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하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8년 2월
구판절판


고려보에 도달해 보니 모두 지붕을 이엉으로 엮은 초가집들이라 무척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묻지 않고도 이곳이 고려보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병자호란 발발 이듬해인 정축년(1637년)에 끌려 왔던 이들이 마을 하나를 이루었던 것이다. 중국 동쪽 편 천여 리에 논은 없는데, 이곳에서만은 논이 있다. 떡과 엿 등이 조선과 흡사했다. 이전에는 사신 일행이 당도해서 하인배들이 술이나 음식을 사 먹을 때 값을 받지 않는 일도 더러 있었다. 아낙네들도 내외를 하지 않고, 고국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짓는 이도 적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점차 잇속을 챙기려는 하인들이 생겨나 술과 음식을 먹고도 값을 치르지 않으며, 그릇이며 의복까지 토색(돈이나 물건 등을 억지로 달라고 하는 것)하기도 하였다. 주인이 고국의 옛정을 생각하여 까다롭게 굴지 않으면 틈을 노려 도둑질을 일삼곤 하였다. 이런 탓에 고려보 주민들은 차츰 고국 사람들에 대해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사신 일행을 만나면 술과 음식을 감추어 두고 잘 팔려고 하지 않았고, 사정사정해야만 겨우 팔되 바가지를 씌우거나 선불을 요구했다.
(아래에 계속)-48-49쪽

(위에서 계속)
그럴수록 하인들은 온갖 속임수를 동원해 사기를 침으로써 분풀이를 하고, 그러다 마침내 서로 원수를 대하듯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지날 때면 일제히 소리 높여, "이놈들아, 네놈들 할애비가 오셨거든 어찌 나와서 절을 하지 않느냐"고 욕하면, 고려보 사람들 역시 우리들을 향해 맞받아친다. 이런 지경에 도리어 우리는 이곳 고려보 풍속이 틀려먹었다고 욕을 해대니,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48-49쪽

호질 후지

연암 박지원이 말한다.
이 글에는 비록 지은이의 성명은 없으나 아마 가까운 시기에 중국 사람이 비분강개를 이기지 못하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운세가 긴밤의 어둠으로 접어들면서 오랑캐의 재앙이 맹수보다도 사납다. 선비들 가운데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는 글귀나 모아서 세상에 아첨을 해대는 형편이다. 이들이 하는 짓이란 무덤을 파헤치는 것과 비슷하여 시랑조차도 잡아먹기를 달게 여기지 않을 정도이다. 이제 이 글을 읽어 보면 말이 대부분 이치에 어긋나고 그 뜻은 거협, 도척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천하의 뜻있는 선비라면 어찌 한시라도 중국을 잊을 수 있겠는가.
(아래에 계속)-63-65쪽

(위에서 계속)
지금 청나라가 세상을 다스린 지 겨우 4대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 통치자들은 모두 문무를 겸비하고 장수를 누렸다. 지난 백 년은 태평스런 시대로서 천하가 두루 편안하고 조용했다. 이런 상황은 한, 당 시절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렇듯 평화를 유지하면서 치적을 이루어가는 뜻을 살펴보니, 이 또한 하늘이 내린 제왕이 아닌가 싶다. 옛날 누군가가 일찍이 하늘이 순순히 명령한다는 말씀에 의문을 느껴 맹자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맹자께서는 분명히 하늘의 뜻을 체득하셔서 말씀하셨다.
"하늘은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과 일로써 보여 주신다."
나는 언젠가 이 대목을 읽다가 강한 의혹이 들어, 감히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행동과 일로써 보여 주신다면, 오랑캐가 중화의 문물을 변개시키는 것은 엄청난 치욕이다. 그러니 저 백성들의 원통함이 어떠하겠는가. 또 향기로운 제물과 비린내 나는 제물은 각기 그 덕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 그렇다면 귀신들은 대체 어떤 냄새를 찾아오시겠는가."
(아래에 계속)-63-65쪽

