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우리말 달인 건방진 우리말 달인 시리즈 1
엄민용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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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달아, 안녕?

봉두난발에 수염이 숭숭 난 얼굴, 세모꼴 눈에 사람을 비웃는 표정을 하고 꾀죄죄한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네 이름이 우달이였지. 책 앞부분의 등장인물 소개에는

"자칭 타칭 건방진 우리말 달인. 취미는 잘못된 우리말 상식 찾아내서 잘난 척하기, 밤새도록 소주 마시기, 우리말 지식 겨루기, 교과서와 사전의 오류 골라내기, 20여 년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말을 전파하고 있는 천상 우리말 지킴이"

라고 나와 있구나. 그 아래에는 네 개에 대한 소개도 있네. 

"우리말 달인의 애견. 이름은 달코. 주인을 닮아 소주 마시기를 좋아하고 남 일에 참견하기를 즐긴다. 특기는 우리말을 잘못 쓰는 사람을 만나면 주인과 함께 혼쭐 내주기. 주인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될 순 없다."

실제로 이 책에는 우달이 네가 우리말을 잘못 쓰는 사람들을 때리거나 너 스스로도 우리말을 잘못 쓰다가 네 개에게 맞는 그림들이 많아. 재미있으라고 그려 넣은 것이겠지만...어떻게 하니? 난 전혀 재미가 없었어.

애당초 '우리말을 잘못 쓰는 사람은 혼쭐을 내줘야 한다'는 사고 방식 자체가 큰 문제라고 난 생각하거든. 메뉴판을 잘못 쓴 식당에서는 주인에게 항의를 해야 한다든가, 남에게 "칠칠하다"는 칭찬을 하라든가... 네가 재미있으라고 하는 얘기들이 나는 잘 이해가 안 간다. 언어 생활에서 규범을 정확히 지키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며 원활한 의사 소통을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자세가 결핍되어 있다면 아무리 규칙을 잘 알더라도 결코 '달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해.

이런 까닭으로, 책을 읽는 내내 난 참 불쾌했어. 읽기 편하고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반말을 썼다고 너는 말하지만, 너의  반말이 "건방진" 태도와 결합해서 빚어내는 효과는 최악이었단다. 나도 우리말 규범에 관심이 많고 되도록 정확한 말을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책을 빌려 읽지도 않았겠지.) 곁에 두고 늘 찾아볼 우리말 참고서로 이 책을 고르고 싶진 않네.

(덧붙임) 네가 하는 얘기 중에'으 불규칙 활용'(101p)이나 'ㄹ 불규칙 용언'(218p) 같은 것은 틀린 말이란다. '불규칙 활용'은 같은 음운 환경에 있는 말들이 서로 다른 형태로 활용할 때 쓰는 문법 용어거든. 예를 들어, "길이 굽다"와 "생선을 굽다"의 경우 똑같은 '-어' 어미 앞에서 전자는 "굽어", 후자는 "구워"가 되지? 이게 불규칙 활용이야. 어간의 끝 모음 'ㅡ'가 어미 '-어' 앞에서 탈락하는 것이나, 어간의 끝 자음 'ㄹ'이 ㄴ,ㄹ,ㅂ,시,오' 앞에서 탈락하는 것은 특정 음운 환경에서 항상 일어나는 변화이기 때문에 규칙 활용이란다. 또 하나,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과 '우리말=한국어'는 다른 거야. 넌 두 가지를 자꾸 혼용하는데,  차이점을 확실히 알아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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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전통
에릭 홉스봄 외 지음, 박지향 외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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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사건을 불문하고 근,현대사가들이 '만들어진 전통들'에 대해 갖는 한 가지 특정한 관심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그들은 비교적 최근의 역사적 혁신물인 '민족'과 그것에 부수된 현상들, 예컨대 민족주의, 민족국가, 민족적 상징들, 민족사 등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역사적 새로움이 혁신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이 모든 것은 종종 의도적이고 항상 혁신적인 사회공학 (social engineering) 작업들에 의존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민족주의와 민족들은 유태인과 중동 이슬람 교도의 역사적 연속성이 무엇이건 상관 없이 새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그 지역에 존재하는 표준 유형의 영역국가라는 것 자체가 한 세기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1차 대전이 종결된 뒤에야 비로소 진지한 전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수 엘리트보다는 좀 더 많은 주민들이 학교에서 배우고 말하는 것은 물론이요 문자로도 쓰는 표준 국어 역시, 대개는 다양하지만 종종 짧은 역사를 갖는 구성물일 따름이다. (아래에 계속)-40-41쪽

(위에서 계속)
플랑드르 어를 연구한 어느 프랑스 역사가가 꽤 올바르게 관찰했듯이, 오늘날 벨기에에서 가르치는 플랑드르 어는 플랑드르 지역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아이들에게 말했던 그 언어가 아니다. 요컨대 그것은 문자 그대로 '모국어'가 아니라 단지 은유적으로만 '모국어'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미심쩍기는 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역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근대 민족과 그것에 수반되는 일체의 부속물들은 일반적으로 새로움의 정반대, 즉 아주 먼 고대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구성된 것의 정반대, 즉 너무도 자명해서 더 이상 정의할 필요도 없는 '자연적인' 인간 공동체라고 간주된다. 그러나 역사 내적이든 역사 외적이든, '프랑스'와 '프랑스 인'이라는 근대적 개념에 묻혀 있는 연속성이 무엇이든 간에 - 누구도 이 개념을 부정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 바로 이 개념들 자체가 구성되거나 '발명된' 요소를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아래에 계속) -41쪽

(위에서 계속)
그리고 근대 '민족'을 주관적으로 구성하는 것 대부분이 그런 구성물들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최근에 만들어진 적합한 상징이나 혹은 알맞게 재단된 담론 ('민족사'와 같은)과 관련되어 있는 까닭에 민족적 현상은 '전통의 발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 없이는 결코 적절하게 조사될 수 없는 것이-41쪽

잉글랜드화된 스코틀랜드 귀족, 오름세의 젠트리, 학식 있는 에딘버러의 법률가와 에버딘의 신중한 상인들, 즉 가난에 찌들지도 않고 돌과 늪을 넘어 다니거나 산에서 밤을 샐 일도 결코 없는 그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고지대 의복을 입고 과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과시한 것은 자기 계층의 전통적인 복장인 역사적인 홀태바지나 거추장스런 혁대 맨 어깨걸이가 아니라, 새로운 발명품인 짧은 치마 내지 짧은 킬트 중에서도 비싸고 장식이 많은 종류였다.
(아래에 계속)-64쪽

(위에서 계속)
이러한 놀라운 변화는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일반적이고 전 유럽적인 것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낭만주의 운동, 즉 멸종 위기에 처한 고귀한 미개인에게 문명이 바치는 예찬이었다. 1745년 이전까지 고지대인들은 약탈을 일삼는 야만인들로 멸시받았다. 1745년에 그들은 위험한 반란군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746년 이후 그들의 특징적인 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들에게는 원시인으로서의 낭만성과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로서의 매력이 결부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어시안은 쉽게 승리를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좀 더 특수하고 좀더 면밀하게 살펴볼 가치가 충분하다. 그것은 바로 영국 정부에 의한 고지대 연대 창설이었다.
(아래에 계속)-64쪽

