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군도 4 열린책들 세계문학 261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결박된 죄수들은 5명에서 7명씩 마차에 실려서 <고르까>라는 수용소의 묘지로 운반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 커다란 구덩이 속에 떠밀려 그대로 <생매장>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잔인성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사람을 운반하고 들어 올리는 작업에서 죽은 사람을 다루기보다는 산 사람을 다루는 쪽이 훨씬 더 편하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작업이 아다끄에서 밤마다 여러 날 계속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방식에 의해서 우리 당의 도덕적 정치적 통일은 달성되었던 것이다.
- P66

슬라바는 전쟁 전에 아홉 살 때부터 도둑질을 하게 되었고 우리 군대가 왔을 때도 도둑질을 했으며 종전 후에도 계속했다. 그는 열다섯 살이라는 나이치고는 어른스러운 침울한 웃음을 띠며 앞으로도 계속 도둑질을 하며 살아갈 작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그는 제법 논리적으로 말했다. "노동자 ㅁ노릇이나 하면 빵과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구경할 수 없잖아요. 나는 아이 때 너무 고생을 했으니까 앞으론 좀 잘살아보고 싶어요." "독일군이 쳐들어왓을 때는 뭘 했니?" 나는 그가 언급하지 않은 2년간, 즉 독일군 점령 기간에 대해 물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독일군이 들어왔을 때는 일을 했지요. 독일군 치하에서 어떻게 도둑질을 해요? 그랬다가는 당장에 총살이에요."
- P162

연소자들은 어른들의 수용소에 와서도 그들의 행동의 주요한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즉, 모두 한패가 되어 일제히 적을 습격하기도 하고, 일제히 적을 물리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힘을 강화시켜 여러 가지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 해도 되는 짓과 해서는 안 되는 짓을 분간하는 힘이 전혀 없으며 선과 악에 대한 관념조차 없다. 그들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것은 모두 선이고 자기를 방해하는 것은 모두 악이다. 그들이 방약무인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유리한 처세술이기 때문이다. 힘이 통하지 않을 때는 거짓 연기를 하거나 속임수를 쓰기도 한다.
- P162

<남의 가랑이 들쑤시지 말라고!>, <(건드리지도 않는데) 오 납작 엎드려?> (이 말의 괄호 부분은 비슷한 낱말로 바꿨지만, 원래의 것을 그대로 쓰면 다음에 오는 <엎드리다>라는 동사가 아주 음탕한 뜻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듣는 사람을 흠칫하게 만드는 표현이 특히 군도의 여자 주민의 입에서 튀어나올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당황하게 된다. 그녀들은 비유에 에로틱한 소재를 즐겨 사용한다. 연구 논문이 지니는 도덕적 제한 때문에 그런 에로틱한 표현들을 열거하지 못함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 P239

제끄는 항상 <현재보다 더 나쁜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운명의 함정과 악마들의 습격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설사 생활이 조금 완화되는 경우에도, 무언가 잘못되어 일어나는 일시적은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항상 재난에 대비하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운명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남의 운명에도 동정하지 않는 제끄의 냉엄한 정신이 형성되고 성숙되어 가는 것이다. 정신적인 평형을 유지하고 있는 제끄는 어느 한쪽으로 기우는 일이 거의 없다. 밝은 쪽으로도 어두운 쪽으로도. 절망 쪽으로도 기쁨 쪽으로도.
- P257

대체로 제끄들은 <유머>를 높이 평가하고 좋아한다. 그것은 군도 첫해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주민들의 심리적 바탕이 건전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들은, 눈물은 자기변명이 될 수 없으며 웃음은 얼마든지 좋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유머는 그들의 변함없는 동맹자로서 그것 없이는 아마도 군도에서의 생활을 이어 갈 수 없었을 것이다.
- P266

