 망망대해에서 만나려면 앞에 간 부모를 쫓아가는 수밖에, 그 부모의 배를 내 쪽으로 끌어당길 수는 없는. 어릴 적 이런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 시절을 보내기가 더 수월했을지도 모를 일인데 이건 시간이 가르쳐주고 스스로가 알아내야 하는 일인지라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반복적인 어른과 아이의 모순된 행동양식에 들어가고 만다. 세상의 시스템이 태초에 이렇게 정해진 모양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삼각형에 사각형을 가두지 말고 삼각형을 삼각형의 틀에도 가두지 말고 좀 내버려두지... 하는 것 같은 울림을 들을 수 있다. 나가세에게 불쌍하다고 돈을 쥐어주는 아주머니를 보며 왜 나에게는 돈을 주지 않느냐고 하던 진나이를 보며 아이와 어른, 성장을 떠나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사람이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사는 방식도 그저 하나의 살아가는 방식일 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진나이처럼 살 생각도 없고 진나이가 부럽지도 않고 그렇게 사는 것만이 전부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나이 같은 사람도 세상에 있는 거라는 점이니까. 만약 당신의 주변에 진나이가 있다면 당신이 이 책을 보며 바라보는 느낌으로 진나이를 바라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없다. 아마도 진나이가 내 주변에 있으면 한 대 쥐어박았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여러 사람들이 있다. 차일드가 복수가 되었을 때 차일즈가 아니라 칠드런이 된 것은 아이가 모인다고 아이들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다른 존재들이다. 하지만 어른이 모이면 어른들이 된다. 그들은 닮아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서로 이해할 수 있을 때 특별한 날들이 조금 더 연장되는 것이지 싶다. 특별한 날들을 만들고 싶다면 이해할 마음 보따리 하나 꾀어 차고 세상에 뛰어 들기를. 아님 우린 태어났을 때 하나의 보따리를 더 지니고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무엇을 담든 그것은 세상에 나온 우리 몫일 것이다.
역시 같은 작품도 보는 독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게 마련이라는 것을 읽은 뒤 깨달았다. 아사카 코타로의 작품 가운데 이 작품은 <사신 치바>랑 비슷해 보이니 말이다. 도돌이표로 돌아가는 아카사 월드는 여전히 존재하고 늘 다른 사람들을 내세우지만 언제나 색다른 사람들을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런 색다름의 추구도 작가의 편견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왜냐하면 아무리 인간이 많다고 해도 모든 인간들이 정말 모두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니까. 그래서 나는 진나이를 색다르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내게 진나이는 또 다른 한명의 인간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