(위에서 계속)
고지대 연대의 창설은 1745년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실제로 최초의 고지대 연대인 블랙워치(Black Watch)는 제43연대 및 제42연대에 뒤이어 1745년 퐁트누아(Fontenoy)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1757년부터 1760년 사이에 노 피트(elder Pitt)는 고지대인들의 호전적 기질을 자코바이트의 위험으로부터 제국의 전쟁에로 체계적으로 돌리고자 했다. 그가 후에 주장했듯이
"나는 능력이 어디에 있든지 그것을 찾고자 했다. 감히 자랑하건데, 나는 최초로 북쪽의 산악지대에서 그것을 찾으려 했고 또한 찾았다. 나는 그것을 불러서 제국에 봉사할 강건하고 대담한 일족을 소환했던 것이다."
(아래에 계속)-64-65쪽

(위에서 계속)
이렇게 만들어진 고지대 연대들은 곧 인도와 아메리카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그들은 새로운 복장 전통도 세웠다. 1747년의 '무장해제법'에서 그들만이 유일하게 고지대 복장에 대한 금지령에서 예외였다. 따라서 켈트 농민들이 섹슨 족의 바지를 영구적으로 받아들이고 켈트 족의 호메로스조차 음유시인의 긴 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되던 35년이라는 시간 동안, 고지대 연대들만이 유일하게 격자무늬 천 직물업계를 살리고 모든 의복 가운데 가장 뒤늦게 만들어진 혁신물인 랭카셔 킬트를 영속시켰던 것이다.
(아래에 계속)-65쪽

(위에서 계속)
본래 고지대 연대들의 군복은 혁대를 맨 어깨걸이였다. 그러나 킬트는 발명되자마자 그 편의성으로 말미암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결국 고지대 연대들도 킬트를 도입하게 되었다. 나아가 그들이 킬트를 군복으로 입기 시작하면서, 아마도 씨족별로 구분되는 격자무늬라는 개념이 탄생했을 것이다. 전쟁의 필요에 따라 고지대 연대들의 수가 증가하면서 그들의 격자무늬 군복들도 구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민간인들도 다시 격자무늬를 입기 시작하고 낭만주의 운동이 씨족 숭배를 부추김으로써, 동일한 구분의 원칙이 연대에서 씨족으로 쉽게 전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장차 일어날 일이다. 일단은 잉글랜드의 퀘이커 산업가가 고안한 킬트가 잉글랜드의 제국주의 정치가(노 피트) 덕분에 소멸될 위기로부터 구제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65-66쪽

이 시기의 가장 흥미로운 특성 가운데 하나가 민족 영웅의 출현이다. (중략)
1770년 데인스 배링튼은 17세기 초 존 윈 경(Sir John Wynne)이 그웨더(Gwedir) 가문의 역사에 대해 기록한 문헌을 출판했다. 이 문헌은 그 몇 년 전 카트(Carte)가 자신의 잉글랜드 역사책을 낼 때 이미 인용한 바 있는데, 그는 그 문헌 가운데 1282년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 음유시인들을 학살한 이야기를 인용했다. 토머스 그래이는 카트로부터 이 이야기를 차용하고 '눈 먼 패리'의 공연에서 영감을 받아 1757년 유명한 시 <음유시인(The Bard)>을 완성했다. 그래이는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여전히 웨일스 시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1282년의 음유시인들에게 후계자가 있음을 증명하지 않는가? 어쨌든 카트의 이야기는 런던에서 모든 옛 웨일스 서적들이 불태워졌고 음유시인들이 유형을 당했다는 웨일스 전설에 어느 정도 근거한 것이었다. (아래에 계속)-166-168쪽

(위에서 계속) 1757년 이후에는 웨일스인 자신들이 그레이의 설명을 믿기 시작했고, 1760년대에는 에반 에반스와 같이 엄밀한 학자도 그레이를 상당히 인용했다. (중략) 1770년대와 1780년대에 이르면 그래이의 <음유시인>은 유명세를 얻어 이미 그 때부터 회화의 주제로 널리 이용되기 시작했다. (중략)
이 이야기 전체는 전설이거나 신화에 불과하다. 기껐해야 중세 잉글랜드 왕들이 예언을 통해 불화를 일으키는 웨일스 음유시인들을 때때로 제약하거나 통제했다는 사실을 심히 과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래에 계속)-168-169쪽

(위에서 계속)
새로운 영웅 가운데 가장 놀라운 인물은 매덕(Madoc)이었다. 그는 주군 오웨인 과이니드의 아들로, 고향인 북부 웨일스의 반목에 낙담해 1170년경 자신의 배 '그웨난 곤' 호를 타고 미지의 서쪽 바다로 떠나 미국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웨일스로 돌아와서 동료들을 모아 그들과 함께 다시 항해에 나선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자손들은 인디언들과 결혼해 여전히 미 대륙의 서부 광야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전설은 18세기에 기원한 것은 아니지만 튜터 왕조가 북아메리카에 대한 스페인의 지배권을 공격할 때 처음 이용되었다. 웨일스에서는 200여년간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휴면 상태로 있다가, 1770년대에 미국 독립혁명으로 미국에 대한 웨일스 인들의 관심이 고조되었을 때 다시 생명력을 얻었다. 독립혁명 그 자체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신생 공화국 미국으로 이민 가 그 곳에서 웨일스 어가 통하는 식민지를 세우자는 강력한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래에 계속)-169-170쪽

매덕 신화는 런던의 목사이자 역사가이며 윌리엄스 도서관의 사서인 존 윌리엄스 박사(Dr. John Williams)가 1790년대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출판한 이후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런던의 웨일스 인들은 모두 열광했다. 이올로 모건이 매덕의 후손들이 살아 있고 웨일스 어를 사용하며 미국 중서부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온갖 문서를 위조했기에, 윌리엄스 박사는 두 번째 책을 내야만 했다. '퍼그' 윌리엄 오웬은 탐험대를 조직하기 위해 '매덕 찾기(Madogeion)' 협회를 조직했고, 이올로는 자신이 탐험대장이 되겠다고 했다. 그는 원 포어의 존 에반스(John Evans of Waun Fawr)라는 진지한 젊은이가 탐험에 나설 준비가 되었다며 나서자 무안해졌다. 이올로는 온갖 핑계를 대고 본국에 남았지만, 존 에반스는 미국을 향해 떠나 끝내 서부 황야에 이르렀다. 그는 스페인 왕에게 고용된 탐험가가 되었다. 여러 차례의 아슬아슬한 모험 끝에 만다 인디언들 (Mandan Indians, 그는 만다 인디언들이 매덕의 후예들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의 땅에 도달했지만, 그들이 웨일스 어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70-172쪽

웨일스에서 문화적 부활 및 신화 만들기 운동은 웨일스적인 생활의 위기, 그러니까 민족의 생명력 자체가 소진되어 가고 있다고 느껴지던 상황에서 싹튼 것이다. 웨일스의 과거는 폐막되고 종료되었으며, 웨일스 인들은 '길고의 서에서 지워졌으니' 분수에 만족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상식적이고 이상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니 웨일스 동포들이 자기들 유산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려면 소수 애국자들의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ㅡ들 애국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위로하며 즐기도록 해 주고 교육할 수 있는 새로운 '웨일스다움'을 창조하는 것, 그러기 위해 과거를 파헤치고 그것을 상상력으로 가공하는 일만이 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느꼈다. 웨일스 인들은 이렇게 창조된 신화적이고 낭만적인 웨일스를 통해 자기들 바로 이전의 과거를 상실하는 대신, 예술과 문학에서 그것의 변형된 모습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꿩도 먹고 알도 먹으려 했던 것이다. (아래에 계속)-196쪽