우리 나라 곳곳에서 우리는 이런 것을 보게 된다. -개를 끌고 가는 경비병이 누구를 잡으려고 앞으로 뛰어나가는 석고상이 있다. 따시껜뜨시에는 이런 동상이 NKVD 부속의 사관학교 앞에 서 있는데, 랴잔시에서는 마치 시의 상징처럼 미하일로프 방면에서 시로 접근하면 눈에 들어오는 유일한 기념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고도 혐오의 몸서리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그것이 당연한듯이, 개를 부추겨 사람한테 덤벼들게 하는 모습의 동상에 아주 익숙해져 버렸다.
우리들에게 덤벼드는데.
- P452

예를 들어 아리스찌드 이바노비치 도바뚜르만 한 괴짜도 없을 것이다. 그는 루마니아와 프랑스 혈통의 뻬쩨르부르끄 출신 고전 문학가로, 한평생 독신으로 지낸 고독한 사람이다. 마치 고깃덩어리를 빼앗긴 고양이처럼, 그는 헤로도토스와 카이사르를 빼앗기고 수용소로 끌려온 것이다. 지금도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 해독되지 않은 고문서들로 가득 차 있어서 수용소에서도 늘 꿈속에 있는 꼴이었다. 그는 여기 들어와서 일주일도 채우기 전에 죽을 게 뻔했지만, 의사들이 그를 거둬들여 의무 통계계라는 좋은 일자리를 주었고, 나중에는 수용소에서 양성하기 시작한 의무 보조계 교육을 위해 한 달에 두 번씩 그에게 강의를 의뢰하기까지 했다. 수용소에서, 더욱이 라틴어 강의를 맡게 된 것이다. 도바뚜르는 조그만 칠판 옆에 서서, 행복했던 대학 시절로 되돌아간 듯 희색이 만연하다.그는 수용소 군도 주민들이 일찍이 본 적도 없는 괴상한 동사 변화형을 칠판에 쓰면서 그 분필 닿는 소리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 P204

1930년대 이후로 우리 나라에서 산문이라는 것은 땅속으로 잦아든 호수가 남긴 거품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것과 격리되었기 때문에 이미 산문이라 할 수 없고 단지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중략) 사물을 깊이 통찰하고 그 특징을 파악해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를 그만두지 않은 사람들은 그 시대에 죽음의 길로 들어서야 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수용소 안에서 죽어 갔고, 일부는 전선에서 자포자기적 행동 속에 죽어 갔다. - P210

수용소의 악착스러움, 대인 관계의 잔인함, 마음을 굳게 잠근 비정의 문, 일체의 양심적인 일에 대한 혐오. 이 모든 것이 쉽사리 수용소 주변의 세계를 휩쓴 후 우리 나라의 ‘바깥 세상’에 깊이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군도는 자기를 만들어 놓은 것에 원한을 품고 ‘소비에뜨 연방’에 복수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그 어떤 잔혹한 행위도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 P323

아르놀드 수시와 같은 사람은, 쉰 살쯤에 수용소에 왔다. 그는 한 번도 신을 믿지 않았으나, 원래 예의 바른 사람이었으며, 다른 사는 방법을 몰랐다. (중략) 그는 언제나 바보짓을 하여 곤경에 빠지고, 어려운 사정에 있었으며, 일반 작업도 하고, 징벌 지역에도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게다가 수용소에 들어올 때의 모습 그대로 살아남았다. 나는 처음의 그의 모습도 보았고, 나온 후의 그의 모습도 알고 있어서 보증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수용소 생활에서는 그 부담을 덜어 준 세 가지 사정이 있다. 그가 노동 불능자로 인정된 것과, 수년간 가족이 보내는 소포를 받았으며, 음악에 재능이 있는 덕택에 아마추어 연예회에 나가서 식사의 부족을 보충했다는 것이다. (중략) 그러한 사정이 없었더라면 그는 죽었겠지만, 그가 사는 방법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 P380