(위에서 계속)
그런 탓에 사람이 처한 입장에서 본다면, 은나라의 우관이든 주나라의 면류관이든 다 나름의 때를 따라 마련된 것일 뿐이다. 유독 청나라 사람의 홍포에 대해서만 꼭 의심을 던질 이유가 없다. 이에 그동안 하늘이 정한다는 입장(天定)과 사람들이 뜻이 우선이라는 견해(人衆)가 유행하였고, 하늘과 사람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원리(人天相與)는 도리어 후퇴해서 기수(氣數)의 형세에 따르게 되었다. 현실 세계를 옛 성현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 부합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곧장 천지의 기수가 이렇구나 한다. 슬프다! 이것이 정말 기수의 문제란 말인가.
안타까운 일이다. 명마라의 왕택(王澤)은 이미 메말랐고, 중국의 뜻 있는 선비들도 변발로 머리를 바꾼 지 백 년에 세월이 흘렀다. 그럼에도 자나깨나 가슴을 치며 명나라 황실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인 연유인가. 차마 중국을 잊지 못해서일 것이다.
(아래에 계속)-63-65쪽

(위에서 계속)
그런가 하면, 청나라가 스스로를 도모하는 방식도 어설프기 짝이 없다. 과거 오랑태 출신 왕조의 마지막 임금들이 늘 중화를 본뜨다가 쇠망하고 만 경험을 경계하여, 철비를 새겨서 전정에 묻었다. 그랬으면서도 스스로는 자신들의 의관을 부끄러워하면서 오히려 강약의 형세에 마음을 쏟으니 이 얼마나 어릿거은 일인가. 문왕의 지략과 무왕의 공렬로도 도리어 은나라 말기의 쇠망을 구제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사소한 의관제도를 굳이 고집할 필요가 있읋가. 만약 싸움에 편리한지 여부를 가지고 그 의관을 살핀다면, 북쪽과 서쪽 오랑캐의 복장인들 전투용 복장으로 선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서북 오랑캐들로 하여금 중국 풍속을 따르게 할 수 있어야 진실로 강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온 천하의 인민들을 욕된 구렁에 몰아넣고 홀로 호령하기를, ‘너희들이 잠깐 수치를 참고 우리의 풍속을 따른다면 진정 강하게 될지니’라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정말 강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래에 계속)-63-65쪽

(위에서 계속)
설령 자기 복장을 강요한다고 해서 저 신시, 녹림의 사이에 눈썹을 붉게 물들이거나 머리에 노란 두건을 둘러서 스스로 다른 이들과 구별하고자 한 것처럼 되지는 못할 것이다. 가령 어리석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쓰고 있던 홍모를 벗어 땅에 내팽개친다면, 청나라 황제는 앉은 자리에서 천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지난날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하던 것이 도리어 쇠망의 실마리가 된다면, 철비를 세워 후세에 교훈으로 삼고자 한 일이 참으로 부질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이 글이 원래는 제목이 없었는데, 그 속에서 ‘호질’이란 두 글자를 뽑아 제목으로 삼아 중원의 어지러움이 맑아지는 날을 기다리고자 한다.
-6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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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상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2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 그린비 / 2008년 2월
구판절판


이날 밤 고교보에서 묵었다. 이곳은 지난해 사행이 은을 잃은 곳이다. 이 일 때문에 지방관이 파직을 당했고, 근처 점포에선 사형당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순찰을 맡은 갑군은 밤새도록 야경을 돌면서 우리나라 사람을 도적이나 다름없이 엄하게 감시했다. 창고지기의 말을 들으니, 이곳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을 원수같이 여겨서 가는 곳마다 문을 닫고 숫제 상대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고려, 고려 하면 진저리가 나오. 묵었던 집 주인을 죽이고 은자 천 냥에 네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대체 그게 말이 되오? 우리네들 중에도 나쁜 사람이 많지만 당신네 일행 중에도 어찌 좀도둑이 없겠소. 장물을 숨겨 달아나는 방법이 몽고인들과 다르지 않더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내가 역관에게 그 연유를 물었더니, 역관이 그 전말을 이야기해 주었다.
(아래에 계속)-272-274쪽

