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는 사람들 - AI만 읽는 시대, 퇴화하는 인간 지능에 관한 경고
나오미 배런 지음, 전병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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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의 학자(읽기 교육 전공자)가 쓴 AI 시대의 독서 이야기. 별로 흥미는 없지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읽음. 최신 정보가 많은 것은 장점. 서둘러서 번역하느라 그랬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 많은 것은 단점. 번역자가 '-ㄹ 것이다.'를 굳이 '-ㄹ 테다.'로 쓰는 이유를 모르겠다. 너무 어색하다. 

물론, 문해력의 하락세는 생성형 AI가 등장하기 전부터 있던 현상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LLM(Large Language Mode)이 방대한 데이터세트를 ‘읽은’ 다음 종이 위의 텍스트를 요약 비평 비교한 글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우리가 굳이 몸소 읽지 않아도 된다는 유혹을 더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예상되는 개인의 문해력 상실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 P13

읽기는 개인에게 가치 있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되는 길을 보여주기도 하죠.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읽기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가치 있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시민들은 시대적 관심사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시민들이 투표로 결정할 사안들에 대해 각자 주체적인 입장을 정립할 수 있겠죠. 그러한 이해를 확보하기 위한 핵심 통로가 바로 읽기입니다. - P14

읽기는 (순수한 즐거움은 말할 것도 없고) 학습의 핵심 원천이다. 읽기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믿을지 스스로 결론에 도달하도록 이끈다. 읽기는 우리의 뇌를 단련시키고, 결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죽었거나 허구인) 존재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연결될 기회를 제공한다. 거기에 바로 우리가 읽기를 통해 더 나은 시민, 나아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 P19

AI 덕분에 인간의 사고 노력을 아낄 수 있다니, 마치 정신이 공짜로 휴식을 누린다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나친 사고 감소는 사고 능력의 상실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 P21

2022년, 프린스턴대학교 4학년생 에드워드 티안은 겨울 방학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GPTZero 프로그램이다. 티안의 프로그램은 이후 공개적으로 이용 가능한 AI 탐지 도구 산업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이들의 공통 목표는 텍스트 작성자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봇인가, 아닌가? - P68

‘당혹감’은 티안이 텍스트의 전반적인 복잡성을 측정하는 지표였다. (중략) 챗GPT는 본질적으로 (출현 빈도에 기반해) 다음에 나올 가능성이 가장 높은 단어를 예측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익숙한’ 글일수록 당혹감 점수가 낮게 나온다. (중략) 이 척도의 한 가지 함정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이 부족한 어휘력 때문에 자신의 글에 챗GPT를 사용했다는 부당한 혐의를 받기도 했다는 점이다. - P68

티안이 도입한 두 번째 프로그래밍 척도는 ‘간헐성’으로, 문장의 길이와 복잡도 같은 지표를 고려해 텍스트 내 문장 변화량을 계산한다. (중략) 인간이 작성한 문장은 일반적으로 텍스트 전반에 걸쳐 길이와 복잡도 면에서 등락을 보이는 반면, AI가 생성한 문장은 훨씬 균일하다. - P69

그러니 옥스퍼드대학교 출판부가 2024년에 올해의 단어로 ‘뇌썩음 brain rot’을 선정한 배경이 이해가 간다. 옥스퍼드는 이 표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소하거나 도전적이지 않을 듯한 자료(현재는 특히 온라인 콘텐츠)의 과도한 소비 결과로 보이는 개인의 정신적 지적 상태 저하.
기록상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곳은 1854년에 출간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으로 보인다. 소로는 당시 사회가 복잡한 사상과 정신적 노력을 회피하는 경향을 보이는 데 대해 비판하며 이렇게 썼다.
영국이 썩은 감자를 치료하려고 애쓰는 동안,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치명적인 뇌 썩음은 (아무도) 퇴치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건가? - P70

저널리즘의 세계는 2020년을 기점으로 심대한 변화를 겪었다. 신문 기사의 상당수가 이제는 (표기를 하든 말든) AI로 생성된다. 이 수치가 얼마나 되는지 확실히 알기는 어렵지만, 2024년 중반 한 추정치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하루 약 6만 건에 이르렀다. 이는 전 세계 뉴스의 7퍼센트에 가까운 수치이다. - P76

한 사회에 문자가 존재한다고 해서 구성원 대부분이 읽을 수 있지는 않았다. 고대 아테네와 중세 유럽,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수치는 점점 늘어났다. 1500년 영국의 문해율(추정치)은 남성의 경우 약 10퍼센트였으나, 1900년에 약 95퍼센트까지 증가했다. 여성은 약 5퍼센트에서 시작했으나 1900년에 이르러서 남성을 거의 따라잡았다. 식민지 시대의 뉴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들이 놀라운 문해율을 자랑했다. 백인 남성의 경우에는 거의 100퍼센트에 달했다. - P109

고국에서는 자발적으로 책을 읽어 본 적이 없던 병사들까지 읽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앞두고 영국에서 노르망디 해안으로 향하는 수송선에 승선하는 병사들을 위해 배정된 책만 해도 100만 권에 가까웠다.
상륙 후에는 어떻게 됐을까? 오마하 해변에서 벌어진 일을 보자. 여기서 미군은 24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처음에 상륙한 병사들은 거의 모두 전사했다. 그럼에도 병력은 밀물처럼 몰려가며 상륙을 계속 시도했다. 수많은 병사가 부상했는데, 일부 병사는 주머니에 책을 넣고 있었다. 매닝이 썼듯이, "그날 나중에 해변을 오른 많은 사내는 중상을 입은 병사들이 가파른 언덕 기슭에 몸을 기대고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 P128

왜 진중 문고(Armed Services Edition)는 그토록 수요가 많았을까? 첫 번째 이유는 책들이 충족시킨 다양한 욕구이다. 병사들에게 책은 기분 전환이나 지루함을 달래주는 수단, 오락거리, 현실로부터의 탈출구였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책은 눈앞의 도전과 비극에 대처하기 위한 도구이자 나아가서 희망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두 번째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정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2차 대전 참전 용사 중 상당수가 ‘제대군인원호법 GI Bill’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일부는 대학 진학 여부와 상관없이 열혈 독자가 됐다. - P128

19세기만 해도 미국의 사립대학 수가 많지 않았다. 입학 지원자의 규모도 마찬가지로 제한적이었다. (중략) 하버드 대학교는 1870년 9월에 ‘뉴욕 타임스’에 광고를 내면서 지난 6월에 입학시험을 치른 지원자 210명 중 185명이 합격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이런 지원자들은 압도적 다수가 사립 예비학교 출신이었다. 그러나 이후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20세기 초가 되자, 대학에 입학하는 공립 고등학교 졸업생 수가 점점 늘어났다. 공교육의 수준이 향상되고 이민자 인구가 급증한 결과였다. 새로운 지원자 중에는 유대인 학생이 많았는데, 대다수가 부유한 형편은 아니었다. 아이비리그 대학 캠퍼스에서 이들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개신교 상류층 중심의 기존 질서는 도전에 직면했다. 해결책은? 새로운 입학 요건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공식적인 대학 지원서가 등장했다. - P178

대학 지원서의 서술형 영역을 AI가 쓰고 읽는 지금의 추세는 나를 상당히 심란하게 만든다.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쓰는지, 그것이 어떻게 읽히는지에 대해 점점 더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초현실적 게임을 하고 있다. 듀크대학교가 에세이 영역에서 쓰기의 질 평가를 중단하기로 한 결정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합리적인 첫걸음으로 보인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평가 방식을 마련해야 한다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 P189

2025년 3월에는 과학 출판계의 거대 기업인 엘스비어가 사이언스 다이렉트 AI를 출시했다. 사이언스 다이렉트 AI는 엘스비어가 보유한 세계최대의 과학 논문 및 단행본 정보 사이트인 사이언스 다이렉트에 축적된 방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인간 연구자들이 다루는 주제에 관한 연구 결과를 요약, 비교, 종합해서 제시한다. 완전한 인용은 물론 원문 링크를 함께 게시해 편의성뿐만 아니라 AI의 정확도를 확인할 손쉬운 방법까지 제공한다. - P227