1946년에 사마르까 수용 지점에서 지식인들의 그룹이 너무나 쇠약하여 죽기 직전의 상태에 놓였다. 그들은 굶주림과 추위와 무리한 노동으로 지쳐 있었다. 그들은 수면마저 빼앗겨 버렸다. 토막 막사를 아직 짓지 못해서, 잘 장소가 없었다. (중략) 며칠 후로 다가온 죽음을 예지하면서, 그들은 벽 옆에 앉아서 잠잘 수 없는 자기의 최후의 자유 시간을 이렇게 보냈다. 찌모페예프레소프스끼가 그들을 모아서 ‘세미나’를 열고, 그들은 자신들은 알고 있으나 남이 모르는 정보를 서둘러 교환하며 최후의 강의를 하고 있었다. 사벨 신부는 부끄럽지 않은 죽음에 대하여, 신학 대학 출신의 신부는 교부학을, 종교 합동파의 신도는 교의학과 교회법에 대하여, 에너지학자는 미래의 에너지학의 원리에 대하여, 레닌그라뜨 출신 경제학자는 소비에뜨 경제학 원리를 확립하려는 시도는 새로운 이론의 결여로 실패했다는 것에 대하여 강의하였다. 찌모페예프레소프스끼 자신은 그들에게 미시 물리학을 이야기했다. (뒤에 계속) - P383

(앞에서 계속) 회를 거듭할수록 참가자가 줄었다. 그들은 이미 시체 안치실에 있었다. 죽음에 대해 이미 둔감해져 있으면서, 이러한 것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인텔리겐치아인 것이다! - P383

가장 나쁜 행동을 할 때, 나는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정연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었따. 형무소의 썩은 짚단 위에 누워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최초의 善의 태동을 느꼈다. 차츰 나에게 분명해진 것은, 선악을 가르는 경계선이 지나가고 있는 곳은 국가 간도, 계급 간도, 정단 간도 아니고, 각 인간의 마음속, 모든 인간의 마음속이라는 것이다. (중략) 종그때부터 나는 세계의 모든 종교의 진리를 이해했다. 그 종교들은 ‘인간 속에 있는 악’과 싸우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악을 완전히 추방할 수는 없지만, 각자가 그것을 줄일 수는 있다. 그때부터 나는 역사에서의 모든 혁명의 위선을 알았다. 그들 혁명은 다만 동시대의 악의 시행자만을 (서둘러서 구별할 수도 없이, 선의 시행자까지도) 구축하고 있다. 악 그 자체는 배로 증가되어 유산으로 남았다. - P397

분명히 수용소의 타락은 일반화되어 있다. 그런데 그 원인은 수용소가 지독했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우리 소비에뜨의 인간이 정신적으로 무방비인 채 군도의 땅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었다. (중략)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또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수용소와는 관계없이, 알고 있어야 한다. - P412

어떤 소비에뜨 시민과의 이야기에도 거짓말을 해야 했다. 때로는 무턱대고, 때로는 눈치를 보면서, 때로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긍정하는 듯이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혹시 일대일로 바보 같은 말동무가, 우리 군대는 히틀러 군대를 되도록 깊이 유인하기 위해 볼가강까지 후퇴하고 있다. 혹은 감자의 해충인 콜로라도 갑충은 미국인이 우리 나라에 뿌린 것이라고 당신에게 말하게 되면, 당신은 찬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드시 찬동해야 한다! 머리를 끄덕이지 않고 옆으로 짓기라도 하면, 당신은 군도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P4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용소군도 3 열린책들 세계문학 260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반장은 죄수들을 곤봉과 배급 식량으로 밀어붙이면서, 당국, 교도관, 호송병이 없어도 작업반원들을 꽉 잡아야 한다. 샬라모프가 실례로 보여 주듯이, 꼴리마 지방의 금 채굴 현장에서는 한 기간 내에 작업반의 구성원들이 죽어서 몇 번이나 새 사람들로 바뀌었으나, 반장만은 죽지 않고 최후까지 바뀌지 않았다.
- P198

하지만 인간이 적응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 있을까? 때로는 그 작업반이 군도의 주민 사회의 자연스러운 세포, 즉 사회에서 가족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무시한다면, 우리의 관찰이 너무나 소홀했다 할 것이다. (중략) 다만 그것은 일반 작업, 즉 한 사람이 죽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일반 작업반은 아니었다. 그것은 특수 작업반이었다. 전기 기술자들이나, 선반공들, 목수들, 페인트공들의 작업반이었다. 이런 작업반은 인원이 적으면(10명에서 20명) 적을수록 서로 돕고 의지하는 기미가 현저했다.
- P199

