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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ㅣ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2
귄터 그라스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10월
평점 :
품절
소설의 배경은 발트해에 면한 상업도시 단치히이다. 독일과 폴란드의 경계에 위치한 도시, 오랜 역사 속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했으나, 그만큼 수난도 많이 겪은 도시. 독일기사단에 대항하여 한자 동맹에 가입하고 명목상의 폴란드령으로 자치권을 누리다가 18세기 이후 독일령이 되고, 1차 대전 후 국제 자유도시가 되었다가 1939년 독일에 점령당해 2차 대전을 겪고 그 후에는 폴란드령 그단스크가 된 이 곳에서, 1924년 주인공인 난쟁이 오스카가 태어난다.
어머니 아그네스는 지역의 토착민인 카슈바이 인이다. 독일어와도 폴란드어와도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 농부들의 운명에 대해 외할머니 안나 콜야이체크는 "카슈바이인은 이주라는 것을 할 수가 없어. 언제까지나 본고장에 살고 있으면서 다른 무리들에게 두들겨 맞기 위해서 머리를 내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어쨌든 우리들은 진짜 폴란드인도 아니고 진짜 독일인도 아니야." 라며 큰 소리로 웃는다.
두 개의 국가 권력 사이에 놓인 단치히의 운명은 주인공 오스카의 두 명의 아버지로 표상된다. 어머니의 합법적인 남편이자 오스카의 법적 부친인 식료품상 알프레드 마체라트는 독일인이다. 어머니의 외사촌 오빠이자 평생에 걸친 간통 상대이며 주인공의 생물학적 부친일 가능성이 큰 얀 브론스키는 폴란드 우체국원으로 나치 독일에 의해 죽는다. 역자는 어머니 아그네스의 죽음이 자유도시 단치히의 멸망을, 얀 브론스키의 죽음이 폴란드 왕국의 멸망을, 소련군에 의한 알프레드 마체라트의 죽음이 제국 독일의 멸망을 뜻한다고 해설하는데,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여정은 어두우면서도 환상적이고,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전쟁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오버하지 않으면서도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채소 장수 그레프의 감자 저울 이야기라든지 파인골트 씨의 소독약 이야기 같은 것들은 오래도록 묵직하게 마음에 남는다. 전쟁으로 인해 독일 민중이 겪는 고통은 나에게 세노 갓파의 <소년H>를 연상시켰는데, 독일의 사례에서나 일본의 사례에서나 우리들이 배워야 할 교훈은 그 민족 전체가 우리의 적이라는 또다른 국가주의 논리가 아니라 국민 국가의 광기로부터 우리의 정의와 인간성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어둠의 시대 폭압적 권력의 경계를 미끄러져 가는 난쟁이 오스카는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고민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그의 양철북을 두드리는 것이다.