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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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하고 메시지가 분명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독일 사람들이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피로사회’는 2010년 가을 독일에서 출간되었고, 출간되자마자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이 책이 시대의 뇌관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디 차이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슈피겔 등 독일의 모든 주요 언론 매체들이 이 책에 관해 앞다투어 서평을 내보냈으며, 2주 만에 초판이 매진됐다. ‘피로사회’는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현재까지 판을 거듭하고 있다. 철학책이 이러한 호응을 얻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최근 디 타게스타이통이 지적한 것처럼, ‘피로사회’의 저자는 거의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비평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P5

사회는 오늘날 면역학적인 조직과 방어의 도식으로는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구도 속으로 점차 빠져들어 가고 있다. 이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한다. 이질성은 면역학의 근본 범주이다. 모든 면역 반응은 이질성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오늘날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면역학 이후의 차이, 후기근대적 차이는 더 이상 병을 유발하지 않는다. - P13

보드리야르의 폭력 이론은 이질성과 무관한 긍정성 내지 동질적인 것의 폭력을 면역학적으로 서술하려고 시도하는 바람에 논리적 혼란과 부정확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 P19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더 이상 오늘의 사회가 아니다. 규율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사회가 들어선 것이다. 그것은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은행, 공항,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이 사회의 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 그들은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이다. - P23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이 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이러한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준다. - P24

에렝베르에 따르면 우울증은 규율사회의 명령과 금지가 자기 책임과 자기 주도로 대체될 때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 P27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인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hype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 P32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 P32

‘활동적 인간의 주된 결함’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쓴다. "활동적인 사람들은 보통 고차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 (...) 돌이 구르듯이 활동적인 사람들도 기계적인 어리석음에 걸맞게 굴러간다." - P49

멜빌이 묘사하는 사회는 아직 규율사회이다. 따라서 소설은 온통 규율사회의 건축적 요소인 담장과 벽으로 점철되어 있다. ‘필경사 바틀비’가 ‘월가의 이야기’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 P56

바틀비를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긍정성이나 가능성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발동시키라는 후기근대적 명령의 짐을 지고 있지 않다. 베껴 쓰기는 도무지 어떤 자발성도 허용하지 않는 활동인 것이다. 아지 꽌습과 제도의 사회 속에 살고 있는 바틀비는 우울한 자아-피로를 초래하는 과중한 자아의 부담을 알지 못한다. 병리학적 측면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아감벤의 존재신학적 바틀비 해석은 소설 자체의 이야기와도 맞지 않는다. 이 해석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심리적 구조의 변동 또한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 P58

탈진의 피로는 긍적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 P71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 P72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복종, 법, 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 쾌락, 선호가 그의 원칙이다. 그가 노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 그의 노동은 향유적 노동이다. 그는 타자의 명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명령하는 타자의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해방적이기만 한 jt은 아니다. 자유에서 새로운 강제가 발생한다는 데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타자로부터의 자유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전도되며, 이는 오늘날 성과주체가 겪는 많은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 된다. - P86

세네트 역시 보상의 위기가 온 원인으로 나르시시즘적 장애와 타자 관계의 결핍을 들고 있다. "성격 장애로서의 나르시시즘은 뚜렷한 자기애와 완벽하게 대립된다. 자아 속으로의 침잠은 보상을 낳지 못하고, 오히려 자아에게 고통을 가한다. 나르시시즘에서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가 소멸하는데, 이는 자아가 결코 뭔가 새로운 것, ‘다른 것’과 마주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87

경험하는 인간은 타자와 마주한다. 경험은 이화적이다. 반면 체험은 자아를 타자 속으로, 세계 속으로 연장시킨다. 따라서 체험은 동화적으로 작용한다. 자기애는 자기 자신에 비해 타자를 폄하하고 거부한다는 점에서 아직은 부정성의 영향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아는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정립한다. 이로써 자아와 타자를 분리하는 경계선이 유지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타자와의 대립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반면 나르시시즘에서는 타자와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나르시시즘적 장애를 겪는 사람은 자기 자신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리하여 타자관계가 소실되고 이에 따라 안정된 자아의 이미지도 형성되지 못한다. - P88

호모 사케르에 관한 아감벤의 이론은 부정성의 도식을 고수한다. (중략) 그는 이미 낡게 느껴지는 부정성의 세속화된 형식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까닭에 긍정성의 극단적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날의 폭력은 적대적인 이견에서보다는 순응적 합의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버마스에 반하여 합의의 폭력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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