이러한 작업반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어울리는 반장이 필요했다. 그것은 적당히 엄격하고, 수용소 군도의 모든 도덕(부도덕) 규칙을 잘 알고, 통찰력이 있고, 작업자에게 공정하며, 당국에 대해 의연하고 확고한 태도를 가지고 발언하는 인물 - 어떤 자는 목쉰 소리로 지껄이며, 어떤 자는 냉정하게 조리를 세우는 인물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작업반을 위하여 여분의 1백 그램의 빵, 솜바지, 구두 한 켤레를 놓치지 않는 인물이다. 게다가 유력한 사람들과 친분을 가지고, 그에게서 수용소 내의 소식이나 예정된 변동 상황을 미리 알고, 그것에 대응하여 바르게 지도할 수 있는 인물이다. 더욱 작업 내용에 정통하고, 각 작업 현장의 유리하고 불리한 점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만일 이웃에 작업반이 있다면, 그쪽에 불리한 현장이 돌아가게 하는 인물)
-아래에 계속 - P199

-위에서 계속
속임수에 대해 예리한 눈을 가지고, 그 5일 노동 속에서 노르마의 속임수가 가장 쉬운 곳이 어딘가를 간파하는 능력이 있는 인물이다. 현장 감독이 작업 수행 보고서를 <삭제>하려고 잉크가 묻은 펜을 들었을 때, 굽히지 않고 속임수를 지켜 나가는 인물이다. 또 노르마 산정자에게 <뇌물>을 줄 수 있는 인물이다. 자기 작업반 안에서 누가 밀고자인지 (만일 그가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아서 해를 끼치지 않을 자라면, 그대로 둔다. 그러지 않으면 더욱 까다로운 녀석이 오게 된다) 알고 있는 인물이다. 자기 작업반의 일이라면 한눈에 누구를 격려하고 누구를 나무라야 하는지, 오늘은 누구에게 가벼운 작업을 시켜야 하는지, 언제나 알고 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반장을 가진 작업반은 단단히 결속되어 꿋꿋하게 살아남는다. 쉽지는 않지만, 죽는 사람도 없다. (중략)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렇게 효율적이고 또 머리가 좋은 반장들은 대부분이 <꿀라끄>의 자식들이었다.
- P199

어떤 여자는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특권수들의 첩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여자는 <일반 작업장>에 끌려 나가 사랑 때문에 죽어갔던 것이다. 게다가 전혀 젊지도 않은 여자까지 이런 일에 말려들어 교도관들을 당황하게 했다. 바깥세상에서는 도저히 이런 여자를 상상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이 여성들은 정욕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돌보아 주고, 누군가를 따스하레 위로해 주고, 자기 몫을 떼어서라도 그에게 먹여 주고, 그의 옷가지를 빨아 주고, 누더기가 된 것을 기워 주고 싶다는 여성 본래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 P314

고참 수용소 죄수 D.S.L.이 감사하며, 동시에 죄의식을 가지고 말하고 있듯이 - 만일 내가 오늘 살아 있다는 것은 그 날 밤 나 대신에 다른 누군가가 명단에 의해 총살된 덕분이라 하겠다. 내가 오늘 살아 있다는 것은 배의 선창에서 나 대신에 누군가가 질식사한 덕분이다. 내가 오늘 살아 있다는 것은, 그것은 내가 죽은 사람들보다 빵을 2백 그램 더 받은 덕분이다.
- P350

지식인은 그 직업이나 일의 내용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교육과 훌륭한 가정이 반드시 지식인을 기른다고 할 수도 없다. 지식인이란 그 생활의 정신적인 면의 관심과 의지가 튼튼하고 변함이 없고, 외적 사정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그와 대항하는 인간을 말한다. 지식인이란 모방할 수 없는 사상의 주인인 것이다.
- P373

