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이라는 거짓말 - 진정한 나를 찾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이유
앤드류 포터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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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책 중 제일 재미있었다.

생각할 거리가 한가득, 더 읽고 싶은 책도 잔뜩.

내용이 풍부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으면서도, 설명이 친절하고 유머러스하다. 

우리는 진정한 나, 진정한 삶, 진정한 경험의 의미와 관련해 일종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 핵심에는 자기 실현과 자기 발견을 소중하게 여기는 개인주의가 자리한다. 물론 가치 있는 생각이다. 문제는 거기에 반사회적, 비순응적, 경쟁적 속성이 내재한다는 점이다. ‘너만의 어떤 것을 하라’고 권하는 히피 버전의 진정성 추구는 남들은 하지 않는 행동, 튀는 행동을 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순응적이고 천편일률적인 대중의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경쟁을 유발한다. 잘 살펴보면, 로프트에서 살기, 생태관광, 슬로푸드 운동 같은 소위 ‘진정성 잇는’ 생활양식들에서도 위장된 형태의 지위 획득 행위가 발견된다. 그리고 이는 타자에게 분개의 감정을 일으킨다. - P22

가톨릭교는 세계(하느님이 7일 만에 창조함)와 지구생명체(하느님이 흙을 빚어 아담을 만들고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듦)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강력한 포괄적 교리를 갖췄다. 게다가 도덕률(십계명)과 그에 대한 정당성(신의 명령), 그리고 위반할 경우의 벌칙(불지옥에 떨어짐)까지 제공한다. 무엇보다 성서는 신부가 매개하는 성찬예식을 통한 영혼의 구원과 삶의 의미를 설명한다. 과학, 정치, 도덕, 영적 구원. 가톨릭교회는 존재론적, 정치적, 사회적, 과학적 욕구를 종합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원스톱 쇼핑몰이다. - P33

포괄적 종교의 임무는 지구상과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모든 현상에는 결국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는 신의 의지 혹은 신의 명령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된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목적론적 설명’ -궁극의 목적이나 목표를 염두에 둔 설명- 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 버전이다. 우주 속에 구조적으로 탑재된 궁극의 목적, 목표, 역할에 기대는 일이 불합리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날 때 세상에 대한 환멸이 찾아온다. - P34

과학적 사고방식의 핵심요소는 두 가지다. 첫째는 일반법칙과 일반원리 추구에 매진하는 것이고, 둘째는 과학의 진보란 개방적이며 궁극적으로 비결정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 P36

어떤 종류의 소외든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소외감을 느꼈다고 해서 반드시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문제 상황은 아니라는 점이다. 심리적, 사회적 소외는 둘 다 일정 상황에 대한 묘사일 뿐이다. 전자는 개인의 상황을 묘사하고, 후자는 개인, 집단, 제도 간의 관계를 설명한다. - P58

루소는 어떤 오지나 먼 과거에서 근대성이 제거된 안식처를 찾는 대신,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가장 기본적이고 즉흥적이고 강렬한 느낌과 감정을 돌봄으로써 진정한 자기를 찾으라고 제안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진정성 있는 인간은 자기 내면의 깊은 감정과 접촉하는 사람, 감정적 삶을 터놓고 드러내는 사람이다. - P87

루소야말로 몇백 년에 걸친 열정 대 이성, 예술 대 상업, 개인 대 사회, 보헤미안 대 부르주아의 문화전쟁에서 중요한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르주아가 된다는 것은 진정한 자아로부터 스스로를 소외하는 일이며, 다시 말하면 안락과 안전을 앞세워 창의력을 위축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사익을 위해 신념을 버린 것이다. 순응하지 않는 보헤미안, 주류와 투쟁하는 외로운 반항아가 되는 것만이 다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진정성 있는 사람은 그 정의상 당연히 대중의 취향, 생각, 의견, 스타일, 도덕관념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 P89

