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은 놀고 보자는 느낌으로 신나게 노는 중. 공부는 8월에 하면 안되는 걸까.... -_-;;;
에 일단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전집. 이 중 몇 편은 한국에서는 첫 번역인 만큼 빨리 읽은 순서로는 한국의 10위권  안에 들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다. ㅋㅋ. 이걸로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에 이어 현전하는 희랍비극을 모두 읽었다.















라블레의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덕수궁 앞에서 친구랑 나란히 앉아서 간식 먹으면서 읽었다. 바로 앞에는 경찰 부대가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바흐친의 <장편소설과 민중언어>. 3월부터 질질 끌며 읽다말다 하던 것을 드디어 끝냈다. 사실 앞의 라블레는 이걸 읽기 위해서 가져온 거기도 함








오비디우스의 <로마의 축제일>. 내 분야는 원래 여기지. ㅋㅋ. <황금가지>에 나오는 레미의 숲 이야기의 출처가 여기인 듯.













그리고 예전에 읽었던 소설 퍼레이드. 다카노 카즈아키 <13계단>,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공원>과 <잃어버린 세계>. 읽었던 책을 다시 읽고 읽고 또 읽는 건 노년기 증상이 아닐까 조금 걱정.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빼서 읽는 일본소설들 조금. 하다 케이스케의 <흑냉수>는 형제간의 증오라는 소재를 아주 리얼하게 묘사했다. 살짝 치기같은 게 느껴졌는데 작가가 17세의 고등학생이라는 얘기를 읽으니 납득이 갔다.  무코다 구니코의 <수달>은 근사한 단편집. 짧지만 삶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를 담고 있다. 아시하라 스나오의 <청춘 덴데케데케데케>는 1960년대 카가와 시골의 고등학생들의 밝고 따스하고 유쾌한 일상을 엄청 기분좋게 그려낸 멋진 책이다. 일본어를 잘하게 된다면 꼭 사누키 사투리를 살린 원문으로 보고 싶은 책.















하라 료의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를 읽고 중년 탐정의 피곤한 삶이 마음에 쏙 들어서 내친 김에 레이먼드 챈들러를 읽었다. <빅슬립>하고 <안녕 내 사랑>. 흠... 시적이라는 평가는 납득이 가는데, 내 취향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게, 필립 말로가 장신의 미남이라는 게 아주 맘에 안 든다. 연달아 나타나는 육감적인 미인들하고의 에로에로한 관계도 느끼하고. 마음에 드는 건 삐딱한 독백 정도려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사람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는 게 납득이 간다. 하라 료는 물론 챈들러 장면에 대한 오마쥬를 가득 써 두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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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말 레포트 내고 본격적으로 놀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들을 조금. <반도에서 나가라>는 예전에 읽은 것. <공항에서>는 처음이지만 소설이라기엔 그냥 꽁트집이었고, <이비사>는 이 작가 작품 중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는 뭔소린지 잘 모르겠는 유형.











한국 현대 소설 중 환상 단편을 모아둔 <환상소설첩> 읽었다. 장정일의 <펠리칸>이랑 신경숙, 윤대녕의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이런 유형의 책들은 당연히 재미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흔들리는 바위>. 미야베 미유키야 작가 이름만으로도 확실히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지. 특히 이 작가의 에도시대 물은 다 좋았다. <흔들리는 바위>는 아코로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 이 소재도 이제는 무지 익숙해. 편안하고 즐겁게 읽었다.












존 보인의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이건 영화 소개를 보고 낚여서 읽었는데 대실망. 동화책이란 걸 감안하더라도 리얼리티가 너무 없었다.











중학생 대상의 '위로와 격려의 글 쓰기' 교수법에 대해 고민하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읽은 키토 아야의 <1리터의 눈물>. 보는 김에 드라마까지 넘겨가며 봤는데, 드라마 쪽은 아코 캐릭터가 괜찮았고 료짱이 나왔다는 거 외엔 별로 이렇다할 느낌이 없었지만, 책은 참 괜찮더라. 보면서 조금 울기도 했고. 그렇지만 어짜피 죽을 거 이렇게까지 고생해서 오래 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죽는 것보다 아픈 게 더 싫어.












방학하고 집에서 놀면서 예전에 읽었던 만화들을 다시 보다. <히카루노 고>도 <이니셜D>도 다시 봐도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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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히 소설이 읽고 싶어서 집 앞 도서관에 들렀다가 무코다 구니코 씨의 단편집 <수달>을 빌렸다.
