(위에서 계속)
"지난 병신년(1776년)에 영조대왕의 부고를 전하러 갔던 사행이 돌아오면서 이곳에 이르러 공금으로 가지고 온 은 1000냥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사신들이 의논하기를, ‘이 은자는 나라의 돈이라 만일 쓴 곳이 명확하지 않을 땐 국법에 따라 맞추어서 환납해야 합니다. 그만 1000냥이나 잃어버렸으니 돌아가서 뭐라고 보고를 하지요? 설령 우리가 잃었다고 한들 누가 믿으며, 물어내자고 한들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하고는 곧 지방관에게 글을 올려 전후 사연을 알렸지요. 중후소에 보고하자, 중후소에서는 금주위에, 금주위에선 산해관 수비에게 이 사실을 알렸답니다. 그러자 며칠 새에 이 일이 예부에 알려지고, 바로 그날로 황제의 명령이 내려졌지요. 일단 이 지방의 공적 자금으로 잃은 돈을 배상하게 하고, 여기 지방관이 평소 순찰에 힘쓰지 않아 길손이 원통한 변을 당했다 하여 그 책임을 물어 파직시켜 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점방의 주인과 가까운 이웃에 사는 용의자들을 잡아다가 호되게 닦달했지요. 그 바람에 용의자들 중 너덧 명이나 죽고 말았습니다.
(아래에 계속)-272-274쪽

(위에서 계속)
사행이 미처 심양에 이르기도 전에 황제의 분부가 내렸으니, 일처리가 얼마나 신속한지 알 수 있지요. 그 뒤로 고교보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을 원수처럼 여기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셈이지요."
의주의 말몰이꾼들은 태반이 불량한 치들이다. 오로지 연경에 출입하는 것으로 생계를 삼아 해마다 연경 드나들기를 저희 집 뜰을 밟는 것처럼 여긴다. 그런데, 위주 관아에서 그들에게 주는 급료는 한 사람 당 백지 60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백여 명에 달하는 말몰이꾼들은 길에서 도적질을 하지 않고는 연경을 드나들 수가 없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넌 뒤로는 얼굴도 씻지 않고 벙거지도 쓰지 않는다. 머리털은 뒤엉켜 더벅머리 꼴에 먼지와 땀이 엉겨 붙어 있다. 비바람에 시달려 옷과 벙거지는 해지고 더럽혀져 귀신인지 사람인지도 못 알아볼 정도인데, 그 모습이 흡사 도깨비처럼 보인다. 이들 가운데 열다섯 먹은 아이가 있는데, 이 아이는 벌써 이 길을 세 번이나 드나들었다고 한다.
(아래에 계속)-272-274쪽

(위에서 계속)
처음 구련성에 닿았을 때는 제법 말쑥하여 귀엽더니 절반도 못 와서 햇빛에 그슬리고 시꺼먼 먼지를 뒤집어써 두 눈만 빼꼼히 하얗게 보일 따름이다. 걸친 거라곤 홑고쟁이뿐인데, 그마저 다 떨어져 엉덩이가 죄 드러날 정도였다. 이 아이가 이러할 제 다른 치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도무지 부끄러움이라곤 모른다. 게다가 도둑질하는 걸 보통으로 알아서 밤에 점방에 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훔치고야 마는데, 점방 주인들도 이를 단속하기 위해 온갖 책략을 다 동원한다. 지난해 동지 사행 때 의주 상인 하나가 은화를 몰래 가지고 오다가 말몰이꾼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때, 빈 말 두 마리만 고삐를 놓아서 도로 강을 건너 보냈는데, 말이 각기 그 집으로 찾아 든 것을 증거로 삼아 죄를 물었다고 한다. 그 흉악함이 이런 정도니, 은이 없어진 것이 어찌 이 놈들의 소행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은 오히려 사소한 경우에 속한다. 만일 병자호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면 용천이나 철산의 서쪽은 남의 땅이 되고 말 것이다. 변방을 지키는 자들 역시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272-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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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이틀 미스티 아일랜드 Misty Island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 들녘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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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구간으로 읽었는데 아주 재미났어요. 특히, 살인범으로 체포된다면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될지 상상할 수 있어서 좋던데요. 경찰, 검찰, 법원, 교도소 순서로 차례차례 만나게 되는 `인간들`을 상상하면서 흥미진진하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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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 2 - 석양에 빛나는 감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장세연 옮김 / 손안의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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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추리소설을 읽을 때 범죄의 트릭보다도 인간의 문제가 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범죄에 희생되는 인간,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 그리고 범죄자를 쫓는 인간.

다카무라 카오루의 <조시(照柿)>는 그러한 인간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네 개의 죽음(자신의 집에서 목이 졸려 살해된 호스티스의 죽음, 전차 선로에 뛰어들어 자살한 중국인 노동자의 죽음, 그리고 후반부에 추가되는 두 건의 매우 극적인 죽음들)의 수수께끼를 푸는 내용이 주된 흐름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범죄의 트릭을 파헤치는 과정 이상으로 그 과정을 밟는 인간의 심리가 독자를 사로잡는다.