(위에서 계속) 여기서 우리가 묘사했던 예술적 가공들은 웨일스가 그렇게 어려운 역사적 전환기에 직면했을 때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중요한 치유의 기능을 수행했다. 웨일스적인 생활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었고, 그렇게 변화를 겪는 가운데 우리가 묘사했던 과정이 되풀이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이 낙마하자마자 새로운 신화 제작자들과 전통의 창조자들, 즉 급진적이고 비국교도적인 웨일스 인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사냥꾼은 바뀌었지만, 사냥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196-197쪽

1817년 섭정 왕세자의 딸인 샬럿 공주의 장례식 때에는 장례식 지휘자가 술에 취해 있었다. 10년 후 요크 공작이 서거했을 때에는 윈저에 있는 예배당이 너무나 축축해서 대부분의 조문객들이 감기에 걸렸고, 캐닝(George Canning)은 류머티즘에 걸렸으며, 런던 주교는 심지어 사망했다. 조지 4세의 대관식은 약간의 인기를 회복하려는 절박하면서도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은 시도를 통해 가능한 한 장엄하도록 계획되었으나, 너무나 과장이 심해서 장엄함이 도리어 웃음거리가 되었을 뿐이다. -231쪽

그러나 영국 왕실의 공적인 이미지는 1870년과 1914년 사이에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서투르고 개인적이며 호소력 또한 제한적이었던 왕실 기념식이, 화려하고 공적이며 대중적인 행사로 변모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군주들이 현실 정치에서 점차 물러났기에 촉진된 것이었다. (중략) 군주정의 실질적인 권력이 약화되면서 군주정이 장엄한 기념식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오히려 더욱 증가했다. (중략) 빅토리아 재위 마지막 10년간 그녀의 왕권은, "영국인들에게 지구 전역으로 진출할 것을 격려하는, 영국 인종의 상징"이 되었다. -236-242쪽

1926년의 총파업과 뒤이은 대공황은 전례 없는 규모의 적대감과 고통을 야기했고,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다라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개인적으로 존경할 만한 군주가 '어수선한 시대에 안정의 구심점'으로 그것도 매우 성공적으로 출현했고,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측면은 바로 왕실의 절제되고 고풍스런 기념비적 장엄함이었다. -265-266쪽

앵글로-인도의 문화체제에서 1857년과 1858년의 대반란은 결정적인 분수령으로 보일 수 있다. (19세기 후반부에는) 단순한 방문이건 의무 과정이건 어쨌거나 인도를 여행하는 잉글랜드 인들을 위해 그 거대한 사건과 연루된 장소들-델리 리지(Delhi Ridge), 칸푸르의 메모리얼 웰(Memorial Well) 및 부활의 천사라는 거대한 대리석상으로 꾸며진 대정원, 럭나우 총독 대리 관저(Residency in Lucknow) [인용자주: 폭동 당시 영국군 진지, 영국인들이 학살당한 곳, 격전지 등] -을 방문하는 정규적인 대폭동 역사탐방 (Mutiny pilgrimage)이 있었다. 무덤과 기념물들, 기념석들과 그 위에 새겨진 비문 그리고 유럽 풍 교회 벽면의 현판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순교와 희생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적어도 빅토리아 조의 잉글랜드 인들에게는 그들의 인도 지배를 성스러운 것으로 여기도록 만든, 궁극적인 군사적-군사외적 승리를 떠올리게 했다.
(아래에 계속)-344-345쪽

(위에서 계속)
요컨대 대폭동은 1859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잉글랜드 인들에게 그들의 인도 지배를 정당화하는 중심적 가치 - 희생, 의무, 불굴의 의지-를 구현하고 표현하는 영웅 신화로 보였다. 무엇보다 그것은 적절하게 구축된 권위와 질서를 위협한 인도인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궁극적 승리를 상징했다.-345쪽

인도인들이 특히 민족운동 초기에 그들 자신의 조직들을 통해 그들 자신의 공적인 정치적 용례를 발전시켰을 때, 그들은 어떤 용례를 사용했던가? 나는 그들이 실제 자신들의 전임, 곧 영국 지배자들이 체택했던 것과 똑같은 용례를 사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전 인도 회의 평의회들(All India Congress Committes)의 초창기 회합들은 그 행사나 주요 인물 및 그들의 연설을 보건대 알현식과 매우 흡사하다. 그들 역시 그런 수단을 통해 '진보적 통치'의 가치들을 달성하고 인도인들의 행복과 복지를 구하려고 한 것이다. 영국식 용례는 초기 국면의 민족주의 운동의 담론에 어휘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었다. 실제로 초기 민족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인도제국의 진정한 목표에 대해 영국 지배자들보다 훨씬 더 충실하다고 주장했다.-390-391쪽

유럽의 만들어진 전통들은 식민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 인들에게 잘 규정된 일련의 준거점들을 제공했다. 비록 거의 모든 경우가 인간관계 및 주종관계에서 종속적인 역할로 진입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프리카 인들은 그 전통들을 통해 이러저러한 유럽의 신-전통주의적 행동 양식을 받아들여 사회화되기 시작했다. 확실히 역사문헌을 보면, 부대의 병사가 되는 일이나 19세기 국교회 의식을 행하는 법을 배우는 일을 자랑스레 여기는 아프리카 인들로 빼곡하다. 그런 과정들은 종종 식민권력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귀결되기도 했는데, 이는 사회화의 도구로서 신-전통들 자체에 잠복해 있는 위험이었다.-428쪽

국가는 점차 '시민적 신분'이라는 존재를 합법화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것을 정의했다. 물론 국가가 그런 종류의 유일한 무대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시민생활에서 차지하는 국가라는 존재, 그것이 시민생활에 부과하는 한계들과 그것이 시민생활에 대해 정례화시킨 규제적 개입은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선진국들에서는 '민족 경제'(국가 경제? - 인용자주), 곧 국가 영토나 그 하위 영토에 의해 규정된 국가 영역이 경제 발전의 기본 단위였다. 국가의 경계 안에서, 혹은 국가의 정책 속에서 일어난 변화는 시민들에게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물질적 결과물들을 가져다주었다. 국가 안에서 일어나는 행정과 법률의 표준화, 그 중에서도 특히 공교육은 사람들을 특정한 나라의 시민들로 변형시켰다. (중략)
이와 똑같은 이유로 공식적인 지배자들이나 지배집단들의 전망이라는 견지, 즉 위에서 봤을 때, 국가가 어떻게 신민들이 성원들의 복종과 충성과 협력을 확보하고 유치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해야만 그들의 눈에 정당하게 비칠 것인가라는 유례 없는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497-498쪽

프랑스와 독일 양국의 혁신들을 비교해 보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둘 다 새로운 체제가 건국되는 계기들로서, 가령 프랑스는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는 명백한 일화(바스티유 함락)를 통해 프랑스 혁명을, 그 반면에 독일은 보불전쟁을 강조했다. 독일제국이 역사적 회고에 정도 이상으로 집착했다면, 프랑스 공화국은 혁명이라는 역사적 준거점을 제외하면 정도 이상으로 역사적 회고를 꺼렸다. 대혁명이 프랑스 국민과 그 애국주의의 존재와 성격과 한계들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화국은 마리안느, 삼색기, <라 마르세예즈> 등과 같은 몇 가지 분명한 상징들을 통해, 또 이따금씩 자유, 평등, 우애라는 분명한 이론적 혜택을 (최하층 시민들에게까지도) 베푸는 가운데 정교화된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으로 그런 상징들을 보완하면서, 프랑스 국민과 그 애국주의를 시민들에게 주입하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었다. (아래에 계속)-521-522쪽

