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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이 죽었습니다 - 아들이 살해당한 후, 남은 가족의 끝나지 않은 고통을 추적한 충격 에세이
오쿠노 슈지 지음, 서영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제목과 출판사 설명만 봤을 때 너무 가슴 아플까봐 걱정했다. 슬퍼서 울까봐서. 그러면 너무 감정에 치우쳐 제대로 읽지 못할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기우였다. 작가는 너무 담담하게 피해자 가족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그 너무 담담함이, 살기 위해서만 아니 와해되지 않기 위해 기를 썼던 아버지와 어머니와 딸의 30년 동안의 이야기가 눈물도 나지 않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말하는 듯 그렇게 전해졌다.
우리 외할머니는 한국전쟁때 막내 외삼촌이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는 일을 겪으셨다. 그 뒤 연이어 큰 외삼촌 돌아가시고, 가운데 외삼촌까지 돌아가셔서 아들 모두를 먼저 앞세우셨다. 그러고 여든 여섯까지 사셨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애닳았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엄마는 생일날만 되면 생사를 알 수 없는 막내 외삼촌 얘기를 하신다. 엄마 생신 다음날이 외삼촌 생신이다. 그 그리움의 세월이 육십여년이 되어간다.
아들이 죽는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른다. 부모가 아닌 나는 그 마음을 모른다. 그것도 살해되어 어린 나이에 가슴에 묻어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조차 안된다. 아마도 할머니가 살아 생전 외삼촌 그리던 마음, 자식 죽었다고 혼절하셨다던 그 심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자식이 죽어 한 집안은 30년이 흐른 지금까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엄마는 정신을 놓기까지 했고, 어린 딸은 오빠의 부재에 울지도 못한다. 아버지는 그런 가족때문에 정신을 추스르려 애를 쓰지만 아들이 죽을 때 찬 손목 시계를 죽는 날까지 손목에 차고 있었다. 아들 생각이 날까 미칠 것 같아 가해자에 대한 복수는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아들 생각도 슬픔이 복받쳐 가족간에 말하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복수도 생각할 수 없는 비통한 슬픔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데 가해자는 어떤가. 변호사가 되었고 사과 한번 없었고 전화를 하니 돈이 필요하면 빌려 주겠다는 말만 한다. 갱생을 위해 소년원에 넣었고 전과를 남기지도 않았는데 이 모습 어디에서도 갱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게 인권이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피해자의 여동생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인권은 없는 것인가?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얘기다. 법은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가를 말이다.
최소한 가해자나 가해자 부모는 죄송하다거나 미안하다거나 하는 사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잘못을 해도 잘못했다고 가르치지 않는 건지 그런 마음 자체가 없는 건지 유감이 대세라 그런가 유감이라는 말만 있고 사죄는 사라진 것 같다. 아이들이 서로 싸워도 미안하다고 하며 크는 거 아니었나? 이런 점에서 픽션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속 가해자의 사죄는 오히려 크게 다가온다. 그게 갱생의 시작이다.
마음없는 갱생, 피해자에게 용서받지 못한 갱생, 아니 노력조차 하지 않는 갱생이라는 이름의 허울뿐인 법과 가해자는 증발하고 피해자와 그 가족만 남아 그 상처를 알아주는 이 없이 살게 하는 일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법과 인권,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해 국가와 사회는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작품이 참 감정을 절제한 느낌을 준다. 논픽션이고 작가가 희생자 가족의 이야기를 옮긴 것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그보다는 아직 아픔이 남은 이들이 감정을 드러내는데 소극적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건 직후 머리가 하얘지고 지금도 장례식장에서 있지 못하는 어머니와 이제는 돌아가신 아버지, 남이 빤히 쳐다보면 몸이 떨리는 여동생의 모습에서 치유의 길은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은 더 많아지리라는 생각도... <내 아들이 죽었습니다>라는 제목이 <내 사회가 죽었습니다>로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