 

 

전작 <마크스의 산>에서 ‘경찰관 직무집행법이 옷을 입고 걸어다니는 것 같’다고 묘사되었던 고다(合田雄一郞) 형사는 <조시>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며 초조와 번민 속에서 타락해간다.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폭력단 관계자와 어울리고,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는 피의자를 폭언으로 위협하고, 심지어는 개인정보 부정조회와 협박이라는 범죄에까지 다가간다. 그런 그를 걱정하며 머리를 좀 식히라는 손위처남 가노(加納祐介) 검사에게 고다가 하는 “머리를 식히고 있다간, 하나 잃고 또 하나 잃고, 결국 내가 설 장소도 없어져. 하나를 잃을 때마다 확실히 뭔가가 줄어드는 게 느껴져. 조금 억지스럽든 위법이든, 범인을 검거해야만 겨우 어딘가에 서 있을 수 있어.(1권 419쪽)” 라는 말은 냉혹하고 불합리한 조직사회에서 하루하루의 실적에 쫓기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황폐해져가는 한 고독한 인간의 맨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런 고다와 대칭적인 위치에서 동시에 파멸의 길로 굴러 떨어지는 인간은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인 노다(野田達夫)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한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17년, 자신 안에 타오르던 예술가의 기질과 그것에 동반하는 격렬한 감정과 충동을 억누르고 저비용 고효율을 외치는 공장 시스템의 일개 부품으로 쉴 사이 없이 일하며 살아온 중년 남자의 인생이 돌연 엉망진창으로 망가져가는 숨가쁜 과정은 처절하고 극적이며 또한 매우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두 주인공의 심리 이상으로 흥미를 더하는 것은 작품의 대칭적 구조가 작가 특유의 ‘관계에 대한 천착’과 절묘하게 얽혀드는 양상이다. 전작에서부터 미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던 가노-고다의 형제 관계는 노다-고다라는 좀더 근원적인 형제 관계와 대칭을 이루면서 일보 전진한다. 고다와 전처 기요코(加納貴代子)와의 관계 또한 미호코(佐野美保子)라는 여성의 등장으로 인해 새롭게 반추되고 재해석된다. 여기에 호스티스 살해 사건의 두 사람의 용의자를 향한 두 개의 수사 노선의 대칭성이라든지 노면전차와 열처리공장의 노(爐)와의 대칭성이라든지 노다가 관계하는 두 여자 사이의 대칭성이라든지에서 유사한 구조들을 발견하는 것은 이 소설을 읽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복잡한 인물들과 관계들, 사건들을 아우르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인데, 그것은 8월의 염천 아래서 눈꺼풀 안쪽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타오르는 붉은색으로 표현된다. 석양에 반사된 감의 빛깔이라는 “테리가키(照)". 노다와 고다 두 사람의 기억 깊숙한 곳에, 한편으로는 유년의 느릿한 시간과, 한편으로는 전차 선로에서 자살한 여자의 육체의 파편과 얽혀 침잠해 있다가 삶이 한계에 부딪쳤다는 인식과 함께 다시 부상한 이 특별한 붉은색은 책을 덮은 후에도 독자의 뇌리에 오래 남아 살아가는 것의 막막함과 부서지는 것의 처절함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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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 2 - 석양에 빛나는 감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장세연 옮김 / 손안의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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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가 전속신청서를 냈어. 자네, 모리에게 뭔가 들었나? 전속 희망처는 오오시마(大島), 니이지마(新島), 미야케지마(三宅島), 하치조지마(八丈島), 오가사와라(小笠原)...."
고다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역시’라는 생각이었다. 몇 달 전이었다면 화가 났겠지만, 동료의 심정을 헤아려 줄 마음의 여유가 지금 자신에게 없다는 것이 먼저 절절히 느껴졌다. 그러나 ‘역시’라는 생각 주변을 별다른 형태도 없는 분한 마음이 느릿느릿 소용돌이쳤다. 원래라면 전속신청서는 주임인 고다나 아즈마에게 제출해야 하는데, 모리가 직접 하야시에게 건넸다는 것도 상처에 소금을 뿌린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자신보다 어린 부하가 조직 내에서 자신의 몸을 둘 방향을 한 벌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충격이었다. 저 상승지향 덩어리 같았던 모리가 조직의 현재와 자신의 능력이며 성격을 생각하고, 생활의 검소한 안정을 생각하고, 누구와 의논하는 일도 없이 혼자서 고민한 끝에 미래의 승진이라는 길을 버렸다는 건가. 그런가, 저 모리가 섬으로 간다는 건가? 그럼 나는, 히노데 부두에서 종이테이프나 던지며 배웅하는 것인가?-177-179쪽