당신들이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오는 것을 축하하는 장기수의 거의 다가 특권수다. 아니면 형기의 대부분의 기간을 특권수로 지낸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수용소란 박멸시키기 위해 있으니까.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P331

구내의 진정한 특권수란 다음과 같은 자들이다. 요리사, 빵을 자르는 사람, 창고지기, 의사, 의사의 조수, 이발사, 문화교육부의 교육계, 목욕탕 책임자, 빵 공장의 책임자, 창고 책임자, 소포 취급소 책임자, 막사의 장, 구역의 장, 작업 할당계, 회계계, 본부 막사의 서기, 수용소 구내 및 작업장 설비 기사들이다. 이들은 언제나 배부르게 먹을 뿐 아니라 청결한 의복을 입고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작업이나 요통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해 권한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을 지배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 P332

나 자신은 형기의 절반을 ‘샤라시까‘ 즉 극락의 섬의 한 군데서 일했다. 그곳은 우리를 ‘군도‘ 전체에서 떨어지게 했고 그 노예적 상태를 눈앞에서 볼 수 없게 했다. 특권수들도 그랬지 않았을까? 아주 넓게 보자면, 과학 연구를 함으로써 우리는 그 NKVD와 전체의 강압 제도를 강화한 것이 아닌가? - P343

이 문제는 수용소 군도내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 범위는 우리 사회 전체다. 모든 교양 있는 계층, 이공계 사람도, 인문계 사람도 이 수십 년간 마법 사슬의 고리 같은 일반화된 특권수가 아니었던가? 체포를 면하고 번영을 이룬 가장 정직한 사람들 중에서 자기의 생활을 희생하면서까지 사회 전체의 생활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바친 학자들, 작곡가들, 문화사학자들의 이름을 들 수 있는가? - P343

이 조항으로 투옥된 사람들의 수를 우리가 살펴본 흐름을 기초로 하여 대략 계산하고 게다가 그 3배의 숫자인 가족들까지 합치면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민‘이 ‘자기 자신의 적‘이 되고, 그 대신에 인민의 가장 좋은 친구인 비밀경찰을 얻게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 P389

그들(인용자주-정통파 공산주의자)의 정열은 한 해에 여섯 번이나 열두 번에 걸쳐 청원서, 신청서, 탄원서를 쓰는 데 소비되었다. 그들은 무엇을 썼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물론, ‘위대한 천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중략) 이런 청원서에 대해 거의 같은 숫자의 거부서가 일제히 되돌아왔으나, 그것은 그 청원서가 스딸린한테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분이라면 용서해 주었겠지, 자애로운 분이시니까! 국가에 용서를 빌다니 얼마나 한심한 ‘정치범‘인가! 이것이 그들의 의식 수준이었다. - P4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용소군도 2 열린책들 세계문학 259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아무튼 어떻게 해서라도 용변을 줄이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을 적게 주어야 한다! 그리고 식사도 적게 주면, 설사 때문에 불평을 말하는 자도 없을 것이고, 공기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다. (중략) 누구도, 아무도 우리를 괴롭히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호송대의 행동은 아주 합리적이었다! (중략) <제58조> 위반자를 잡범이나 경범죄자와 같은 한 찻간에 넣는 것도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때로는 그랬다.) 그것은 단지 죄수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아서 차량이 부족하고 시간도 없어서 정리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략) 예수가 두 사람의 도둑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것 역시, 빌라도가 그를 능욕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지 않았는가? 다만 그날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골고다의 언덕은 하나밖에 없고, 시간도 짧았다. 그래서 <그는 악당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 P288

가지지 말라!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중략) 빵과 설탕은 한 번에 이틀분을 주어도 이내 전부 먹어 버리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이제 아무도 훔칠 수가 없다. 당신은 하늘의 새처럼 자유롭게 된다! 항상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 것만 가지는 것이 좋다. 여러 언어를 알며 여러 나라를 알고 여러 사람을 알라. 당신의 기억이야말로 당신의 여행 가방이 될 것이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 P312