그러나 철학, 문학, 문화이론 전공자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그(인용자주- 발터 벤야민)의 논문이 한 편 있다. 바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이다. 1936년에 출간된 이 논문은 예술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직관을 설명하는 최고의 문헌으로, 초기에는 사진과 영화가, 그리고 요즘은 자유자재로 자르고 섞고 굽는 디지털 콜라주 문화가 야기하는 진품성에 대한 불안감을 폭로한다. - P114

진품성을 인정받으려면 일정한 공동체와 그들의 의례와 연결되는 것이 핵심이며, 의례로부터 멀어질수록 작품의 아우라는 약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벤야민은, 20세기 초 사진과 영화가 정당한 예술 형식인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핵심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았다. 진짜 이슈는 사진과 영화가 기존에 진품 관념이 이해되던 관계를 해체해버림으로써 예술의 본질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점이다. 기술복제시대에 그런 해체를 일으킨 두 주역은 ‘대량화’와 ‘상품화’다. - P115

동일한 복제를 무제한 만들 수 잇는 새로운 종류의 예술품이 등장하면서 무엇이 원본인지는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다. 작품이 일단 공동체 의례에서 했던 역할을 벗어나는 순간, 즉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놓여야 할 필요성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동시적, 집합적 경험이라는 현상의 등장을 목격한다. - P115

대중상품으로서의 예술의 가능성을 열어젖힘으로써 기술복제시대는 진품성의 위기를 초래했다. 오락이 세속화, 상업화, 대량생산화되는 시대에는 작가의 삶이 작품의 아우라를 보존하는 예식의 역할을 떠맡는다. 작가들의 과거, 이력, 라이프스타일, 이미지는 그들의 작품을 거품 낀 천박성과 상업성에서 구해내 창조적 전통이나 서사에 고정시킬 안전장치다. - P115

요즘 현대미술 작품들은 개념도 황당하고 솜씨도 미숙해서 ‘우리 애도 저 정도는 그리겠네’라는 문외한들의 전형적인 불평은 오히려 애들한테 모욕일 지경이다. 그러나 그런 불평은 초점을 벗어난다. 작품 자체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팔리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페르소나 또는 ‘브랜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미술가 중에 데미언 허스트만 한 브랜드는 찾아보기 어렵다. - P117

경영학 교수 돈 톰슨은 저서 ‘1200만 달러짜리 박제상어’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100만 파운드로 살 수 있는 것 중에 유명 상표 현대미술품처럼 사회적 지위와 인정을 가져다주는 물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람보르기니를 사는 건 천박한 취향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테고, 돈 있으면 요트를 살 사람도 많겠지만, 허스트의 땡땡이 그림을 사서 벽에 걸면 사람들이 "와우, 이거 허스트잖아요?"라고 반응한다는 얘기다. - P118

현대미술의 공허함은 예술 작품의 대량생산으로 말미암은 진품성 위기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렇다고 이게 과연 발터 벤야민을 근심시켰을 만한 종류의 결과인지도 분명치 않다. 예술 작품의 기술복제로 인해 예술이 대중의 오락거리나 심지어 전체주의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는 현상을 그가 경계한 것은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대중이 예술에 접근하기 쉬워지면서 실력자나 엘리트의 전유물이던 예술의 소비와 비평이 민주화되는 효과를 목격했다. - P118

중심부에서 제작되는 예술을 대중이 소비하던 발터 벤야민의 시대와는 달리 디지털문화 시대의 예술은 소비뿐 아니라 생산도 민주화되고 있다. 수백만의 아마추어가 직접 제작한 음악, 동영상, 사진, 소설이 인터넷에 넘친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현상은 모든 개인은 창조적 영혼을 지닌다는 루소적 이상의 성취다. 하지만 그렇데 다들 창작에 여념이 없다면 대체 누가 그걸 소비할 시간이 있겠는가? 관심이 희소한 경제에서는 좀 거창하고 작위적인 이벤트를 동원해서라도 관심을 가장 잘 이끌어내는 아티스트가 대박을 낸다. - P120

예술 작품의 진정성은 상품화 현상에 의해 위협받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알고 보면 진정성이란 큰돈을 쓸 의사가 있는 사람들이나 획득할 수 있다. 원래 성스러운 제례나 고대의 공동체 전통에서 기원했던 아우라는 이제 모든 마케터와 브랜드 매니저가 주시하는 훌륭한 판매 전략으로 탈바꿈했다. - P121