집이 있는 38동에 도착하니 1층 우편함에 있어야 할 하루치 조간과 석간이 보이지 않아 가노 유스케가 들렀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께 미토에서 본 옛 처남이 일부러 걸음을 했다면, 짐작 가는 용건은 하나였다. 하치오지 서에 들어온 불시 감사에서 들킨 관련조회 부정이, 또다시 전광석화처럼 그의 귀에 들어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전화로 호통을 치면 끝날 것을 옛 처남은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존재 때문에 기요코와 옛 매제의 관계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이미 사라졌을 촛불을 고다가 없는 사이에 다시 피워 올리기 위해서 걸음을 하는 것이었다. 각각의 용건은 전부 그것의 구실이었다. 그것은 이미, 어느 정도는 쌍둥이 중 다른 한쪽이라는 입장에서 발현하는 특별한 심상이라고 해도 태반은 가노 유스케라는 남자의 감정이 어떠한가의 문제였기에, 단적으로는 여자보다 다루기 ‘번거로운’이라는 데서, 고다 자신의 머리도 정지해 버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중략) 불을 켜니 주방 테이블 위에 신문과 복사용지 한 장이 있었다.
(아래에 계속)-181-189쪽

(위에서 계속)
B4사이즈의 용지는 하치오지 서 형사과의 문서건 명부를 복사한 것이었다. 어제 아침, 고다가 거짓 번호를 매긴 문건 중 다이요 정공의 총무부장에 관한 조회처가 실려 있는 부분의 옆에는 "모처로부터 입수. 할 거면 좀더 능숙하게 해"라는 옛 처남의 갈겨쓴 글이 있었다. ‘모처’는 불시 감사를 담당한 1계의, 경찰청과 이어져 있는 누군가인가? 복사물은 하야시에게 전해진 것과는 다른 경로로, 눈짓 한 번으로 몇 군데의 손을 거친 후 봉투에라도 넣어져, 검찰합동청사의 옛 처남의 책상으로 전해졌음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고다는 정관계의 거대한 그물망이 쳐진 권력기구의 한 구석에서, 먼 친척의 사소한 죄를 왈가왈부하는 괴문서가 날아다닌다는 시시함에 감명을 받고, 그곳에 있는 가노 대신 어이없어했을 뿐이었다. 확실히 그가 남긴 말대로 ‘할 거면 좀더 능숙하게’ 해야 했다. 준법정신과 함께 지금까지 살았을 남자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에 대한 빈정거림도 실망도 힘없이 끊었다가는 이내 진흙 같은 한숨에 녹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래에 계속)-181-189쪽

(위에서 계속)
아니, 아무리 가노 유스케라도 역시 화가 났을 거라고 잠시 생각을 고쳐 보기도 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제는 교정도 할 수 없는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과, 그 타인이 자신의 감정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거듭 실망을 해도 여전히 끊어내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여동생 기요코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그런 불분명함을 타인인 남자에게 말하려다 못했던 자신의 그런 불분명함을 타인인 남자에게 말하려다 이루지 못한 것, 그것을 유스케는 화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直裁인지 韜晦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소유자와 지금도 만남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라 생각하자, 마지막에는 또 여자보다 ‘번거로운’ 이라는 것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뭔가 실망하고, 단념하고, 어느 날 결단하더니 냉큼 남자 둘을 버리고 간 기요코에 비하면, 남겨진 남자 둘의 미련이나 집착은 눈뜨고 봐줄 수 없다는 얘기일 뿐이다.
(아래에 계속)-181-189쪽