AI 조사 에이전트가 추구하는 또 다른 목표가 있다. 문헌에 대한 체계적 고찰 systematic review이다. (중략) 체계적 고찰은 연구자들이 특정 분야의 연구 결과를 개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의학 분야에서는 임상 시험과 치료에 대한 접근법을 안내하기도 한다. 이를 책임감 있게 준비하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AI 조사 에이전트는 매력적인 지름길을 보여주지만, 본격적으로 활용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게 일반적 평가이다. 최소한 체계적 고찰에는 지금의 AI가 만들어내는 ‘환각’을 용인할 여지가 없다. - P228

2023년에도 뉴욕의 변호사 스티븐 슈워츠의 악명 높은 사례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사건과 관련된 판례를 훑는 데 챗GPT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가 변론에 인용한 판례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판사가 발견했다. 슈워츠는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후속 심리에서 "챗GPT가 판례를 날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호소했다. 변호사로서 훌륭한 일은 아니었지만, 당시는 챗GPT가 막 등장한 시점이었고 환각을 유발하는 문제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P235

AI 사용의 영향을 뇌에서도 측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없을까? 2025년 6월 ‘아카이브’에 게재된 흥미로운 연구가 긍정적 답을 시사한다. 뇌파 검사EEG는 뇌의 전기적 활동을 측정하는 확립된 방법이다. 보스턴 지역의 한 연구진은 이 기술을 활용해, 참가자들이 LLM을 사용하거나, 전통적인 웹 검색을 하거나, 아니면 둘 다 사용하지 않는 (오직 뇌만 사용하는) 상태에서 에세이를 작성할 때의 뇌 활동을 서로 비교해 봤다. 참가자들 중 ‘뇌만 사용한’ 집단의 신경 활동 수준이 가장 높았고, 검색 엔진을 사용한 집단이 그 뒤를 이었다. LLM을 사용한 집단은 신경 활동 수준이 가장 미미했다.
- P357

빅테크 기업들이 자신들의 서비스를 채택하도록 우리를 몰아가는 행위를 탓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생각하는 소비자로서 우리는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을 때) 읽기 대행자로서 AI에 얼마나 의존하고 싶은지를 결정할 수 있다. AI에 과도하게 의존한다고 해서 체중이 늘거나 과다 복용으로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종국에는 우리의 학습과 개인적 성장에 해가 될 수 있다. AI가 환경에 끼치는 피해에 기여하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 P360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쏟아놓은 모든 연구를 통해 내가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을 제시하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첫째는 정신적 노력의 중요성이다. (중략) 둘째는 문해력 사업에서 진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 P361

셋째는 우리가 AI 시대에 어떤 독자가 되고 싶은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과제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술적 선택지가 아무리 인상적이라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한 개인으로서 뇌를 사용하고 인성 (그리고 영혼)을 구축해야만 한다. 또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도 있다. 타인과 상호작용하고, 시민으로서 자신을 교육하며, 아이들에게 본보기가 돼야 한다.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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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학 / 시학 -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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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작문과 화법 교육에서 가르치는 것들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는 것에 경탄했다. 알면 알수록 더 대단한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은 유용하다. 참된 것들과 올바른 것들은 그와 반대되는 것들보다 본성적으로 더 우월하기 때문이다. 판정이 제대로 내려지지 못할 경우, 필연적으로 참된 것들(진실)과 올바른 것들(정의)이 그 반대되는 것들(허위와 불의)에 의해 무너질 수밖에 없다. (1권1장) - P28

말로 제시하는 증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것은 말하는 사람의 성격에 달려 있고, 두 번째 것은 청중이 어떤 심적 상태에 있게 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세 번째 것은 말이 증명하거나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는 말 그 자체에 달려 있다. (1권2장) - P31

말하는 사람의 말이 믿음직스럽게 들릴 때 그는 성격을 통해서 설득한다. 우리는 대체로 매사에 정직한 사람을 더 기꺼이 더 빨리 신뢰하며, 정확성을 기할 수 없고 의견이 엇갈릴 때는 특히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도 말하는 사람의 말을 통해 생겨나야지, 말하는 사람에게 갖는 선입관을 통해 생겨나서는 안 된다. 몇몇 수사학 전문가가 주장하듯, 말하는 사람이 드러내는 개인적 정직성은 그의 설득력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성격은 말하는 사람이 지닌 가장 효과적인 설득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1권2장) - P31

말하는 사람이 청중의 감정을 자극할 때는 청중을 통해 설득한다. 우리는 괴로울 때나 슬플 때, 사랑할 때나 미워할 때 동일한 판단을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오늘날의 수사학자들은 이런 효과를 내는 데만 정성을 쏟는다. 우리는 감정에 대해 논할 때 이 문제들을 상세히 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개별 사항에 적합한 설득 수단을 통해 진리 또는 진리인 것처럼 보이는 것을 증명할 때는 말 자체로 설득한다. (1권2장) - P32

연설에는 필연적으로 심의용 연설(symbouleutikos), 법정 연설(dikanikos), 과시용 연설(epideiktikos) 이 세 종류가 있다. 심의용 연설은 어떤 일을 하라고 권유하거나 하지 말라고 만류한다. 개인적으로 권유하는 사람들도 대중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도 언제나 권유하거나 아니면 만류하기 때문이다. 법정 연설은 누군가를 고발하거나 변호한다. 소송 당사자는 반드시 고발하거나 변호해야 하니까. 과시용 연설은 누군가를 찬양하거나 비난한다. 이들 세 종류의 연설은 또한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시간에 관여한다. (1권3장)
- P41

친구란 남을 위해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람은 친구가 많고, 그런 사람들이 존경스러우면 친구가 훌륭한 것이다. (1권5장) - P54

인간의 모든 행위는 다음 일곱 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 때문에 일어나는데, 우연, 본성, 강요, 습관, 계산, 분노, 욕구가 그것이다. (1권10장) - P88

집중과 노력과 긴장을 요하는 행위는 괴롭다. 습관화되지 않은 이상 그런 것에는 필연과 강요가 내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습관화되면 그런 것도 즐겁다. 그런 것과 상반되는 것은 즐겁다. 그래서 편안함, 여가, 이완, 놀이, 휴식과 잠은 즐거운 것에 속하는데, 어느 것도 강요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권11장) - P91

즐거움은 현재의 것을 지각하는 데 있거나, 과거의 것을 기억하는 데 있거나, 미래의 것을 기대하는 데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것은 지각하고 과거의 것은 기억하고 미래의 것은 기대하니까. 그런데 현재의 것으로 지각할 때 즐거운 것뿐 아니라 즐겁지 않은 것이 기억나더라도 그 결과가 고매하고 좋을 경우에는 역시 즐겁다. (1권11장) - P92

상사병에 결린 사람에게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동(eromenos)에 관해 말하거나 쓰거나 作詩하는 것이 언제나 즐겁다. 이 모든 경우 그는 기억함으로써 자신이 연동을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동이 곁에 있으면 행복하고 연동이 곁에 없으면 기억하는 것,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시작이다. 그래서 연동이 곁에 없는 것이 괴롭지만 슬픔과 탄식 속에도 어떤 즐거움이 깃드는 것이다. 그가 곁에 없어 괴롭기는 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행위와 됨됨이를 생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까. (1권11장) - P93

이기는 것 또한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모두에게 즐겁다. 이기면 우월감을 느끼는데, 그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가 욕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기는 것은 즐거운 것이므로 운동 경기나 지적 토론 역시 즐겁다. (1권11장) - P94

연설가가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자질이 필요하다. 증명과는 별도로 남이 나를 믿도록 만드는 것은 세 가지 즉 상식(phronesis, 문맥에 따라 실천적 지혜), 미덕(arete), 호의(eunoia)이기 때문이다. (중략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그릇된 조언을 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 이유 전부 때문이거나 그중 하나 때문이다. 말하자면 상식이 부족해 그릇된 의견을 지니거나, 바른 의견을 지니지만 사악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하지 않거나, 상식도 있고 성품도 고결하지만 청중에게 느끼는 호감이 결여되어 알면서도 가장 훌륭한 조언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2권1장) - P127

연설가는 반드시 청중은 분노하는 심적 상태가 되게 하되, 자신의 상대방은 사람들이 분노하는 그런 사람이며 사람들이 분노하는 일들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2권2장) - P135