진정성 추구는 광고업계의 입장에서 볼 때 현대판 성배 찾기와 같아서, 브랜드 상품을 "왜곡된 메시지와 날조된 경험으로 이루어진 눈부신 가공의 세상"을 넘어서는 고매한 차원으로 승격시킬 수 잇는 궁극의 마케팅 전략이다. 진정성 게임에 참여하는 것은 이제 마케팅에서 기본이고 필수이며, 모든 브랜드 전략의 판단 기준이다. 소비자는 더 똑똑해지고 세련됐다. 이들은 끊임없는 광고의 홍수를 경계하는 한편 독창성, 진실성, 가치를 약속하(고 안겨주)는 브랜드 상품을 기꺼이 구매할 의사를 보인다. - P125

주변을 한번 둘러보라, 자기를 ‘진정성을 옹호하는 반영웅’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권위를 인정하고 지위 추구를 즐거워하고, 일을 너무 사랑하고, 사회에 순응하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 있는가?물론 소수 존재한다. 그들을 일컫는 용어도 있다. 좀비사원, 샌님, 꼰대, 부화뇌동자, 여피족, 파시스트. 그러나 아무도 자신이 부화뇌동자나 여피라고 시인하지 않는다. 진정성 없는 삶을 사는 건 항상 ‘남들’이나 하는 짓이다. - P133

헛소리(인용자주- hoax)는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가리는 게임에 아예참여하지 않는다. 헛소리가 가장 중요시하는 미덕은 정확성이 아니라 진정성이다. 헛소리 치는 사람들은, "세상을 정확히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자기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보여주려고 애쓴다"고 프랭크퍼트는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 대신 진심을 보여주는 데 가장 집중하는 두 분야, 즉 정계와 광고업계가 헛소리가 제일 심한 분야라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달리 말하면 정치와 광고는 진정성으로 겉치장하는 데 가장 신경 쓰는 두 분야라 할 수 있다. - P136

과시용 진정성은 유혹적이고 매력적이다. 과시가 유효하려면 최소한 외관상 유용하거나 사회적으로 유익한 모습을 띠어야 한다는 베블런의 통찰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하기 때문이다. 즉, 본의를 숨기고 마치 다른 목적을 지니는 듯한 외양을 연출한다. 여기서 본의란 지위 추구다. - P148

실생활에서 집단극화(group polarization) 현상은 (적어도 민주주의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매일 다양한 집단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면서 극단적으로 쏠리는 경향이 완화되기 때문이다. 선스타인은 인터넷상에서의 집단극화를 특히 걱정한다. 블로고스피어는 일련의 반향실처럼 작동하고, 모든 관점이 반복 강조되면서 히스테리에 가까운 고성으로 증폭된다. 선스타인은 정치가 온라인으로 옮겨감에 따라 공론장은 편파와 극단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 P183

사생활 보호의 종말은 곧 문화적 성숙성의 종말이 될 것이다. 감시는 범죄자에게나 필요하고, 쓸데없는 가십은 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사생활 보호를 "그만 포기하고 잊어"버리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꿈을 포기하고 잊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 P194

TV토론에 참여해본 사람은 금방 깨닫는 사실이지만 TV란 뉘앙스, 깊이, 섬세한 구분을 싫어하는 지적으로 우악스러운 매체다. TV는 첨예한 대립을 좋아한다. 정치 프로그램이 시사토론에 진보와 보수인사를 초대할 때, 방송 PD들은 양편의 동의나 양보를 기대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 갈등이야말로 시청자에게 전달되는 메시지이며, 논쟁에서 승리자는 있을지 몰라도 (고등학교 토론대회에서 점수를 따내는 식으로) 그 승리와 견해의 옳고 그름은 무관하다. - P201