(위에서 계속)
(중략) 고다는 차례차례 떠오르는 기요코의 모습이 굉장히 흐릿해졌다는 사실에 새삼 큰 충격을 받으며, 위스키의 힘을 빌려 계속해 생각했다. 자신은 왜 결혼을 한 것인가? 왜 기요코였나? 왜 파탄이 난 건가? 11년 전 봄, 갑자기 수식이라도 하나 풀렸다는 얼굴로, 우리들 결혼해요 하고 기요코가 말을 꺼냈다. 그때 고다는 너와 난 어울리지 않아 하고 대답했는데, 그것은 본심에 충실한 것이었다. 또한, 신중함이 어느 정도 결여된 기요코의 돌진에는 오빠 유스케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간단히 설명하기 어려운 밀착된 관계로부터 도망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상대는 꼭 자신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고다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튼 스물셋의 남자가 보는 인생의 모습에는 한계가 있었고, 친형제도 없는 고독을 메우는 데 결혼은 가장 가까운 선택지였다. 뭔가가 일그러졌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결국 알지 못한 채, 마지막에는 결혼하면 매일 기요코를 안을 수 있다는 정도의 애매한 희망이 이긴 것이다.
(아래에 계속)-181-189쪽

(위에서 계속)
다만 형사과에 배속된 지 얼마 안 된 신참 형사와 석사논문과 박사논문 준비로 바쁜 학생의 조합은, 3일에 한 번 얼굴을 마주칠 수 있을까 말까 한 현실이었고, 거의 생활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중략) 아니, 실제로는 사소한 충돌은 몇 가지나 있었고, 그 하나하나가 서로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더했던 점만은 세상 사람들과 비슷했다고 고다는 생각을 바꾼다. 어떤 계기로 싸움을 하게 되었을 때, 어두운 주방 의자에 돌처럼 앉아있던 기요코의 등. 혹은 며칠 만인가 돌아왔는데 기요코가 없던 한밤의 집의 오싹한 어두움. 부부가 모두 집을 비우기만 해서 곰팡이가 핀 욕실. 거둬들이지 않고 발코니에서 젖어 있던 세탁물. 아니, 어느 순간 자신은 기요코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마음이 끓어오른 그 순간의 구토감이야말로 ‘절정’이었던가. 아니, 절정은 그후 기요코에게 연구자 애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찾아온 역겨운 안도감 쪽인가. 아니면, 이미 처음부터 무리였다는 술회가 들어갈 여지도 없던, 자신의 냉혹감 쪽인가.
(아래에 계속)-181-189쪽

(위에서 계속)
아니, 냉혹할 뿐이라면 그나마 나았다. 한 여자에 대한 감정이 육체에서 태어나 육체로 끝난 것은 결국 자신이 그것을 바랐다는 얘기라며 고다는 더욱 생각해 보았다. 사실 자신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가장 잔혹한 것을 바란 것일지도 모른다. 소극적인 듯이 굴며 자신의 욕정만을 채우고, 그 이상의 것은 거부하며 받아들이지도 베풀지도 않앗다. 그저 자신의 자의식을 지킴으로써 간신히 상식적인 사회인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나라는 남자였다. 그렇다면, 기요코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고, 기요코 도한 빠른 시간에 그렇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어느 순간 스스로 단념하고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181-189쪽

요즘 무료하게 <신곡>을 다시 읽으며, 생각한 것이 있어. 단테를 이끄는 것은 베르길리우스이지만, 자네가 어두운 숲에ㅔ서 눈을 떳을 때 만난 것은 사노 미호코였어. 단테가 "당신이 사람이든 그림자이든, 나를 도와주십시오"하고 베르길리우스를 부른 것처럼, 자네는 정신없이 그녀에게 말을 건 거야. 그리고 그 이후부터 그동안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며 방황해 왔던 자네가 지금, 淨化에 대한 의지의 출발로써 통한과 공포의 단계가지 온 것이라면, 거기까지 인도해 준 것은 사노 미호코이자 노다 다쓰오였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그건 그렇고, 나도 인생의 중반에, 이미 오래 전부터 어두운 숲을 헤매고 있지만, 아직 불러 세울 만한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네.
10월 15일. 가노 유스케(加納祐介).-360-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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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zuaki 2013-01-28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리야.... ㅠㅠ. 난 모리도 되게 좋았는데, 섬으로 가다니 쇼크. 그래, 수사1과 수라장에서 고생하느니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출세 같은 거 생각하지 말고 자연 속에서 맘편히 살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