겸손하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자들 앞에서도 우리는 차분해진다. 그런 자들은 자신들이 열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며, 열등한 자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은 아무도 남들을 경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도 사람이 앉아 있을 때는 물지 않는데, 이는 겸손한 자들 앞에서는 분노가 가라앉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2권3장) - P136

따라서 청중을 진정시키고 싶으면 분명 이런 전제들에서 말하며 청중이 적절한 심적 상태가 되게 해야 하며, 그들이 분개하는 자들을 두려운 자들, 존경스러운 자들, 호의를 베푼 자들, 본의 아니게 행동한 자들 또는 자신의 행위 때문에 지나치게 고통당한 자들로 그려야 한다. (2권3장) - P139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좋다고 믿는 것들을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해 바라면서 힘닿는 데까지 그런 것들을 해주려고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2권4장) - P140

우리는 절제 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은 남에게 불의를 저지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같은 이유에서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2권4장) - P141

분노는 우리와 관련있는 것에서 비롯되지만, 증오는 우리와 무관한 것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람들을 단순히 어떤 성격의 소유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미워할 수 있으니까. 분노는 언제나 칼리아스나 소크라테스 같은 개인과 관계가 있는 데 반해, 증오는 어떤 부류를 향할 수도 있다. 도둑과 밀고자는 모든 사람이 미워하니까. (아래에 계속)

(위에서 계속) 또한 분노는 시간이 지나면 치유되지만, 증오는 그렇지 않다. 분노는 고통을 안겨주려 하지만, 증오는 해를 입히려 한다. 분노하는 사람은 자기 피해자들이 무엇을 느끼기를 원하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피해자들이 무엇을 느끼든 말든 상관없다. 고통스러운 것은 모두 느낄 수 있지만, 불의나 어리석음처럼 가장 큰 해를 입히는 것들은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악덕은 존재하더라도 고통을 야기하지 않으니까. 또한 분노는 고통을 수반해도, 증오는 그렇지 않다. 분노하는 사람은 연민의 정을 느낄 때가 많지만, 증오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분노하는 사람은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이 그 대가로 고통 받기를 원하지만, 증오하는 사람은 자신의 적이 없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2권4장) - P144

경쟁심은 우리도 얻을 수 있는, 높이 평가받는 좋은 것이 본성상 우리와 비슷한 자에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괴로움이다. 그러나 시기심은 남이 그런 좋은 것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얻지 못했기 때문에 느끼는 괴로움이다. (따라서 경쟁심은 훌륭한 사람이 느끼는 훌륭한 감정이지만, 시기심은 나쁜 사람이 느끼는 나쁜 감정이다. 한쪽은 경쟁심을 통해 스스로 좋은 것을 얻으려 하지만, 다른 쪽은 시기를 통해 이웃이 좋은 것을 갖지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2권11장) - P170

젊은이는 돈보다는 명예와 승리를 더 사랑한다. 그들은 돈은 별로 사랑하지 않는데, 암피아라오스를 언급한 핏타코스의 경구처럼 돈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권12장)
- P173

노인은 오랜 세월을 살며 종종 속임을 당하거나 실수를 저질렀을뿐더러 인생 전체가 실패작인지라 그 어떤 것에도 자신감이 없고 매사에 지나치게 활력이 부족하다. (중략) 또한 노인은 심술궂다. 심술궂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나쁜 측면에서 보기 때문이다. 노인은 불신하므로 의심하고, 경험 때문에 불신한다. (2권13장) - P175

젊은이는 용감하지만 절제가 없고, 노인은 절제는 있지만 비겁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말해 청년기와 노년기가 따로 가지는 이점을 한창때 사람들은 함께 가진다. 또한 그들은 청년기나 노년기가 너무 많이 가지거나 너무 적게 가진 것을 알맞게 가진다. 몸은 30세에서 35세 사이가 한창때이고, 혼은 49세쯤이 한창때이다. (2권14장) - P178

부자는 오만불손하다. (중략) 부자는 또한 사치스럽고 으스댄다. (중략) 또한 부자는 자신들이 통치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을 통치자로 만드는 자질을 자신들은 이미 지녔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부자의 성격은 운 좋은 바보의 성격이다. (2권16장) - P180

우화는 대중 연설에 적합하며, 실제로 일어난 비슷한 사건을 찾기는 어려워도 이야기를 지어내기는 쉽다는 이점이 있다. 우화는 비유처럼 지어내기만 하면 된다. 유사성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철학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다. 우화가 주는 교훈은 제공하기가 더 쉽지만, 심의용 연설에서는 사실이 주는 교훈이 더 유용하다. 미래사는 대체로 과거사를 닮았기 때문이다. (2권20장) - P193

금언은 연설에 큰 도움이 된다. 그것은 첬째, 청중은 우둔해 자신이 트정한 경우에 갖는 의견을 누가 보편적인 진리로 표현하면 듣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중략) 하지만 더 중요한 다른 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금언 사용이 연설에 도덕적 성격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중략) 금언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도덕적 원칙을 보편적 형태로 선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언이 훌륭하면 그것을 말하는 사람도 훌륭해 보이게 된다. (2권20장) - P201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진 전제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도 안 되고, 논의의 모든 단계를 결론에 포함시켜도 안 된다. 첫째, 논의가 길어지면 논지가 모호해지고 둘째, 자명한 것을 말하면 시간 낭비가 될 것이다. 이것은 못 배운 자가 배운 자보다 군중 앞에서 더 설득력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들은 "못 배운 자가 군중 앞에서는 말을 더 잘하는 법"이라고 말한다. 배운 자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것을 말하고, 못 배운 자는 자기가 아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해 분명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2권22장) - P202

실제 사실들을 더 많이 가질수록 우리는 더 쉽게 논제를 증명할 수 있고, 사실들은 논제와 밀점히 관계있을수록 더 특별하고 덜 진부하다. (2권22장) - P204

연설과 관련해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증거의 출처이고, 둘째는 문체이며, 셋째는 연설의 부분들을 적절히 배열하는 일이다. (3권1장) - P246

연출은 여러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목소리를 적절히 조절하는 문제, 즉 목소리는 언제 크거나 작아야 하며 언제 그 중간이어야 하며, 날카롭고 무거운 그 중간의 억양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며, 각각의 주제에는 어떤 리듬이 사용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3권1장) - P247

문체의 미덕은 명료성이라고 하자. 연설은 그 뜻하는 바가 분명하지 못하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또한 문체는 적절해야지 저속해서도 안 되고 너무 고상해서도 안 된다. (3권2장) - P250

따라서 은유는 음성적으로나 의미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그 밖의 다른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것에서 빌려와야 한다. 이를테면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라는 표현이 ‘진홍색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라는 표현보다 더 나으며, ‘빨간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라는 표현은 가장 못하다. (3권2장) - P256

훌륭한 문체의 제1원리는 정확한 헬라스어를 구사하는 것이며, 이것은 다섯 가지 규칙을 준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중략) 첫 번째 규칙은 접속어를 적절히 사용하는 것이다. 두 번째 규칙은 흔해빠진 이름이 아니라 특별한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세 번째 규칙은 모호한 표현을 피하는 것이다. (중략) 네 번째 규칙은 프로타고라스가 명사를 남성, 여성 중성으로 구별한 것을 준수하는 것이다. (중략) 다섯 번째 규칙은 많은 수인지 적은 수인지 단수인지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다. (3권5장) - P264

청중은 또한 ‘누가 모르겠는가?’ ‘누구나 다 안다’처럼 연설문 작성가들이 지겹도록 사용하는 기교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맏는다. 청중은 남들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을 자기는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창피해서 동의하기 때문이다. (3권7장) - P271

직유는 여러 번 말했듯이 은유의 일종이다. (3권11장) - P297

수사학의 장르마다 적합한 문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작문의 문체는 토론의 문체와 같지 않고, 토론의 경우에도 대중 연설과 법정 연설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3권12장) - P299

심의용 연설에서 도입부와 쟁점 비교와 요약은 정책상의 갈등이 있을 때만 발견된다. (중략) 법정 연설에서도 맺는 말이 언제나 필요하지는 않다. 이를테면 연설이 짧거나 사실들을 기억하기 쉬울 경우에는 말이다. (3권13장) - P304