TV토론의 영향력이 커지자 토론 참석자들은 점점 더 위험을 기피하게 됐다. 특히 대통령이나 총리직이 걸린 경우 토론의 목표는 승리가 아니라 심각한 실수 없이 살아남는 것이다. (중략) 이러니 TV 시대의 정치란 준비된 원고, 천편일률적인 답변, 외워서 전달하는 요점으로 가득한, 대본대로 따라하는 이벤트가 될 수밖에 없다.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TV토론을 보고 있으려면 너무 멍청하고 답답해서 내 머리에 내 손으로 못이라도 박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 P202

민주주의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낙태, 동성애자의 권리, 자유와 안보의 균형 등 근본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서로 이견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누군가가 단순히 자신이 반대하는 견해를 지지한다고 해서 세뇌당한 증거로 여기는 것은 민주주의를 믿지 않는다는 얘기다. - P216

하지만 투표율이 한 나라의 민주주의를 진단하는 그렇게 대단한 척도일까? 역사를 되돌아보면, 국민들이 정치에 ‘도에 지나치게’ 참여하던 사회라는 게 존재했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는 체육관, 음악연주단, 야외활동 동아리 할 것 없이 시민사회의 거의 모든 조직이 정당 노선을 따라 조직됐다. 이 과열된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투표율은 사소한 선거에서조차 어김없이 80퍼센트 이상을 자랑했고, 독일인들은 공적 영역에서 취하는 모든 행동이 자신의 암묵적인 정치 성향을 반영한다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졌다. 독일사회가 이렇게 심하게 정치화되어 있었던 덕택에, 집권한 나치는 그런 조직들을 너무나 쉽게 재조직화할 수 있었다. 시민사회를 새삼 새로 정치화활 필요 없이, 이미 위태롭게 정치화된 조직을 ‘나치화’하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 P230

정치에서 진정성의 씨를 말린 것은 스핀닥터들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성에 대한 우리의 욕구가 정치인들로 하여금 진정성을 꾸며내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대안은 뻣뻣하고 정직하고 너무나 따분한, 즉 함께 맥주 마시고 싶지 않은 후보에게 표를 주는 것이다. - P232

건강한 문화는 건강한 사람과 같다. 끊임없이 변하고 자라고 진화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떤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중략) 한 문화를 한 사회의 면역체계와 유사한 것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 외부의 이물질에 노출될수록 튼튼해진다는 얘기다. (중략) 특정 문화를 보호하고 보존할 때 원주민이 관광객 보라고 시전하는 ‘진정한 고유성’은 우리가 신경 쓸 대상이 못 된다. 우리가 관심을 쏟아야 할 더 적절한 대상은, 더 유연하고, 더 튼튼하고, 세상과 더 긴밀히 관계맺고 잇는 것, 다시 말해 우리가 ‘세계관’ 혹은 ‘에토스(ethos)’fk 부르는 것이다. - P239

‘에토스’는 스타벅스에서 파는 생수 상표이기 이전에, 한 사회의 도덕, 정치, 종교, 예술, 과학적 기풍을 가리키는 유용한 그리스 용어다. 하나의 사회가 세계 또는 외부인과 어떤 조건으로 관계 맺을지를 규정하는 그 사회의 관습과 전제, 의식과 상징, 규칙과 위계질서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에토스다. 우리는 문화 정체성을 논할 때 보통 이 에토스를 짚고 넘어간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고유한 관점, 혹은 간단히 표현해 ‘세계관’이다. 이 정체성 또는 세계관은 사회의 예술적 창조와 과학 혁신을 촉진하며, 에토스에 충분한 자신감이 담겨 있으면 (고대 그리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20세기 중반의 미국처럼) 놀라운 성취를 거둘 수 있다. - P239

공동체 특수주의는 자유주의의 집착적 자기애를 넘어 더 위대한 어떤 것에 대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소중한 가치로 흔히 전제된다. 가족, 친지, 그 외 역사, 종교, 가치관을 공유하는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우리는 ‘자기’의 단기적 장기적 욕구에서 벗어나 타자의 욕구에 더 민감해진다. 공동체주의자는 자유주의에 대해 "세상 모든 것이 다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라고 일갈한다. 개인의 욕구를 초월하는 것, 우리의 충성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P246