(위에서 계속) 그 반면에 1871년 이전의 '독일인'은 어떤 정치적 규정이나 통일성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새로운 제국(독일인의 많은 부분을 배제해 버린)과 맺는 관계도 모호했다. 그러니 상징적이건 이데올로기적이건 일체화 과정은 더욱 복잡했을뿐더러-호엔촐러른 왕조와 군대 그리고 국가의 역할을 제외하면- 정교한 맛도 떨어졌다. 이로부터 신화와 민속(독일 오크, 황제 프리드리히 바라바롯사)으로 시작해서 뻔한 유형의 조야한 만화를 거쳐 민족의 주적을 규명함으로써 민족을 정의하려는 시도에 이르기까지, 준거점도 가지가지였다. 다른 많은 해방된 '민족'의 경우에 그렇듯이, '독일'을 가장 쉽게 정의하는 방법은 무엇보다 그것이 무엇에 적대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아래에 계속)
-522쪽

(위에서 계속)
바로 그 점이 독일 제국의 '만들어진 전통들'에 내재하는 명백한 틈새를 설명해줄 것이다. 가령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타협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극명한 사례다. 빌헬름 2세가 처음에 '사회 문제에 정통한 황제(social emperor)로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사민당을 금지하는 비스마르크 고유의 정책과도 분명한 거리를 두었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사회주의 운동을 반민족 운동('조국 없는 무리')으로 간주하려는 충동은 뿌리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했고,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예컨대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그러했던 것보다 더 체계적으로 국가업무에서 배제되어 갔다. (중략)
독일 제국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그보다는 덜하지만 유태인들을 내부의 적들로 선택함으로써 그들을 완전히 이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인 이점을 누리기도 했다. 즉,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유태인)와 프롤레타이아적 사회주의(사회민주당) 모두에 대항하는 데마고그적 호소력을 제공함으로써 그 두 가지 모두에 의해 위협받는다고 느끼던 하층 중간계급과 수공업 장인들, 농민들 거대 다수를 '민족'이라는 기치 아래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522-523쪽

원래 축구는 사립학교 출신 중간계급들에 의해 동호인(아마추어) 스포츠 및 인성 계발 스포츠로서 발전했는데, 급속히 (1885년 경) 프롤레타이아화 되고 따라서 프로화되었다. 상징적인 분기점 -계급 적대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은, 1883년 올드 애토이언즈(Old Etonians)가 볼튼 올림픽(Bolton Olympic)에게 패했을 때였다. 프로화가 진행되면서, 전국적 차원의 엘리트 계층에서 충원된 박애주의자들이나 도덕론자들이 축구 클럽의 경영권을 지방 사업가나 기타 유지들의 수중에 넘기면서 철수했다. 새로운 주인공들은 더 높은 임금 수준과 퇴직하기 전에 횡재할 기회(수익 사업 시합들), 무엇보다 명성을 날릴 기회에 이끌려 축구산업으로 유인된 압도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노동력의 사용자들로서, 산업 자본주의에 고유한 계급관계를 기묘하게 희화화시켰다.-539-540쪽

그럼에도 혈통이라는 귀족적 기준 그 자체는 상대적으로 광범위한 새로운 상층 중간계급 엘리트들을 정의하는 데에도 응용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890년대 미국에서는 족보에 대한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여성적인 관심사였다. 가령, '미국혁명의 딸들(Daughters of America Revolution)이 결성되어 번창했던 반면에, 그보다 약간 먼저 결성된 '미국 혁명의 아들들'은 시들해졌다. 비록 DAR이 겉으로 내건 목표는 토박이 백인 프로테스탄트 미국인들을 새로운 이민자 대중과 구별하는 것이었지만, 사실상의 목표는 백인 중간계급에서 배타적인 상층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DAR은 대부분 '뼈대 있는' 돈이 모여 있는 요지들-코네티컷, 뉴욕, 펜실베니아-에서, 그러나 역시 시카고의 졸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어 1900년이면 그 회원이 3만이 넘었다.-544-545쪽

아주 극소수의 경우를 예외로 하면 국제 스포츠에서는 아마추어리즘-다시 말해서 중간계급 스포츠-이 지배적이었다. (중략) 그런 만큼 외국과의 경기를 통해 이렇게 민족적 일체감을 확보하는 것은 적어도 윌가 살피는 시기[1870~1914. 인용자주]에서만큼은 일차적으로 중간계급적 현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은 그 자체 의미심장한 사실일 수 있다. 왜냐 하면, 우리가 이미 살폈듯이, 가장 넓은 의미로의 중간계급들은 주체적인 집단적 일체성을 느끼는 데 특별히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예컨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나온 사람 대부분을 묶어주는 전국적 규모의 클럽에서 사실상의 회원 자격을 정할 정도로 충분히 작은 소수파도 아니었을 뿐더러, 노동자들처럼 공동의 운명과 잠재적 연대성으로 충분히 묶여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중간계급들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분리된 거주지에 살았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상한' 생활양식과 가치들, 또 스포츠의 아마추어리즘을 엄격하게 고수함으로써 스스로와 하위층을 분리시키는 것이 쉽다고 느꼈다. (아래에 계속)-558-559쪽

(위에서 계속)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중간계급들은 외부적 상징들을 통해 소속감을 확립하는 게 한층 쉽다고 느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상징들 중에서도 특히 민족주의적 상징들(애국주의나 제국주의)이 아마도 가장 중요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가 하면 새롭게 올라서고 있던 중간계급으로서는 자신들을 애국주의의 중핵 계급으로 집단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가장 쉽게 느꼇을 법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559쪽

'만들어진 전통들'에는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기능들이 있는데, 만일 그런 기능들이 없다면 아마도 '만들어진 전통들'은 나타나지도 않았거니와 확립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얼마만큼 조작될 수 있었는가? 조작을 위해 그런 전통들을 사용하고 실제 발명해내려는 의도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정치에서든 그보다 먼저 사업에서든, 그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이 그런 만큼 그와 같은 조작이 존재하며 그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음모이론의 신봉자들은 그 나름대로 그럴듯한 증거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런 조작들이 가장 성공적이었던 때는 특정 집단의 절실한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관행들을 이용했을 때라는 점 역시 분명해 보인다. (중략) 그것들은 이용되거나 창출되기 전에 먼저 발견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돌이켜 재발견하는 일이 역사가의 몫이다. 물론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에 처한 변화하는 사회의 견지에서 왜 그런 필요들이 절실해졌는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일까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566-5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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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어 성립 사정
야나부 아키라 지음, 서혜영 옮김 / 일빛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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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society의 의미는 어떤가? 1933년에 출간된 <옥스퍼드 영어 사전 (Oxford English Dictionary)>에 의하면 society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1) 동료인 사람들과의 결합, 특히 벗끼리의 친밀함이 담긴 결합, 동료끼리의 모임
2) 같은 종류의 것끼리의 결합, 모임, 교제에서의 생활 태도, 또는 생활 조건. 조화를 이룬 공존이나 상호 이익, 방위 등을 위해 개인의 집합체가 이용하는 생활 조직, 방식
지금까지 보아온 일본 사전의 번역어는 모두 다 1)의 뜻에 상당히 가깝고 2)의 뜻은 거의 취하고 있지 않다. 그에 대응하는 비슷한 현실 및 그것을 표현하는 말을 찾아낼 수 있었지만, 후자처럼 넓은 범위의 인간 관계의 경우에는 그에 대응하는 현실 그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 뜻을 표현할 말도 없었다.
당시 쿠니(國)라든가 한(藩)과 같은 말은 있었다. 그러나 society는 2)에서도 서술하고 있듯이 궁극적으로는 개인(individual)을 단위로 하는 인간 관계이다. 좁은 의미로도 넓은 의미로도 그렇다. '쿠니'나 '한'에서는 사람들은 신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래에 계속)-17쪽