그대가 도입부에서 해야 할 일은 판단 대상이 될 쟁점이 무엇인지 분명해지도록 주제를 말하는 것이고 맺는 말에서는 증거들을 요약해서 말해야 한다. 이 요약하는 단계에서 맨 먼저 할 일은 그대가 약속을 비텼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대가 무슨 말을 왜 했는지 말해야 한다. (3권18장)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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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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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하고 메시지가 분명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독일 사람들이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피로사회’는 2010년 가을 독일에서 출간되었고, 출간되자마자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이 책이 시대의 뇌관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디 차이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슈피겔 등 독일의 모든 주요 언론 매체들이 이 책에 관해 앞다투어 서평을 내보냈으며, 2주 만에 초판이 매진됐다. ‘피로사회’는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현재까지 판을 거듭하고 있다. 철학책이 이러한 호응을 얻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최근 디 타게스타이통이 지적한 것처럼, ‘피로사회’의 저자는 거의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P5

사회는 오늘날 면역학적인 조직과 방어의 도식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도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 가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 이질성은 면역학의 근본 범주이다. 모든 면역 반응은 이질성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면역학 이후의 차이, 후기근대적 차이는 더 이상 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 P13

보드리야르의 폭력 이론은 이질성과 무관한 긍정성 내지 동질적인 것의 폭력을 면역학적으로 서술하려고 시도하는 바람에 논리적 혼란과 부정확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 P19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 P23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 P24

에렝베르에 따르면 우울증은 규율사회의 명령과 금지가 자기 책임과 자기 주도로 대체될 때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 P27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인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 P32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 P32

‘활동적 인간의 주된 결함’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쓴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음에 걸맞게 굴러간다." - P49

멜빌이 묘사하는 사회는 아직 규율사회이다. 따라서 소설은 온통 규율사회의 건축적 요소인 담장과 벽으로 점철되어 있다. ‘필경사 바틀비’가 ‘월가의 이야기’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 P56

바틀비를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긍정성이나 가능성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발동시키라는 후기근대적 명령의 짐을 지고 있지 않다. 베껴 쓰기는 도무지 어떤 자발성도 허용하지 않는 활동인 것이다. 아지 꽌습과 제도의 사회 속에 살고 있는 바틀비는 우울한 자아-피로를 초래하는 과중한 자아의 부담을 알지 못한다. 병리학적 측면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아감벤의 존재신학적 바틀비 해석은 소설 자체의 이야기와도 맞지 않는다. 이 해석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심리적 구조의 변동 또한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 P58

탈진의 피로는 긍적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 P71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 P72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복종, 법, 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 쾌락, 선호가 그의 원칙이다. 그가 노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 그의 노동은 향유적 노동이다. 그는 타자의 명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명령하는 타자의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해방적이기만 한 jt은 아니다. 자유에서 새로운 강제가 발생한다는 데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타자로부터의 자유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전도되며, 이는 오늘날 성과주체가 겪는 많은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 된다. - P86

세네트 역시 보상의 위기가 온 원인으로 나르시시즘적 장애와 타자 관계의 결핍을 들고 있다. "성격 장애로서의 나르시시즘은 뚜렷한 자기애와 완벽하게 대립된다. 자아 속으로의 침잠은 보상을 낳지 못하고, 오히려 자아에게 고통을 가한다. 나르시시즘에서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가 소멸하는데, 이는 자아가 결코 뭔가 새로운 것, ‘다른 것’과 마주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87

경험하는 인간은 타자와 마주한다. 경험은 이화적이다. 반면 체험은 자아를 타자 속으로, 세계 속으로 연장시킨다. 따라서 체험은 동화적으로 작용한다. 자기애는 자기 자신에 비해 타자를 폄하하고 거부한다는 점에서 아직은 부정성의 영향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아는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정립한다. 이로써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는 경계선이 유지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타자와의 대립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반면 나르시시즘에서는 타자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나르시시즘적 장애를 겪는 사람은 자기 자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타자관계가 소실되고 이에 따라 안정된 자아의 이미지도 형성되지 못한다. - P88

호모 사케르에 관한 아감벤의 이론은 부정성의 도식을 고수한다. (중략) 그는 이미 낡게 느껴지는 부정성의 세속화된 형식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까닭에 긍정성의 극단적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날의 폭력은 적대적인 이견에서보다는 순응적 합의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버마스에 반하여 합의의 폭력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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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이라는 거짓말 - 진정한 나를 찾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
앤드류 포터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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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책 중 제일 재미있었다.

생각할 거리가 한가득, 더 읽고 싶은 책도 잔뜩.

내용이 풍부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으면서도, 설명이 친절하고 유머러스하다. 

우리는 진정한 나, 진정한 삶, 진정한 경험의 의미와 관련해 일종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 핵심에는 자기 실현과 자기 발견을 소중하게 여기는 개인주의가 자리한다. 물론 가치 있는 생각이다. 문제는 거기에 반사회적, 비순응적, 경쟁적 속성이 내재한다는 점이다. ‘너만의 어떤 것을 하라’고 권하는 히피 버전의 진정성 추구는 남들은 하지 않는 행동, 튀는 행동을 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순응적이고 천편일률적인 대중의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경쟁을 유발한다. 잘 살펴보면, 로프트에서 살기, 생태관광, 슬로푸드 운동 같은 소위 ‘진정성 잇는’ 생활양식들에서도 위장된 형태의 지위 획득 행위가 발견된다. 그리고 이는 타자에게 분개의 감정을 일으킨다. - P22

가톨릭교는 세계(하느님이 7일 만에 창조함)와 지구생명체(하느님이 흙을 빚어 아담을 만들고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듦)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강력한 포괄적 교리를 갖췄다. 게다가 도덕률(십계명)과 그에 대한 정당성(신의 명령), 그리고 위반할 경우의 벌칙(불지옥에 떨어짐)까지 제공한다. 무엇보다 성서는 신부가 매개하는 성찬예식을 통한 영혼의 구원과 삶의 의미를 설명한다. 과학, 정치, 도덕, 영적 구원. 가톨릭교회는 존재론적, 정치적, 사회적, 과학적 욕구를 종합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원스톱 쇼핑몰이다. - P33

포괄적 종교의 임무는 지구상과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모든 현상에는 결국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는 신의 의지 혹은 신의 명령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된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목적론적 설명’ -궁극의 목적이나 목표를 염두에 둔 설명- 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 버전이다. 우주 속에 구조적으로 탑재된 궁극의 목적, 목표, 역할에 기대는 일이 불합리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날 때 세상에 대한 환멸이 찾아온다. - P34

과학적 사고방식의 핵심요소는 두 가지다. 첫째는 일반법칙과 일반원리 추구에 매진하는 것이고, 둘째는 과학의 진보란 개방적이며 궁극적으로 비결정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 P36

어떤 종류의 소외든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소외감을 느꼈다고 해서 반드시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문제 상황은 아니라는 점이다. 심리적, 사회적 소외는 둘 다 일정 상황에 대한 묘사일 뿐이다. 전자는 개인의 상황을 묘사하고, 후자는 개인, 집단, 제도 간의 관계를 설명한다. - P58

루소는 어떤 오지나 먼 과거에서 근대성이 제거된 안식처를 찾는 대신,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가장 기본적이고 즉흥적이고 강렬한 느낌과 감정을 돌봄으로써 진정한 자기를 찾으라고 제안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진정성 있는 인간은 자기 내면의 깊은 감정과 접촉하는 사람, 감정적 삶을 터놓고 드러내는 사람이다. - P87

루소야말로 몇백 년에 걸친 열정 대 이성, 예술 대 상업, 개인 대 사회, 보헤미안 대 부르주아의 문화전쟁에서 중요한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르주아가 된다는 것은 진정한 자아로부터 스스로를 소외하는 일이며, 다시 말하면 안락과 안전을 앞세워 창의력을 위축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사익을 위해 신념을 버린 것이다. 순응하지 않는 보헤미안, 주류와 투쟁하는 외로운 반항아가 되는 것만이 다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진정성 있는 사람은 그 정의상 당연히 대중의 취향, 생각, 의견, 스타일, 도덕관념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 P89

그러나 철학, 문학, 문화이론 전공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그(인용자주- 발터 벤야민)의 논문이 한 편 있다. 바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이다. 1936년에 출간된 이 논문은 예술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직관을 설명하는 최고의 문헌으로, 초기에는 사진과 영화가, 그리고 요즘은 자유자재로 자르고 섞고 굽는 디지털 콜라주 문화가 야기하는 진품성에 대한 불안감을 폭로한다. - P114