방송 작가 출신이 쓴 나오키 상 수상작이라는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있는 순문학풍의 잘 된 단편집이었는데,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작품의 내용이 아닌 작가 쪽이었다.
1929년생. 평생 원고마감에 시달리며 살았던 여성 방송작가...
이거 어디서 본 듯한 얘기인데 혹시.... 하고 찾아본 것이 10년 전에 산 <펜끝으로 훔쳐본 세상>.














 혹시가 역시였다.  드라마 극본이 늦어져서 제작진이 모두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원고를 받으러 간 스탭에게 질그릇 냄비를 건냈던 그 아줌마가 바로 이 무코다 씨였다.
  "어머나, 무코다 씨, 예전에 세노 갓파 씨랑 같이 뵈었었지요. 드디어 무코다 씨의 글을 읽게 되다니 정말이지 감개무량!! 이야~ 그 동안 세월 많이 흘렀네요. 그 때만 해도 쌩쌩한 20대 초반이었는데, 이젠 저도 중년이에요. 호호호"  ^^;;

실은 10년 전 <펜끝으로 훔쳐본 세상>을 읽을 때도 나는 '10년 지인'을 한 사람 만났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읽었던 <창가의 소녀 토토짱>의 작가 구로야나기 데츠코 씨 이야기가 여기에 나왔던 것이다. 그 때도
"어머나 이게 누구야? 토토짱 아냐?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초등학교 때 봤는데 그새 어른이 됐구나. 이야~ 하지메 짱도 그렇지만 당신도 정말 훌륭해졌네."
하면서 꽤나 감격했었다.
하지메 짱이라는 것은 세노 갓파 씨의 본명으로, 이 양반의 어린 시절 이야기인 <소년 H>를 나는 그  2년 전에 읽었었다. 즉 무대미술가 세노 갓파 씨와 아나운서 구로야나기 데츠코 씨를 나는 그들이 꼬마였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나이로는 나보다 쉰 살이나 많은 분들이지만 그런 게 전혀 상관 없어진다는 것이 책읽기의 재미있는 점이다.








 








얘기가 이리저리 섞여버렸지만,  이 글의 마지막에는 역시 10년만에 떠올린 질그릇 냄비의 추억을 옮겨놓아야겠다.

<원고 대신 받은 질그릇 냄비>

나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무코다 씨에게서 받은 질그릇 냄비를 소중히 사용하고 있다.
그녀의 각본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를 만들 때 나는 미술 담당이었다. 이 질그릇 냄비는 그때의 인연으로 그녀에게서 받은 것이다.
하루는 연출자가 내게 무코다 씨를 찾아가 직접 각본을 받아오라고 부탁했다. 미술 디자이너는 작가에게서 각본을 받아오는 담당은 아니다.
그러나 연출자는 "내가 가는 것보다 갓파 씨가 가는 게 덜 재촉하는 것 같지 않겠어요?"
하며 듣기 좋은 말로 나를 설득했다.
"한숨도 안 자고 쓰는데도, 아직 열일곱 장밖에 못 썼어요. 기다리게 하는 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와주세요."
그녀는 자기 원고를 읽어 주는 것이, 뒷부분을 쓰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뛰어갔는데, 가는 도중에 두부를 샀다. 전화 목소리로 보아 아직 식사도 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초췌한 모습의 그녀는 들고 간 두부를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조금 깊긴 해도 두부를 데칠 땐 이 질냄비가 맘에 들어요. 다시마가 있던가? 가다랭이포밖에 없지만 괜찮지요?"
하며 그녀는 재빠르게 두부 데칠 준비를 했다.
나는 완성되어 있다는 열 몇 장의 각본을 아직 받지 못했기에 초조해서 은근슬쩍 책상 위를 보았지만 쓴 것은 서너 장뿐이었다.
"배우들은 앞부분 연습을 하고 있나요?"
"네, 뒷부분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기 때문에 연출가도 망설이고 있습니다만....."
결국 그 날은 한 장도 못 받았다. 그녀는 "내일 아침에는 반드시...."하면서 마치 원고 대신이라는 듯이 질냄비를 신문지에 싸서 나에게 주었다. 물로 씼었을 냄비가 아직 따뜻했다.
                      - 세노 갓파, 박국영 옮김(1998): <펜 끝으로 훔쳐본 세상>, 서해문집, 112쪽