자유주의적 세계시민주의는 허무주의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비난은 익숙하지만 잘못된 비난이다. 고전적인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세계시민주의가 이기주의와 자기도취를 허락해서 매력을 느낀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세계시민주의가 새로운 가치, 새로운 삶의 양식에 눈뜨게 하고, 관용과 상호존중의 미덕을 장려하는 방식을 보며 좋아했다. - P246

이 논쟁에서 한 가지 난점은 세계시민주의자와 공동체주의자가 여러 면에서 서로 동문서답을 한다는 점이다. 세계시민주의자는 특정한 자유주의 원칙의 중요성을 논하고, 공동체주의자는 자유주의자가 가치관에 일으키는 효과를 두려워한다. - P247

사회 통합과 인종 다양성의 관계를 집중 연구한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남은 다양성을 사회 안정의 원천으로 본 볼테르의 믿음과 대조되는 연구 결과를 선보인다. 퍼트남에 따르면, 이민자가 늘고 다양성이 증가하면 사람들은 "몸을 움츠리고 거북이처럼 행동"하며, 타자에 대한 개방성이 감소하고 상호 불신이 증가해 공동체의 결속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간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다양성이 큰 공동체는 균질하고 결속력이 강한 하부 소그룹으로 분열될 뿐 아니라 공동체 전반으로 불신이 확산된다고 퍼트남은 말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자기와 다르게 생긴 사람뿐 아니라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마저 불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 P248

다양성 증가가 단기적으로 공동체를 약화시킨다면, 더 광범위하고 포용성 있는 시민 정체성을 구축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퍼트남의 주장이었다. 그가 지적한 대로 미국은 20세기 전반에 아일랜드, 이탈리아, 폴란드, 독일, 유대인 이민자 수백만 명을 미국 사회에 동화시킨 역사가 있다. 이를 다시 이루지 못할 이유는 없다. - P249

만약 어떤 공동체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 구성원을 무지하고 가난하고 고립되게 만들고 선거권도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공동체는 우리가 존중하거나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다. 히말라야 기슭에서 농민들이 뼈 빠지게 벼농사를 하는 농경시대 불교 왕국 부탄의 매력적인 모습이나, 1946년 모습 그대로 정지한 아바나를 보는 일이 강단좌파나 진정성 추종자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부탄이나 쿠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진정성이라는 허사으이 희생자다. 그리고 자기들 문화를 반근대의 상징 삼아 박물관에 들여놓으려는 자들에게 붙잡힌 인질이다. - P268

논의에서 간과된 것은 세계시민주의 덕택에 얻게 된 것들, 즉 정치적 자유권, 부의 증가, 지성과 창조성 발휘의 기회 증가다. 더 중요한 것은 세계시민주의는 물질적 향상뿐 아니라 도덕적 진보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세계시민주의의 핵심 도덕은 포괄적 관용에 기초한 보편주의다. (중략) 만약 세계시민주의가 결국에 가서 특정인이 원하는 종류의 ‘진정한 문화’ 관념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땐 콰메 앤터니 애피아 교수의 말이 맞다. 안됐지만 ‘진정한 문화’가 양보해야 한다. - P268

공산주의 관광산업이 이렇게 성황중이라는 것은, 나치즘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공산주의가 사람들에게 가볍게 여겨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저널리스트 앤 애플바움은 저서 ‘굴락(Gulag)’ 서문에서, "어떤 대량살상의 상징물은 우리에게 공포감을 주는 반면, 우리를 웃게 만드는 대량살상의 상징물도 있다"는 점이 희한하다고 서술한 바 있다.
이것은 오래된 문제다. 해설도 가지가지다.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가 기본적으로 포용과 평등의 이데올로기인 반면 나치즘은 배타적이고 증오에 찬 인종주의임을 지적한다. 나치즘은 강력한 유대인 로비 때문에 순전한 절대악의 상징이 됐지만, 소련 공산주의는 수많은 서구 뭉닝과 지식인들이 좌파여서 쉽게 용서받는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 P285