진품성을 인정받으려면 일정한 공동체와 그들의 의례와 연결되는 것이 핵심이며, 의례로부터 멀어질수록 작품의 아우라는 약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벤야민은, 20세기 초 사진과 영화가 정당한 예술 형식인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핵심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았다. 진짜 이슈는 사진과 영화가 기존에 진품 관념이 이해되던 관계를 해체해버림으로써 예술의 본질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점이다. 기술복제시대에 그런 해체를 일으킨 두 주역은 ‘대량화’와 ‘상품화’다. - P115

동일한 복제를 무제한 만들 수 잇는 새로운 종류의 예술품이 등장하면서 무엇이 원본인지는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다. 작품이 일단 공동체 의례에서 했던 역할을 벗어나는 순간, 즉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놓여야 할 필요성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동시적, 집합적 경험이라는 현상의 등장을 목격한다. - P115

대중상품으로서의 예술의 가능성을 열어젖힘으로써 기술복제시대는 진품성의 위기를 초래했다. 오락이 세속화, 상업화, 대량생산화되는 시대에는 작가의 삶이 작품의 아우라를 보존하는 예식의 역할을 떠맡는다. 작가들의 과거, 이력, 라이프스타일, 이미지는 그들의 작품을 거품 낀 천박성과 상업성에서 구해내 창조적 전통이나 서사에 고정시킬 안전장치다. - P115

요즘 현대미술 작품들은 개념도 황당하고 솜씨도 미숙해서 ‘우리 애도 저 정도는 그리겠네’라는 문외한들의 전형적인 불평은 오히려 애들한테 모욕일 지경이다. 그러나 그런 불평은 초점을 벗어난다. 작품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팔리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페르소나 또는 ‘브랜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미술가 중에 데미언 허스트만 한 브랜드는 찾아보기 어렵다. - P117

경영학 교수 돈 톰슨은 저서 ‘1200만 달러짜리 박제상어’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100만 파운드로 살 수 있는 것 중에 유명 상표 현대미술품처럼 사회적 지위와 인정을 가져다주는 물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람보르기니를 사는 건 천박한 취향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테고, 돈 있으면 요트를 살 사람도 많겠지만, 허스트의 땡땡이 그림을 사서 벽에 걸면 사람들이 "와우, 이거 허스트잖아요?"라고 반응한다는 얘기다. - P118

현대미술의 공허함은 예술 작품의 대량생산으로 말미암은 진품성 위기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렇다고 이게 과연 발터 벤야민을 근심시켰을 만한 종류의 결과인지도 분명치 않다. 예술 작품의 기술복제로 인해 예술이 대중의 오락거리나 심지어 전체주의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는 현상을 그가 경계한 것은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대중이 예술에 접근하기 쉬워지면서 실력자나 엘리트의 전유물이던 예술의 소비와 비평이 민주화되는 효과를 목격했다. - P118

중심부에서 제작되는 예술을 대중이 소비하던 발터 벤야민의 시대와는 달리 디지털문화 시대의 예술은 소비뿐 아니라 생산도 민주화되고 있다. 수백만의 아마추어가 직접 제작한 음악, 동영상, 사진, 소설이 인터넷에 넘친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현상은 모든 개인은 창조적 영혼을 지닌다는 루소적 이상의 성취다. 하지만 그렇데 다들 창작에 여념이 없다면 대체 누가 그걸 소비할 시간이 있겠는가? 관심이 희소한 경제에서는 좀 거창하고 작위적인 이벤트를 동원해서라도 관심을 가장 잘 이끌어내는 아티스트가 대박을 낸다. - P120

예술 작품의 진정성은 상품화 현상에 의해 위협받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알고 보면 진정성이란 큰돈을 쓸 의사가 있는 사람들이나 획득할 수 있다. 원래 성스러운 제례나 고대의 공동체 전통에서 기원했던 아우라는 이제 모든 마케터와 브랜드 매니저가 주시하는 훌륭한 판매 전략으로 탈바꿈했다. - P121

진정성 추구는 광고업계의 입장에서 볼 때 현대판 성배 찾기와 같아서, 브랜드 상품을 "왜곡된 메시지와 날조된 경험으로 이루어진 눈부신 가공의 세상"을 넘어서는 고매한 차원으로 승격시킬 수 잇는 궁극의 마케팅 전략이다. 진정성 게임에 참여하는 것은 이제 마케팅에서 기본이고 필수이며, 모든 브랜드 전략의 판단 기준이다. 소비자는 더 똑똑해지고 세련됐다. 이들은 끊임없는 광고의 홍수를 경계하는 한편 독창성, 진실성, 가치를 약속하(고 안겨주)는 브랜드 상품을 기꺼이 구매할 의사를 보인다. - P125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자기를 ‘진정성을 옹호하는 반영웅’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권위를 인정하고 지위 추구를 즐거워하고, 일을 너무 사랑하고, 사회에 순응하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 있는가?물론 소수 존재한다. 그들을 일컫는 용어도 있다. 좀비사원, 샌님, 꼰대, 부화뇌동자, 여피족, 파시스트. 그러나 아무도 자신이 부화뇌동자나 여피라고 시인하지 않는다. 진정성 없는 삶을 사는 건 항상 ‘남들’이나 하는 짓이다. - P133

헛소리(인용자주- hoax)는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가리는 게임에 아예참여하지 않는다. 헛소리가 가장 중요시하는 미덕은 정확성이 아니라 진정성이다. 헛소리 치는 사람들은, "세상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자기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보여주려고 애쓴다"고 프랭크퍼트는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 대신 진심을 보여주는 데 가장 집중하는 두 분야, 즉 정계와 광고업계가 헛소리가 제일 심한 분야라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달리 말하면 정치와 광고는 진정성으로 겉치장하는 데 가장 신경 쓰는 두 분야라 할 수 있다. - P136

과시용 진정성은 유혹적이고 매력적이다. 과시가 유효하려면 최소한 외관상 유용하거나 사회적으로 유익한 모습을 띠어야 한다는 베블런의 통찰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하기 때문이다. 즉, 본의를 숨기고 마치 다른 목적을 지니는 듯한 외양을 연출한다. 여기서 본의란 지위 추구다. - P148

실생활에서 집단극화(group polarization) 현상은 (적어도 민주주의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매일 다양한 집단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극단적으로 쏠리는 경향이 완화되기 때문이다. 선스타인은 인터넷상에서의 집단극화를 특히 걱정한다. 블로고스피어는 일련의 반향실처럼 작동하고, 모든 관점이 반복 강조되면서 히스테리에 가까운 고성으로 증폭된다. 선스타인은 정치가 온라인으로 옮겨감에 따라 공론장은 편파와 극단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 P183

사생활 보호의 종말은 곧 문화적 성숙성의 종말이 될 것이다. 감시는 범죄자에게나 필요하고, 쓸데없는 가십은 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사생활 보호를 "그만 포기하고 잊어"버리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꿈을 포기하고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 P194

TV토론에 참여해본 사람은 금방 깨닫는 사실이지만 TV란 뉘앙스, 깊이, 섬세한 구분을 싫어하는 지적으로 우악스러운 매체다. TV는 첨예한 대립을 좋아한다. 정치 프로그램이 시사토론에 진보와 보수인사를 초대할 때, 방송 PD들은 양편의 동의나 양보를 기대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 갈등이야말로 시청자에게 전달되는 메시지이며, 논쟁에서 승리자는 있을지 몰라도 (고등학교 토론대회에서 점수를 따내는 식으로) 그 승리와 견해의 옳고 그름은 무관하다. - P201

TV토론의 영향력이 커지자 토론 참석자들은 점점 더 위험을 기피하게 됐다. 특히 대통령이나 총리직이 걸린 경우 토론의 목표는 승리가 아니라 심각한 실수 없이 살아남는 것이다. (중략) 이러니 TV 시대의 정치란 준비된 원고, 천편일률적인 답변, 외워서 전달하는 요점으로 가득한, 대본대로 따라하는 이벤트가 될 수밖에 없다.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TV토론을 보고 있으려면 너무 멍청하고 답답해서 내 머리에 내 손으로 못이라도 박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 P202