"일반 작업이란 각 수용소의 주요한 기본적인 작업을 말하는 걸세. 전 죄수의 80퍼센트가량이 일반 작업에 참가하고 있는데 결국은 모두 죽어 버리고 말지. 하나도 살아남을 수 없어! 다시 새로운 죄수를 끌어다가 인원을 보충하는 거야. 거기 끼어들면 항상 굶주려야 하고 항상 젖은 옷을 입어야 하고, 터진 신발을 신어야 하고, 식량 배급량에 속아야 하고, 가장 나쁜 막사에서 자야 하지. 병이 들어도 치료 한 번 받아 볼 수 없어.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것은 일반 작업에 나가지 않는 죄수들뿐이야.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일반 작업에만은 끼지 말도록 하게! 첫날부터 말이야!"
- P379

나는 반 년 전에 우리들의 수용소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수용소 관리 본부의 인사 카드에 여러 가지 사항을 기록했던 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인사 카드의 중요한 칸은 <특기란>이었다. 그리하여 죄수들은 자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수용소에서 가장 인기 있는 특기를 카드에 써넣었다. <이발사>, <재단사>, <창고계>, <제빵사> 등등. 그러나 나는 눈을 찌푸리고 핵물리학자라고 써넣었다. 나는 핵물리학자는 아니었으나 그저 전쟁 전에 대학에서 그 방면의 강의를 다소 들은 적이 있어서 원소의 기호며 매개 변수 따위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핵물리학자라고 써넣었던 것이다. 1946년이 되자 원자 폭탄이 아주 필요하게 되었다.
- P415

그리고 나도 그런 천국과 같은 수용소(죄수들은 속어로 <샤라시까>라고 한다)에 형기를 반쯤 보내고 나서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남은 것도 그 덕택이며 일반 수용소에서라면 도저히 형기를 다 치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 P416

모든 인간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일정한 사상의 보유자"(이하 인용은 끄릴렌꼬의 혁명재판소 논고 - 인용자주)다. 피고인의 개인적 성격 또는 자질이 어떠하든 간에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평가 방법"이 적용될 뿐이다. 그것은 "계급적 합목적성"에 입각한 평가다. (중략)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저 되는대로 살아가다가 어느날 갑자기 자기가 "계급적 이익에 맞지 않는" 존재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 P24

그러니까 죄수들의 장래는 같은 죄수 출신인 사무 보조원들에게 달려 있으며, (중략) 가죽 점퍼 하나면 북극권인 노릴스끄가 아니라 남쪽인 날치끄로 갈 수도 있고 베이컨 1킬로그램이면 시베리아의 따이셰뜨로 갈 것을 모스끄바 교외의 세레브랸니 보르로 갈 수도 있다. (물론 재수가 없으면 가죽 점퍼와 베이컨만 공짜로 떼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뜻을 이룬 죄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애초에 뇌물로 줄 만한 물건도 없는 죄수나 이런 혼란 속에서 태평할 수 있는 죄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 - P373

환영을 찾지 말라. 재물과 명성을 좇으려 하지 말라. 그런 것은 수십 년에 걸쳐 애써 축적된 것이지만 단 하룻밤 만에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이다. 초연한 태도로 삶을 살아 나가라. 불행을 두려워할 것도 없고 행복으로 가슴을 태울 필요도 없다. (중략)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마음을 깨끗이 하라. 그리고 당신들을 좋아하고 당신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무엇보다도 높이 평가하라. 결코 그들에게 모욕적인 말이나 욕을 하지 말 것이며 그들 누구와도 말다툼 같은 것으로 헤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것이 체포 전의 당신의 마지막 행위가 될지도 모르며 당신은 그런 식으로 그들의 기억 속에 남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P4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용소군도 1 열린책들 세계문학 258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김학수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악한 짓을 하기에 앞서 인간은 먼저 그것을 선이라고 믿어야 하고 자기 행위의 합법성을 찾아야 한다.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중략) 셰익스피어의 악당들의 상상력과 정신력으로는 불과 열 사람 정도의 사람도 제대로 죽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 그것은 사악한 일에 그럴듯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악인에게 필요한 장기간에 걸친 강인함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그 사회적인 이론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악행을 은폐하게끔 도와주고, 비난과 저주를 듣는 대신 칭찬과 존경을 듣도록 도와준다.
- P266