(위에서 계속) society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이 2)의 넓은 범위의 인간 관계를 일본어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있었을 것이다. -18쪽

그런데 society의 번역어로서 어째서 '사회'만이 남은 것일까? 일단은 예로부터 써온 일본어인 '교제'나 '세상' 등은 society와는 의미가 어긋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뜻이 공통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사회'는 거의 society를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조어나 다름없다. '사회'라는 말은 오래된 한어이긴 한데, 일본에서의 용례는 지극히 드물었다. 번역어 '사회'는 '사'와 '회'에서 새삼스레 조합되어 나온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에는 원래의 '사'의 어감도 '회'의 어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는 society와 그 뜻이 어긋나는 부분도 거의 없지만, 그러나 공통 부분도 또한 거의 없다.
이 무렵 만들어진 번역어에는 한자 두 자로 이루어진 신조어가 많다. 특히 학문과 사상의 기본적인 용어에 많다.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의미의 말에 대해서 이 쪽의 전래돼오는 말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그 뜻이 어긋나는 것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뜻이 결핍된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래에 계속)-33-34쪽

(위에서 계속)
그리고 말은 일단 만들어지면 뜻이 결핍된 말로는 취급되지 않는다. 뜻은 당연히 거기 있을 것으로 취급된다. 사용하는 당사자는 잘 몰라도 말 자체가 심원한 뜻을 본래 갖고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그리고 모르기 때문에 도리어 남용되어 다른 말과 구체적으로 맥락이 이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용되는 것이다. -34쪽

'네모난 문자(인용자주 -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번역하겠다는 것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번역의 대원칙인 것이다.
이리하여 '자연스러운 일본어'로 번역할 때 완성되는 번역문은 어색하지 않은 진짜 일본어문이 된다. 그런데 이 때 번역되는 원서가 일본인에게 낯선 새로운 이질적인 사상을 얘기하고 있다면, 같은 일본어를 사용한다 해도 종래 사용되지 않았던 방식의 서술을 하게 된다. 즉 번역자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를 사용하면서도 말의 조립을 궁리하여 문맥상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방식으로 말을 사용하게 되면, '자연스러운 일본어'의 의미도 변질된다. '사람'은 '하늘' 앞에 있는 독립된 혼자의 존재가 되고, '교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범위의 다수의 사람들과의 평등한 인간 관계를 의미하는 말로 바뀌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후쿠자와 유키치 이외의 당시 다수의 지식인들은 어째서 이 방법을 취하지 않았던 걸까? 왜 네모난 문자만 사용했을까? (아래에 계속)-46쪽

(위에서 계속)
그것은 매우 뿌리 깊은 문제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기에는 상대(上代) 이래 천수백 년 동안 중국 등 선진 문화를 한자라는 언어를 통해 받아들여왔다고 하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일본은 일관되게 번역 도입국이었다. 번역되어야 할 선진 문명의 말에는 반드시 '자연스러운 일본어'만 가지고는 표현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 중요한 말일수록 그러하다. '자연스러운 일본어' 속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말한 완전히 '흠잡을 데 없는 역자(譯字)는 사실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어긋나는 의미를 '네모난 문자' 자체에 맡기는 것이다. '인민 각개'도 '일신의 몸가짐'도 결국 그러한 예이다. (아래에 계속)
-46-47쪽

(위에서 계속)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네모난 문자'의 의미가 원어의 individual과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말을 아무리 뚫어지게 바라보아도 individual의 의미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이러한 새로운 문자의 건너편에 individual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약속이 놓여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번역자가 멋대로 한 약속이므로, 다수의 독자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려워 보이는 한자에는 잘은 모르지만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독자 측에서도 또한 받아들여주는 것이다.
일본어에서 한자가 지니는 이러한 효과를 나는 '카세트 효과'라고 부른다. 카세트(cassette)란 작은 보석함을 이르는 말로, 내용물이 뭔지는 몰라도 사람을 매혹시키고 애태우게 하는 물건이다. '사회'와 '개인'은 예전 사람들에게 말하자면 이 '카세트 효과'를 갖는 말이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계속)-47쪽

(위에서 계속)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일본어를 사용하여 새로운 이질적인 사상을 얘기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일상 속에 살아 있는 말의 뜻을 바꾸고, 또 그것을 통하여 우리들의 현실 그 자체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방법이었다. 다루는 말이 하나하나 현실의 무게를 이끌고 있을 뿐 아니라, 네모난 말의 조립이 갖고 있는 '카세트 효과'를 빌려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개인'이란 문자가 포함된 말을 아주 이른 시기부터 individual 또는 그것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했던 것은 역시 후쿠자와 유키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society에 대해 초기에는 '교제'라는 자연스러운 일본어를 사용하다가 결국에는 '사회'라는 한자 조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이들 '네모난 문자'와 함께 '카세트 효과'의 연역 논리도 등장했다. 그것은 이 시점에서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고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선각자가 일본어에 의한 독창적인 사고를 한계까지 추구하다가 결국은 현실과의 격투 끝에 좌절한 것이다.-47-51쪽

'근대'라는 말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몇 번인가 이상할 정도로 그 말이 유행했던 때가 있다. 그 최초의 유행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1910년 전후 메이지가 끝나갈 무렵으로, 특히 문예 분야의 사람들 사이에서였다. 문학사를 보면 이 즈음 혹은 그에 이어지는 한 시기에 '근대'라는 이름을 내건 논문이 만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최초의 유행을 계기로 '근대'라는 말은 일본 사람들 사이에 상당히 널리 보급되었고, 드디어 사전에도 기왕의 modern의 번역어였던 '근세'와 나란히 기술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다음 번의 유행은 이 장의 서두에서 인용한 '근대의 초극' 좌담회 무렵이었다. 태평양 전쟁 ㅇ중인 1942년이다. 앞의 유행에서는 '근대'는 플러스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전적으로 동경의 대상이었던 데 반해 이 시기의 '근대'는 '초극'되어야만 할, 부정적 가치를 지닌 대상이다. 앞서 게재한 나카무라 미츠오의 발언에는 그러한 시류에 대항하여 고의로 반대의 가치를 강조할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아래에 계속)-70쪽