민주주의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낙태, 동성애자의 권리, 자유와 안보의 균형 등 근본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서로 이견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누군가가 단순히 자신이 반대하는 견해를 지지한다고 해서 세뇌당한 증거로 여기는 것은 민주주의를 믿지 않는다는 얘기다. - P216

하지만 투표율이 한 나라의 민주주의를 진단하는 그렇게 대단한 척도일까? 역사를 되돌아보면, 국민들이 정치에 ‘도에 지나치게’ 참여하던 사회라는 게 존재했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체육관, 음악연주단, 야외활동 동아리 할 것 없이 시민사회의 거의 모든 조직이 정당 노선을 따라 조직됐다. 이 과열된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투표율은 사소한 선거에서조차 어김없이 80퍼센트 이상을 자랑했고, 독일인들은 공적 영역에서 취하는 모든 행동이 자신의 암묵적인 정치 성향을 반영한다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졌다. 독일사회가 이렇게 심하게 정치화되어 있었던 덕택에, 집권한 나치는 그런 조직들을 너무나 쉽게 재조직화할 수 있었다. 시민사회를 새삼 새로 정치화활 필요 없이, 이미 위태롭게 정치화된 조직을 ‘나치화’하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 P230

정치에서 진정성의 씨를 말린 것은 스핀닥터들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성에 대한 우리의 욕구가 정치인들로 하여금 진정성을 꾸며내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대안은 뻣뻣하고 정직하고 너무나 따분한, 즉 함께 맥주 마시고 싶지 않은 후보에게 표를 주는 것이다. - P232

건강한 문화는 건강한 사람과 같다. 끊임없이 변하고 자라고 진화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떤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중략) 한 문화를 한 사회의 면역체계와 유사한 것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 외부의 이물질에 노출될수록 튼튼해진다는 얘기다. (중략) 특정 문화를 보호하고 보존할 때 원주민이 관광객 보라고 시전하는 ‘진정한 고유성’은 우리가 신경 쓸 대상이 못 된다. 우리가 관심을 쏟아야 할 더 적절한 대상은, 더 유연하고, 더 튼튼하고, 세상과 더 긴밀히 관계맺고 잇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세계관’ 혹은 ‘에토스(ethos)’fk 부르는 것이다. - P239

‘에토스’는 스타벅스에서 파는 생수 상표이기 이전에, 한 사회의 도덕, 정치, 종교, 예술, 과학적 기풍을 가리키는 유용한 그리스 용어다. 하나의 사회가 세계 또는 외부인과 어떤 조건으로 관계 맺을지를 규정하는 그 사회의 관습과 전제, 의식과 상징, 규칙과 위계질서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에토스다. 우리는 문화 정체성을 논할 때 보통 이 에토스를 짚고 넘어간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고유한 관점, 혹은 간단히 표현해 ‘세계관’이다. 이 정체성 또는 세계관은 사회의 예술적 창조와 과학 혁신을 촉진하며, 에토스에 충분한 자신감이 담겨 있으면 (고대 그리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20세기 중반의 미국처럼) 놀라운 성취를 거둘 수 있다. - P239

공동체 특수주의는 자유주의의 집착적 자기애를 넘어 더 위대한 어떤 것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소중한 가치로 흔히 전제된다. 가족, 친지, 그 외 역사, 종교, 가치관을 공유하는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우리는 ‘자기’의 단기적 장기적 욕구에서 벗어나 타자의 욕구에 더 민감해진다. 공동체주의자는 자유주의에 대해 "세상 모든 것이 다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라고 일갈한다. 개인의 욕구를 초월하는 것, 우리의 충성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P246

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는 허무주의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비난은 익숙하지만 잘못된 비난이다. 고전적인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세계시민주의가 이기주의와 자기도취를 허락해서 매력을 느낀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세계시민주의가 새로운 가치, 새로운 삶의 양식에 눈뜨게 하고, 관용과 상호존중의 미덕을 장려하는 방식을 보며 좋아했다. - P246

이 논쟁에서 한 가지 난점은 세계시민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가 여러 면에서 서로 동문서답을 한다는 점이다. 세계시민주의자는 특정한 자유주의 원칙의 중요성을 논하고, 공동체주의자는 자유주의자가 가치관에 일으키는 효과를 두려워한다. - P247

사회 통합과 인종 다양성의 관계를 집중 연구한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은 다양성을 사회 안정의 원천으로 본 볼테르의 믿음과 대조되는 연구 결과를 선보인다. 퍼트남에 따르면, 이민자가 늘고 다양성이 증가하면 사람들은 "몸을 움츠리고 거북이처럼 행동"하며, 타자에 대한 개방성이 감소하고 상호 불신이 증가해 공동체의 결속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간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다양성이 큰 공동체는 균질하고 결속력이 강한 하부 소그룹으로 분열될 뿐 아니라 공동체 전반으로 불신이 확산된다고 퍼트남은 말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기와 다르게 생긴 사람뿐 아니라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마저 불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 P248

다양성 증가가 단기적으로 공동체를 약화시킨다면, 더 광범위하고 포용성 있는 시민 정체성을 구축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퍼트남의 주장이었다. 그가 지적한 대로 미국은 20세기 전반에 아일랜드, 이탈리아, 폴란드, 독일, 유대인 이민자 수백만 명을 미국 사회에 동화시킨 역사가 있다. 이를 다시 이루지 못할 이유는 없다. - P249

만약 어떤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 구성원을 무지하고 가난하고 고립되게 만들고 선거권도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공동체는 우리가 존중하거나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농민들이 뼈 빠지게 벼농사를 하는 농경시대 불교 왕국 부탄의 매력적인 모습이나, 1946년 모습 그대로 정지한 아바나를 보는 일이 강단좌파나 진정성 추종자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탄이나 쿠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진정성이라는 허사으이 희생자다. 그리고 자기들 문화를 반근대의 상징 삼아 박물관에 들여놓으려는 자들에게 붙잡힌 인질이다. - P268

논의에서 간과된 것은 세계시민주의 덕택에 얻게 된 것들, 즉 정치적 자유권, 부의 증가, 지성과 창조성 발휘의 기회 증가다. 더 중요한 것은 세계시민주의는 물질적 향상뿐 아니라 도덕적 진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세계시민주의의 핵심 도덕은 포괄적 관용에 기초한 보편주의다. (중략) 만약 세계시민주의가 결국에 가서 특정인이 원하는 종류의 ‘진정한 문화’ 관념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땐 콰메 앤터니 애피아 교수의 말이 맞다. 안됐지만 ‘진정한 문화’가 양보해야 한다. - P268

공산주의 관광산업이 이렇게 성황중이라는 것은, 나치즘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공산주의가 사람들에게 가볍게 여겨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저널리스트 앤 애플바움은 저서 ‘굴락(Gulag)’ 서문에서, "어떤 대량살상의 상징물은 우리에게 공포감을 주는 반면, 우리를 웃게 만드는 대량살상의 상징물도 있다"는 점이 희한하다고 서술한 바 있다.
이것은 오래된 문제다. 해설도 가지가지다.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가 기본적으로 포용과 평등의 이데올로기인 반면 나치즘은 배타적이고 증오에 찬 인종주의임을 지적한다. 나치즘은 강력한 유대인 로비 때문에 순전한 절대악의 상징이 됐지만, 소련 공산주의는 수많은 서구 뭉닝과 지식인들이 좌파여서 쉽게 용서받는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 P285

팩스턴은 파시즘의 경우 다음 사항에 집착하여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정치운동이라고 결론 내린다.
-개인보다 집단과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경향
-순수와 결속에 대한 상실감
-이질적 문화의 영향에 따른 쇠락에의 두려움
-합리적 원칙보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를 숭배하는 경향
-폭력과 죽음에 아름다움과 구원의 힘이 담겨 있다는 믿음 - P293

서구 합리주의에 대한 쿠틉의 거부는 오사마 빈 라덴의 마음속에서 미국을 향한 비대한 혐오감으로 둔갑했다. ‘미국’은 지하드 전사들에게 정치(개인주의, 민주주의, 세속주의), 비즈니스(세계화, 교역, 상업), 오락(소비주의, 술, 섹스)등 근대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상징물이었다. 라이트가 지적하듯, 알카에다의 최고 이론가 쿠틉은 20세기가 제공하는 거의 모든 것에 등을 돌림으로써 이슬람이 근대와 평화롭게 공존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원리주의자들이 향하는 목적지는 오로지 한 곳, 바로 과거였다. - P295