우리는 일부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억압할 권리를 가진다는 그 <관념 자체>를 공개적으로 탄핵할 의무가 있다.
- P272

나는 그가 어쩌면 그토록 통곡할 수 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감방 동료인 희끗희끗한 백발의 에스토니아인 아르놀드 수시는 나한테 이렇게 설명했다. "잔인함의 밑바닥에는 반드시 감상이 깔려 있는 법이지. 이건 이를테면 상호 보완의 법칙이야." - P305

파스첸꼬는 우리 감방에서 자유의 몸이 될 가망성이 전혀 없는 유일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활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의 어깨를 끌어안고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위해 <일어나서> 싸우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진리를 위해서는 형무소에 들어가 <앉아> 있어야지!
그러고는 나한테 자기가 좋아하는 옛 유형 시대의 노래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어두운 감방 속, 축축한 갱도에서 말없이 죽어 간다 해도 우리의 외침은 살아남은 세대 속에 메아리쳐 살아나리라!
나는 이 말을 믿는다! 그리고 이 글이 그의 믿음을 실현시키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 P305

물론 우리는 고개를 번쩍 쳐든다. 그러면 우리는 반사된 햇살이 아닌 진짜 태양을 본다. 아, 저 태양! 영원히 살아 있는 태양! 봄 구름 사이로 나타나는 황금빛 햇무리!
봄은 누구에게나 행복을 약속하지만 우리 수감자에겐 열 배나 더 큰 행복을 안겨 준다. 오, 4월의 하늘이여! 감옥살이 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총살형만은 면하게 될 모양이니까. 그 대신 나는 여기서 더욱더 슬기로운 인간이 되련다. 여기서 더 많은 것을 깨달으련다. 하늘이여, 나는 또 나 자신의 과오를 시정하련다. -물론 <그들>에 대한 과오가 아니다! 하늘이여! 너에 대한 과오를 말이다. 나는 여기서 나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었다 - 나는 반드시 그것을 시정해 보이겠다!
- P320

만약 진리의 조그만 첫 물방울 하나가 마치 심리적인 폭탄처럼 이토록 폭발적인 위력을 지니고 있다면, 진리가 폭포처럼 무너져 내릴 때 과연 우리 나라에는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그렇다, 분명히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 P4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발레, 무도에의 권유 - 발레에 새겨진 인간과 예술의 흔적들
이단비 지음 / 클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은 책이다. 인터넷에서 조금씩 주워들어 왔던 발레 지식들이 이 책을 통해 체계를 가지고 정리되었다. 발레의 특징, 발레의 역사를 알기 쉽게 정리해 주는 사이사이에 필자 자신의 경험을 적절하게 끼워 넣어서 생생하고 재미있다. 살짝 과도하게 감상적인 부분들도 있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예쁜 일러스트들이 적절하게 사용되어 내용의 이해를 돕는 것도 좋았다. 

풀업이 잘 됐을 때 안정적인 를르베가 가능하고, 를르베가 제대로 된 후에야 비로소 회전을 비롯한 다양한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다. 발레는 똑바로, 제대로 서 있는 것에서 시작하는 춤이다.
- P70

정확한 풀업을 요구하는 춤은 발레 외에 어떤 것도 없다. 즉 풀업이 없다면 발레가 아니다. 풀업은 발레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 P72

타조, 독수리, 황새, 두루미도 두 발로 걷지만 이들은 척추의 방향이 수평, 가로로 되어 있다. 펭귄이 유일하게 인간처럼 척추가 수직이지만, 대신 허벅지 뼈가 수평이다. 동물들도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출 수 있지만 풀업은 가능하지 않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척추와 다리가 수직으로 되어 있어서 풀업을 할 수 있고 그 덕분에 발레의 테크닉이 발전할 수 있었다. 결국 발레는 신이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허락한 선물인 셈이다.
- P73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것 중의 하나로 나는 발레를 배운 일을 꼽는다. 그건 풀업의 방법과 중요성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전문 무용수의 길을 걷는 경우는 좀 다른 이야기가 되지만,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발레를 배워보라고 권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 몸이 풀업이 되었구나’라는 걸 아는 그 순간의 느낌은 짜릿하다. 풀업을 아는 것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포 하나하나, 근육 하나하나를 느끼며 나의 신체를 내 뜻대로 컨트롤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과 다름없다.
- P77

