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뜰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4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아득한 벌판

죽음의 붉은 신호등 앞에

당신은 서 있었다.

건너가지마, 누군가

등 뒤에서 속삭였다.

결코 뒤돌아 봄 없이

당신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시간과 죽음 사이로

가랑이를 벌리고 앉아

운명의 난장판 혹은 고독의 牌(패)들을

쉬임없이 흩었다 다시 모으고

또다시 흩으면서

당신은 슬금슬금 웃는다.

당신의 전신이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진흙을 게워내기 시작한다.

 

아득한 벌판 앞에서

당신의 그림자가 먼저 지워진다.

두 다리와 몸통이 지워지고

머리가 지워지고

오직 귀신같은 눈빛만 남아

마지막으로 당신의 시야가

막막하게 흩어져 눕는다.

 

최승자 시인의 “솔리테어”라는 시다. 오정희의 “비어 있는 들”을 읽고서 라는 부제가 달려 있기도 하다. 이것보다 오정희의 작품을 잘 표현하는 내용이 또 있을 지 의문이다.

낚시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나선 아내는 아이와 남편에게 반복적으로 시간을 묻는다. 지루하고 초조한 일상이 세월을 지나도 계속 반복되는 것이 오정희의 소설이다.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삶이 너무나 건조해서 바짝 말린 명태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라야만 명태는 조각조각 찢겨진 채 아버지 술국으로 어울리듯이, 어쩌면 그런 메마른 일상의 연속기가 인간 삶의 참 맛을 알게 할 지도 모르겠다. 단편들 중에서 “저녁의 게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느 날인가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도중 문득 내 인생이 감옥 같은 일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정희의 “저녁의 게임”에서 아버지와 화투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내가 가끔 오정희의 소설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감옥인 것이... 한마디로 그의 작품을 표현하라면 감옥 같은 일상을 그린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백년이 지나도, 천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인간이 날마다 이별하는 시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이 책에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재미가 없다.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야하는 참 서글픈 우리의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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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5-06-09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저번부터 읽고 싶었는데... 꼭 읽을게요.

물만두 2005-06-10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있으신가요? 이거 벤트 방생 목록에 있습니다. 구판이지만요^^

하루(春) 2005-06-10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벤트에 꼭 참가해야 할텐데요... ^^

물만두 2005-06-10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