알카에다(와 이슬람 원리주의)를 이처럼 미국 소비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진정성 운동으로 묘사하면 9.11 이후 지적 지형도 위에 형성된 괴이한 대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좌파가 이슬람 원리주의의 노골적인 목표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반적 논제에 널리 동조하는 현상 말이다. 즉, 세계무역센터 테러로 민간인 3000명이 살해된 일을 내놓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도 빈 라덴의 서구 문화 비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많다. - P296

그것은 후쿠야마가 시인한 대로 역사의 종결이 낳은 컴컴한 수렁 같은 권태이며,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가치 있는 건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느끼는 깊은 공포다. 원리주의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모든 밧줄에서 풀려난 자유로운 정신, 무제한적인 가능성의 바다에서 닻을 내릴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는 순수하게 자유로운 지성에 대한 공포다. - P305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누구나 거울을 들여다보며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무엇이 의미 있는가’ ‘무엇이 성스러운가’를 자문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질문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변주에 해당한다. 다른 종교나 이념과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이에 대해 미리 준비된 답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근대는 그런 기존의 해답을 전부 쓸어버리고 신성함이라는 관념을 약화시켰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위의 질문에 ‘그런 건 없다’ 아니면 –그보다 조금 나은- ‘당신한테 달렸다’라고 답한다. 이게 심히 공포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를 부정하고 과거에 대한 향수와 폭력에 호소하는 행태는 규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진정성 추구라는 우리의 대안 역시 혼란만 야기하고 성공할 수 없는 허구일 뿐임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 P305

인정욕구가 보편적으로 충족되면 인정의 가치가 사소해진다는 니체의 단순하지만 날카로운 통찰이 힌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누구나 인정받는다는 건 아무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 인정이란 본질적으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구별(distinction)의 한 형태로, 거기에는 권력관계와 우열 판단이 내포된다. 이때 인정이라는 용어에 진정성을 겹쳐놓으면, ‘모든 것이 진정하다면 아무것도 진정하지 않은’ 것이 된다. 진정성이란 ‘무엇과 대조해서 진정한 거냐?’라는 질문에 답함으로써 비로소 힘을 얻는 대조의 용어이기 때문이다. 결국 진정성은 누구나 누릴 수 없기 때문에 가치 있는 지위재화다. - P311

진정성 허구를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근대와 화해하고 지난 250년이 비극적 실수가 아니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중략) 근대와의 화해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긍정적으로 포용하는 일을 수반한다. 그것은 그 두 가지가 단순한 필요악이 아니라 그 자체의 가치 구조와 도덕 기반을 갖춘 정치 경제의 조직체계로서 이전 체계보다 일정한 장점을 지님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시장에 등을 돌리는 일은 옳지 않다. 또한 분노와 억압으로 고통받던 수많은 이들의 숨통을 터준 권리와 자유를 해치는 사회질서를 완벽한 것으로 이상화하며 갈망해서도 안 된다.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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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 존재하게 되는 것의 해악
데이비드 베너타 지음, 이한 옮김 / 서광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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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책이다.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따져가며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은 잘 이해 못 하고 '대충 이런 얘기인가 보다......'하고 후루룩 넘어가게 되는 부분이 많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다. 마음을 울리는 감동이 있다.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웃음이 터지는 부분, 재미있는 부분이 많다. 

비록 그들이 나를 존재케 하였지만, 나의 부모님께.
그리고 그들 각자의 존재가 비록 자신에게는 해가 되지만,
나머지 우리들에게는 큰 이득이 되는, 나의 형제들에게. - P7

우리는 각자 존재하게 됨으로써 해를 입었다. 그 해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장 좋은 삶의 질조차도 매우 나쁘기 –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는 정도보다 훨씬 나쁘기 –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존재를 막는 것은 명백히 이미 늦어 버렸지만, 미래의 가능한 사람들의 존재를 막는 것은 아직 늦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창조하는 것은 그래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이러한 주장들을 찬성하여 논하겠다. 그리고 왜 그러한 주장들에 대한 통상의 반응 – 분개는 아닐지라도 쉽사리 믿지 않는 반응 – 이 결함이 있는 것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 P9

나는 이 책을, 그것이 존재하게 될 사람들의 수에 (많은) 차이를 가져올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서 쓴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받아들여지건 아니건 간에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은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쓴 것이다. - P10

특정한 사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 가능성이 매우 낮은 일이라는 인식을,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항상 심각한 해악이라는 인식과 결합하면, 존재하게 된 것은 진짜 운이 나쁜 일이라는 결론이 산출된다. 해를 입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쁘다. 그렇게 해를 입을 가능성이 아주 희박할 때 그 해를 입는다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이다. - P26

친출생 편향은 많은 방식으로 드러난다. 예를 들어 (결혼해서건 아니면 그냥 동거해서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보며, 불임이 아니라면 아이를 낳지 않는 건 퇴행적이거나(backward) 아니면 이기적이라고 본다. ‘퇴행적이라고’ 보는 것은 개체발생론적 패러다임이나 개인의 발달 패러다임을 활용한다. 즉 아이들은 아이들을 낳지 못하지만 어른들은 낳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 번식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어른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적절한 패러다임인지는 절대 명백하지 않다. 첫째로, 언제 아이를 갖지 않아야 할지를 알고 이 앎에 따라 자제력을 발휘하는 것은 성숙의 징표이지 미성숙의 징표가 아니다. 아이들을 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서도 아이를 갖는 지나치게 많은 수의 (청소년기) 아이들이 있다.
(아래에 계속) - P28

(위에서 계속)
둘째 역시 첫째 논점과 관련되어 있다. 계통발생적인(phylogenetic) 관점에서 출산하려는 충동은 극도로 원시적이다. 만일 ‘퇴행적인’이 ‘원시적인’으로 이해된다면, 출산하는 것이 퇴행적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동기를 가지고서 출산하지 않는 것은 진화적으로 더 최근 일이고 더 진보된 일이다. - P28

존재하게 되는 해악을 가하는 것을 피하고자 출산을 삼가는 곳에서는 그들의 동기는 이타적인 것이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더구나 아이를 갖고자 하는 이가 이타적인 동기라고 여기는 어떠한 것도, 이득을 보는 이로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철저하게 오도된 것이고, 이득을 보는 이가 다른 사람이거나 국가라면 부적합한 것이다. - P29

아이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인질을 잡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가치를 높이는 일이 불공정하며 그런 행위에 보상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의 삶을 더 나쁘게 만들 수 있지만, 그러한 결과를 방지하는 비용이 아이를 갖지 않은 사람들의 어깨에 지워져야만 하는가?
- P32

많은 이들은 삶을 즐기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어서 행복해한다. 그러나 (중략) 어떤 이가 자신의 삶을 즐긴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존재를 비존재보다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존재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그 삶을 사는 기쁨을 아쉬워할 사람이 없을 것이고 그리하여 그 기쁨의 부재는 나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삶을 즐기지 않을 경우에 존재하게 된 것을 후회(regret)하는 것은 이치에 닿는다. 이 경우 존재하게 되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 사람이 사는 삶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좋다.
- P94

아주 운 좋은 삶(charmed life)은 너무나 드물어서 그런 삶이 하나 있을 때마다 비참한 삶은 수백만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아이들이 그 불운한 이들 가운데 끼게 되리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들의 아이가 소위 운좋은 극소수에 속하히라는 것은 모른다. 존재하게 된 사람 누구에게도 커다란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가당 특권적인 사람 누구에게도 커다란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가장 특권적인 사람들조차도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겪고, 강간당하고 폭행당하거나 잔인하게 살해당할 아이를 낳을 수 있다. - P138

법적 권리(a legal right)의 다른 것과 구별되는 특성(distinctive features)은 그릇된 일이 될 수도 있거나 여겨지기도 하는 일을 할 자유를 허용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에 대한 법적 권리는 모든 이들이 훌륭하고 현명하다고 여기는 표현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일부 사람들은 사악하고 멍청하다고 여기는 표현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 P152

사람들의 삶이 지속할 가치가 없지 않은 한, 그들의 삶을 갑자기 중단시키는 것은 그들의 삶을 더 못하게 만든다. 존재하게 된 것의 다른 모든 해악에다가 때 이른 죽음이라는 해악을 또 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멸종은 이런 방식으로 발생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추가적인 사람들을 창조하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 미래의 사람들의 삶이 갑자기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 삶이 갑자기 중단될 어떠한 사람들도 아예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니 말이다. - P271

