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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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나이가 들면 이런 시는 버겁다. 이십대 때는 사랑 타령의 진부한 시가 싫더니만 삼십을 넘어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은 오히려 이런 시가 불편하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영화의 제목으로 차용됐다는 얘기만으로 덜컥 사버렸는데 후회한다. 이십대때 이 시집을 읽었다면 좀 더 진지하게 찬찬히 읽을 수 있었겠지만 이제 사람이 산다는 건 그리 심각하지도 그리 장황하지도 그리 대단하지도 않음을 알게 되어 시가 헛되고 헛된 젊은이의 울부짖음으로 다가온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을 읽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벽에 대고 외치는 공허한 메아리... 그래도 외치는 자들이 있겠지만 이상은 이상일 뿐이고 아픔은 아픔일 뿐 이것은 또한 높이 날려다 세게 추락의 고통을 맛 보기 위한 시도라는 생각만이 들어 안따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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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8-02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공부에도 때가 있다는데 어떤 책, 어떤 감상, 어떤 감흥은 그렇게 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기형도에게 별 셋이라니... 흑흑.... 이건 제 청춘에 대한 모욕이라고요. 하하.

물만두 2004-08-02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 님 취향을 저에게 강요하셔도 할 수 없네요... 넘 시가 비슷하고 지루해서리... 죄송합니다. 근데 싫어하는 분들은 굉장히 싫어하시더라구요. 편차가 심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