(위에서 계속)
나아가 다음 유행은 태평양 전쟁 패전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앞 시대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 시대의 '근대'는 일종의 긍정적 가치의 상징 자체였다. '근대 문학', '근대 시민 사회의 통과'론 등등의 무렵이다. 그 다음에는 결국 그 반동으로서 '근대주의' 비판이 온다. <중략>
말의 의미가 이 정도로 다의적인 것은 본래 그 말에는 의미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의미가 결핍돼 있기에 유행하고 남용되고, 그리고 유행하고 남용되기 때문에 다의적인 말이 된다.
이 '근대' 유행의 시대를 거쳐서, 드디어 역사학자들이 좋다 싫다라는 가치 부여 없이 이 말을 사용하면서 시대 구분 용어로서의 겉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결국 '근대'라는 말은 처음에는 현실의 의미 없이 단지 형태만으로 존재했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하나하나 의미를 획득해갔던 것이다. 이것은 번역어의 의미 형성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70-72쪽

미시마 유키오가 '미'를 말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미'에 대해서 말할 때와 '미'로 하여금 말하게 할 때이다. 그는 보통 평론풍의 짧은 글에서는 '미'에 대해서 말하며, 소설 작품 속에서는 '미'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이 중 우선 전자부터 보자.
미시마 유키오가 '미'에 대해서 말할 때는 거의 늘 경멸조의 부정적인 어투를 사용한다. (중략)그런데, 이 <킨카쿠지> 안에서 미시마 유키오는 '미'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중략) '미'가 킨카쿠지와도 별개인 양 '나'에 대립하여 존재하면서 '나'의 앞에 나타나 '나'의 위에 군림하며 '나'를 이끌려고 한다. '미'는 여기서는 늘 저 멀리 있고, '나'는 그것이 나타나는 것을 보기만 하는 입장이다. 그 정체 그 자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이것은 평론 등에서 '미'에 대해 말할 때 마치 별볼일 없는 것처럼 경멸조로 언급하던 '미'와는 딴판이다. (아래에 계속)
-86-88쪽

(위에서 계속)
이렇게 '미'를 말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은 분명히 의식적인 조작이다. 독자는 소설의 무대 위에 나타나는 '미'를 매우 중요한 무서운 그 어떤 존재라고 느끼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 그가 평론 등에서 경멸조로 '미'를 언급할 때는 마치 소설의 무대 뒤로 돌아가서 미의 딴 모습을 보여주는 척한다. 독자는 어느 쪽에서 보아도 '미'의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뭔가 뜻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된다.
이 '미'라는 말의 트릭이 가능했던 것은 '미'라는 번역어가 일본어 속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작자 편한 대로 그 말을 여러 가지 의미로 조작할 수 있었던 데 있다. -88-89쪽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보면 아서 예로 든 문장 조금 뒷부분에서는 이 je suis라는 것을 mon être라고 바꿔 말하고, 거기서부터 또 Être parfait (완전한 être, 즉 신)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 여기서는 suis의 명사형 être 쪽이 사고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또 이 être는 명사이면서 1인칭 단수형인 suis의 원형동사이기도 하다. 명사 중심으로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때로 동사 표현으로 말을 바꾸고 있다. 즉 명사 표현과 동사 표현 사이를 쉽게 왕복할 수 있다. (중략)
번역용 일본어인 '존재한다'는 동사이네, '존재'는 명사이다. 양자는 언뜻 보아 근원이 같은 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명사 '존재' 쪽이 먼저 있고 동사형은 여기에 하다(する)를 붙인 '하다' 동사이다. 명사 중심의 구성이란 점에서는 서구어보다도 철저하다. 서구 학술 용어의 번역에 딱 좋은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은 일본어 원래의 구조라기보다는 오랜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져온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래에 계속)-122-123쪽

(위에서 계속)
그럼, 전래되어온 일본어 ある나 いる는 어떤가? 이미 서술한 ある뿐 아니라いる도 명사화하기 어렵다. (중략)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가 서구 철학의 번역을 '존재'와 같은 한자 두 자의 표현을 중심으로 해온 데에는 실로 지당한 까닭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 번역용 일본어는 확실히 편리했다. 그러나 그 점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이 이점의 다른 면을 놓ㅊ서는 안 된다. 즉 한자 중심의 표현은 번역에는 이로웠을지 몰라도 학문과 사상 등의 분야에서 일본 고유의 야마토 말, 즉 전래의 일상어 표현을 잘라 버려왔다는 것이다. 그런 탓에 가령 일본의 철학은 우리들의 일상에 살아 있는 의미를 포섭하지 못했다. 이것은 지금부터 350년쯤 전에 라틴어가 아니라 굳이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쓴 데카르트의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며, 나아가 소크라테스 이래의 서구 철학의 기본적 태도와도 상반되는 것이다. -123쪽

역사학자 츠다 소키치(1873~1961)는 (중략) '자유'라는 말이 사용된 오래된 예를 들고 있다. <후한서>에 붉은 눈썹의 도적들이 자신들이 옹립한 천자를 어린애 취급하여 "百事自由'로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일본의 예로는 <도연초>에 죠신소즈라는 중에 대해서 "세상을 가볍게 여기는 버릇이 있으며, 만사 자유로이 하고 다른 사람을 따른 ㄴ법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자유'라는 말에는 '제멋대로'라는 식의 용례가 많다. '자유'라는 말을 좋은 의미에서 사용하는 용례도 있는데 특히 선승(禪僧)의 경우에는 '자유 해탈' 등 얽매이지 않는 경지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170-171쪽

그렇다면 여러 가지 번역어 중 '자유'가 승리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쿠후 말기~메이지 초기에 '자유'와 경쟁하던 '자주', '자체', '불기', '관홍' 등은 적어도 나쁜 뜻의 어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자유'보다도 적절했다고 생각된다. 그 점은 한자, 한문 서적에 통달한 당시의 지식인들이라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번역어가 선택되고 남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자의 뜻으로 보아 가장 적절한 말이 남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가장 번역어다운 말이 정착한다. 번역어는 모국어의 문맥 속에 들어온 이질적인 태생의, 이질적인 뜻의 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이질성이 그냥 남아 있는 것, 즉 어딘가 잘 모르는 구석이 있다든가, 어감이 어딘가 어긋난다든가 하는 상태로 있는 것이 낫다. (중략)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고르는 것이 아니라, 소위 일본어라는 하나의 언어 구조가 저절로 그렇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번역어란 전래의 모국어로부터 보자면 구별된 말이다.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구별의 표시를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말인 것이다.-177-178쪽

he나 she 등이 서구 문장에서 하는 역할은, 첫째 행위의 주체인 주어를 명확하게 해주는 구문상의 기능이다. 가로 문자의 글에서는 he나 she 등은 얼마든지 반복된다. 표시하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적 필요 이전의 형식상의 요청이다. 즉 ㅈ서구인들은 3인칭대명사 등 인칭대명사가 많은 글에 친근감을 느낀다. 그 배후에는 늘 행위의 주체를 밝히고 책임자를 개체로서 포착하여 분명하게 해두고자 하는 사고 구조가 있다.
일본어로 쓴 글에 주어가 적은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다.
주어가 '생략'된다고 하는 견해는 본래 주어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서구 문장을 모델로 삼은 데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 주어는 문맥상 알 수 있으면 특별히 필요할 때 이외에는 표시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일본어에 더 잘 맞는 생각이다. (아래에 계속)-192쪽