(옆 페이지에 세노 씨의 훌륭한 세밀화로 그려진 문제의 질그릇냄비가 그려져 있다. 그림의 위와 아래에 "높이 13센티, 직경 23.5센티, 무게 13650그램. 크기에 비하여 얇고 가벼워서 깨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무코다 구니코씨가 준 질그릇 냄비에 속아서 그냥 왔습니까? 갓파씨는 물건을 받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문제예요." 라고 디렉터에게 비난을 당했다."라는 메모가 더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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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 1 - 을유세계사상고전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박규태 역주 / 을유문화사 / 2005년 5월
구판절판


그러나 일반적으로 고대의 왕이 동시에 사제이기도 했다는 사실만으로 왕이 행했던 직무의 종교적 측면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당시에는 왕을 둘러싼 신성이 단순히 명목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진지한 신앙의 표현이었다. 많은 경우 왕은 단순히 인간과 신을 중개하는 사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신 그 자체로서 숭배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왕은 그저 초인간적, 불가시적 존재에게 희생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리는 것만으로 백성들과 숭배자들에 대해 필멸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그런 은총을 내려줄 수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사람들은 종종 왕이 제때 비와 햇빛을 내려줌으로써 곡물의 성장을 촉진시켜주리라고 기대했다.-65쪽

주술의 기초가 되는 사유 원리를 분석해 보면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번째, 유사는 유사를 낳으며 혹은 결과는 그 원인과 유사성을 가진다는 사유 원리이다. 두번째, 이전에 한 번 접촉했던 사물은 물리적 접촉이 끝나 서로 떨어져 있어도 계속 상호작용을 한다는 사유원리이다. 첫번째 원리를 '유사의 법칙'이라 한다면, 두번째 원리는 '접촉의 법칙'이라 칭할 수 있다. (중략)유사의 법칙에 입각한 주술은 '동종주술' 혹은 '모방주술'로 접초그이 법칙에 입각한 주술은 '감염주술'로 분류할 수 있다. (중략) 편의상 동종주술과 감염주술을 묶어 '공감주술'이라고 총칭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두 가지 유형의 주술 모두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물이 비밀스런 공감을 통해 상호작용을 한다는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70-72쪽

터부는 실천적, 실제적 주술의 소극적인 적용이라 할 수 있다. 적극적 주술(magic)이나 사술(sorcery)은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이런 것은 이렇게 하라"고 말한다. 이에 비해 소극적 주술이나 터부는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런 것은 하지 말라"고 말한다.-86쪽

이런 줗술사 계급의 발달은 해당 사회의 종교적 발전과 정치적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왜냐하면 부족의 안녕이 주술적 의례에 의존하는 그런 사회에서 주술사는 자연히 막강한 권위와 신임을 얻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부족의 수장직이나 나아가 왕권까지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주술사 계급은 다른 어떤 직업에서도 얻을 수 없는 명예와 부와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부족 내에서 가장 우수하고 야심만만한 자들이 그 계급에 모여들게 마련이었다. 이렇게 모여든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들은 종종 우매한 동료 부족원을 기만하고 그들의 소박한 미신적 신앙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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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30
M.엘리아데 지음, 이은봉 옮김 / 한길사 / 1998년 5월
품절


우리에게 종교적 인간이란 가능한 한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고자 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나라가 대지의 중앙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는 자신들의 도시가 우주의 배꼽을 구성한다는 것, 더욱이 신전이나 궁전이 진정한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기 자신의 집이 중심에 존재하고 세계의 모상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사실상 뒤에서 살펴보게 되겠지만 집이란 세계의 중심에 있고 소우주적 차원에서 우주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통 사회의 인간은 위로 열려져 있는 공간, 즉 상징적으로 지평의 단절이 보증된, 따라서 다른 세계, 초월적 세계와의 접촉이 의례를 통해 가능한 공간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인간은 항상 중심에 살고자 하는 욕구를 느낀다. 간단히 말해서 그가 친밀함을 느끼는 공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공간이 어떤 차원에 속하든지 간에 종교적 인간은 항상 전체적이고 조직된 세계 속에, 즉 코스모스 안에서 살기를 바란다. 우주는 그 중심으로부터 생겨난다. 즉 우주는 그 배꼽인 중심점에서부터 확장되어 나간다.-71쪽

'우리의 세계'는 코스모스이기 때문에 밖으로부터의 어떤 공격이든 카오스로 변화시킬 위험성을 안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신들의 모범적인 작업인 우주 창조를 모방하여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세계를 공격하는 적은 신들의 적, 악마, 특히 악마의 두목, 태초에 신들에게 정복당했던 원초적인 용(龍)과 동일시되었다. '우리의 세계'에 대한 공격은 신들의 작업인 코스모스에 저항하여 그것을 무(無)로 돌려버리려는 신화적인 용의 복수 행위에 해당했다. '우리의' 적은 카오스 세력에 속한다. 어떤 도시의 파괴는 카오스로의 전락을 의미한다. 침입자에 대한 승리는 용(즉 카오스)에 대한 신들의 모범적 승리를 재현하는 것이다.-74쪽

