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
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1965년 일본에서 한편의 경이적인 SF작품이 등장했다. 바로 이 작품, <시간을 달리는 소녀>다. 지금 보면 약간 단순해 보이기도 하고 SF라고 하기에는 너무 쉽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 단순함의 미학이 이 작품이 오랜 시간동안 사랑받고 무수히 리메이크되고 다른 작품에 영향력을 행사한 원동력이었음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첫 번째 작품인 표제작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기억과 기대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가즈코는 라벤더 향을 맡고 타임리프를 하게 된다. 이 순수했던 시대는 우리가 미래를 아름답게 그리는 어린 시절의 또 다른 모습이다. 가끔 어떤 냄새를 맡거나 어느 길을 걸을 때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마치 예전에 어떤 기억이 생각날 것 같은 좋은 향기와 누군가와 걸었던 것 같은 길이었던 느낌. 우리는 그것을 데자뷰, 또는 기시감이라 부르지만 어쩌면 우리가 타임리프해서 과거나 미래를 왔다 갔다는 흔적은 아닐까. 아니면 봉인된 기억의 흔적일지도 모르고. 아름답고 아름다운 소녀의 시간은 이렇게 흘러간다. 아름다운 생각과 미래에 대한 설레는 기대로. 시간은 우리에게서 기억을 빼앗아간다. 우리는 시간을 쫓아 달려야만 하는 인간이다. 그것을 SF적으로 잘 표현한 작품이다. 읽고 있으니 황순원의 <소나기>를 보는 듯 순수함이 다시 한 번 가슴 따뜻하게 밀려옴을 느껴본다.

 

두 번째 작품인 <악몽>은 추억과 어린 시절의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 모두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 나는 물을 무서워한다. 내가 물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 바닷가에 놀러갔다가 빠져죽을 뻔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30년도 더 전의 일이지만 그 기억은 아직까지 내게 물에 대한 안 좋은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어린 아이에게는 사소한 것도 악몽으로 나타난다. 자신도 반야 가면과 다리의 난간을 무서워하면서 동생 요시오가 밤마다 화장실을 못가는 이유를 알아내려고 애쓰는 마사코에게서 요즘 보기 어려운 따뜻한 동생에 대한 배려를 느낀다. 그런 마음이 자연적으로 마사코의 마음속 두려움도 알아가게 만들고 그것은 과거를 더듬게 한다. 자신을 도와주려는 분이치와 공포극복 여행까지 가는 마사코의 모습에서 지금은 사라져버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어 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악몽도 있다. 그 악몽의 원인을 찾아 나선 길동무의 따듯한 손이 있다. 서로 등 두드려주는 가족이 있다. 어쩌면 이 작품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모습이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진짜 악몽은 아무도 함께 의논할 수 없는 친구와 가족이 없는, 그리고 어린 시절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마음이 없는 것, 그런 것들의 사라짐이 아닐까...

 

세 번째 작품인 <The Other World>는 다원우주와 동시존재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결국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아니 소녀의 바람이다. 이 다원우주에는 단 한명의 노부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딘가 시공간이 다른 곳에 같지만 다른 노부가 존재한다. 그 한명의 인생이 꼬이면 다른 한명에게도 영향이 전해진다. 다른 시공간의 과학자 노부가 발명을 잘못하는 바람에 평범한 노부코의 현실이 점점 노부코가 꿈꾸던 것으로 바뀐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노부코는 바라던 일임에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까 꿈은 하루아침에 이루면 안 되는 것이다.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고 공들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순수했던 시절 그렸던 이야기를 요즘 그린다면 이런 식의 작품은 나오지 못할 것이다. 세상은 바뀌었고 사람도 바뀌었으니까. 이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또 다른 노부코는 좋아 하며 쉽게 적응할 것이다. 왜 나는 그것이 서글퍼지는지. 아마도 나이 탓인 모양이다.

 

나이에 따라 어떻게 볼지 궁금하게 만드는 너무 늦게 내게 찾아온 작품이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 읽을 수 있어 더 좋은지 모르겠다. 작품을 읽으며 나는 내내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되었다. 내가 지나온 시간을 찾아 달렸다. 참 많이 달려야 했지만 달릴 시간이 많아 좋았다. 읽는 내내 기뻤고 즐거웠고 어린 시절이 그리웠다. 타임리프해서 그때를 한번 다녀오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역시 츠츠이 야스타카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심플한 SF작품은 일본적 SF작품의 원동력일 것이다. 서구의 어느 작품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동양적 정서를 간직한 예쁜 SF 작품이었다. 거창한 것보다 때론 소박한 것이 더 좋을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고마운 작품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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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2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맛있게 먹었습니다. (웃음)
이거....리스트에 담고 싶지만.아직도 [알라딘] 서재 개편중으로 에러가 날까....(긁적)

물만두 2007-06-12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신님 보관함에 넣어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