인류가 끝이 나게 될 때가 언제이건 마지막 사람들은 심각한 비용을 치를 것이다. 그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인구가 감소하고 사회 기반 시설이 붕괴되어 고통을 겪을 것이다. 모든 사정이 동일하다면, 이런 일이 더 나중에 벌어진다고 해서 아무것도 얻어지지 않는다. 동일한 괴로움이 발생한다. 그러나 만일 멸종이 더 일찍 일어난다면 치르지 않아도 되는 비용이 있다. 현재 세대와 마지막 세대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중간의 새 세대들이 치르는 비용 말이다. 더 이른 멸종을 찬성하는 논거는 따라서 강하다. - P272

도덕적 행위자와 합리적 숙고자를 담고 있는 세계가 뭐가 그렇게 특별한가? 인간이 그들과 같은 존재를 담고 있는 세계를 가치 있게 여긴다는 것은 실제로 세계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는 것보다는 자기 중요성에 관한 부적절한 그들의 감각에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중략) 만일 우리가 도덕적 행위자성, 합리성, 그리고 다양성과 같은 용인이 세계를 고양시킨다고 생각한다 해도 그것들의 가치가 인간 삶과 함께 오는 어마어마한 양의 괴로움을 능가한다고 보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없다. - P274

어떤 견해의 반직관성은 그 자체로는 그 견해에 반대하는 결정적인 고려 사항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직관들은 흔히 심히 믿을 수 없는 것 –그저 편견의 산물- 이기 때문이다. 한 시대와 장소에서 심하게 반직관적으로 여겨지는 견해가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는 명백히 참으로 여겨진다. 노예제가 그르다는 견해 또는 ‘다른 인종간의 출산’에는 아무것도 그른 바가 없다는 견해는 한때 대단히 그럴 법하지 않고 반직관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견해는 지금은 적어도 세계의 많은 곳에서 자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 P280

그러므로 어떤 견해나 그 함의가 반직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는 심지어 모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싫어하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논증을 검토해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을 창조하는 것이 그르다는 견해를 거부한 사람들 대부분은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논증을 뜯어보지 않고서 그렇게 했다. 그들은 그냥 간단히 이 견해를 틀린 것으로 가정해 버렸다. - P280

그런 가정을 하면 안 되는 한 가지 이유는 그 결론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상당히 합당한 견해에서 도출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 2장에서 설명했듯이 쾌락과 고통의 비대칭성은 새로운 사람들을 창조하는 일에 관한 중요한 몇 가지 도덕적 판단들에 대한 최선의 설명이다. 나의 모든 논증은 그 비대칭성을 드러내고 그것이 어떤 결론으로 이르는지를 보여준 것뿐이다. - P280

대단히 그럴 법한 전제에 기초한 강력한 논증이 있으며, 그 결론을 따르면 괴로움을 겪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박탈하지 않고서 괴로움을 감소시킬 수 있는데도, 그 결론이 단지 우리의 판단을 훼손하는 원시적인 심리적 특성 때문에 거부되는 때에는 그 결론의 반직관성은 그것에 반대하는 이유로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 - P285

의문의 여지없이 일부 사람들은 이것으로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나의 논증이 터무니없다(그들의 생각)는 것을 공준으로 여기는 것이 그 이유라면, 내가 그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내가 나의 결론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논증이 무엇이건간에 그들은 그것이 산출하는 결론에 의해 그 논증이 논박된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논증의 결함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결론의 부정(否定)이 독단의 지위를 획득했다는 점만을 입증할 뿐이다. 독단적인 사람을 납득시키기 위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P285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항상 해악이라는 견해에도 우리가 아이를 갖지 않아야 한다는 견해에도 그럴 법하지 않은 점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고 나도 그들 중 하나이다. 인류의 큰 부분이 이 견해를 공유하게 될 가능성은 작다. 그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 가능성이 작아서 현재와 인류의 궁극적 종말 사이에 야기될 어마어마한 양의 괴로움 때문에. - P285

나의 견해에도 낙천적인 부분이 있다. 인류를 비롯한 유정적 삶은 결국 끝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종말을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이들에게는 종말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은 염세적이다. 이와 반대로 더 이상 사람들이 없다면 더 좋을 것이라는 나의 평가와 더 이상 사람들이 없데 되는 때가 올 것이라는 나의 예측은 낙천적인 평가를 낳는다. 사태는 지금 나쁘지만 언제까지나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 P287

출산에 대한 자율적인 결정과는 달리 삶을 지속할지 죽을지에 관한 자율적인 결정은 문제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 의해 내려진다. (내가 3장에서 논했듯이) 사람들의 삶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못하다는 것이 참이라면, 그들의 삶이 지속할 가치가 있는지에 관한 그들의 평가는 잘못되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범하도록 허용해야만 하는 잘못된 판단이다. 그 잘못된 판단의 결과는 그들이 오롯이 감수한다. 이는 자신의 후손이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의 후손의 삶이 더 나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실수와는 다르다.
- P300

어떤 이의 삶은 나쁠 수 있지만, 그 삶을 끝내는 것이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고려해야 한다. (중략) 상이한 사람들은 상이한 무게의 짐을 견뎌낼 수 있다. 그 사람에게 계속 살라고 가족들이 기대하는 것이 부당한 경우조차도 있을 수 있다. 다른 경우에는 그 사람의 삶은 나쁠 수 있지만 자살하여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의 삶을 이미 그러한 것보다 한층 더 못하게 만들 정도로 나쁘지는 않을 수 있다.
- P303

내가 도달한 결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심하게 염인적인(misanthropic)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나는 삶이 불쾌함과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아이를 갖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더 나중이 아니라 더 일찍 인류가 끝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논증했다. 그것은 염인주의(厭人主義)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논증의 압도적인 취지는 인간에게 적용된다면 염인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애적인(philanthropic) 것이다. (중략) 유정적 삶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그 삶을 갖게 되는 존재에게 해악이다. 나의 논증은 그 해악을 가하는 것이 그르다고 시사한다. 해악을 가하는 것에 반대하여 논증하는 일은 해악을 입는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배려하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 P306

(역자 후기)
이미 있는 사람들에게 더 이득이 된다는 것만으로 친출생주의 근거가 확보된다고 믿는 사람든 인간을 한낱 수단으로 대우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베너타의 결론은 도덕적 결론이기 때문이다. 실천적 이유 중에서 도덕적 이유는 다른 모든 이유에 우선한다. 친구의 돈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이유와 돈이란 더 많이 가질수록 이득이 된다는 실천적 이유를 동일 평면에 놓고 무게를 가늠하는 사람은 이유를 잘못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존재케 하는 것이 그 누군가에게 도덕적 잘못이 된다면, 그 행위를 통해 이미 존재하는 사람이 통상적인 이득을 더 본다는 것은 결론에 영향을 미치는 근거로 제시될 수 없다. - P316

(역자 후기)
이 책은 단지 철학적 흥밋거리가 아니라 실천과 직결되는 함의를 갖는다. 우선 베너타의 논증은 무엇보다도 출산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숙고하는 개인에게 중요한 도전을 제기한다. 만일 베너타의 논증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잘못이라고 여기는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도전은 출산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이들뿐만 아니라, 이미 출산을 한 번 이상 했다 하더라도 추가로 출산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개인적으로 출산을 독려하거나 사회적으로 출산을 하지 않으면 불리하게 대우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것의 도덕적 타당성을 검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제기된다. 더 나아가 사회가 취할 수 있는 정책에도 도전을 제기한다. - P317

(역자 후기)
이 책의 결론이 적어도 유력하다면 출산에 관련된 기본권이 단지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신체의 자유만이 아니게 된다. 양심의 자유 역시 관련된다. 도덕적으로 큰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개인의 판단을, 다른 사람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조종하여 각종 제재와 불이익을 부과하여 다른 판단으로 대체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 침해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 숙고조차 하지 않을 것이므로 겉보기에는 도전을 전혀 마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도덕의 문제는 도덕을 무시한다고 해서 거기 없는 것이 아니다.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이성적 숙고를 통해 결정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이 책의 논의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정거장을 제공할 것이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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