휴가 기간인데도 다음 날 아침에 주섬주섬 연습복을 챙겨 발레단에 클래스를 하러 나왔다는 이야기를 무용수들에게 종종 듣는다. 아예 여행을 3박 4일 이상 가지 않는 무용수들도 있다. 가급적 빨리 발레 클래스에 복귀하기 위해서이다. 부득이 오래, 먼 지역으로 여행 갈 경우 현지 발래 클래스를 미리 체크해서 여행 중간중간 꾸준히 참여하고 온다. 그렇게 휴가 이후에 발레단에 복귀했을 때도 바로 어제 출근했던 사람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몸이 이미 만들어진 근육이나 몸의 선을 그렇게 오랫동안 가지고 있을 수 없다. 유효기간은 단 이틀. 이틀만 지나도 몸은 기억력을 상실한다. 발레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며칠만 쉬어도 풀업으로 다져진 몸이 흐물흐물해진다고 느낀다.
- P92

그런데 실제로 바지 없이 타이츠만 입고 무대에 등장했다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발레단에서 쫓겨난 사람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된, 1911년의 일이다. 그 사람은 ‘무용의 신’이라 불리는 바츨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였다. 러시아로 귀화한 폴란드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러시아 마린스키극장의 주역이었다. 그 당시 남성 무용수들은 타이츠만 입고 무대에 오른 적이 없었다. 19세기 초반 파리오페라발레학교의 경우 남학생들이 무릎 길이의 헐렁한 바지를 입는 게 규정이었다. 그래서 엉덩이와 무릎의 움직임이나 근육의 변화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던 발레 마스터들은 바지를 입지 않도록 끊임없이 정부요 요청했다. 당시에는 발레학교의 규정을 정할 때도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요청은 받아들여져서 연습 때 반바지를 입지 않게 됐지만 공연 때는 공처럼 부풀린 형태의 반바지를 입어야 하는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 P110

한 남성 무용수가 은퇴를 준비하면서 "이제 댄스벨트와도 안녕이구나"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해방감일까, 섭섭함일까, 무용수의 옷을 벗고 이제 다른 옷을 입어야 하는 시점이 언젠가는 온다. 몸은 시간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변하고, 늙어가고, 훈련으로 그 변화를 막을 수 없는 지점에 언젠가는 도달한다. 올해 했던 테크닉을 그다음 해에는 구사할 수 없다는 걸 직면하게 되고, 올해 내가 뛰어올랐던 점프의 높이가 그다음 해에는 더 낮아져서 점점 더 땅에 가까워지는 걸 겪는다. 발레는 훈련한 기간과 강도에 비해 찰나에 가까울 정도로 짧은 기간 무대 위에서 불꽃을 피우다가 사라지는 춤이다. (중략) 신이 부여한 신체조건과 예술적 감성이 인간의 노력과 만나 짧은 순간 불꽃을 일으킨 후,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발레 무용수의 길이다.
- P117

발레단은 오전에 클래스를 마치고 나면 공연 리허설에 들어가는데 자신이 공연에서 맡은 부분을 리허설하고 나면 퇴근이다. 전막 공연에서 본인이 등장하는 장면이 1막에만 있다면 1막 리허설을 마치면 퇴근이 가능하다. 그래서 캐스팅을 받지 못한 무용수는 오전 클래스만 하고 리허설도 없이 퇴근하게 된다. 다들 공연 연습을 하는데 혼자 매일 클래스만 하고 퇴근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런 경우가 많아지면 퇴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평생 발레만 바라보고 살아온 무용수에게 이런 일은 치명적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다.
- P1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