종교적인 인간은 두 종류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그중에서 더 중요한 성스러운 시간은 순환적, 가역적, 회복 가능한 시간이라는 역설적인 면으로 나타나고 의례를 통하여 주기적으로 회귀하는 일종의 신화적인 영원의 현존을 나타낸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종교적 인간과 비종교적 인간을 구분하기에 충분하다. 종교적 인간은 근대적인 용어로 역사적 현재에만 사는 것을 거부하고, 어떤 점에서는 영원성과 동일시될 수 있는 성스러운 시간을 다시 획득하려고 노력한다고 할 수 있다.-90쪽

신이나 문화 영웅은 이제껏 속된 행위를 계시해 본 적이 없다. 신이나 선조들이 행한 것, 따라서 신화가 그들의 창조 행위에 대하여 말한 모든 것은 성스러움의 영역에 속하고, 그러므로 존재에 참여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인간이 자기 자신의 발의에 따라 행하는 것, 어떤 신화적 모델이 없이 행하는 것은 모두 속된 영역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헛되고 허망한 행위이며, 궁극적으로는 비현실적 행위이다. 인간은 종교적이 되면 될수록 그들의 태도와 행동을 인도할 모범적 모델을 더욱 많이 가지게 된다. 말을 바꾸면, 인간은 종교적으로 되면 될수록 실재에 더 많이 들어가게 되고, 비모범적이고 '주관적'이어서 결국 그릇된 행동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위험이 훨씬 줄어들게 된다.
이것이 여기서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있는 신화의 측면이다. 신화는 절대적인 성스러움을 계시한다. 그것은 신들의 창조 행위를 말하고 신들의 작업의 신성성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신화란 성스러운 것이 세계 속으로 다양하게, 때때로 극적으로 침투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108쪽

천공 구조를 갖는 최고 존재자는 그 신앙 숭배로부터 점차 사라져 가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서 멀리 있는 감추어진 신(dei otiosi)이 된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신은 마치 창조라는 거대한 일에 그 힘을 전부 사용해 버린 것과 같이 우주와 생명과 인간을 창조해 버려서 일종의 권태를 느낀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 그들은 하늘로 은퇴하고, 창업을 완성하기 위해 그 아들 혹은 조물주를 지상에 남겨둔다. 차차 그의 지위는 신화적 선조, 모신, 풍요신 등과 같은 다른 신격들로 대체되었다. (중략)최고 존재자가 그 본래의 지위를 지키고 있는 것은 유목 민족뿐이다. 그것은 일신교적 경향을 갖는 종교(아후라-마즈다) 혹은 명확한 일신교(야훼, 알라)에서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 (중략)
대다수 아프리카 종족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위대한 천신, 지고존재자, 전능한 창조주는 부족의 종교 생활에서 사소한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그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혹은 너무 선하기 때문에 일부러 숭배할 필요가 없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이 닥칠 때에는 마지막 원천으로서 그의 도움을 요청한다.-125쪽

성스러운 지식, 일반적으로 지혜는 가입식의 성과로 해석된다. 그리고 고대 인도에서나 그리스에서도 분만의 상징이 의식의 각성과 결부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조산원에 비유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사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의식으로 태어나는 것을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인간'을 분만시켰던 것이다. 불교의 전통 가운데서도 동일한 상징이 발견된다. 비구는 가문의 이름을 버리고 '붓다의 아들'(sakya-putto)이 되는데, 그것은 그가 '성인의 한 사람으로(ariya) 태어났기' 때문이다.-179-180쪽

비유적 해석 방법을 발전시킴으로써 고대 말기 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스토아 학파였다. 이 방법이 신화적 유산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재평가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스토아 학파에 따르면, 신화는 사물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견해나 윤리적 원리를 계시해 준다. 신들의 수많은 이름들은 하나의 단일한 신격이 여러 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며, 모든 종교는 단지 용어만 다양할 뿐 동일한 기본적 진리를 나타낸다. 스토아 학파의 비유적론적 방법은 모든 고대의 전통 혹은 전통을 하나의 보편적인 언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가능케 하였다. 이 방법은 널리 받아들여졌고, 후대에도 자주 사용되었다.-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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