(위에서 계속)
또 하나, 일본어에는 주어를 표시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한 예로, 일본어 고유의 '자발(自發)의 조동사'가 사용될 경우가 그렇다. 내가 이 책과 같은 글을 쓰면서, "...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쓰면 말한 것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져야 하지만, "...라고 생각된다"라고 쓰면 왠지 책임이 경감되는 듯하여 약간 자신이 없을 때는 그만 이 표현을 쓰고 싶어진다. '생각된다'라는 표현을 쓰면 생각하는 주체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또 일본인들은 '하다'가 아니라 '되다'라는 동사를 즐겨 쓴다. 회의석상에서 보고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말하면 저항이 있지만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말하면 무난히 통과된다고 한다. 채소 가게 아저씨가 "싸졌습니다"라고 말할 때, "싸졌다"는 행위에는 당사자인 채소 가게 아저씨뿐 아니라 동업자도 손님도 얼마간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라고 생각된다"라고 쓰면, 그 내용은 필자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ㅏ 다른 논자도 독자도 얼마간 그 생각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192-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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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1-09-28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어를 잘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이라고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이 있었다. 책을 읽으며 그의 의견에 크게 공감했다. 별 생각 없이 쓰던 단어들에 담겨 있는 고민의 깊이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것이 무척 유감이다.
아울러, 요전에 <형이상학>을 읽으며, 역자의 고유어에 대한 집착이 크게 불편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자 번역어가 가진 고민의 무게를 반일 민족주의 구호 따위로 그리 쉽게 내버리는 데는 역시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데카르트가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썼다는 지적, 고유어로 철학할 때에 철학이 일상의 의미를 포섭할 수 있다는 말이 <형이상학>의 역자의 의도를 짐작하게 해 주기도 한다.
 
마녀의 한 다스 지식여행자 16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3월
구판절판


'애국주의는 깡패들의 마지막 방패'라는 말을 쓴 18세기 영국의 문호이자 영어사전 편찬자 새뮤얼 존슨 박사에 대해, 앰브로스 비어스 Ambrose Bierce는 <악마의 사전 The Devil's Dictionary>에서 "아니, 애국주의는 깡패들의 마지막이 아니라 첫 방패지."라고 반론하면서, "야심가라면 누구든 불붙이고 싶은 물건이요, 한 번 불 붙으면 훨훨 타오를 쓰레기"라고 재정의한다. 또한 애국자에 대해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정치가에게는 바보처럼 속임당하고 정복자에게는 손쉽게 이용당하는 인간." (뒤에 계속)-233쪽

(앞에서 계속)
원래 인간은 생명체 고유의 자기 보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존재다. 기본적으로 자기, 자기 가족, 자기 민족처럼 자기와 관련된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안다. 태어나 자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인 것이다. 따라서 일부러 목청 높여 주장하고 선동하는 것은 마치 성욕을 부추기는 것처럼 경솔하고 요상스러운 행위라는 뜻이 아닐까.
관념 조작에 가장 빈번하게 동원되는 것이 바로 이 '나라'며 '민족'이라는 '불 지피기 쉽고 타오르기 쉬운' 도구다. 이보다 좀 더 체계적인 수단으로는 배타적인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를 들 수 있다. 이 또한 일종의 '이민족'을 만들기 위한 장치다.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게 하는 마법이라고나 할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장벽을 만드는 엄청난 힘을 가진 마법.-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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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09-13 0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네하라 마리의 <마녀의 한 다스>와 <프라하의 소녀 시대>를 읽었다. 고상하고 마음이 따뜻한 아줌마로 보이고, 행복하게 살다 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짝 고종석의 에세이랑 비슷한 느낌? 아줌마가 쓴 고양이 이야기도 읽어 보고 싶다.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진성 옮김 / 이제이북스 / 2007년 11월
절판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29쪽

일반적으로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가르침의 능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술이 경험보다 더 학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남을 가르칠 수 있지만 경험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34쪽

영문을 몰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이 무지에서 벗어나려고 철학을 했다면, 그들은 분명 쓸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를 위해 앎을 추구했다. 이는 벌어진 일을 통해 확인된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안락과 오락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거의 다 갖추어졌을 때, 그러한 앎을 찾아 나섰다. 이렇듯 우리는 분명히 어떤 다른 쓸모 때문에 지혜를 찾지 않는다. 마치 남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있는 사람을 '자유인'이라 부르듯이, 이런 앎만이 모든 앎들 가운데 또한 '자유롭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것만이 제 자신을 위해 있기 때문이다.-39쪽

일반적으로 지혜는 보이는 것들의 원인을 찾지만 우리는 이 점을 내버려 두었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의 실체를 설명한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종류의 실체들(이데아)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어떻게 이것들이 보이는 것들의 실체인지에 대해선 빈말을 한다. "나눠 가짐"은 앞서 말했듯이 아무 것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89쪽

일반적으로 '있음'의 여러 가지 뜻을 구분하지 않은 채 있는 것들의 요소들을 찾아낼 수는 없다. 특히 사물들이 어떤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묻는 방식으로 요소들을 탐구할 경우에 말이다. 정말이지 '입힘'이나 '입음' 또는 '곧음'이 어떤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알아낼 수 없으며 알아낼 수 있다면 오로지 실체들의 경우에만 알아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들 모두의 요소들을 찾는 것이나, 이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91쪽

진리에 대한 연구는 어떤 점에서는 어렵지만, 어떤 점에서는 쉽다. 이는 한편으로는 어느 누구도 진리를 딱 맞게 얻을 수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가 진리를 얻지 못하지는 않아서 본성에 관해 무엇인가 참인 것을 말하고, 개인적으로는 전혀 또는 조금 밖에 진리에 이바지하지 못하지만 모두 한데 모이면 꽤나 많은 양이 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진리가 '누가 도대체 큰 문을 못 맞추랴'란 속담의 큰 문과 같은 것이라면 진리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전체를 가질 수 있지만 부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진리의 어려움을 보여 준다.-97쪽

우리는 먼저 나눔의 방식에 따라 얻어지는 정의들에 관하여 연구해야 한다. 정의 속에는 이른바 '맨 처음의 무리(類)'와 '차이성(種差)들'이라 불리는 것들 말고는 어떤 것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예를 들어 '두 발 달린 동물'에서 '동물'은 무리이며 '두 발 달림'은 차이성이다.-332쪽

우리는 실체들의 원인들, 원리들, 요소들을 찾고 있다고 앞서 얘기했다. 어떤 실체들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들이지만, 어떤 실체들에 대해선 특정의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견해를 나타냈다. 자연적인 실체들은, 예를 들어, 불, 흙, 물, 공기 따위의 단순한 물질들, 또 식물과 그 부분들, 그리고 동물과 그 부분들, 마지막으로 물리적인 우주와 그 부분들은 다들 실체로 인정하였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독자적으로 꼴들과 수학적인 대상들이 실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있다는-것은-무엇-이었는가'와 '바탕이 되는 것'이 또한 실체라는 결론에 이른 논의들도 있었다. 더 나아가, 무리가 여러 가지 꼴들보다, 그리고 보편적인 것이 개별적인 것들보다 더 많이 실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데아들은 보편자와 무리와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데아들은 같은 이유로 실체인 듯하기 때문이다. (뒤에 계속)-353쪽

(앞에서 계속)그리고, 본질은 실체이고 정의는 이 본질에 대한 규정이므로 우리는 정의와 '제 본성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다루었다. 정의는 규정이고 이 규정은 부분들을 가지므로 우리는 또한 이 '부분'에 관항 어떤 것들이 실체의 부분들이고, 어떤 것들이 그런 것들이 아닌지 그리고 실체의 부분들이 아울러 정의의 부분들인지를 살펴보아야 했다. 더 나아가, '보편적인 것'도 무리의 실체가 아니다. 이데아들과 수학적인 대상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감각되는 실체들뿐만 아니라 이것들도 실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354쪽