팩스턴은 파시즘의 경우 다음 사항에 집착하여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정치운동이라고 결론 내린다.
-개인보다 집단과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경향
-순수와 결속에 대한 상실감
-이질적 문화의 영향에 따른 쇠락에의 두려움
-합리적 원칙보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를 숭배하는 경향
-폭력과 죽음에 아름다움과 구원의 힘이 담겨 있다는 믿음 - P293

서구 합리주의에 대한 쿠틉의 거부는 오사마 빈 라덴의 마음속에서 미국을 향한 비대한 혐오감으로 둔갑했다. ‘미국’은 지하드 전사들에게 정치(개인주의, 민주주의, 세속주의), 비즈니스(세계화, 교역, 상업), 오락(소비주의, 술, 섹스)등 근대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상징물이었다. 라이트가 지적하듯, 알카에다의 최고 이론가 쿠틉은 20세기가 제공하는 거의 모든 것에 등을 돌림으로써 이슬람이 근대와 평화롭게 공존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원리주의자들이 향하는 목적지는 오로지 한 곳, 바로 과거였다. - P295

알카에다(와 이슬람 원리주의)를 이처럼 미국 소비자본주의를 거부하는 진정성 운동으로 묘사하면 9.11 이후 지적 지형도 위에 형성된 괴이한 대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좌파가 이슬람 원리주의의 노골적인 목표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반적 논제에 널리 동조하는 현상 말이다. 즉, 세계무역센터 테러로 민간인 3000명이 살해된 일을 내놓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도 빈 라덴의 서구 문화 비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많다. - P296

그것은 후쿠야마가 시인한 대로 역사의 종결이 낳은 컴컴한 수렁 같은 권태이며,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가치 있는 건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느끼는 깊은 공포다. 원리주의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모든 밧줄에서 풀려난 자유로운 정신, 무제한적인 가능성의 바다에서 닻을 내릴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는 순수하게 자유로운 지성에 대한 공포다. - P305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누구나 거울을 들여다보며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무엇이 의미 있는가’ ‘무엇이 성스러운가’를 자문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질문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변주에 해당한다. 다른 종교나 이념과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이에 대해 미리 준비된 답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근대는 그런 기존의 해답을 전부 쓸어버리고 신성함이라는 관념을 약화시켰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위의 질문에 ‘그런 건 없다’ 아니면 –그보다 조금 나은- ‘당신한테 달렸다’라고 답한다. 이게 심히 공포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를 부정하고 과거에 대한 향수와 폭력에 호소하는 행태는 규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진정성 추구라는 우리의 대안 역시 혼란만 야기하고 성공할 수 없는 허구일 뿐임을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 P305

인정욕구가 보편적으로 충족되면 인정의 가치가 사소해진다는 니체의 단순하지만 날카로운 통찰이 힌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누구나 인정받는다는 건 아무도 인정받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 인정이란 본질적으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구별(distinction)의 한 형태로, 거기에는 권력관계와 우열 판단이 내포된다. 이때 인정이라는 용어에 진정성을 겹쳐놓으면, ‘모든 것이 진정하다면 아무것도 진정하지 않은’ 것이 된다. 진정성이란 ‘무엇과 대조해서 진정한 거냐?’라는 질문에 답함으로써 비로소 힘을 얻는 대조의 용어이기 때문이다. 결국 진정성은 누구나 누릴 수 없기 때문에 가치 있는 지위재화다. - P311

진정성 허구를 꿰뚫어보기 위해서는 근대와 화해하고 지난 250년이 비극적 실수가 아니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중략) 근대와의 화해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긍정적으로 포용하는 일을 수반한다. 그것은 그 두 가지가 단순한 필요악이 아니라 그 자체의 가치 구조와 도덕 기반을 갖춘 정치 경제의 조직체계로서 이전 체계보다 일정한 장점을 지님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시장에 등을 돌리는 일은 옳지 않다. 또한 분노와 억압으로 고통받던 수많은 이들의 숨통을 터준 권리와 자유를 해치는 사회질서를 완벽한 것으로 이상화하며 갈망해서도 안 된다. - P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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