어떤 것들은 그것을 가짐으로써, 어떤 것들은 그것을 만들어 냄으로써, 어떤 것들은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임으로써, 또 어떤 것들은 그것이나 다른 반대되는 것들을 얻거나 잃음으로써 '반대된다'고 말해진다. 그런데, 모순되는 것들, 결여, 반대성들, 그리고 관계 맺은 것들이 맞놓인 것들이고, 이 중 모순되는 것들이 으뜸가는 맞놓임이다. 그리고 반대되는 것들은 중간 것을 허용하지만 모순되는 것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분명히 모순과 반대는 같지 않다.-427쪽

일반적으로, '여기에 있는 것'들이 언제나 변하고 결코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리에 관한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오히려, 언제나 같은 상태에 있으며 어떠한 변화도 겪지 않는 것들로부터 출발하여 진리를 사냥해야 한다. 천체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것들은 한때는 이렇게 보이다가 다른 때는 그것과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항상 같은 것이며 어떠한 변화도 공유하지 않는다.-465쪽

세 종류의 '이론에 관련된 학문'들이, 즉 자연학, 수학, 신학이 있다. 이론학의 무리가 가장 나은 것이며, 이 가운데서도 마지막에서 언급된 것이 가장 낫다. 왜냐 하면 신학은 있는 것들 중 가장 고귀한 것을 다루며, 또 각 학문은 자신에 고유한 인식 대상에 따라 더 낫다고 또는 더 못하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470쪽

우리의 연구는 실체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실체의 원리 및 원인이다. 왜나하면 우주를 일종의 전체로 볼 때, 실체가 그 중 으뜸가는 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주를 잇따라 있는 것으로 보더라도 실체가 으뜸가는 것이며, 그 다음에 질이고, 그 다음에 양이다. -495쪽

실체는 세 가지다. 그 중에 감각되는 실체가 있다. 그리고 이 실체 중 어떤 것은 (즉 해, 달, 별 등의 천체들은) 영원하며, 어떤 것은 사라진다. 사라지는 실체는 온갖 동식물들처럼 사람들이 다들 실체로 인정하는 것들이다. 이런 감각되는 실체의 요소들을 이것들이 하나이든 여럿이든 우리는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남은 한 종류의 실체는 움직이지 않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것이'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며, 어떤 사람들은 꼴(이데아)과 수학적인 대상들을 한 가지로 놓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가운데 수학적인 대상만을 놓는다. 앞의 두 가지 실체는 자연학의 대상이다. 그것들은 움직임을 가지기 때문이다. 세 번째 종류의 실체는 이것과 앞의 두 실체에 공통된 원리가 없다면 다른 어떤 학문의 대상이다.-496쪽

수학 계열의 학문들이 아름다움이나 좋음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중략) 아름다움의 최고 형태는 질서, 균형, 일정함인데, 이런 것들을 바로 수학 계열의 학문들이 가장 많이 증명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많은 사물들의 원인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분명히 수학 계열의 학문들은 또한 어떤 점에서 그런 종류의 원인을, 즉 '아름다움'이란 뜻의 원인을 다룬다.-546쪽

이들은 이데아들을 '보편적인 것'들로 놓으며, 동시에 그것들을 '따로 떨어져 있는' 것들로, 그리고 '개별적인 것'들로 만든다. 이럴 수 없음은 이미 다룬 바 있다. <실체들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 특징을 한 가지 것에다 결합시키는 까닭은 실체들이 감각 대상들과 같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각 세계의 개별적인 것들은 흐르는 상태에 있어서, 그것들은 어느 것도 멈춰 있지 않지만, 보편적인 것은 그것들과 따로 있으며 그것들과 다른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에서 우리가 말했듯이, 소크라테스는 이런 것을 정의들을 통해 부추겼다. 그러나 그 자신은 개별적인 것들로부터 따로 떼어놓지 않았다. 따로 떼어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생각은 옳았다. -585쪽

사물은 그것이 늘 있어왔다 하더라도 언젠가 생겨난 것이라면, 자신을 이루는 것으로부터 생겨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잠재/가능 상태로 (어떤 것인) 것에서 나와 그것이 되는 바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ㄹ 수 없는 것'으로부터는 생겨날 수도 생겨나 있을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ㄹ 수 없는 것'은 발휘/실현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래에 계속)-598쪽

(위에서 계속) 이렇다면 수나 '밑감을 갖는 다른 어떤 것'은 그것이 아무리 늘 있어 왔다고 할지라도 있지 않을 수 있다. 마치 '여러 해 동안 있는 것'이 '하루밖에 있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있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다면, 끝없이 긴 시간 동안 있어 온 것도 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은 영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자리의 논의에서 다뤘던 바대로, '있지 않음을 허용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방금 말한 것이, 즉 '어떤 실체도 그것이 (신처럼 오로지) 발휘/실현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영원할 수 없다'는 주장이 보편적으로 맞다면, 그리고 요소들은 실체의 밑감이라면, 어떤 영원한 실체도 '자신 안에 들어 있으면서 자신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598쪽

이 모든 점들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이치에 맞는 점들과 충돌하기도 한다. 여기서 마치 시모니데스의 '긴 말'을 보는 듯하다. 정말이지 긴 말은 노예들이 그렇듯 건전한 것을 전혀 말하지 못할 때 나온다.-609쪽

이런 (이치에 어긋난) 점들이 (이데아론에) 따르며, 또 아직 더 많은 점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수들의 생성과 관련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체계적으로 연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몇몇 사람들의 주장과는 달리, 수학적인 대상들은 감각 대상들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 주고, 또 그것들은 원리들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준다.-6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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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08-08-24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었다~!!
8월 2일에 시작해서 8월 24일까지.
음음 솔직히 어려웠다. 원문에서 빼는 것은 {}, 주석자가 삽입하는 것은 ()로 쓰는 것은 관례에 따른 것인 듯 한데, 같은 뜻의 단어들도 ()에 넣어서 혼란스러웠다. 원문에 대한 집착은 그런대로 납득이 갔지만, 고유어에 대한 집착은 공감하기 어렵다. 고유어를 쓴다고 글이 쉬워지는 건 절대로 아닌데 말이지.
책 내용을 한 마디로 줄이는 건 뒷표지의 역자의 말인 듯 해서 마지막으로 여기에 적어 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을 학문으로서 최초로 정립한 철학자였다. 그는 오늘날 철학의 분과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저술 <형이상학>에서 이론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면서 정점에 이른 자신의 사상을 보여준다. <형이상학>에서 그가 묻는 근본 물음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이 있음의 의미를 파헤치면서 그는 '있는 것'들의 으뜸 가는 원인(또는 원리)들을 찾아 나선다.
이런 탐구 과정에서 있는 것들 중에서도 실체가 양, 질, 관계 등의 다른 모든 범주들의 원인으로, 실체들 중에서도 으뜸 실체인 꼴(형상)이 다른 모든 실체들의 원인으로, 으뜸 실체 중에서도 영원불변의 신이, 천구들을 움직이는 이성(nous)들과 더불어 있는 것들 모두의 궁극적인 원인으로 드러난다. 신은 모든 존재와 변화의 시작점에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으뜸가는 것'으로서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